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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당신은 지갑 속 주민등록증을 몇 번이나 사용했나요?
주민등록증의 조상, 등록표, 국민증, 도민증광복 후, 정부는 인적 청산과 불순 세력 색출 등을 이유로 ‘등록표’(1947년)를 만들어 국민들에게 배포했다. 정부 수립 후 최초의 신분증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후, 1949년 ‘국민증’이란 이름으로 갱신한 후 사용했다. 종이로 만들어진 등록표, 국민증은 이름, 생년월일은 물론이고 지문 날인까지 한 신분증으로 항시 휴대해야 했다. 이 신분증들은 각 지자체별로 발행해 사용했다.
전쟁 중에도 신분증은 필수이자 ‘생명증’ 같은 존재광복의 기쁨도 잠시, 곧 6.25전쟁이 발발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통에서도 수많은 ‘신분증’들이 생겨났고 신분증은 피난민들의 필수품이 되었다. 전쟁 직후 사회부(현 내무부)에서 발행한 ‘피난민 증’은 피난을 가기 위해, 식량을 배급 받기 위해, 부역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꼭 필요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이 ‘피난민증’은 신분증을 만드는 기초 자료로 쓰이게 된다. 전쟁 중에 생명줄과 같았던 신분증은 또 있었다. ‘도강증’이 바로 그것이다. ‘도강증’은 피난 후 돌아오는 피난민들에게 발급하던 신분증으로 강을 건너려면 반드시 이것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웃돈을 얹어서라도 이것을 가지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쟁 막바지였던 53년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경비원 김모씨가 도강증을 불법으로 위조해 1매에 5백환씩 받고 4백매를 일반 시민들에게 팔다 적발돼 구속됐다는 사건이 소개되기도 했다. 전쟁 중 발행된 여러 신분증 중엔 슬픈 신분증도 있다. 1950년, 7월 미군의 요청으로 징발에 의한 특별 조치령이 내려진다. 이에 따라 전국의 35세에서 45세 남성을 군인으로 징발이 된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어린 10대에서부터 60대 노인까지 무작위로 징발된 그들은 일명 ‘지게부대’로 불리며 총탄이 오가는 전선을 지게 하나 메고 누볐다. 이들에게 발급된 신분증이 ‘징용등록증’, ‘징용증명서’다. 이들이 겨우 목숨을 부지해 살아 돌아올 땐, ‘징용해제통지서‘와 열차표 한 장 만 손에 쥐고 있었다.
국민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해 생겨 난 신분증 ‘도민증’6.25전쟁 직후, 혼란 속에서 신분증은 더욱 필요했다. 국내 질서가 혼란하고 북한에서 월남한 많은 동포들의 신원 파악이 어려운 상황 하에서 국내의 반국가적 행위자를 색출하고 도민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해 ‘도민증’ 이라는 것이 발급 되었다. 1950년부터 1961년까지 사용되었던 도민증은 현역 군인, 국가 공무원, 지방 공무원으로서 도민증 발급을 원하지 않는 자, 만 13세 미만인 자, 노쇠, 질병으로 영구히 기거할 수 없는 자, 만 3개월 미만 도내에 거주한 자 등을 제외한 모든 도민에게 발급되었다. 각 도의 규칙에 따라 도민에게 발급 되었던 도민증은 모양도, 안의 내용도 시·도 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도민증 안에는 기본 정보는 물론이고 혈액형, 체중까지 적혀 있는 것도 있어 휴대용 신상명세서나 다름 없었다.
주민등록증 1호 발급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5.16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 정권은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고 혼돈스러운 상황을 조기에 수습 하고자 주민등록증 제도를 도입했다. 1962년 ‘기류법’ (주민의 거주관계를 파악하고, 인구의 동태를 명확히 하여 행정사무의 적정, 간이 한 처리를 목적으로 하는 제도)에 따라 그 해 5월 10일, 주민등록법을 제정했다. 같은 해, 6월 20일 주민등록법을 시행하고 68년, 역사적인 주민등록증 첫 발급이 시작됐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첫 번째로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것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의 주민등록증 번호는 110101-100001, 육영수 여사는 110101-200002 로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1번과 2번 번호를 부여 받았다. 주민등록증 발급은 사실 정부 계획보다 조금 앞당겨 시행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 해 1월 일어났던 간첩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북한은 호시탐탐 남한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주요 인물 암살을 시도했다. 그러던 중 68년 1월, 김신조가 이끄는 북한군이 청와대를 기습,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 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간첩과 불순분자 색출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되어 주민등록증 발급이 당겨졌다.
통금 시대의 마패, 야간통행증혼란의 시대에 믿을 건, 신분증 밖에 없었다. 증(證)을 몇 개 갖고 있느냐가 권력과 힘의 상징일 정도였다. 1972년 6월 ‘청와대 민원반’을 사칭하며 건축업자 등에게서 돈을 뜯어 낸 사기꾼 2명이 검거됐다. 이들이 꺼내 든 건 공무원증도 아니고 명함도 아닌 ‘야간통행증’이었다. 광복 후, 대한민국엔 통행금지가 있었다. 당시엔 자정부터 4시까지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주민등록증이 68년도에 발급이 되었지만 그것만으로 불순분자나 간첩을 색출하기엔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한 정부가 도입한 것이 통행금지와 야간 통행증. 통금 단속에 불응하고 달아나는 차량에 군인이 소총을 발포할 만큼 무시무시했던 시절, 심야 거리를 마음대로 활보 할 수 있다는 것은 특권 중의 특권 이었다. 조선시대 마패가 암행어사의 무소불위 권력을 행사하는 허가증처럼 사용되었듯 야간통행증도 마찬가지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통금이 해제된 1982년 1월 5일 0시까지 37년간 야간통행증은 통행허가증명서 이상의 힘을 가졌다. 야간통행증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었으며 경찰관도 이 증서를 가진 사람 눈치를 봤다. 그렇다면 이 막강한 야간 통행증은 누가 받았을까? 공무원, 의사, 신문기자 그리고 신분이 확실한 자로 전국에 2만 3119명이 이 야간통행증을 발급 받았다. 박정희 정권 시절, 이 증명서는 장·차관과 주요 공공기관 간부들에게 우선 발급 되었지만 나중엔 김장용 배추 운반 트럭 운전사나 영세 상인들도 갖게 되었다. 가수 이장희, 윤형주 등 심야 DJ들도 받았다.
주민등록증도 이제는 가로형 시대1975년, 주민등록증에도 변화가 생겼다. 12자리 숫자에서 13자리로, 주민등록번호 앞 번호를 생년월일로 바꿔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주민등록증 발급 대상자 연령도 18세에서 17세로 변경 했다. 변경 이유는 민방위대 및 전시동원 대상자와 일치시키기 위함이었다. 주민등록증은 그 후, 1983년 또 한 번의 변화를 맞게 된다. 이때부터 가로가 긴 형태의 주민등록증이 사용된다. 그로부터 16년 후인 1999년 9월, 홀로그램등 첨단기술로 제작된 현재의 플라스틱 주민등록증이 탄생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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