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잎새’ 남기고 떠난 배호>
'돌아가는 삼각지'는 '영원한 가객' 배호의 최고 히트곡 중 하나이다.
이 노래가 배호에게 오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돌아가는 삼각지’는 배호가 부르기 4년 전인 1963년에 이미 만들어졌다. 그러나 작곡가 배상태는 노래 부를 가수를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
돌고돌아 결국 '배호'에게로
당시 인기가수였던 남일해는 연습만 하다 포기하고, 금호동에게 넘어갔는데 그는 이 노래가 “곡이 촌스럽다”며 두 손을 저었다.
이어 한참 떠오르는 신인가수 남진에게도 타진했지만 “창법이 맞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결국 무명가수 김호성이 처음 녹음을 하기는 했지만 음반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노래는 ‘돌아가는 삼각지’ 제목처럼 돌고 돌아 다시 주인을 찾아갔다. 주인공은 배호였다.
군에서 막 제대한 신예 작곡가 배상태는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서울 청량리 성 바오로병원 뒤 배호의 허름한 단칸방을 찾아갔다.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아 어머니와 누이의 간호를 받으며 병석에 누워 있던 배호도 처음에는 이 노래의 녹음을 사양했다.
하지만 쓸쓸한 분위기의 노래가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 같아 배상태가 내놓은 악보를 두고 가라며 녹음을 승낙했다.
신장염 투병, 투혼 발휘한 녹음
이튿날 배상태는 배호의 단칸방을 다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연습을 시작했지만 병든 배호의 호흡이 너무 짧아 연습이 쉽지 않았다.
녹음 전날 밤 배호는 모든 악보를 외웠다. 배상태는 배호를 부축해 장충동 아세아레코드사 녹음실로 향했다.
신장염 투병으로 숨이 찬 배호는 ‘삼각지 로~’에서 멈췄다가 ‘~터리’로 이어가는데, 녹음기사가 노래가 끝난 줄 알고 스위치를 끄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 창법이 배호가 멋 내느라고 일부러 그렇게 부른 것으로 알았다.
가래를 뱉어가며 투혼을 발휘한 녹음은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폭넓은 음역과 드럼 주자였기에 가능했던 정확한 리듬 타기 장점이 있는 배호는 단 한번의 NG도 없이 녹음을 마쳤다.
전국 휩쓴 '배호 돌풍'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녹음을 마친 ‘돌아가는 삼각지’는 지병과 가난에 신음하던 24세 한 무명가수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첫 음반 발매 후 4개월 정도 별다른 반응이 없어 배호와 배상태는 실망한다. 당시 가요계는 ‘떠오르는 혜성’ 남진의 노래가 큰 히트를 치고 있는 중이어서, 처음엔 남진의 위세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배호의 선 굵은 저음과 담백하면서도 애절한 호소력이 먹히기 시작한다.
삼각지 로터리에 궂은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그 사랑을 아쉬워하며
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삼각지
‘배호 돌풍’은 대구, 부산, 광주 등 지방 대도시를 시작으로 삽시간에 경부선과 호남선을 타고 서울로 상경한 뒤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대히트곡이 되었다.
한국 가요사에서 ‘돌아가는 삼각지’의 히트는 당시 기준으로 1964년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1966년 최희준의 ‘하숙생’에 이은 3번째 ‘대박 음반’으로 평가된다.
마지막 공연의 마지막 곡 ‘마지막 잎새’
배호는 ‘돌아가는 삼각지’ 대박 이후 ‘안개 낀 장충단공원’ ‘누가 울어’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인기가수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1966년부터 앓아온 신장염으로 꾸준히 고통을 받고 있었고 건강이 채 회복될 틈도 없는 바쁜 스케줄로 몸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그 순간까지도 배호는 무대에 서서 마이크를 잡으면 실수 한 번 없이 노래를 불렀다. 배호의 마지막 공연 피날레 곡은 마치 운명의 장난이듯 ‘마지막 잎새’였다
그 시절 푸르던 잎 어느덧 낙엽 지고
달빛만 싸늘히 허전한 가지
바람도 살며시 비켜가건만
그 얼마나 참았던 사무친 상처길래
흐느끼며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
배호는 이종환이 진행하는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 출연 후 귀가 중 비를 맞게 된다. 여기서 감기몸살을 얻어 쓰러지면서 인사동의 ‘최규식 내과’에 입원한다.
그러나 망가질 대로 망가진 신장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최규식 원장은 배호의 회복이 어렵다고 판단해 큰병원으로 옮기라고 가족들에게 말한다. 배호는 최규식이 소개해준 대로 세브란스 의사 곽진영에게 연락한 후 10월 29일 밤 9시 이 병원 538호실에 긴급 입원한다.
약혼녀와도 안타까운 이별
당시 그에게는 약혼녀가 있었다. 대구 출신 대학생 김 씨였다. 그녀는 세브란스병원까지 그림자처럼 배호를 따라다니며 그의 건강 회복을 기원했다.
그러나 혼수상태에서 가끔 깨어난 배호는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을 예감한 듯 약혼녀 김 씨에게 마지막 말을 남긴다.
“나는 안될 것 같아요. 당신이 홀로 남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아요. 그러니 가슴 아프지만 내 곁을 떠나 좋은 배필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주오.”
배호는 힘겨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이별 인사를 한 후 손목에서 스위스제 고급시계인 ‘파텍스’를 풀어서 그녀의 손목에 채워주었다.
그녀의 눈물이 손목에 찬 시계 위로 떨어졌다. 배호의 눈시울도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배호는 의식이 잠깐잠깐 돌아왔을 때 그의 병상을 지켜온 작곡가 배상태를 통하여 ‘팬들에 남기고픈 마지막 말’을 메모해줄 것을 간청했다.
그는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서도 가족처럼 친했던 작곡가 배상태를 “상태형! 상태형!” 하며 찾았다.
나이 29세, 세상과 이별하다
불굴의 투병에도 불구하고 배호는 더 이상 가망이 없자 구급차에 실린 채 미아리 집으로 가기 위해 병원을 떠난다.
배호는 이동침대에 누웠다. 그 주위로 어머니 김금순, 여동생 배명신, 외삼촌 김광빈, 작곡가 배상태가 앉았다.
저녁 9시. 배호가 어머니 쪽으로 몸을 돌리며 손을 잡는다. 배호는 이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세상과 이별했다.
‘봄꽃 같은’ 나이 29세 때였다.
첫댓글 넘슬퍼요
그래서 노래가 더 가슴에 심금을 울리죠
나도 슬픈때 노래불르면 심금올릴까?
그럼요ㆍ소년에 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