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파 무협소설에 이어 1950년대 말에서 1960년에 걸쳐 홍콩과 대만을 중심으로 새로운 경향의 무협소설이 등장하게 됩니다. 신파 무협소설에서는 의나 협의 요소가 약간 희박해지고 새로운 무술을 창출하거나 농후한 남녀간의 애정이 가미되었습니다.
이러한 현대의 무협소설들은 1962년 홍콩의 작가 양우생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양우생은 역사상 실재했던 인물이나 사건을 무협소설에 집어넣고 폭넓은 시대 설정이나 명쾌한 역사관으로 뒷받침된 작품을 많이 썼습니다. 특히 고전시가나 풍부한 역사적 지식을 구사한 격조 높은 문체로 일가견이 있지요. 즉 중국의 전통문학을 바탕으로 역사무협소설을 쓴 것입니다.
양우생
국내 번역판 "명황성"(1989)
무와 협의 관계에서 협이 먼저이고 무는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하다는 자신의 지적대로 양우생의 작품은 애국주의 색깔이 짙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의 협사들은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보다는 평화와 정의를 추구하는 자유의 투사로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대표적인 작품 "광협천기마녀"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배경은 남송과 금 그리고 징기스칸의 몽고가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격변기입니다. 송의 협사 유청요와 화곡함, 금의 단우층 이 세 인물이 펼치는 사랑과 갈등, 국가에 대한 충성심, 그러고 전란으로 무고하게 죽어 가는 민중들에 대한 애틋한 연민의 정을 절절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김용
반면 김용은 1955년 "서검구은록"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1972년 "녹정기"를 끝으로 절필하기까지 17년 동안 15부의 전 작품에서 무협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온갖 가능성을 단계적으로 시도해 왔습니다.
초기 작품인 "사조영웅전"에서 송, 원, 요, 금의 여러 국가가 중원의 패권을 놓고 치열한 각축을 벌이는 남송 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징키스칸, 완안열, 전진칠자, 구처기와 같은 역사적 실존인물을 등장시켜 작품의 사실감을 부여하면서 주인공 곽정이 천하제일의 무공을 성취하여 원수를 무찌르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소오강호"
"녹정기"
"천룡팔부"
"협객행"
그러나 1969년에 발표한 "소오강호"에 이르러서는 강호를 비웃는다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무협소설에서 전통적으로 설정하는 선악의 기준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김용의 무협소설로서는 보기 드물게 역사적인 배경이 전혀 없는 완전한 강호를 다루면서 정과 사에 대한 여러 가지 답을 제시합니다.
영화 "신소오강호"(1996)
여기서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강호의 은원 관계나 권력의 부패에 염증을 느껴 그 구속에서 벗어나기를 꿈꾸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영호충은 지도자나 리더의 자질도 없으며 무공도 뛰어나지 못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에 경도되어 사랑하는 여인과 술을 마시며 사는 생활을 꿈꿀 뿐입니다. 즉 강호의 관습을 깨는 반무협을 주제로 삼은 것이지요.
영화"녹정기"2(1993)
이러한 반무협의 경향은 1972년에 발표한 "녹정기"에서 완성합니다. "녹정기"는 청나라 강희제 때 주인공 위소보가 엮어내는 해학과 기지 넘치는 이야기이지요. 기생집 아들인 위소보는 당찬 성격과 교활한 이기주의, 넘치는 기지로 황제의 신임을 받습니다. 동시에 반청복명의 비밀결사인 천지회와의 사이에서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연출하여 독자로 하여금 긴장과 스릴을 맛보게 해줍니다.
이 작품은 무협소설이라기보다 차라리 역사소설로서 반영웅, 반전통, 반속박을 추구합니다. 주인공이 할 수 있는 무술이라야 겨우 도망치는데 쓸모 있는 보법 정도이니 초인이어야 할 무협소설의 주인공을 부정한 무협소설이지요.
김용의 무협소설은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재미만을 추구하지 않고 무협소설에 문학성을 가미시켰다는 점에서 큰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웅장한 스케일과 복잡다단한 플롯, 인생에 대한 진지한 사색은 무협소설을 본격문학에 접근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초기 작품에서 구축한 무협소설의 규범을 스스로 뒤집어 덧없는 강호세계의 만가, 반영웅, 반무협을 선보였다는 것은 "20세기 인류문명이 지닌 비관주의와 회의정신에 대한 의미 있는 반영”이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협의 세계를 중시하는 홍콩의 무협소설과는 달리, 대만의 와룡생과 고룡 같은 작가는 무예의 성취를 통한 인간 개인의 내면적인 세계를 더욱 파고드는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최초로 소개되어 항구적인 무협소설 독자층을 일구어낸 공적이 큰 와룡생은 대만 작가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역사와 무관한 비현실적인 환상을 그리는 데 뛰어납니다. 특히 비극적인 남녀간의 정을 묘사하여 이른바 기정무협을 완성했습니다.
"옥차맹"의 국내 번역판"군협지"(1966)
"군협지" 삽화
와룡생 작품의 주인공은 상대방에게 당하면서도 원한을 품지 않는 매우 소극적인 도덕군자로 나오는 것이 보통입니다. 언제나 현실을 도피하며 무공과 기연에 힘입어 사건을 해결하지요. 다만 무협소설에서 와룡생이 이룩한 공적은 무림의 구대문파를 설정하고 이들 구대문파가 무림맹주의 자리를 두고 패권을 다툰다는 하나의 전형을 만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강호에서의 패권다툼이라는 무협소설의 큰 주제를 완성시킨 것이지요. 예를 들어 "옥차맹"과 같은 작품에서 주인공 서원평은 무공비급을 훔치기 위해 소림사를 숨어들어갑니다. 그곳에서 고수 혜공대사를 만나 소림사 무공의 정수인 "달마역근경"을 전수받습니다.
최후에는 남해신수가 중원을 제패하기 위해 설치한 고독지묘 안에서 무공비급을 차지하려고 몰려든 중원의 무림고수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가운데 서원평은 남해신수의 장풍을 맞아 죽는다는 비극적인 결말을 맺게 됩니다.
"초류향" 국내판(1992)
"유성호접검" 국내판(1992)
40세에 요절한 작가 고룡은 미스터리 무협소설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습니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경험이 있는 고룡은 서구문학의 기법을 무협소설에 끌어들여 과장이 없고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사건을 전개합니다.
짧고 직설적인 문장으로 영화의 몽타주 수법을 사용하여 시공을 확대하거나 발빠른 장면 전환을 구사하지요. 또한 역사적 배경이 모호하여 어느 시대의 이야기인지 분명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완전한 픽션을 독자로 하여금 자유롭게 이야기 세계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지요.
고룡의 작품은 개성 있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옴니버스식 이야기 연결이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초류향전기"에 나오는 초류향은 도적으로 언제나 현장에 향수냄새를 남기고 가는 것이 주특기입니다.
여기서는 대개 사건이 일어나고 주인공은 범인을 색출하고 악인을 제거한다는 단순한 구성으로 되어 있지만, 인간 관계를 복잡하게 설정하여 그로 인해 빚어지는 심리묘사나 시종일관 불꽃 튀기는 두뇌 싸움 그러면서 비인간적인 현실에 고뇌하는 주인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청부살인업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유성호접검"과 같은 작품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으로 가득한 무협 미스터리로서 수수께끼가 끊임없이 수수께끼를 불러들여 최후에는 놀라운 결말을 맞이하는 이른바 서구의 탐정소설을 그대로 무협소설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