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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aquellos días, se levantó María y se fue con prontitud a la región montañosa, a una ciudad de Judá; entró en casa de Zacarías y saludó a Isabel. Y sucedió que, en cuanto oyó Isabel el saludo de María, saltó de gozo el niño en su seno, e Isabel quedó llena del Espíritu Santo; y exclamando con gran voz, dijo: «Bendita tú entre las mujeres y bendito el fruto de tu seno; y ¿de dónde a mí que la madre de mi Señor venga a mí? Porque, apenas llegó a mis oídos la voz de tu saludo, saltó de gozo el niño en mi seno. ¡Feliz la que ha creído que se cumplirían las cosas que le fueron dichas de parte del Señor!».
Y dijo María: «Engrandece mi alma al Señor y mi espíritu se alegra en Dios mi salvador porque ha puesto los ojos en la humildad de su esclava, por eso desde ahora todas las generaciones me llamarán bienaventurada, porque ha hecho en mi favor maravillas el Poderoso, Santo es su nombre y su misericordia alcanza de generación en generación a los que le temen. Desplegó la fuerza de su brazo, dispersó a los que son soberbios en su propio corazón. Derribó a los potentados de sus tronos y exaltó a los humildes. A los hambrientos colmó de bienes y despidió a los ricos sin nada. Acogió a Israel, su siervo, acordándose de la misericordia -como había anunciado a nuestros padres- en favor de Abraham y de su linaje por los siglos». María permaneció con ella unos tres meses, y se volvió a su casa.
«Saltó de gozo el niño en mi seno»
Mons. F. Xavier CIURANETA i Aymí Obispo Emérito de Lleida
(Lleida, España)
Hoy contemplamos el hecho de la Visitación de la Virgen María a su prima Isabel. Tan pronto como le ha sido comunicado que ha sido escogida por Dios Padre para ser la Madre del Hijo de Dios y que su prima Isabel ha recibido también el don de la maternidad, marcha decididamente hacia la montaña para felicitar a su prima, para compartir con ella el gozo de haber sido agraciadas con el don de la maternidad y para servirla.
El saludo de la Madre de Dios provoca que el niño, que Isabel lleva en su seno, salte de entusiasmo dentro de las entrañas de su madre. La Madre de Dios, que lleva a Jesús en su seno, es causa de alegría. La maternidad es un don de Dios que genera alegría. Las familias se alegran cuando hay un anuncio de una nueva vida. El nacimiento de Cristo produce ciertamente «una gran alegría» (Lc 2,10).
A pesar de todo, hoy día, la maternidad no es valorada debidamente. Frecuentemente se le anteponen otros intereses superficiales, que son manifestación de comodidad y de egoísmo. Las posibles renuncias que comporta el amor paternal y maternal, asustan a muchos matrimonios que, quizá por los medios que han recibido de Dios, debieran ser más generosos y decir “sí” más responsablemente a nuevas vidas. Muchas familias dejan de ser “santuarios de la vida”. El Papa San Juan Pablo II constata que la anticoncepción y el aborto «tienen sus raíces en una mentalidad hedonista e irresponsable respecto a la sexualidad y presuponen un concepto egoísta de la libertad, que ve en la procreación un obstáculo al desarrollo de la propia personalidad».
Isabel, durante cinco meses, no salía de casa, y pensaba: «Esto es lo que ha hecho por mí el Señor» (Lc 1,25). Y María decía: «Engrandece mi alma al Señor (...) porque ha puesto los ojos en la humildad de su esclava» (Lc 1,46.48). La Virgen María e Isabel valoran y agradecen la obra de Dios en ellas: ¡la maternidad! Es necesario que los católicos reencuentren el significado de la vida como un don sagrado de Dios a los seres humanos.
♣ 사랑으로 찾아가는 복된 방문 ♣
작은형제회에서 전례로 거행하기 시작한 이 축일은 기본적으로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알려줍니다. 곧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사실, 세례자 요한이 탄생 전에 주님을 만남으로써 원죄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 성모찬가에서 복되신 동정녀의 겸손을 상기시켜 줍니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구세주를 잉태하리라는 예고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순응하신 며칠 뒤, ‘서둘러’(1,39)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에 사는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성모께서 ‘서둘러’ 발길을 옮긴 것은 자신이 받은 약속의 기쁨에 이끌려 구원의 기쁨을 나누고 경건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봉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성령의 은총을 받으시고 머뭇거리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의 말씀은 나자렛에서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여행을 이어갑니다. 그 여행은 사랑의 순례였고 오직 사랑을 체험한 이가 사랑으로 봉사하려는 몸짓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고,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찼습니다.”(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 그 뱃속에 든 아기가 뛰놀았고,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찼습니다. 성모님의 발길은 하느님의 축복을 나누기 위한 ‘평화의 발걸음’이었고, 구원의 기쁨을 발생시키는 성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를 품으신 성모님의 이 ‘찾아봄’은 새로운 만남을 뜻하며 그 만남 안에서 두 연인은 성령이 주시는 일치를 체험합니다. 엘리사벳은 먼저 목소리를 들었고, 요한은 무엇보다 먼저 은총을 깨달았습니다. 마리아에 대한 엘리사벳의 찬탄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신앙고백이요, 마리아에 대한 하느님 백성들의 찬미인 셈입니다.
성모께서는 엘리사벳의 축복의 인사를 받고 자신을 통하여 이루신 하느님의 위업과 인류 구원 역사(役事)에 감사드립니다(1,46-55).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의 인격 안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알아보고 기뻐합니다(1,46).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천대받는 가난한 백성을 해방시키러 오시기 때문입니다(1,48).
능하시고 거룩하시며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무상으로 은혜를 베푸시고, 가난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을, 그들을 교만하게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들로부터 해방시키러 오십니다(1,50-53).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행동방식이요, 예수님의 행동방식입니다.
우리도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성모님을 떠올리며 봉사하기 위하여 그리고 구원의 기쁨을 나누기 위하여 이웃을 찾아가야겠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발걸음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하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또한 엘리사벳이 성령의 빛으로 주님의 모친을 알아보았듯이 우리도 일상의 삶에서 영의 눈으로 구세주의 모친을 알아보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을 품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오늘도 가난하고 묶인 이들과 부당한 착취를 당하고 반생명적인 움직임들로 인해 시달리는 모두의 해방을 위해 가난한 마음으로 서로를 찾아가는 복된 방문의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난 일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축일입니다.
“두 어머니가 만난 일이 뭐가 중요해서 축일로 정해서 경축하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만남’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엘리사벳의 증언’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2-45)”
이 말은, 마리아가 잉태한 예수님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언하는 말이고,
메시아의 구원이 사람들에게 참 행복을 주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엘리사벳은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첫 번째 인물입니다.
‘주님’이라는 호칭은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신앙고백이고, 증언입니다.
또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행복을 찬양한 것은,
사실은 메시아를 세상에 보내 주신 하느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메시아를 보내 주셔서 사람들에게 참 행복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한 것.)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은,
즉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은
마리아 외에는 들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를 만난 엘리사벳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루카 1,41)
그것을 온 세상에 증언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날 때, 곁에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즈카르야는 있었을 것입니다.
두 어머니가 사람들 모르게 은밀하게 만난 것이 아니라면,
주변에 가족들과 친척들과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아마도 마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숨어 지낸 기간은 다섯 달입니다(루카 1,24).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임신을 알게 된 것은 그 한 달 뒤입니다(루카 1,36).
그러니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났을 때에는
이미 이웃과 친척들이 모두 엘리사벳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축하하기 위해서 몰려들었을 것입니다(루카 1,58).
또 마리아가 엘리사벳과 함께 지낸 기간은 석 달입니다(루카 1,56).
그 석 달 동안 엘리사벳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언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한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요한 1,29-36).
엘리사벳의 증언은 나중에 세례자 요한이 하게 될 일을 미리 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어머니의 증언을 물려받아서
다시 증언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직접 요한에게 계시를 내려 주셨지만...(요한 1,33)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 말했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말했다는 뜻인데,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로봇처럼 말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마리아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달았고,
그것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증언하고 고백했습니다.)
다시 또, “엘리사벳의 증언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증언은 예수님에 대한 첫 번째 신앙고백이고,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엘리사벳의 증언 다음에 ‘마리아의 노래’가 나오는데,
‘마리아의 노래’는 가브리엘 천사가 한 말과 엘리사벳의 증언을 합해서
마리아 자신의 입장에서 표현한 신앙고백이고, 찬미가입니다.
내용을 보면, 하느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찬양과
메시아께서 하실 일에 대한 예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과거형으로 표현되었지만, 그래도 예언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이 부분만 보면, 마치 사회 혁명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혁명이 아니라 메시아 나라의 행복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비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만의 행복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행복입니다.
(메시아 나라는 모두가 똑같이 행복해지는 나라입니다.)
메시아 나라는 통치자들과 부유한 자들이 불행하게 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도 스스로 회개하고, 자기가 가진 것들을 내려놓으면,
메시아께서 주시는 참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는 권력가도 없고 부유한 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들을 움켜쥐고 있겠다고 고집부리면,
즉 메시아께서 주시는 참 행복을 거부한다면,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주시는 것을 받지 않아서 못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세속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니고, 부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만일에 세속적인 출세와 성공을 행복이라고 착각하고서
그런 것만 예수님께 청한다면, 그것은 청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천함’과 ‘굶주림’이 좋은 것도 아니고, 선(善)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악(惡)입니다.
우리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비천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그 노력이 바로 ‘이웃 사랑’이고,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신경심장학이란 현대의학이 있습니다.
신경심장학이란 뇌를 연구하듯이 똑같이 심장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신경심장학에 따르면 심장과 뇌는 서로 독립적으로 정보를 밀접하게 주고받으며 소통하는데,
두뇌의 판단에 따라 심장박동수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심장에서 보내는 특정 신호가 감정이나 인지 능력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즉 화가 나서 심장박동수가 불규칙하다기보다
불규칙한 심장박동수가 그 사람을 불안하고 짜증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그래서 심장박동수를 가장 이상적 상태로 유지시켜주는 정서를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즐거운 일을 상상해 보게도 하고, 명상을 시키기도 했으며,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한 상태로 휴식을 취해 보게 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실험들을 통해,
심장 박동 수를 가장 이상적으로 유지시켜주는 순간은 ‘감사’의 정서를 느끼는 상태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편안한 휴식이나 심지어 수면 상태에 있을 때보다도
심장박동수의 변화주기를 더욱더 일정하게 유지해주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감사는 호흡과 심장박동, 혈압의 리듬까지 신체기능의 가장 적합한 상태로
변화되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내었습니다.
늘 옆모습만으로 사진이 찍히기를 원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볼 수 없는 눈을 버리고 푸른색 유리 눈을 끼워 넣고
정면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이 헬렌 켈러입니다.
생후 19개월 심한 열병으로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일곱 살에 만난 설리번이라는 스승의 도움과 자신의 의지와 노력 끝에
마침내 헬렌 켈러는 이렇게 외칩니다.
“I.... AM....... NOT ..... DUMB”(나...는... 버...엉...어...리가... 아니...임...니다.)
또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유일한 소망 하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죽기직전에 꼭 3일 동안만 눈을 뜨고 보는 것이다.
만약 내가 눈을 뜨고 볼 수 있다면 나는 나의 눈을 뜨는 그 첫 순간
나를 이만큼 가르쳐주고 교육을 시켜준 나의 선생 설리번을 찾아가겠다.
지금까지 그의 특징과 얼굴모습을 내손 끝으로 만져서 알던 그의 인자한 얼굴
그리고 아리따운 몸매 등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보면서
그의 모습을 나의 마음속 깊이 간직해 두겠다.
다음엔 친구들을 찾아가고 그 다음엔 들로 산으로 산보를 가겠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사귀들, 들에 피어 있는 예쁜 꽃들과 풀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석양에 빛나는 아름다운 노을을 보고 싶다.
다음날 이른 새벽에는 먼동이 트는 웅장한 장면,
아침에는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 오후에는 미술관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하루를 지내고,
마지막 날에는 일찍 큰길가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들.
아침에는 오페라하우스. 오후엔 영화관에서 영화를 감상하고 싶다.
그러다 어느덧 저녁이 되면 나는 건물의 숲을 이루고 있는 도시한복판으로 나와서
네온사인이 반짝거리는 거리, 쇼윈도에 진열돼 있는 아름다운 상품들을 보면서
집에 돌아와 내가 눈을 감아야 할 마지막 순간에
나는 이 3일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하여준 나의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기도를 드리고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왜 우리는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고, 말 할 수도 있는데도
3일만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헬렌 켈러만큼 감사할 줄을 모를까요?
어제는 어떤 자매에게 살아오면서 언제가 가장 행복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오랜 냉담 끝에 성당에 찾아갔고 무릎을 꿇었고 하느님께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들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 이후로 많이 변해서 이제는 주님만을 바라보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바로 그 날을 가장 행복한 날로 기억하지 못할까요?
감사가 좋다는 것은 신경심장학이라는 현대의학도 증명해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께서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노래하시며
당신의 비천함에 비해 너무나 큰 주님 사랑에 찬미와 감사를 올리십니다.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교만 때문입니다.
저도 신학교 때 주님께 무언가 해 드리고 있다고 교만해 있을 때
며칠 단식을 하여 매우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성체를 영하고 무릎을 꿇었을 때
가장 큰 행복과 감사를 느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걸어다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더 가져야 당연한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하기 때문이고,
하느님을 알게 된 날이 가장 행복한 날이 아닌 것은
그 때 온전하게 무릎을 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 분 앞에 무릎을 꿇는 날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기쁜 날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성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해 주시고 싶은 말은 이것일 것입니다.
“겸손하여라, 감사하게 될 것이다.
감사하여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그러면 찬미하게 될 것이다.
찬미하여라, 그러면 그 분 안에서 기뻐 뛰며 머물게 될 것이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오늘 복음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서 나눈 이야기들이다.
사람이 누구와 만나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눈다.
어떤 특별한 주제를 정해 놓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면
주로 일상적으로 자기 주변에서 일어났었던 이야기를 나눈다.
과연 우리들은 주로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는가?
우리들이 만나서 주로 나누는 이야기의 화제는 무엇인가?
좀 더 건설적인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 영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을까?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나눈 이야기를 보면
세속적인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보고
"주님의 어머니께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라고 했고, 마리아는 이를 받아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
라는 등 모두가 주님에 관한 이야기, 믿음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이것을 영적 이야기라고 한다.
우리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이런 영적인 이야기를 나눌 상대를 만난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
신자들이고, 수도자들이고, 성직자들이라 하더라도
진심으로 마음을 터 놓고 자기의 영적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 그럴까?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우리 자신들이 영적 이야기를 나눌 소재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영적 이야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적으로 사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영적으로 살지 않으면 아무리 영적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나눌 내용이 없다.
어쩌면 그마만큼 우리의 삶에서 영적인 것들이 멀리 있는 지도 모른다.
아니 영적인 것들에 대해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영적 이야기란 무엇인가?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요한 6,63)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영적인 주님의 말씀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적인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롭게 깨닫게 된 것들을 나누는 것이다.
즉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신 일들에 관한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주님이 내 안에서 어떤 일들을 하셨고,
주님의 은총으로 내 삶이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무엇을 새롭게 깨달았으며, 어떤 일들이 내 안에서 이루워졌고
또 지금 내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이루워지고 있는지를 나누는 것이다.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나눈 이야기들은 전부 주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나열한 것이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노래를 "마니피깟"이라고 한다.
마니피깟이란 "위대하다, 장엄하다, 참으로 놀랍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마니피깟이란 "주님께서 이루신 위대한 일들에 관한 노래"라는 뜻이다.
그럼 주님께서 마리아에게만 위대한 일들을 이루셨는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위대한 일들을 이루셨다.
다만 내가 그 일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보지 못하는가?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주님의 말씀을 보고 듣지 않으니까 영적인 감각이 살아있지 못하다.
그래서 주님께서 매순간 우리 각자에게 위대한 일들을 이루시지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영적인 의식이 없이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의식에만 깨어있고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진정 우리도 마리아처럼 나의 마니피깟을 부를 수 있을 때
영적인 생활을 한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마니피깟이어야 한다.
한 순간도 주님께서 내 안에서 위대한 일들을 하지 않으시는 순간이 없고,
또 내 주위에 펼쳐보여지는 모든 것들이 주님의 위대한 일들을 찬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신비가이고, 인생은 살아야 할 신비이지
풀어야할 과제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매 순간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위대한 신비를 감상하고 노래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주님을 찬미하라.
흘러 가는 구름을 보고 주님을 찬미하라.
내가 오늘 살아있음을 보고 주님을 찬미하라.
내가 오늘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음을 보고 주님을 찬미하라.
내가 함께 사는 가족이 있음을 보고 주님께 찬미하라.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눈을 주님을 찬미하라.
등등 끊임없는 찬미가 즉 마니피깟을 불러라.
"숨쉬는 모든 것들아 주님을 찬미하라!"(시편 150,6)
성바오로가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2코린 3,17)
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영적으로 사는 사람 즉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고 사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에서 모든 곳에서 주님께서 이루시는 위대한 일들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어떠한 막힘도 없이 자유롭게 주님을 노래한다.
그래서 시인이 되고, 작곡가가 되고, 화가가 된다.
한 마디로 창의적인 사람이 된다.
그것도 지칠 줄 모르는 창의성이 샘물처럼 솟아나온다.
"나는 종탑마다 돌아다니며 종을 쳐 댄다네. 그러고는 춤을 춘다네!"라고
시인 랭보의 기상천외한 시상이 나타나듯이,
또 다윗 왕이 왕이면서도 너무 즐거워 주님 앞에서 발거벗고 춤을 추었듯이
언제나 어디서나 새로운 노래 새로운 춤을 추게된다.
얼굴에 주름살을 펴고싶은가?
얼굴이 아름다워지고 싶은가?
춤을 추고 싶은가?
찡그린 얼굴을 활짝펴고 싶은가?
마음에 늘 기쁨으로 울렁거리는 삶을 살고 싶은가?
나의 영혼이 주님을 찬양드리고 싶은가?
그렇다면 주님께서 내 안에서 어떤 위대한 일들을 하셨는지를 들여다 보라.
그것을 보기 시작할 때 당신의 모습은 아름답게 변화되기 시작하리라.
"나는 종탑마다 돌아다니며 종을 쳐 댄다네. 그러고는 춤을 춘다네!"
얼마나 신명나는 삶인가!
"나는 종탑마다 돌아다니며 종을 쳐 댄다네. 그러고는 춤을 춘다네!"
오늘 우리도 종탑마다 돌아다니며 종을 치고 그러고는 춤을 추는 하루가 되자.
마니피깟을 부르는 멋진 하루가 되자.
마리아 본명을 가지신 모든 분들에게 영명일을 축하드립니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