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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36 - 4두체제 로마제국을 통일하고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
콘스탄티누스는 272년 2월 상 모이시아 속주의 나이수스에서 장군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플라비아 율리
아 헬레나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헬레나는 가톨릭과 정교회의 성인이니 예수 그리스도가 못박혔던
성십자가를 발굴(?) 한 것으로 유명하니, 당시 십자가는 수많은 죄인들을 처형하던 도구로 그냥 나무인데....
헬레나의 출신은 불분명하니 후에 반대파가 콘스탄티누스를 창녀의 자식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고,
콘스탄티누스의 단독 황제 즉위 후에는 정반대로 헬레나가 귀족 집안 출신이라는 프로파간다가
유포되기도 했으나.... 선술집 딸이었다는 전승이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보이니 하류 서민층 입니다.
로마군 장교였던 부친 콘스탄티우스는 292년 4두 정치 성립 당시 서방 부제에 취임하는 출세를 하니.... 남자가
귀하게 되면 의례 그리하듯 서민 출신인 헬레나와 이혼하고,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딸인 플라비아
테오도라와 정략결혼을 하자 콘스탄티누스는 볼모가 되어 동방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휘하에서 복무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갓 스무살의 젊은 나이에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아래에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드러내며 승승장구하였고, 특히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상당한 활약을
펼쳤으니......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퇴위 후에 새 부제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습니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의 동반 은퇴로 부제였던 갈레리우스(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위)
와 콘스탄티우스가 각각 동서방 정제로 등극하였고, 동시에 서방 부제에는 갈레리우스의 부하
장교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동방 부제로는 갈레리우스의 외조카인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임명
되는데 두 부제를 모두 자기 사람으로 꽂아넣으면서 갈레리우스가 명실공히 제국의 최고 권력자가 됩니다.
동서고금 세계 5천년사에서 황제(왕) 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고 남을 황제(왕) 로 세운 사례는 참
보기 힘든 특이한 사례인데..... 그가 나이 들어 병이 들자 아들이 없는지라 사위 갈레리우스
에게 제국을 물려준 것이니, 부제 2명도 사위의 뜻대로 해주어 권한을 강화시켜 준 것이라 여겨집니다.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 능력을 경계해 괴롭혔다는 일화도 꽤 남아있는데, 결국 콘스탄티누스가
4두정치의 내재적 모순을 무력으로 해결하고, 나아가 동방 천도와 기독교 공인 등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이후의 역사를 보면 갈레리우스의 사람 보는 안목은 꽤나 뛰어났던 듯 합니다.
갈레리우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후임 정제로 아나톨리아 지역을 물려받으면서 이제 갈레리우스 밑에서 복무
하는 불편한 처지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서방 정제로 취임한 부친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하니, 아들을
아버지 곁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콘스탄우스 황제의 요청을 갈레리우스가 언제까지나 거부할수는 없었나 봅니다.
"비잔티움 연대기" 에서는 아예 콘스탄티누스가 갈레리우스의 동방 정제 치소였던 니코메디아에서
탈출해 아버지가 있는 갈리아의 불로뉴로 도망쳤다고 묘사하는데... 만약에 이게 사실
이었다면 동방 정제의 눈을 피해 지중해를 따라 유럽을 통째로 가로지르는 대모험을 펼친 셈입니다.
당시 콘스탄티우스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넘어 약탈을 일삼는 픽트족을 치기 위해 칼레도니아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콘스탄티누스는 부친을 보좌해 함께 원정에 나사게 됩니다.
그런데 켈트족으로 원주민인 스코틀랜드 픽트족의 입장에서는 침략자 로마군에 땅을 뺏기고
북쪽 산악지대로 도망쳐 살면서... 로마로 부터 자신들의 땅을 되찾으려는 국토 회복운동 입니다?
원정 도중에 아버지가 요크 인근에서 병사하니 원래 4두정의 원칙대로라면 부제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정제 자리를 승계해야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이를 무시하고 장병들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오릅니다.
동시대의 기독교 저술가 락탄티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가 갈레리우스에게 자신의 정제
취임 보고와 함께 정제의 복장을 입고 월계관까지 쓴 초상화를 같이 보냈으니 갈레리우스는
분노해 초상화를 불 속에 던져 버렸는데 측근들의 간곡한 설득으로 겨우 분노를 진정시켰다고 합니다.
서방 정제 콘스탄티우스의 서거로 이제 유일한 정제가 된 갈레리우스 동방 정제는 콘스탄티누스를
서방 정제로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부제의 지위는 인정하면서 갈리아- 브리타니아
전선을 담당하는 갈리아 군관구 (Praefecture of Gallia) 의 지휘를 맡기니 서로 타협한 것입니다.
당시 갈리아- 브리타니아는 면적은 넓어도 경제력은 타 속주에 미치지 못했고, 동시에 라인강과 하드리아누스
방벽 너머 이민족들이 호시탐탐 침략할 기회만 노리고 있는 험지였으니 1차 4두정에서도 서방 부제의
담당이었고 콘스탄티누스에게 부친이 물려준 영토로 세력이 약한 콘스탄티누스는 부제 강등을 받아들입니다.
라인강 방어선을 담당한 콘스탄티누스는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을 수도로 306년부터 10년간 게르만족 침입을
방어하였는데.... 그의 통치는 잔혹해 포로로 잡은 이민족들을 원형경기장에 던져넣어 산 채로 사자밥으로
만들기도 했고, 로마사에서는 보기 드물게 적의 시체로 쌓은 기념비를 만들었으니 잔인무도한 인간이었습니다.
비록 인정사정 없이 잔인무도하긴 했지만 콘스탄티누스 본인은 사치와 향락에 빠지지 않았고,
내정 면에서 제법 성과를 거두어 속주민의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으니
동 시대 다른 지역이 4두정치의 한계에 부딪혀 혼란에 빠져있던 것에 비하면 큰 성과였습니다.
제국에 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은퇴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였으니 20년 가까이 재위했던
정제의 적자임에도 제위에 오르지 못했는데 반해..... 채 2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정제를 지낸
콘스탄티우스 1세의 아들로 서자에 불과한 콘스탄티누스가 부제 자리에 오른 것에 불만을 품은 것입니다.
막센티우스는 306년 10월에 4두정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원로원과 로마 시민 그리고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계속해 축소, 해체 정책에 시달려온 근위대의 지지를 받으며 봉기하니
여기에 막시미아누스 까지 아들을 지원하고자 황제로 복귀하면서 자칭, 타칭 황제가 6명에 이르게 됩니다.
원로원 의원들은 고위급 군 지휘관의 합의로 결정되는 정제, 부제 선임 과정에서 소외된 것에 불만을 품었고
로마 시민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본국 이탈리아를 일반 속주와 같은 지위로
격하시킨데 이어,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로마시의 면세 특권마저 폐지할 것이라는 소문에 폭발한 것입니다.
서방 정제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진압에 나서 로마로 향했으나 전 황제 막시미아누스에게 참패해 라벤나로
퇴각해 농성하던중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막시미아누스 모략에 넘어가 항복후 로마로 압송되어 307년
9월 처형되니 갈레리우스가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으나 막시미아누스- 막센티우스 부자는 이 또한 격퇴합니다.
갈레리우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은퇴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등 전현직 황제들을
초청해 카르눈툼에서 회담을 열었으니 갈레리우스의 친구 리키니우스를
서방 정제로 선임하고,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살해한 죄로 막센티우스를 제국의 공적으로 선포합니다.
그러나 부제가 정제로 승격한다는 원칙을 깨고, 딱히 내세울 경력이나 명성이 부족한 리키니우스를 단지
최선임 정제 갈레리우스의 친구라는 이유로 정제 자리에 올린 것은 오히려 4두정의 존립 근거를
뒤흔드는 것이었으며..... 게다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막센티우스가 회동 결과에 거세게 반발합니다.
막시미아누스는 근위대가 도열할때 아들의 자줏빛 망토를 힘으로 벗겨 아들의 폐위를 시도했지만
근위대는 오히려 막센티우스의 손을 들어주니 실각한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처럼 은퇴를 선언하고 일리리아에 은거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갈레리우스가 허락하지 않습니다.
막시미아누스는 라인강변의 트리어로 달아나 307년 딸인 플라비아 파우스타와 콘스탄티누스를 결혼시키고,
콘스탄티누스를 아우구스투스 (서방 정제) 로 선포하여 아들과 다른 4두정 황제들들을 물먹이는데
콘스탄티누스는 이미 미네르비나 라는 부인에게서 아들까지 있었지만 아버지 콘스탄티우스가 292년에 처
헬레나를 버리고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장녀 테오도라와 재혼한 것 처럼 출세를 위해 처를 버리니 부전자전이라?
콘스탄티누스는 이모와 결혼한 것이고 이때 부제에서 정제로 승격된 셈이지만 나중에 막센티우스를 물리친 후
원로원이 정제로 선포하는 절차를 거친 것을 보면 콘스탄티누스도 막시미아누스의 일방적 선언에 의미를
두진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탈리아에서 황제를 자처하던 막센티우스의 입지를 흔들어놓기엔 충분했습니다.
겹 장인인 막시미아누스는 한동안 콘스탄티누스의 궁정에서 웃어른 대접을 받으며 지냈으나, 역시
난세의 군웅답게 만족하지 않고 310년에 콘스탄티누스가 라인강을 침범한 이민족을 치기위해
출병한 사이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급히 돌아온 콘스탄티누스의 역공에 패배해 마실리아
에서 자결을 강요받아 죽는데, 막시미아누스 세 가족이 모두 콘스탄티누스에게 살해당하게 됩니다.
그러던 311년에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가 병사하고 외조카인 부제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동방
정제로 취임하였는데, 당시 서방 정제 리키니우스는 슬금슬금 동방으로 영향력을 넓혀
가고 있었으니 서방에는 경쟁자가 콘스탄티누스, 막센티우스 둘인데 반해 동방에는
갈레리우스 사후 경쟁자가 다이아 뿐이었는데다가 본거지인 일리리아도 동방과 가까웠습니다.
서방의 콘스탄티누스 대 막센티우스, 동방의 리키니우스 대 막시미누스 다이아의 구도가 뚜렷해지면서,
누구와 손을 잡을지가 중요해졌으니 이때 막센티우스의 선전포고를 받은 콘스탄티누스는 서방
정제의 영역인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점거한 막센티우스를 몰아내자며 리키니우스에게 손을 내밉니다.
그러자 리키니우스가 응해 두 사람은 동맹을 맺었고, 이복 동생 플라비아 콘스탄티아와 리키니우스
가 약혼 부터 한 후에 사태가 일단락된 313년에는 정식으로 결혼을 하는데.... 그러자
막센티우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대항해 동맹을 맺으면서 내전은 2 : 2 의 구도가 완성됐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막센티우스에게서 모욕을 받고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 협상을 시도 했지만,
서방 제국 전역 통치권자라고 스스로 선포한 막센티우스가 갈리아를 침공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라에티아 방면에 대기시키자 ....망설이지 않고 콘스탄티누스도 전쟁을 개시합니다.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우선 히스파니아 속주를 손에 넣은 다음, 알프스산맥을 넘어 북이탈리아의 타우리노룸
(토리노) 전투와 베로나 전투에서 막센티우스 군을 연파한후 아퀼레이아, 라벤나를 접수하고
이탈리아로 진격해 10월 28일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전사시키고 제국서부를 평정하게 됩니다.
막시미아누스의 명성을 존경하던 정예병이 아들 막센티우스에게 돌아섰고 막센티우스가 근위대를 늘렸기에
8만명의 이탈리아 병력과 아프리카에서 징집한 40,000명의 무어인에 카르타고인, 그리고
시칠리아를 비롯한 각 지역에서 할당된 군사를 공급받아 총병력 17만명에 기병 18,000명 병력을 보유합니다.
그 반면에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보병 9만명과 기병 8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막센티우스와는 달리 야만족의 침공에 대비해야 했기에 라인강에
수비대를 남겨놔야 했으니 전군의 삼분의 일 정도 밖에 동원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양은 많이 모자랐지만 다만 병력의 질이 크게 차이가 났는데, 로마의 목욕탕과 극장 및 향락에
젖어있던 이탈리아 병사들과는 달리 콘스탄티누스의 군단들은 야만족에
맞서서 변경 지대를 지켜 왔기 때문에 힘든 복무 과정으로 정예화 되어 있는 상황 이었습니다.
한니발에게 국경이 뚫렸던 로마는 곳곳에 인공 요새를 축성해 모든 통로를 방어하니 이탈리아로 접근하는데 쉽진
않았지만 산악 지대 농민들이 협조적이었고, 도로도 확충됐으니 피에몬트 평원까지 진격하는 상황에서
막센티우스는 정보도 받지 못했는데 콘스탄티누스는 도시 수사를 포위 공격하지 않고 사다리를 건 후에 돌파합니다.
콘스탄티누스군이 남하한다는 소식을 들은 막센티우스의 장군이 40마일 떨어진 타우리노룸(토리노)
평원에 대규모 군단을 집결시켰으니, 막센티우스는 동방의 나라에서
수입해온 중기병대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밀집 종대형인 쐐기 모양으로 정렬시킨 후에 대기했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콘스탄티누스는 병력을 대규모 정렬 대형으로 분리하여 전개한후, 진격했고
전투에서 대승하니 패배한 막센티우스의 군대는 토리노로 도망쳤고, 콘스탄티누스는
황궁에 입성해 알프스 산맥과 포 강 사이에 있는 이탈리아 모든 도시들의 통치권을 장악합니다.
만일의 경우 퇴로가 차단될걸 생각해 콘스탄티누스는 베로나에 본부를 두고있던 장군 루리키우스
폼페이아누스를 향하자 그는 즉시 대규모 기병대를 파견했으나, 브레시아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완파당했으며 베로나를 포위한 콘스탄티누스는 공성전을 전개합니다.
베로나는 서쪽 좁은 반도형 지역을 통해서만 접근할수 있었고, 아디제강의 급류에 둘러싸여 있어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는 방어하기 좋은 도시인데, 콘스탄티누스는 도시 위쪽에서
완만한 흐름의 아디제강의 지점을 찾아낸 뒤 도강을 감행했는데 여기서는 상당한 고전을 합니다.
폼페이아누스는 자주 병사들을 출격시켜 타격을 주었고, 결국 포위망을 돌파하여 베로나로부터 벗어나
원군을 구해온 다음 역포위를 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군에게 도전하니
콘스탄티누스는 재빨리 부대를 반분해 절반은 성을 포위하고 나머지 절반과 함께 빠르게 진군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폼페이아누스측 수가 많은걸 알았기에 2전열을 줄이고 1전열을 늘려 처음 맞상대에서는 병력이
대등했으니 날이 저물고 밤새도록 백병전이 벌어졌고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선두에 서서 적병을 격살했으고
그와 최정예 돌격대가 적 대열을 깨고 들어가 폼페이아누스를 죽였으며 이 참상을 본 베로나는 즉시 항복합니다.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 보다 많은 병력을 보유했었고, 제3의 군대가 노련한 장교들의 손에 편성되었지만
회전에 대해선 미적거렸는데.... 군생활 대부분을 야전에서 보냈고 로마 최고 지휘관(디오클레티아누스,
갈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아래에 경험을 쌓은 콘스탄티누스와 달리 막센티우스는 군 지휘 경력이 없었습니다.
막센티우스는 식량 부족에 대비해 풍부한 군수 물자 까지 확보해둔 상황이었고, 반면에
콘스탄티누스는 군수품 부족으로 시간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시간 내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로마를 불태우거나 파괴에 가까운 상황까지 몰아붙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막센티우스는 로마에서 9마일 떨어진 삭사루브라 근방 평원에 진형을 갖추고 있었기에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테베레 강변까지 포함하는 배수진을 쳤고, 위험한 위치에 자신을 배치함으로써 사기를 끌어올립니다.
첫 공격은 막센티우스의 기병대를 향해 콘스탄티누스가 이끄는 선봉부대의 공격으로 시작됐는데
막센티우스 기병대는 중기병이었고, 콘스탄티누스는 정예 경기병으로
이루어진 기동력이 우수한 기병대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중기병은 순식간에 격파돼 버립니다.
좌우익을 무너뜨리자 측면의 막센티우스의 보병대가 무방비 상대로 노출됐고,
그대로 엄청난 타격을 입혔으며 그후 막센티우스의 전열이 완전히 붕괴
됐고, 승패가 명확해지자 막센티우스군은 군기를 버리고 도주하기 시작합니다.
혼란스러운 패 속에 막센티우스군 수천이 테베레강의 깊은 급류로 뛰어들었고 황제 막센티우스도
밀비우스 다리를 건너려고 했으나 다리 위로 몰려든 수많은 병사들에게 밀려나
강물로 떨어져버렸으니...... 그는 갑옷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강 위로 떠오르지 못한채 익사합니다.
이 전투는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가 마지막 불꽃을 산화한 전투인데, 막센티우스가 전사하고 아군들이 전부
도주하는 상황에서도 프라이토리아니는 위치를 사수하며 최후까지 명예롭게 저항했다니 전투력의 쇠퇴
와는 무관하게 마지막까지 근위대라는 자부심은 있었던 것이며 전투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후에 항복합니다.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를 본 일화에 따르면, 전투를 치르기 전 어느날 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막사에서 꿈을
꾸는데 하늘에서 빛나는 십자가가 나타나더니 '이 표시로 너는 승리할 것이다 (In hoc signo vinces)'
라는 글자를 보게 되고 꿈에서 깬 황제는 십자가 모양의 군기를 만들어 앞장세워 승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 전승이 기록된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을 쓴 에우세비우스는 황제 본인으로 부터 이 이야기가 진실
이라는 맹세까지 받았다고 증언했지만, 후에 17세기 계몽 시기에 이르러 일화의 사실성에 대해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그후 기독교가 유럽의 국교가 되니 "저런 일화도 만들어지는 것" 인가 봅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서방을 통일해 한숨을 돌렸고, 로마시 입성후 2달 반을 머물면서 전후처리를 했으니,
성당 25곳에 후한 보조금을 주고 신축 성당에 대한 지원, 로마 주교(교황의 전신) 멜키아데에게
라테라노 궁전을 기증했는데, 가톨릭에서는 이날 11월 9일을 라테라노 대성당의 봉헌 축일로
기리니 국교화의 발단이 되는지라 성 베드로 대성당 보다 명목상 더 높은 위상을 가지는 근거가 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 우호 관계를 맺고 여동생 콘스탄티아를 그와 결혼시키기로 약속
했었는데...... 그 전투 직후 콘스탄티누스는 프랑크족의 침입 때문에 라인강으로
되돌아 갔고, 리키니우스도 막시미누스 2세 다이아의 공세로 즉시 전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동맹인 막센티우스의 죽음에도 개의치 않고 내전을 감행하기로했으니 한겨울에
시리아에서 출발한 그의 군대는 비티니아의 변경 지대로 향했고, 곧 혹독한 날씨를
맞닥뜨렸으니 수많은 말과 병사들이 눈에 파묻혀 죽었고 줄기차게 내리는 눈비로 도로마저 끊깁니다.
막시미누스는 강행군에 방해되는 보급품들을 후방에 남겨 놓을 수밖에 없었으나 이러한 작전 덕에
리키니우스가 공격 의도를 알아채기도 전 대규모 군대를 트라키아 보스포루스 해협에
데리고 올수는 있었으니...... 그의 군대는 11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비잔티움의 항복을 받아 냅니다.
이어 리키니우스가 29 km 떨어진 지점에 진영을 설치했는데,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리키니우스
는 협상으로 시간을 끌며 서로 상대방 진영의 귀족들을 배신케 하려고 노력
했는데, 막시미누스는 7만명의 정예병을 지휘하고 있었으나 리키니우스는 3만 명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면전에서 승리한건 리키니우스였으니 막시미누스는 엄청난 속도로 하루만에 257km
떨어진 니코메디아로 도망쳤고 아시아의 부가 상당했기에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다시
재기할수 있을만한 병력을 모았을 것이나 3~ 4개월 뒤에 타르수스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습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양측은 결혼식을 치렀고, 제국을 양분해 통치하게 되었으며, 기독교 공인
으로 유명한 종교 관용칙령, 즉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으며, 리키니우스는 4월 30일 트라키아의 치랄룸
전투에서 막시미누스 다이아에게 크게 이긴후 8월 다이아가 타르수스에서 자결함으로써 동방을 병탄합니다.
로마는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가 서방과 동방을 나눠 지배하는데, 공적이나 사적으로나 동맹 관계였던
둘은 겉으론 괜찮아 보였지만 막시미누스가 사망한지 1년도 채 못 가서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게 됩니다.
제국분할은 오래가지 못했으니 콘스탄티누스는 암살 시도를 겪었는데, 암살범을 문초하자 배후는 리키니우스
의 부하로 부제감으로 지목받던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또한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와의
접경지대인 아에모나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 에 있었던 콘스탄티누스의 동상과 초상화를 파괴합니다.
전쟁은 314년 10월 8일 키발라이 전투에서 2만명의 콘스탄티누스군이 3만 5천의 리키니우스군을 격파하고
승리했고 두번째 전투는 316년 말~ 317년 초 마르디아 평원(불가리아) 에서 벌어졌으니 콘스탄티누스는
5,000명 병력으로 고지를 점령하고 전투가 한창일때 적의 배후를 공격해 대승리를 거두니 리키니우스의
군대는 이중 전선을 펴고 진지를 사수하다가 밤이 되어 전투가 끝나자 마케도니아의 산악 지대로 퇴각합니다.
두차례 전투에서 정예병을 모두 잃은 리키니우스는 화평을 청하니 리키니우스의 부황제인 발렌스가
찾아갔으나 콘스탄티누스는 분노해 노예인 그가 부황제에서 파직되는게 강화
조건의 첫번째여야 할 것이라고 말하니 발렌스는 재위 며칠 만에 부황제에서 퇴출당하고 숙청됩니다.
317년 3월1일 세르디카에서 콘스탄티누스에게 유리한 조약을 맺는데, 트라키아를 제외한 유럽 속주
전역의 할양, 316년 말에 세웠던 리키니우스의 부제 발레리우스 발렌스를 폐위후 죽이고, 각자의
아들을 동서 양쪽의 부제로 세울 것, 같은 정제지만, 콘스탄티누스가 선임황제임을 인정할 것 3개 입니다.
315년에 로마시에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완공되었는데 부조 장식은 하드리아누스 등 예전 로마
황제에게 헌정했던 기념물의 장식을 떼어다 재활용한 것이라는데 ㅡ 폭군과 그의 무리를 상대
로 한 정의로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신성으로 가득한 황제 플라비우스 콘스탄티누스에게 바치다 ㅡ
316년 2월에 파우스타에게서 장남 콘스탄티누스 2세가 태어났고, 317년 8월 7일 또 파우스타와에서 차남
콘스탄티우스 2세가 태어났으며, 이후 양측은 7년간 평화를 유지하며 이민족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데 이때 콘스탄티누스 큰아들 크리스푸스(전처 미네르비나 소생) 가 두각을 나타내게 됩니다.
320년에 리키니우스는 주교의 종교회의를 금지하고 유배보냈으며, 다른 신에게 제사를 지내려 하지않는 사람
들을 쫓아내니 막시미누스 다이아파 숙청과 맞물려, 기독교인을 포함 사람들이 콘스탄티누스 측으로 이반
했으며, 콘스탄티누스는 317년 테살로니카에서 항구 바닥을 깊게파는 준설공사까지 하면서 함선을 건조합니다.
국경 안에 들어온 사르마티아인을 격퇴하던 중에 콘스탄티누스와 부대가 리키니우스령 트라키아로 통지 없이
진입한 사건이 확대되어 324년 7월 3일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콘스탄티누스 승리로 끝났고, 리키니우스
는 비잔티움에 웅거하면서, 우세했던 해군력을 통해 소아시아로 콘스탄티누스군이 건너오는 걸 막으려 했습니다.
리키우스는 7월 3일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대군을 이끌고 대항했으나 패배해 비잔티움으로 퇴각한후 부관
마르티니아누스를 서방 정제로 세운뒤 우세했던 해군을 맡겨 적군이 소아시아로 넘어오지 못하게
다르다넬스(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해전을 벌이지만 콘스탄티누스 아들 크리스푸스의 분전으로 패배합니다.
콘스탄티누스군이 소아시아로 넘어와 9월 18일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 크리소폴리스에서 다시 대패하고
근처 니코메디아로 도주한 뒤 항복하는데, 리키니우스는 더 싸워보려고 했지만 아내이자
콘스탄티누스의 이복 여동생 콘스탄티아가 그만 싸우고 항복해야 목숨은 건질수 있다고 해서 따릅니다.
콘스탄티누스는 4두정치 실패로 인해 초래된 내전을 끝마치고 324년에 제국 유일의 황제로 군림하게 되는데,
경쟁자였던 리키니우스 사후처리가 냉혹했으니항복할 때는 정략결혼이었을지언정 처남이기도 해서 정에
호소해 신변보장을 받았지만, 테살로니카에서 유폐생활중 325년 고트족과 내통한다는 명목으로 처형당합니다.
영국 요크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석상. 밑에 써 있는 글씨는 'CONSTANTINE BY THIS
SIGN CONQUER', 즉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에 봤다는 글귀의 영어 번역이다.
로마 제국을 통틀어 유일무이한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이후 13년동안 로마 제국의 체제를 시대에 맞게
개혁하면서 통치하는데,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공식적으로 부정해
이후 기독교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꿔놓았지만 정작 콘스탄티누스는 아리우스파에 우호적이었습니다.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파가 다수였기에 콘스탄티누스는 일단 그들의 결정 사항을 인정했지만 황제는
말년으로 갈수록 아리우스파에 더 기울었으니 로마 제국에서는 이단으로 지목된 아리우스파
가 더 우대되고 정통으로 인정받은 아타나시우스파가 억압되는 상황이 이어졌으며.....
황제는 아타나시우스를 유배보내기도 했고 이러한 상황은 후계자 시절에도 한동안 이어집니다.
공의회 직후 326년에는 황실 내부의 큰 사건이 일어나니 큰아들이자 내전 승리의 일등공신인 크리스푸스가
무자비한 고문 끝에 처형당했는데 공식적인 처형 사유는 콘스탄티누스의 후처 파우스타와의 불륜
관계였고 크리스푸스 사후 몇개월 뒤에 파우스타 역시 뜨거운 욕탕에서 처형당했고 기록말살형에 처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사건 이후 11년을 더 살았지만 두 사람의 기록 말살형도 취소하지
않았으며, 콘스탄티누스 사후 파우스타의 소생 3형제가 즉위한 후에도, 그
세 아들 중에 아무도 친어머니 파우스타의 기록말살형을 취소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잔혹한 가족사에 대해 여러가지 엇갈린 견해가 있으니 설마 제국을 운영하는데 부제가 절실히
필요한데 죽였겠냐는 주장과 군공이 큰 맏아들을 정적으로 여겨 정치적으로 필요성이
떨어진 후처 파우스타와 엮어 오명을 씌우고 숙청했다는등 뜬금없이 제거한 음침한 느낌이 짙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가정사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웅장한 대업을 계획하고 있었으니 '새로운 로마(Roma Nova,
New Rome)' 라는 이름의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 일이었는데 324년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시를
새로운 수도로 삼겠다 공언한 바 있었고, 6년간의 공사 끝에 330년 5월 11일에 완성 선포와 함께 봉헌합니다.
상당히 날림 공사가 이루어져 건물들이 꽤 자주 무너졌다고 하는데, 원래부터 지진이 잦은 지역이므로
건물을 더 튼튼하게 지어도 모자랄 판국에.... 실제로 아틸라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접근
했을때 마침 지진에 성벽이 무너져서 동로마 고관들의 심장을 쪼그라들게 만드는 일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수도라고 해서 기반 시설을 다 만든게 아니라 필요 건축물들만 만들었고 대신 제국
각지의 유명 건축물들에서 석재와 예술품을 가져와 장식했으니,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가 전왕조 파라오의 신전 조각상 묘지의 부장품을 훔쳐 사용한 것처럼 했던 것입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영역은 테오도시우스 2세가 삼중 성벽을 쌓으면서 훨씬 더 넓어진 것으로 원래는 조금
더 좁았는데,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직접 창을 가지고 땅에 그은 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다고 전합니다.
331년 사르마티아족과 고트족 사이 분쟁에 개입해 재차 고트전쟁이 벌어졌으며, 초기엔 모에시아 속주 일대가
약탈당하고 전투에서 패하기도 했지만 고트족을 격파하고, 원정대를 크림반도로 파견해 케르소네수스인
들의 협력을 받아 고트족의 본토라 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 까지 공세를 가한후 332년 평화협정을 맺습니다.
사르마티아족 역시 굴복시키고 334년 이들을 속주 일대에 사민했으며 이렇게 콘스탄티누스가 부제
시절인 306년 부터 30년에 걸쳐 사르마티아인과 게르만 제종족을 상대했던 것에 대해서
다루는 문서가 따로 있으니 German and Sarmatian campaigns of Constantine 입니다.
333년 키프로스 섬에서 양떼를 관리하던 칼로카에루스가 황제를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에 콘스탄티누스의 이복 동생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가 출동하여
칼로카에루스 일당을 체포해 재판에 회부하였고 칼로카에루스는 산채로 불태워졌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336년 재위 30주년 기념 축전을 열었으나 10달 후인 337년 5월에 사망했는데 죽기 하루 전인
5월 21일, 아리우스파인 에우세비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기독교인들의 전례를 따른 것으로 죽기
직전까지 세례받는 것을 미루어 현세의 원죄와 본죄를 씻고 죽자마자 천국에 바로 가기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르게는 기독교에서는 황제 라도 하느님과 주교 앞에서는 죄 많은 한 개인에 불과한지라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면, 기독교 주교들의 간섭에서 속박당하니 그걸 피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망할때 제국을 자식에게 나누어 통치하게 했는데, 4두정치 장점인 업무 분담은 유지하면서 결점인
제국이 분할될 가능성을 피해 보려고 했지만, 사후 대책은 죽자마자 일부 지역의 통치권을
인정받았던 조카들이 그의 세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스, 콘스탄티우스 2세) 에게 피살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족 학살 사건) 되고 뒤이어 세 아들들끼리 내전을 벌이면서 차질을 빚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