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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 사제로서 ‘교황무류성’⑴과 ‘사제독신제’를 비판하며 교황청과 대립하고 교황청으로부터 교수직을 박탈당한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 신학자 한스 큉(Hans Küng)이 9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한스 큉은 신앙교리성 장관이자 후일 교황이 되는 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 추기경과 끊임없이 신학적 대화를 주고받은 인물이다.
세계윤리재단(Global Ethic Foundation)에 따르면, 지난 6일 한스 큉은 독일 튀빙겐의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세계윤리재단은 한스 큉이 오늘날 다원적 사회에서 종교·종파를 뛰어넘어 연대와 평화를 실천하기 위해 주창했던 ‘세계윤리구상’에 따라 설립된 재단이다.
전통적 신학의 경직성에서 벗어나 다원화된 사회와의 조화 강조했던 인물
한스 큉은, 가톨릭교회의 정체성을 다른 종교나 문화와 배타적인 방식으로 이해해온 전통적인 신학의 경직성에서 탈피하여 다원화된 오늘날 사회와의 조화를 추구했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교회일치를 위해 노력했던 한스 큉의 행적은 개신교와 가톨릭교회를 아우르는 그리스도교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먼저 한스 큉은 교황청립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철학·신학 학위를 취득하고 1954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후 1957년 프랑스 파리 가톨릭대에서 ‘의화론 : 칼 바르트의 교리와 가톨릭적 성찰’(프랑스어 : La justification. La doctrine de Karl Barth et une réflexion catholique)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0년 한스 큉은 불과 32세의 나이로 독일 튀빙겐대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이후 1964년에는 튀빙겐대 부설 교회일치신학연구소장을 맡게 되었다.
당시 한스 큉은 자신과 함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신학자문위원(peritus)으로 활동했던 요제프 라칭거 신부(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교의신학 강의를 맡기면서 연을 맺기도 했다. 당시 라칭거 신부의 강의는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분도출판사)이라는 그리스도교 전반을 아우르는 유명 저작으로 남아있다.
한스 큉은 1971년 모든 인공적 피임을 금지하는 등 현대사회에서 통용되기 어려운 가족계획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보수적인 입장을 재차 천명한 바오로 6세의 회칙 「인간 생명」이 발표된 이후, 교황무류성 교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저술을 발표하면서 교황청 성직자들의 눈총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스 큉의 가톨릭 교수직을 박탈하기까지 하면서 한스 큉과의 대립을 드러냈다.
이에 튀빙겐대는 한스 큉의 학문적 역량을 인정하여 교회일치신학연구소장 직위를 유지시켜 그가 은퇴하는 1996년까지 교수직을 지속할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이를 방증하듯 한스 큉 작고 소식에 튀빙겐대 학장 베른트 엥글러(Bernd Engler)는 “한스 큉의 작고로 튀빙겐대는 활발한 연구자, 매우 창의적인 식자, 훌륭한 신학자를 잃었다”고 추모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임기 내내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은 30년 가까이 가톨릭교회의 ‘교리 수호자’로 알려진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재직했다. 한스 큉과 라칭거 추기경은 가톨릭교회 교리에 관한 논쟁에서는 양극단을 달렸지만, 계속해서 개인적인 인연을 이어왔고 라칭거 추기경이 베네딕토 16세가 된 이후인 2005년에는 교황청에서 만남을 가지면서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반항아 신학자’, ‘현대신학계의 문제아’, ‘판을 뒤엎는 현대주의적 가톨릭 신학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유력 신학자’ 칭호 얻어
한스 큉의 입장 가운데서도 단연 주목을 받은 것은 그가 가톨릭교회 사제 출신으로서, 그리고 신학자로서 사제독신제를 반대하고, 여성 서품, 임신중절 및 해방신학 등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신앙 공동체로서의 가톨릭교회는, 오로지 로마식 통치체제를 내버릴 때만이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1천 년간 이러한 절대왕정 체제 없이도 잘 살아왔다. 이런 문제들이 생겨난 것은 11세기로, 당시 교황들은 평신도에게서 모든 권한을 앗아간 일종의 성직자중심주의를 적용함으로서 자신들에게 절대적인 교회 통제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사제독신제 역시 이 시대에서 비롯되었다.” (2011년 독일 일간지 < Spiegel >지와의 인터뷰 중)
“요한 바오로 2세가 인권, 자유, 민주주의와 더불어 특히 이라크 전쟁에 관해 발언하고 종교간 대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방식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가톨릭교회 내의 자유를 억압하고, 개혁적인 신학자들과 주교들에 대한 심문을 지지하고 출산계획과 낙태에 관해 불관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2003년 10월 18일 < AP >와의 인터뷰 중)
이처럼 그를 수식하는 표현은 ‘문제아’로 요약된다. 가톨릭교회의 기성 문화와 제도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제도교회의 압력에도 활발한 저술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표출했다.
이를 보여주듯 해외 종교계 언론과 여러 외신들은 그를 '반항아 신학자'(이탈리아 일간지 < Corriere della Sera >), ‘현대신학계의 문제아’(프랑스 일간지 < La Croix >), ‘판을 뒤엎는 현대주의적 가톨릭 신학자’(프랑스 일간지 < Le Monde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유력 신학자’(미국 예수회 매체 < America Magazine >)라고 표현했다. 진보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미국 가톨릭 매체 < National Catholic Reporter >는 한스 큉의 행적을 되짚는 긴 회고 기사를 싣기도 했다.
한스 큉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방적인 태도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특히 2014년 한스 큉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스 큉의 저작들을 “아주 꼼꼼히” 읽었다는 내용이 포함된 여러 서신을 주고 받았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당시 한스 큉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학적 개방성”을 높이 사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교리성이 ‘가톨릭 신학자’가 아니라고 선언한 사람에게 교황이 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평가했다.
이외에도 2016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에게 교황무류성에 관한 토론에 “어떠한 제한도 두지 않겠다”는 서신을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외에도 한스 큉은 개인적으로 파킨슨병을 앓고 있기도 했는데, 그 이유로 인해 가톨릭교회에서 단호히 반대하는 조력자살(assisted suicide), 안락사를 지지하기도 했다.
한스 큉 선종 다음날인 7일 교황청 공보 < L’Osservatore Romano >는 한스 큉의 조교로 일했으며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 의장을 지낸 발터 캐스퍼(Walter Kasper) 추기경의 인터뷰가 실리기도 했다.
캐스퍼 추기경은 한스 큉을 “교회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낸, 반항아만은 아니다”라며 “교회 쇄신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의 개혁안을 실천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캐스퍼 추기경은 한스 큉이 “신앙과 거리가 있는 사람에게도 복음을 설명할 수 있었던 신학자”였다며 교회일치의 첫 발을 내딛은 인물이며 종교의 긍정적 가치를 한데 모아 세계 평화를 추구했던 그의 ‘세계윤리구상’으로 보건데 “공통의 가치를 인정함으로서 종교간 협업을 증진시켰다”고 평가했다.
한스 큉의 유명 저작으로는 『그리스도교』, 『왜 그리스도인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세속 안에서의 자유』, 『세계윤리구상』, 『그리스도교 여성사』, 『가톨릭의 역사』, 『왜 나는 아직도 기독교를 믿는가』 등이 있다.
(1) 교황무류성 :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도덕과 신앙에 관련된 교황의 선언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를 교좌선언(ex cathedra)이라고 한다.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때 생겨난 교리로, 정립 이후 실제로 적용된 경우는 1950년 성모발현 교리를 정립한 비오 12세의 교황령 「너그러우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 때 단 한 번뿐이다. 하지만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이 개념은 제왕적 권위주의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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