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사진은 “회심 준비론은 개혁 신학이 아니다.”고 주장한 예장 대신 000 목사 담벼락에서 가져온 사진이다.
첫째
“개혁 신학”이라고 적힌 도식은 ‘준비 은혜라는 과정이 있는 순간 단회 중생 시 확정 성화와 회심’론이라는 존 머레이 목사님 중생론을 이단시한 연중론(연속적인 중생론)의 도식이다.
000 목사가 “개혁 신학”이라며 정리한 도식을 보면, “중생”과 “회심(신앙+회개)” 사이에 “죄에 대한 깨달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조명”이라는 은혜가 있다. 물론, 이 은혜는 특별 은혜인 중생 뒤에 있음으로 일반(보편, 보통) 은혜가 아닌 특별 은혜다.
그런데 청교도 신학자들 ‘외소(보편 부르심): 준비 은혜→내소(특별 부르심): 중생-회심’론을 오해해 존 머레이 목사님 ‘외소(보편 부르심): 준비 은혜→내소(특별 부르심): 중생-회심’론을 이단시한 연중론은 영적 탄생을 육적 탄생으로 이해했던 니고데모, 거듭나지 못했던 니고데모 중생론인데, 거듭나지 못한 중생론으로서 연중론에서 말하는 준비 은혜, “죄에 대한 깨달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조명”이라는 준비 은혜 기간은 초기 중생(불완전 중생)한 태아가 ‘믿을까, 말까? 회개할까, 회개하지 말까?’ 하는 거짓 회심을 되풀이하며 회심(출산:완전 중생)을 위해 열 달 동안 분투하는 기간이다.
ㅡ불완전 중생으로서 초기 중생한 태아는 완전 중생이라는 출산을 위해 열 달 동안 분투한다. 이를 연속 중생이라고 한다. 그리고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수태되자마자 즉시 태어나는 태아도 있다. 즉, 0.0001초 동안 분투해 완전 중생에 이르는 태아도 있다. 이를 순간(즉시) 중생이라고 한다. 그래서 “중생은 믿음(회심)에 선행한다는 개혁 신학자들 주장은 잘못됐고, 믿음(회심)은 중생에 선행한다는 개혁 신학자들도 있다.”고 한 한국 교회 연중론 수장 예장 고신 손성은 목사는 “연중론은 순간 중생도 인정하지만, 순중론은 연중론을 인정하지 않기에 이단적이다.”고 주장했다.ㅡ
둘째
위 도식에서 “준비론”이라고 적힌 도식이 바로 ‘20세기 개혁 신학 보물로서 중생 시 확정 성화 진리’를 밝히신 존 머레이 목사님, 20세기 개혁 신학의 거목 존 머레이 목사님의 도식이다. 또한 칼빈 선생님의 도식이다.
위 도식에서 “준비론”에 적힌 “구원의 은혜”는 “개혁 신학”에 적힌 “중생”을 뜻한다. 그리고 “준비론”에 적힌 “죄에 대한 깨달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조명”에서 “조명”은 존 머레이 목사님 용어로 바꿔 말하자면, “믿음의 현관”에서 나오는 빛이다. 물론, 중생하지 못한 구도자는 “좁은 문”으로 말할 수 있는 “믿음의 현관” 밖에 있다.
강조하고 강조해야만 하는 다음 글은 ‘존 머레이 {조직신학 ②} 박문재 역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8)’ 126쪽~127쪽에서 또 옮기는 글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우리가 실제 회심의 시점에 이르게 될 때, 회심에 포함된 믿음과 회개는 복음 진리에 대한 지식과 동떨어져 발생하지 않는다. 그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과, 믿음의 재료가 되는 내용을 전달해 주는 복음의 진리 내용이, 믿고 회개해 그의 영혼이 구원에 이르는 사람의 마음에 전달되는 것임이 틀림없다. 최소한 어느 정도는 구원하는 믿음과 회개의 작용 이전에 율법과 복음이 지닌 의미에 대한 인지와 인식이 있음이 틀림없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러나 믿음과 회개 이전에 존재하는, 그러므로 믿음과 회개가 우리 양심에 일으키는 직접 결과인 중생 이전에 존재하는 복음의 진리에 관한 이러한 인식은 엄격히 성령의 구원하시는 활동에 속한다고 할 수 없다. 그것들은 성령의 구원 활동을 예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의도 속에서 사람을 믿음과 회개라는 지성적 작용의 선행 조건인 심리학적 상태에 놓아두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들은 그의 의식에 복음을 의미 있게 만드는 통각統覺의 내용을 마음속에 준비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믿음과 회개의 구원하시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구속 은혜와 다르다. 즉 비구속 은혜, 또는 보통 은혜 범주에 속해 있다.
보통 은혜의 활동에서 우리는 믿음의 현관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갖게 된다. 우리에게 성령께서 그의 은혜의 특별한 구원하시는 활동을 가지고 들어오는 이른바 “접촉점(Anknüpfungspunkt)”이 있다. 믿음은 진공 상태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통 은혜의 활동 속에서 논리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선행 조건과 전제 조건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 영역과 유기체적 역사 활동의 영역에서, 기독교 신앙의 진보 과정은 선행하는 준비들과 둘러쳐진 조건들과, 일반적인 하나님 섭리의 장에 속한 것만이 아니라, 자애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 하나님 경륜의 특별한 영역, 즉 그 자체가 명백히 구속적이지 않은 보통 은혜 영역에 속하는 준비들과 조건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다음 글 역시 강조하고 강조해야만 하는 글로서, ‘존 칼빈 [사돌레토에게 주는 답신]에서 또 옮기는 글이다. ‘{칼뱅 소품집 제1권} 박건택 편역 (경기: 크리스천르네상스, 2016)’ 547쪽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먼저 자신들을 살펴보도록 권고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단지 피상적이고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양심을 하나님 법정 앞에 세우기 위해서 하고, 자기 자신의 불의함이 엄격하게 확신될 때는 모든 죄인에게 선포된 심판의 엄격함을 생각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리해 그는 자신의 비참함에 놀라고 당황해 하나님 앞에 부복해 엎드려 겸손하게 되고 자신감을 모두 벗어 버리며 마지막 멸망에 던져진 자처럼 신음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구원의 모든 부분이 완성되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 가운데만 유일한 안식처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회심 준비론은 개혁(장로파) 신학이 아니고 청교도 회중파 신학이다.”고 주장한 예장 대신 두 목사가 “자신의 비참함에 놀라고 당황해 하나님 앞에 부복해 엎드려 겸손하게 되고 자신감을 모두 벗어 버리며 마지막 멸망에 던져진 자처럼 신음하게” 된 상태를 두고 “중생자 상태”로 주장할까 염려된다. 그러므로 칼빈 선생님 글을 또 옮긴다. 다음은 {기독교 강요 ②} [제7장] <11항: 율법이 초등교사 역할을 함> 마지막 문장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가운데서 이리저리 더듬거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율법의 굴레에 제재를 받고 하나님을 향해 모종의 두려움과 존경심을 갖고 있다가 성령으로 중생하면서부터 전심으로 그분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예장 대신 두 목사 독해력과 우리 독해력이 확증편향 중증 환자이자 난독증 환자인 예장 합동 정이철 목사 수준이 아니라면, “성령으로 중생하면서부터”의 뜻을 깨달아 “율법의 굴레에 제재를 받고 하나님을 향해 모종의 두려움과 존경심을 갖고 있”는 상태를 두고 “중생자 상태”로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 말고도 ‘존 칼빈 {갈라디아서 강해}’에 적힌 회심 준비론(준비 은혜론)도 옮기고 싶다. 그러나 글이 길어지니 그만둔다.
@四季 朴埰同 혹시나 해서 오랜만에 봤더니 역시나 군요
거짓모함이 아니었다고 계속 우기고 싶겠지요..
저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곧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 있는 사람이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곧 믿음만으로가 아니라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다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갈 3:26-27절 (새번역)
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의 주장을 남녀간의 관계로 "굳이" 표현하자면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식을 통하여 연합하는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四季 朴埰同
그리고 저는 롬 10:9-10절을, 세례의 경우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롬 10: 9-10절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고백)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고백)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四季 朴埰同
그런데 이런 저의 주장을 사계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비판하였습니다.
“결혼식은 서로의 사랑을 이 세상에 선포하는 행위 의식입니다. 타 카페에서 이지끼을 님 ‘세례 중생론’을 두고 저는 ‘남녀의 사랑과 결혼’이라는 비유를 들어 이지끼을 님 ‘세례 중생론’을 반박했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한다면서도 결혼은 죽어도 못 하겠다는 연인이 있다고 칩시다. 그들 사랑을 “참된 사랑”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이중에서 특히
“그런데 서로 사랑한다면서도 결혼은 죽어도 못 하겠다는 연인이 있다고 칩시다.
그들 사랑을 “참된 사랑”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라고 사계님이 말한 부분은
마치 저의 주장을 반대로 뒤집어 공격한 것입니다.
@四季 朴埰同
저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의 주장은,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참된 사랑을 하는 남녀가 결혼하여 연합하는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고 이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계님은 저의 주장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비유로 저를 공격한 것입니다.
마치 제가 그 반대의 주장을 하는 것처럼,
그래서 마치 저의 주장이 상식이하의 주장인 것 처럼 보이게 공격한 것입니다.
거짓모함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치사한 토론 방법입니다.
@四季 朴埰同
그래서 당시 제가 거짓모함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사계님은 오히려 제게 “피해의식” 갖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거론했더니
제가 오독했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거짓모함을 하고, 항의하면 피해의식 갖지 말라고 뻔뻔하게 우기고
이제는 제가 오독한 것이라고 계속 거짓으로 거짓을 덮으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