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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는 외로운 늑대
책 한 권 번역 위해 관련 원서 10여권 공부 18년간 130권 번역최준석 기자
전문 번역가 이종인(58)씨가 번역하고 편집한 ‘로마제국 쇠망사’ 축약본이 ‘책과함께’ 출판사(대표 류종필)에서 4월 16일자로 나왔다. 1147쪽까지 면수가 인쇄돼 있는 두툼한 책이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18세기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쓴 ‘절대역사서’. 이씨가 편역한 이번 책은 원전을 3분의 1 분량으로 줄인 것이다. 이씨에 따르면, 기번의 원서는 국판 크기의 600쪽짜리 책 여섯 권으로, 150만 영어 단어(200자 원고지 2만장 분량)로 돼 있는데, 요즘 나오는 짧은 장편소설로 치면 무려 스무 권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국내에는 두 권의 ‘로마제국 쇠망사’ 완역본이 나와 있다. 1998년 대광서림이 일본어 번역본을 다시 한글로 옮긴 중역본이 나왔고, 민음사가 2010년 6권의 완역본을 내놨다. 민음사 책은 영어 원전에서 바로 한글로 옮겼다는 데 의미가 있으나 번역자가 6명이어서 글쓰기와 용어의 일관성 측면에서 단점이 있다. 이종인씨가 이번에 번역한 책은 전문 번역가 한 명이 달라붙어 작업해 문장과 흐름에서 수미일관하는 장점이 있다. 까치출판사가 과거에 낸 ‘로마제국 쇠망사’도 있는데 이 책은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만 다루고, 동로마제국 시절을 다루지 않았다.
이씨는 4월 11일 국회의원 총선일에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지하철 미금역 인근에 있는 성원아말했다. 번역 작업 착수는 2010년 7월에 했다. 그가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건 작년 2월쯤이었다. 도판을 파트 자택에서 주간조선과 만나 “200자 원고지 5000매 분량의 작업이었다. 8개월 작업했다”고 집어넣는 문제로 고민하느라 출간 시기가 늦어졌다고 했다.
기번의 역사서에 대한 이씨의 관심은 각별했다. 그는 ‘로마제국 쇠망사’ 역자 해제에서 “지난 15년 동안 세 번 읽었다. 읽을 때마다 그 방대한 분량에 놀라움과 위압감을 금치 못했다”고 썼다. 이씨는 이번에 번역하면서 원전을 두 번을 더 읽었다고 했다. 번역을 하면서 한 번, 번역 뒤 또 한 번 읽었다. 그는 번역한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기 전 원전을 다시 읽은 이유에 대해 “원문의 영향을 받아 영어식 문장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걸 고치는 거다”라고 말했다. 원문이 주는 그늘과 카리스마가 커서 한글로 옮기는 게 늘 쉽지 않다고 했다.
그는 단순 번역이 아니라 좋은 번역을 위해 공부하는 학구파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번역하면서 참고한 책이 15권쯤 된다고 했다. 전기, 해설서, 논문을 보면서 작업을 했다. 다 영어로 쓰인 책이다.
이씨는 브리태니커 편집장 일을 그만둔 1994년 이후 번역만으로 생활을 하는 전문 번역가다. 영어 전문 번역가인 그는 “몇 년 전에 조선일보가 5명의 번역가를 선정했는데, 그중에 포함됐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낸 책은 모두 130권 정도. 다음은 일문일답.
- 전문 번역가 수입은 얼마 정도인지.
“이번 책 번역을 하고는 2500만원 받았다. 수입이 별로 많지 않다. 하지만 괜찮다.”
8개월 동안 작업했으니 월평균 수입이 300만원이 좀 더 되는 셈이다. 그는 2009년에 낸 책 ‘번역은 글쓰기다’에서 “번역료 수입이 5년 전까지는 평균 3500만원, 그 이후로는 4000만원 정도 된다. 내가 번역업계에 뛰어들었을 때, 아내는 수입이 충분치 못할 것으로 예상해 옷 가게를 시작했다. 나도 얼마나 수입을 올릴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져도 번역 이외의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굳건했다. 번역가 생활 3년에 아내는 가게를 그만두고 다시 전업주부로 돌아왔다. 내가 벌어들이는 수입만으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그는 또 “아이들이 장성한 지금은 번역 수입이 생활비를 근근이 댈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선배 번역가인 이창식씨는 아무리 열심히 번역을 해도 생활비만큼 벌어들일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했다.
- 번역가는 어떤 사람들인가.
“직장 생활이 안 맞고, 혼자 하는 것을 좋아한다. 직장 생활 수년 하다가 39살에 전문 번역가가 됐다.(고려대 영문학과를 나온 뒤 그는 건설업체에서 해외마케팅 업무를 했다. 이 후 브리태니커 편집장으로 일했다.) 번역가가 되기 전에는 이 일이 안정되게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번역의 품질을 중시하다 보니 번역가로서 자리를 잡았다. 출판계는 편집자가 3년 단위로 많이 이동한다. 한 편집자가 A라는 출판사에서 B출판사로 가면 그가 나를 기억하고 일을 준다. 그러면 일을 대주는 데가 두 곳이 된다. 그렇게 몇 년이 되니 일하는 출판사가 열 곳이 됐다. 1년 내내 일감이 떨어지지 않게 됐다. 시작한 지 3, 4년 후에는 일을 걱정하지 않게 됐다.”
- 지금은 얼마나 일감이 있는지.
“8월이나 9월 중순까지만 일이 있다. 내 희망은 ‘주문이 더 안 들어오면 놀 수 있다’이다. 올해 석 달은 놀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적은 없었다.”
- 번역 작업은 한 번에 한 개만 하나.
“그렇다. 두 개는 못하겠더라. 하나에 집중한다.”
- 몇 권 정도 번역일을 확보해놓고 있나.
“현재 작업 중인 책 말고 세 개가 있다. 현재 책은 4월 말이나 5월에 끝난다. 나머지 넉 달 동안 세 권을 한다.”
- 작업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한 달에 1000매 정도 번역한다.”
- 번역료는.
“잘 주는 데가 (200자 원고지 한 장당) 5000원, 아니면 4500원이다.”
- 현재 작업 중인 책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다. 15년 전부터 라틴어를 혼자 독학했다. 이번 번역은 라틴어와 영어본을 함께 보면서 하고 있다. 너무 힘든 게 걸렸다. 봉사한다고 생각하고 한다. 물론 쉬운 번역도 있다.”
- 하루 작업 시간은.
“작업은 일반 회사원과 마찬가지로 8시간 하는 편이다. 오전 9시에 시작해 낮 12시까지, 점심 먹고 2시부터 시작해 오후 5,6시까지 한다. 요즘은 힘들어서 하루 6시간 정도 한다. 번역을 매일 하지는 않는다. 하루는 책을 읽고, 다음 이틀은 번역한다. 일본어 번역하는 사람은 책을 읽어가면서 번역한다고 하는데, 영어는 그렇게 안 된다. 미리 내용을 알고 있어야 편리하다.
‘책과함께’ 출판사는 내게 잘해줬다. 원고를 넘기기 전에 원고료 2000만원을 미리 줬다. 목돈은 아니고 500만원, 200만원, 200만원 이런 식으로 몇 회에 걸쳐 줬다.”
이씨는 번역하기 위해 많은 관련 책을 구해 읽었다고 했다. 영어로 된 책들이다.
- 참고 서적은 출판사에서 사주나.
“책 사달라는 번역가는 없다. 보통은 번역할 책만 놓고 일한다. 투자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은 미세한 데서 차이가 난다. 이번에 작업하면서 새 책 다섯 권과 헌책을 합해 모두 8권 샀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도 있다.”
부인 김화진씨는 “책 한 권 번역하려면 관련 책 10권은 읽으세요”라고 말을 거들었다.
- 헌책방에서 책을 샀다고 했나.
“재수 좋게 구했다. 인문서를 번역하려면 번역가가 자료를 많이 구입해야 한다. 기번 관련 책을 읽었다는 게 번역된 텍스트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런 걸 읽고 번역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결과물은 다르다. 나는 투자를 많이 한다. 거의 공부하는 수준으로 한다.”
- 수영장 다니며 몸 관리한다고 책에서 읽었다.
“허리 때문이다. 디스크 수술을 3년 전에 받았다. 지금은 괜찮다. 무리하게 책상에 오래 앉아 있어서 그렇다고 했다. 직업병이다. 극복했다. 5000매, 6000매 번역 일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체력이 있어야 한다.”
- 번역가 중 연배가 제일 많은 사람은.
“안정효·이윤기 선생은 돌아가셨고, ‘로마인이야기’를 번역한 김석희씨가 1952년생이다. 나보다 두 살 많다.”
- 그동안 주요 번역서는.
“(이씨는 서재에서 ‘호모 루덴스’ ‘프로이트와 모세’ ‘신의 용광로’ 등을 갖고 나왔다.) ‘호모루덴스’가 제일 잘 팔렸다. 연암서가에서 냈다. 6쇄까지 팔렸다. 1만부가 나갔다.”
- ‘프로이트와 모세’는 출판사에 출판을 먼저 제안했다고 들었다.
“인세 방식으로 작업했다. 900매 분량이었다. 450만원을 받아야 하는데 인세 방식으로 하니 150만원 정도 받았다. 책이 안 팔린 탓이다.”
인세 방식은 책의 판매량과 번역 원고료를 연동시킨다. 많이 팔리면 역자가 번역료(인세)를 많이 받고, 적게 팔리면 수입이 준다.
- 가장 번역 작업이 잘된 책은.
“(‘로마제국 쇠망사’ 책을 가리키며) 이게 잘됐다(웃음). 갈수록 기술이 늘지 않나. 이제 번역을 제대로 하는 것 같은데, 앞으로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점점 든다.”
- 10년은 더 할 수 있지 않나.
“그럴까. 건강은 자신할 수가 없다. 기자는 정년이 몇 살인가.”
- 정년 채우는 사람 많지 않다.
“아 그런가.”
- 출판사 어디와 작업을 하는지.
“지금은 열린책들, 문학동네, 책과함께, 그리고 연암서가와 한다. 나머지는 그때그때 생긴다.”
- 맨처음 번역한 게 톰 클랜시의 ‘공포의 총합’이라고 저서에 썼던데 역자 이름이 책에 들어가 있나.
“안 들어갔다. 선배 번역자 이름이 들어갔다. 안 들어갔어도 괜찮다. 처음에 일을 시작할 때는 그렇다. 다른 사람도 그렇게 시작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 이름이 인쇄된 첫 책은.
“기억이 안 난다. 1994년인데, 그때 나온 책은 유명하지도 않다.”
- 책 안 갖고 있나.
“없다. 아 생각난다. 마이클 코넬리의 ‘블랙 아이스’다. 유명하지 않다. 추리소설이다. 시공사에서 냈다.”
- 지금까지 얼마나 번역했나.
“130권 정도다. 번역본을 다 갖고 있지 않고 30권 정도 갖고 있다. 옛날에 작업한 책에는 애정이 없었다. 수입을 올리기에 급급했었다.”
- 마음에 드는 책을 번역하기 시작한 때는.
“5, 6년밖에 안 됐다.”
- 그 전에는.
“경제경영 서적을 했다. 참 재미없었다. 뻔한 내용을 늘려서. 살 게 많았다. 괜찮게 번역한 책은 30권 정도 된다.”
- 역자 후기를 꼭 쓴다고 하던데.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역자 후기를 잘 쓰려고 노력한다. 후기를 통해 책 내용을 잘 전달하려고 한다. 이 책(로마제국 쇠망사) 후기도 100매 분량인데, 몇 번 고쳤다. 중요하니까.”
- 왜 중요한가.
“역자 후기가 시원찮은 번역서는 일단 의심이 된다. 책을 번역했는데 독자에게 해줄 얘기가 없다면. 기계적인 번역을 했거나 성의없이 한 것이다. 역자 후기를 정성스럽게 쓰려면 텍스트를 잘 읽어야 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 텍스트 뜻을 잘 알려면 관련 책을 읽어야 한다. 기번 연구 학자의 논문을 읽어 어떤 게 중요한가 알아야 하고, 그걸 참고해서 중요한 건 반드시 집어넣어야 한다. 오비디우스 책을 아까도 보여줬지만, 번역만 해도 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역자 후기는 역자의 권리이자 의무인가.
“안 쓰는 사람도 있다. 출판사는 써주길 원한다. 책을 쉽게 소개하니까. 역자 후기를 잘 써오기를 바란다.”
- 번역은 글쓰기라고 저서에서 말했다. 원문파와 자유파라는 번역자의 두 가지 흐름을 말했다. 이 선생은 자유파인가.
“자유파라는 말은 내가 이름 붙였다. 영어와 한국어는 표현, 수사법, 읽히는 것도 다르다. 이양하의 수필 ‘교토기행’을 보면 영어식 문장이다. 그렇게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원문을 읽으면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고 이게 한국말로 전환되는 거다. 1 대 1 단어 대응이 아니다. 나는 원문을 읽을 때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단어 하나가 왜 빠졌느냐, 이게 중요하다고 보지 않는다.”
- 원문의 그늘로부터 어떻게 벗어나나.
“늘 그늘 밑에 있다. 번역을 해놓고 다시 읽어본다. 고친다. 원서를 다시 읽는 게 그 때문이다. 원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영어 비슷한 문장이 나온다.”
- 열심히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당하지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 당하지 못한다고 저서에 썼더라. 번역일을 즐긴다는 말인데.
“그렇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번역 얘기를 해보자. 이거 수입은 얼마 안 된다. 라틴어 공부하려고 번역하고 있다. (번역 중인 원전을 보여주며) 라틴어와 영어로 같이 나와 있는 책이다. 책의 왼쪽은 라틴어, 오른쪽은 영어다. 진행에 엄청 시간이 걸린다. 영어로만 된 걸 번역하는 것과 비교가 안 된다. 사전 찾아야 하고. 라틴어 공부를 한다는 희망이 있기에 하는 것이다.”
- 라틴어 어렵다고 하던데.
“공부한 지 15년 됐다. 조금씩 조금씩 했다. 조금만 더 하면 될 듯한데, 하루에 30분씩 한다.”
- 외국어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지.
“어학에 소질이 있다.”(부인 김화진씨)
- 영어는 잘했나. “영어와 국어는 잘했다. 수학은 꽝이었다.”
이씨는 프랑스어를 공부해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고, 신약성경을 읽고 싶어 그리스어 공부를 했으며, 한문을 오래 공부해 ‘통감절요’ ‘소학’ ‘맹자’를 원서로 읽었다. 일본어를 4년간 공부해 미시마 유키오의 ‘시오사이’를 읽었다. 독일어도 공부했다.
- 그러면 여섯 개 언어인가.
“그랬지만, 다 잊었다(웃음). 특히 일본어는 영어와 동시에 잘하면 번역가가 손쉬운 번역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다. 번역을 하다가 조금이라도 힘들면 일본어 번역본을 찾게 된다. 그렇게 수렁에 빠지면 나중에 일본어 번역본만 보고 작업한다.”
이씨는 번역가는 ‘외로운 늑대’라고 표현했다. 번역가들은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당신 번역 엉터리”라는 말이 나오면서 번역가들 간에 싸움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고 했다.
이씨는 자신이 번역한 요한 하위징아의 고전 ‘중세의 가을’이 5, 6월 중에 나올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서양 고전도 30년 만에 번역을 다시 해야 한다. 시대의 호흡에 맞춰야 한다”고 했다. 한때 그의 희망은 헌책방 주인이었다. 그는 시간만 나면 서울의 헌책방을 찾아 영어 책을 사들였다. 그의 서재에는 영어로 된 프로이트 전집과 칼 마르크스 전집이 꽂혀 있다. 신촌의 ‘숨어 있는 책’, 낙성대의 ‘흙서점’은 그의 단골 헌책방이다. 그는 “65세까지 번역일을 계속하겠다”고 했다. 체력이 허락되면 그 이후에도 하고 싶은 게 그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