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역에서 고흐를 만나다.
서 영 복
“내 얼굴이 서러워 보이나요?”
지난주 말 서울의 지하철역 플랫폼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잠깐 의자에 앉아있는데 한 젊은 남자가 불쑥 다가와서 내게 물었다.
그이는 30대 후반쯤 되는 옷차림이 말쑥하고도 교양 있어 보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술에 취한 것 같지도 않고 정신상태도 말짱하게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내게 다가와 건네는 말에 나는 좀 당황하였다. 그러나 얼른 미소를 지어 보이며 오히려 그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물어볼 생각이 들었지요?”
그러자 그는 손가락빗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조금 전 화장실에서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의 얼굴이 너무 서러워 보여서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궁금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 그의 얼굴이 반 고흐를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표정이 고흐의 어두웠던 생애를 떠오르게 만들어 마치 고흐를 마주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어떤 일 때문에 몹시 슬퍼하다가 바람을 쐬러 잠깐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게다가 내가 조금만 자극하면 금방이라도 엉엉 울어버릴 것 같은 속눈썹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번 웃어 보세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좀 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어 놓으려는 눈치를 보였지만 요란한 소음과 함께 매캐한 바람을 일으키면서 전철이 다가오자 어색하게 씨익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오래전에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화가들이 모여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근대 미술가들이 모여 살았던 지역으로 더욱 유명한 그곳에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해바라기 그림과 그것을 그린 ‘빈 센트 반 고흐’를 꼭 찾아보고 싶었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세계 여러 곳에서 모여든 무명 화가들이 커다란 원 모양으로 바깥쪽을 보고 둘러앉아 그림을 그려 팔고 있었다. 전시해놓은 작품과 즉석에서 손질을 끝낸 그림들을 관광객들이 흥정하여 에누리도 하고 어떤 이는 요구하는 액수보다 더 많은 금액을 주고 사기도 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로디’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화가에게서 에펠탑과 센 강변의 다리가 보이는 풍경으로 겨우 2호짜리 유화 그림을 기꺼이 80달러라는 거금에 샀다. 이 그림은 볼 때마다 고흐를 생각나게 하였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37세의 젊은 나이에 권총 자살로 아까운 젊음을 마감하도록 하였을까?
고흐는 네덜란드 시골 마을에서 가난한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났었다.
그는 어머니의 재능을 닮아 그림에 뛰어난 소질이 있었지만 빈곤한 그의 부모는 생활비와 학비를 대어주지 못하였다.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도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였고 과음과 퇴폐적인 생활을 하며 창녀 러셀과 가까이 지냈다.
서른다섯 살 무렵의 어느 날, 고흐는 신문지에 싸인 무엇을 들고 가서 잘 맡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뛰쳐나온다. 그녀가 그것을 펴 보았더니 고흐의 잘린 귀였다. 그때부터 고흐는 때때로 심한 발작 증세를 일으켰고 생활비는 그의 동생 테오에게서 받아쓰게 되었다. 그는 물감 튜브를 빨아먹다가 발작이 진정되면 그림을 그리곤 하였다.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자주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자신을 혼란시키고 있다며 자기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비평가들이 하는 것에 대하여 민감하게 고통스러워하였다. 프랑스의 파리, 그 몽마르트르에서 동생과 함께 작은 아파트를 얻어 생활하게 되지만 결국 그의 생애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인생의 고통이란 살아있는 그 자체다”
라는 말을 남기고 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권총을 가슴에 발사하였다니…….
고흐가 이 땅을 떠난 지 백 년이 훨씬 지났다. 하지만 아직도 이 땅의 곳곳에는 고흐 들이 많다. 이들은 모두 무엇인가에 굶주려 오돌오돌 떨면서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 피폐해진 자신의 얼굴만 바라보며 어느 사람에게도 손을 내밀지 않는다.
어지럽고 황량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정신적 비틀거림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장애를 가지고도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이나, 병마와 싸우며 하루하루를 병 치료에 매달리면서 건강한 삶을 꿈꾸는 병원의 환자들도 많이 있다. 그뿐인가 경제적 빈곤으로 일터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가족을 위해 성실히 살아가며 내일의 행복한 꿈을 꾸는 이들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이 시대의 고흐들이여! 오늘처럼 맑은 가을날엔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드높은 하늘을 보면서 심호흡도 하고 허허 웃음도 날려보자.
고흐를 태우고 떠난 전철의 꼬리조차 서러워 보였다. 그에게 이 가을바람이 얼마나 향기롭고 아름다운지 알려주지 못한 게 아쉽다. 때로는 삶이 서럽기도 하겠지만, 아니 서럽고 고달파서 그냥 끝을 내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아직은 살아갈 만한 충분한 가치와 정당한 이유가 얼마든지 있음을 말해주고 싶다. 한 쪽문이 닫히면 반드시 다른 쪽문은 열린다는 사실도 함께…… (2024.11)
첫댓글 서영복 수필가닌 올려주신 작품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