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학자가 한국 학자도 감탄할 만한 한국신화 연구서를 펴냈다. 대산문화재단의 해외 한국학 연구지원을 받아 최근 영국의 커즌 출판사에서 나온 454쪽 분량의 책 ‘한국의 신화와 설화―고대 및 근대 자료에 대한 해설’(Myths and Legends from Korea-An Annotated Compendium of Ancient and Modern Materials)이 바로 그것. 폭넓은 자료 수집과 충실한 번역, 독창적인 연구방법과 해석이 돋보이는 이 책의 저자는 영국 셰필드대 동아시아학과의 한국학연구소 주임교수인 제임스 헌트리 그레이슨이다.
그는 한국의 고대 및 근대 신화와 전설을 꼼꼼히 영역·분석하고, 외형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제나 심층적인 층위의 공통점을 밝히고자 하는 ‘드라마적인 구조분석’ 방식으로 중국·일본·몽골·시베리아 등 동북아시아 국가의 설화와 비교 연구했다. 그는 단군신화에서 보이는 동물신과 인간신의 결합 구조를 두 부분으로 나눠 분석했고, 단군신화가 상고(上古)시대의 신화임을 증명해 냈다. 이같은 연구성과는 국내 신화연구자들을 앞서며, 드라마적인 구조분석 방식 역시 비교신화학과 비교문화학의 의미있는 시도로 평가받는다.
"유교가 한국인 정체성 상실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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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국의 신화 연구를 통해 급변하는 현대 사회 속의 한국인의 변하지 않는 사고방식에 대해 파악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가 신화 분석을 통해 본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사고방식은 어떤 모습일까. 한국 신화와 구비문학 전공자인 경기대 김헌선 교수와 그레이슨 교수가 ‘신화 연구의 의미’를 주제로 특별 대담을 가졌다. 그레이슨 교수는 20일 영국으로 돌아간다.
▲김헌선〓한국의 건국신화, 성씨신화, 창세신화, 동물신화 등을 광범위하게 비교 연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그레이슨〓한국처럼 급변하고 산업화가 격심하게 이루어진 나라는 찾기 힘들다. 한국의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한국인의 생각과 가치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전설과 신화를 연구하는 가운데 한민족의 독특한 사고방식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한국의 근대 설화에서는 유교적 사고방식이 매우 두드러진다. 한국 설화에는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갈등하고 시아버지가 그것을 해결하는 식의 내용이 많은데, 다른 나라의 설화에서는 시어머니를 그렇게 그리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유교의 영향력이 워낙 크기 때문에 설화에도 이러한 양상이 표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한국만큼 유교적인 나라는 없다고 본다. 한국의 유학자들은 정치뿐 아니라 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 유교를 실현하려고 했다. 나는 그러한 유교적 사고방식에 대한 집착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위기와 변동에 큰 영향력을 미쳤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김〓저서에서 단군 신화에 대한 분석이 돋보인다. 곰과 호랑이에 관련된 내용은 시베리아적 요소로 분리해 분석했는데….
▲그레이슨〓신화 연구는 단순한 모티브 분석으로 부족하다. 나는 구조적이고 심층적인 분석을 위해 드라마적 구조분석 방법을 시도해 봤다. 외형은 달라도 같은 유형의 이야기는 존재하게 마련이다. 단군신화를 동북아시아의 다른 신화와 비교하다 일본의 건국신화와 내용 구조가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세계로 내려오고 싶어했던 점과 이자나키(일본신화에 등장하는 천신)의 셋째 스사노오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비슷하고, 환웅이 환인의 서자인 점과 스사노오 역시 왕위상속의 대상이 아닌 셋째라는 점도 비슷한 구도다.
일본 신화에는 나오지 않는 곰과 호랑이에 관련된 내용은 시베리아의 만주족, 아이누족, 나나이족의 신화와 비교해볼 수 있다. 그 신화에서 곰이나 호랑이는 토템이 아니라 조상의 영혼과 일치하는 존재이다. 동물이 사람으로 혹은 사람이 동물로 변신하는 것은 원시 신화의 특성이지만, 동물과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 것은 상고 신화의 특성이다. 따라서 단군신화는 상고의 신화라는 결론이 나온다.
▲김〓납득할만한 분석이다. 다만 최근 한국학자들의 비교신화학 연구성과를 참고하지 않았다는 점은 좀 아쉽다. 93년 북한에서는 단군왕릉 발굴 결과를 발표하며 신화적·전설적 인물로 간주돼온 단군을 실존인물이라 주장했다.
▲그레이슨〓예로부터 한국에선 역사적 위기마다 단군 신화 재인식 운동이 있었다. 그것은 조선세조, 조선후기, 근대 초창기의 역사 기록이나 종교운동을 봐도 알 수 있다. 북한역시 마찬가지로 사회가 흔들리다보니 민족의 뿌리를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인 것이라 이해된다. 하지만 북한이 발굴한 그 단군 왕릉은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단군의 부인까지 발견했다니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김〓한국 학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레이슨〓한국 역사책을 읽으면서 민족주의에 경도된 서술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객관적·보편적인 시각으로 인문지리적·사회지리적 배경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포함한 역사서를 만들었으면 한다. 한국사를 처음 접하는 외국인들도 그 책을 제대로 된 한국 입문서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말이다.
▲김〓국수주의적인 역사서술은 일본이 더 심하지 않은가.
▲그레이슨〓물론 그렇다. 그래서 나도 지난 4∼8일 런던에서 열린 제20차 유럽지역 한국학협회 학술대회에 참석했다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반대하는 서명 운동에 동참했다.
〈정리〓정희정 기자〉
한국말이 유창한 키다리 영국신사 제임스 헌트리 그레이슨(57)은 영국 셰필드대 동아시아학과의 한국학연구소 주임교수.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인류학)를, 영국 에든버러대학에서 박사학위(종교학)를 받았다.
한국의 종교와 구비문학, 신화와 전설에 조예가 깊은 유럽의 대표적 한국학자이다. 감리교 목사인 그는 “71년 한국에서 선교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 친하던 한국 목사가 지어준 한국이름이 김정현”이라고 소개했다.
60년대 중반 대학시절 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땅을 처음 밟았고, 71년 교육 선교사로 한국을 다시 찾았다. 87년까지 경북대와 계명대, 감리교신학대에서 종교학과 신학, 인류학을 가르쳤다. 남는 시간엔 서당을 다니며 한학자에게 무릎꿇고 한문을 배웠고 국내 곳곳을 답사다녔다.
청장년 시절 16년을 꼬박 한국에서 보낸 그는 87년 이후에도 매년 한국을 방문, 한국 생활이 거의 20여년에 이른다. 저서로는 ‘한국의 종교사’, ‘한국의 초기 불교와 기독교’를 비롯, ‘존 로스, 한국의 첫 선교사’, ‘세계종교사전’ 등 한국어 저서도 두권 있다.
그는 한국 남자아이 두명을 입양해 키우고 있다. “이제 한국은 ‘고아수출 대국’이란 명찰을 뗄 때가 됐지만 혈통을 중시하는 유교적 사고방식이 뿌리깊어 입양을 꺼린다”고 안타까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