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같은 청황색 말이나 머리가 여럿인 짐승이나 천년이라는 기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권면한다. 이것들은 모두 상징이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가리키는 실체들의 현실성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이 체험하거나 소망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실재들을 다룰 수 있는 상상력에 호소한다.(67)
세대주의는 19세기에 시작한 신학운동, 역사를 여러 세대 혹은 여러 시대로 나누고 각 세대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다루신다고 주장한다. 종말론에 휴거교리를 포함시킨다.(70)
요한계시록은 성경 전통에서 말하는 예언을 담은 말씀이다. 때문에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주된 목적이 그때와 지금의 하나님 백성에게 위로와 도전이 담긴 말씀을 주는 것이지, 미래 일을 예언한다든지 심지어 그런 일을 아주 세세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님을 이해하며 명심할 필요가 있다. 즉 미래를 보여주는 환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단지 수단일 뿐이다.(72)
성경의 모든 예언처럼 요한계시록도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권면한다.(74)
요한계시록은 예배 문학이다.(75)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십중팔구 요한복음의 저자와 동일인이 아니다.(79)
요한계시록에서 예배는 아주 중요하다. 이는 요한이 예배가 정치적 행위임을 올바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 자신이 그 예배 대상에 충성을 바치고 헌신한다고 선언한다. 공예배는 교회가 다른 신들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온 세상에 선언하는 것이다. (90)
요한계시록의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제국의 권력에 맞서 대안적인 권력의 그림을 제시함으로써 제국의 권력에 도전장을 던지는 것이다. 이 대안적인 권력은 신자들에게 위로와 확신과 소망을 주고, 특히 예수가 보여주신 패러다임을 따라 제국의 권력에 맞설 용기를 준다. (126)
우리가 받아들이곤 하는 우상들은 무엇인가? 1세기 만신전에는 아프로디테, 아스클레피오스, 디오니소스, 마르스와 카아사르를 비롯하여 다른 많은 신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에겐 이 신들에 상응하는 다른 이름들이 있다. 성, 건강, 건강하고 단단한 몸, 쾌락, 전쟁, 힘, 안녕을 비롯한 것들이 그런 이름들이다. 고대 사람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을 표현하는 신전과 신상과 명문을 갖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각종 전달 매체들이 전해주는 우리의 우상들을 발견한다. 잡지와 책, 우리가 즐기는 영화와 음악, TV와 온라인이 이런 우상들을 전한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우상들은 우리가 그들을 위하여 살고 죽고 죽여도 될 만큼 소중한 이들로 떠받들어질 수도 있다. 사람들이 이 우상들을 최고선을 구성하는 요소로, 문화의 최고선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로 이해하면, 이 우상들은 결국 그것을 위하여 죽이고 죽는 것도 정당하게 만들어버리는 고상한 명분이 되어버린다. (127)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일곱 교회에게, 시민 종교를 숭배하고 싶어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써 보낸다.(128)
요한계시록의 의도는 시련과 시험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어, 이들이 하나님가 맺은 언약에 끝까지 신실함을 지키면서 헌신하게 하는 것이다.(160)
그리스도가 희생 제물로 죽으심이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에 속함을 의미한다. 어린 양이라는 상징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상징이지만, 또한 '보좌에 앉아 계신 이'를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 하나님의 정체성과 주권을 공유하신다는 역설의 의미를 놓치지 않고 간파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218)
세상이 심판을 받게 된 연유는 세상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 신실함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스스로 자기가 섬길 여러 신을 만들어내면, 신이 아닌 것을 신으로 섬기는 데 따라올 수밖에 없는 결과들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그런 의미에서 심판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으로부터 나온다.(266)
오늘 서구 세계에서 우리 개인, 우리 가정, 우리 교회를 형성하는 것은 복음의 본질에 어긋나는 소비만능주의, 하나님과 인간을 거스르는 가치들이다. 우리가 따르는 소비 방식은 가진 것이 가장 적은 자들, 가장 뒤처진 자들, 잃어버린 자들을 이롭헤 하는가? 우리가 따르는 소비 방식은 정의를 드높이고 나라들을 치료하는가? 우리가 따르는 소비 방식은 하나님과 어린 양이 다스리신다는 우리의 믿음을 그대로 드러내는가? 아니면 우리가 따르는 소비 방식은 바벨론의 가치와 관행을,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의 가치와 관행을 드러내는가?(283)
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지진이나 쓰나미나 전염병을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심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책임한 신학 논리다. 그것은 적어도 두 가지 근본적인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상징이요 묵시인 언어를 다시금 문자 그대로 잘못 해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 이유가 더 중요한데, 특정한 재해를 하나님이 일부러 쏟아내신 진노요 심판으로 해석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속속들이 안다는 주장과 다를 게 없으며, 이는 우상 숭배까지는 아닐지언정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행위여서 믿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어느 인간에게도 당신만이 가진 권한이신 심판을 어떻게 행하실지, 당신 마음 속을 일러주시지 않았다.(287)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만물을 창조하여 존재하게 하신 전능자이시므로, 악을 그치게 하는데 굳이 폭력을 동원하실 필요가 없다.(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