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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들의 비밀생활> 지나 프린스 바이더우드 감독, 드라마, 미국, 109분, 2008년
2009년에 보고 2013년 다시 보았다.
여성소설가가 쓴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여성감독이 만든 영화 <벌들의 비밀생활>에 나오는 흑인마리아를 모시는 마리아자매 공동체는 분명 가공의 세계다. 하지만 필요한 가공의 세계다. 차별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약자들이 피난해야 할 곳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곳에서 사랑과 희망을 가지고 회복하여 다시 일어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 상징의 공간이 좋다.
여성의 감수성이 영화에 가득 담겨 있는 것도 특징이다. 한편으로는 훌륭한 성장영화이기도 하지만 페미니즘영화이자 인권영화이기도 한 셈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열쇠는 여성성에 있다.
아직 흑인민권운동이 한창인 1964년 미국 남부는 여전히 인종차별이 노골적으로 존재한다. 4살 때 영문도 모른채 엄마를 죽인 죄책감에 시달리는 딸은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을 친다. 마침 상점에서 본 흑인성모마리아 꿀병을 보고 그 꿀을 생산하는 흑인자매들의 집에 찾아가 신세를 지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집은 이상한 흑인성모 목상을 모시는 종교공동체이다. '마리아의 자매'들인데, 일요일마다 흑인 여성들이 모여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고 사랑과 기쁨으로 나누며 살아간다. 아이는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자신을 치유해 가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꿀벌과 마리아의 자매의 상징은 의미심장하다. 꿀벌은 암컷이다. 여왕벌을 중심으로 한 언니들이다. 영화에서는 흑인성모상을 보시는 자매들이 꿀벌가족의 중심을 이루며 산다. 그 언니들의 벌집 안에서는 밖에서는 전혀 모르는 그들만의 비밀생활을 하고 있다. 그것은 화기애애하고 사랑 가득한 생활로서 물론 비밀이 아니다. 다만 그 시대의 백인남성중심사회의 폭력적인 분위기와 비껴있다는 점에서 예외적일 뿐이다. 비밀이 아닌 오히려 참되고 자유롭고 평등한 생활이지만, 소통방식이 다른 밖에서는 그것이 흑인 마리아 만큼이나 낯선 것이다. 그래서 외부에는 컬트종교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다. 벌은 약자 중의 약자인 흑인여성을 대변하기 위해 흑인 마리아와 함께 등장한다. 그러고보니 나는 2000년 전 중근동에서 모셨던 풍요의 여신상이 떠오른다. 풍요의 여신은 온통 꿀벌들로 몸이 장식되어 있었다. 영화 안에서는 공감의 화신이랄 정도의 특별하고 섬세한 마음을 가진 세번째 자매 메이라는 흑인 여자가 나온다. 그녀는 남의 고통을 그대로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체험해 세상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결국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 죽음을 길을 가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메이는 여자흑인예수인 셈이다. 이 정도로까지 상징을 해석하지 않아도 영화의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된다. 하지만 고통은 이 영화에서 또한 소중한 주제이다. 메이와 첫번째 자매 어거스트를 통해 발산되는 공감과 사랑, 그리고 이해의 코드야 말로 마리아 자매의 핵심이다. 흑인마리아, 꿀벌, 자매들.... 사랑의 공동체.
나는 여성의 주술이라는 방식을 생각해 본다. 남자들이 논리적이라면 여성은 훨 감성적이고 즉물적이다. 그리고 논리가 객관적이라면 감성은 훨 주관적이다. 논리의 법칙과는 다른 감성의 법칙이 있다. 마음이 쏠리고 의미가 부여되는 방식은 물론 후자의 길이다. 그들은 필연의 필연을 갑갑해하며, 우연의 필연을 선호한다. 물론 나는 논리적이기보다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방식에 더 호감을 갖는 사람이다. 삶을 풍요롭고 살맛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아무래도 후자인 편이기 때문이다. 퀼트나 조각보 같은 여성문화는 공동체문화의 상징으로써 얼마나 아름다운 예술인가. 영화 속 마리아 자매들의 집의 핑크색은 사랑과 풍요를 나타내는 여성의 색깔이지만, 한편 게이 등의 소수자의 상징색이기도 하다는 점도 음미하면 좋을 것 같다.
한편 두번때로 영화를 볼 때는 언어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의 말을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가진다는 것은, 마치 거미가 자신의 거미줄을 짜고 거기서 자신의 세상을 가꾸며 사는 것과 같다. 누구나 자신의 말과 이야기를 가질 권리가 있고 또 그래야 한다. 흑인이 그러하고, 여자가 그러하고, 아이들도 그러하다. 이런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사람들은 자기 목소리를 연습하여 발성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될까? 벌들의 비밀생활은 바로 그런 예에 해당할 것이다. 남의 말을 듣고 말의 말을 따라하는 삶이 아니라, 자기의 말과 어법을 가지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성장영화로의 특징과 관련해서는 시행착오의 기회와 용서, 혹은 너그러움이다. 자연에서는 시행착오를 할 것이 많지 않다. 소유와 경계를 묻는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잡한 사회, 특히 현대 도시는 아이들에게 좀처럼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시행착오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소심해지는 것은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시행착오를 통해 자신을 알게 되가는데 시행착오가 허용되지 않으니 자신을 알 턱이 없다. 영화 속의 아이는 자신의 실수 때문에 엄마가 죽고, 친구가 구타를 당하고 메이가 자살을 하게 되었다고 고통을 받는다. 맏언니 어거스트와 마리아의 자매들은 아무도 아이를 탓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아이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비로소 어른이 된다. 참된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기회도 되는 것 같다.
= 시놉시스 =
외로운 소녀에게 생애 최고의 선물이 찾아왔다! 릴리 오웬스(다코타 패닝)는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 레이(폴 베타니) 밑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열네 살 소녀. 엄마는 릴리가 네 살 때 죽었는데, 엄마의 죽음에 감춰진 진실로 인해 그녀는 끔찍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 어느날, 릴리는 자신을 엄마처럼 돌봐주는 흑인 가정부 로잘린(제니퍼 허드슨)과 함께 시내에 나갔다가 극렬한 인종차별주의자들과 부딪힌다. 이 사건으로 로잘린이 위험해지자 릴리는 그녀와 함께 새로운 삶을 찾아 도망치기로 결심하고, 한때 엄마가 살았던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작은 마을로 향한다. 릴리는 그곳에서 양봉업을 하는 보트라이트 자매들의 집에 기거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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