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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털루 전투
워털루 전투 (나폴레옹 전쟁의 일부) | |||
윌리엄 세드러의 [워털루 전투] | |||
날짜 | 1815년 6월 1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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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벨기에근처의 워털루 | ||
결과 | 연합군 승리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끝 나폴레옹의 몰락 및 최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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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 프랑스어: Bataille de Waterloo)는 1815년 6월 18일,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웰링턴, 블뤼허가 이끄는 영국, 네덜란드 및 프로이센 등이 포함된 연합군이 싸워 연합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한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 최후의 전투이며 여기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2번째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다음해 4월에 폐위되어 엘바섬으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빈 회의에서 전후처리 문제로 연합군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본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26일 엘바섬을 탈출해 남프랑스의 주앙에 상륙한 뒤 병사를 모으면서 파리로 향했다. 도중에 나폴레옹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네 원수와 술트 원수를 만났지만 오히려 나폴레옹에게 동조하게 되어 7,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3월 20일 파리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은 제국의 부활을 선언하고 동맹국에게 공존을 주장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복귀 소식은 유럽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고, 그 이상으로 프랑스 제국의 해체로 인해 생기는 영토와 이득을 욕심낸 연합국은 일제히 단결하여 각 방향에서 프랑스를 향해 진격했다.
나폴레옹은 신규로 징병한 병력을 더해 각 방향에 대한 방어를 준비하면서 주력군 12만 4,000명을 북쪽 방향에 집중시켰다. 웰링턴군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출발한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하노버, 브라운슈바이크의 9만 5,000명의 연합군이었다. 동시에 벨기에 리에주에서 출발한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은 11만 3,000명의 병력이었다. 병력을 비교한다면 총 합계에서는 프랑스군은 연합군에게 크게 뒤지지만 각각 나눠 비교한다면 승산이 있었다. 따라서 신속하게 기동하여 각개격파를 성공시킨다는 전략을 세우게 되었다. 프랑스군의 중핵은 역전의 대륙군이 차지하고 있었고, 불패를 자랑하는 근위대도 건재해 있었다. 질적인 우위는 나폴레옹에게 있었다.
먼저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기 위해 네 원수에게 병력 2만 4,000명을 맡겨 웰링턴군과 카트르 브라에서 전투를 벌이게 하고는 자신은 8만 병력을 이끌고 리니에서 프로이센군과 전투를 벌였다. 6월 16일 리니 전투에서 프로이센군과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한 나폴레옹은 8,000여명의 피해를 입고 프로이센군에게 25,000여명의 사상자란 피해를 주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완벽하게 격파한 것은 아니었다. 퇴각한 프로이센군은 블뤼허 원수가 중상을 입어 참모장(參謀長)이었던 그나이제나우 장군이 대신 지휘를 맡게 되었다.
웰링턴은 블뤼허와 합류한 뒤 결전을 벌일 예정이었으나 블뤼허가 후퇴했기 때문에 자신의 군도 후퇴시켰다. 그 선봉과 전투를 벌였던 네 원수도 나폴레옹과 합류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이 동쪽으로 완전히 퇴각한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다음날 아침 에마뉘엘 드 그루시 원수에게 3만 명의 별동대를 주어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은 웰링턴과의 합류를 목표로 서쪽으로 진군 중이었다.
호우 속에 후퇴한 웰링턴군은 몽-생-장에 구축한 방어 진지에 도착했다. 웰링턴은 프랑스군이 서쪽으로 우회할 것을 두려워해 1만 5,000명을 우익에 배치해 수비를 굳건히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웰링턴군 정면에 포진했다. 보병 사단을 전면에 배치하고, 기병 여단을 그 후방 양익에 배치했다. 거기에 좌우 양익에 기병을 배치했다. 중앙 후방에는 근위군을 결전용 예비 병력으로 배치했다. 웰링턴은 보병대를 전면에 전개하고 중앙 후방에 기병 사단을 집중 배치했다. 프로이센군이 도착할 때까지 방어를 우선시 하겠다는 포진이었다.
전날밤의 비로 인해 땅이 진흙탕처럼 변해버려 대포의 이동이 늦어지는 것 때문에 나폴레옹은 공격 개시 시간을 아침 9시에서 오전 11시로 늦추게 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프랑스군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여기저기 병력을 분산한 결과 프랑스군 7만 2,000명에 대해 웰링턴군 6만 8,000명이 워털루에서 맞붙게 되었다. 프랑스군은 연속으로 포격을 가해 웰링턴군 전선을 압박해 보병 사단의 진출로를 여는 한편, 아군 좌익에 위치한 우구몽 성 저택에 공격을 집중해 그곳을 교두보로서 노리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실제 그곳은 커다란 전략적 가치는 없었고, 나폴레옹은 이 공격을 통해 웰링턴의 중앙 병력을 유인해내기를 기도했지만, 웰링턴은 이에 넘어가지 않고 다만 우익의 붕괴를 막기 위해 약간의 병력을 보냈을 뿐 예비 병력을 풀지 않았다.
웰링턴이 의지하고 있던 진지는 가로로 긴 산등성이로 횡대로 포진하기엔 아주 좋은 방어 진지였다. 웰링턴군은 방어에 매진하면서,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부대를 산등성이 너머로 후퇴시켜 프랑스군의 포격을 피하길 계속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기 위해 보냈던 그루시 원수를 불러들이기 위해 전령을 보낼 것을 지시했으나, 참모장을 맡은 술트 원수는 겨우 1명의 전령만을 보내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에 나폴레옹은 "베르티에였다면 스무명은 보냈을텐데" 라며 중얼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전에 주로 군단 사령관을 맡았던 술트 원수가 참모장 노릇을 만족스럽게 수행할 수 있을리 없었다. 나폴레옹은 그와 동시에 몽-생-장의 산등성이에 맹포격을 지시했다.
그러나 산등성이 너머로 후퇴한 웰링턴군에게 효과적인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을 때, 정오를 지나면서 프로이센군의 전위가 전장에서 멀리 보이는 지점까지 도달했다. 각개격파 전략을 달성하려면 양군이 합류하면 안되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그곳에 도몽 장군 휘하 4개 사단을 급파했다. 병력의 여유는 이제 없었다.
오후 1시를 넘기며, 포격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에르몽이 지휘하는 중앙 4개 사단이 전진했다. 대대 단위로 3열 횡대. 정면병력 200명, 27열의 밀집횡대에 대해 웰링턴은 우익의 라-에-상트에 있던 농가를 방어 거점으로 삼아 방어했으나, 이 공격으로 격전 끝에 함락당했다.
나폴레옹은 흉갑기병대를 풀어 공격 성과의 확대를 기도했다. 웰링턴은 이에 맞서 중기병 2개 여단을 출격시켜 발도 돌격으로 프랑스 흉갑기병을 격파하고는 프랑스 포병 진지를 습격하기 위해 전진했으나 좌측으로 들이닥친 나폴레옹 휘하 폴란드 창기병에게 격퇴되었다. 그 사이 에르몽의 보병 4개 사단은 웰링턴군 제1방위선 하노버, 벨기에 사단을 분쇄했다. 전선에 생긴 균열에 비집고 들어가 제2방어선까지 전진하다 픽튼의 제5사단과 맞붙었다. 픽튼 장군의 전사란 대가를 지불하고 나서야 에르몽은 격퇴당했다.
보병의 정면 돌격에도 열리지 않아,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프로이센군이 도착하기 전에 결판을 지어야 하는 나폴레옹은 포격을 재개했고, 웰링턴은 병력의 소모를 막기 위해 전선을 산등성이 너머로 후퇴시켰다. 이것을 본 네는 적의 퇴각으로 오판, 일거에 승리를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직속 기병에 근위기병을 합쳐 일제돌격을 가했다. 보병의 도움을 받지 않고 돌격하는 기병의 대집단에 나폴레옹은 제지하였으나 멈추지 못했고, 곧 웰링턴도 놀라 26개 대대의 보병을 13개 방진으로 만들어 제1선에 7개, 후방에 6개를 배치해 방어선을 구축했다. 5,000기의 기병 돌격에 방진도 무너질 수 있었으나, 동물들이 본능적으로 방진의 총검을 두려워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방진으로 기병에 대해서는 효과적인 방어가 되었기에 이 돌격은 실패로 끝났다.
오후 3시경, 네는 다시 한 번 기병 돌격을 준비했다. 켈러만 예비 기병 사단, 거기에 근위 기병 사단도 소집했고, 이번엔 보병을 합쳐 공격을 개시했다. 이 공격은 성공해 웰링턴군의 전선을 흔들릴 정도로 깨뜨렸다. 다만 이 진로에 참호가 있었기 때문에 추락한 병사가 많아 전과의 확대가 크지 못했다. 네의 공격에 호응하여 우익 에르몽 사단이 웰링턴군 좌익에 돌입했다. 이것을 호기로 본 네는 나폴레옹에게 증원을 요청했다. 그 시점에서 예비대로 쓰여야 할 도몽의 군단이 프로이센 군을 막으러 떠났기에 나폴레옹의 손에는 불패를 자랑하는 근위대 뿐이었고, 그는 네의 요청을 거절했다.
결국 오후 6시 프로이센군이 도착해 무너진 좌익을 보강하자 웰링턴은 보병을 4열 횡대로 산개시켰다. 나폴레옹이 근위사단을 투입할 시기, 영국 보병 사단은 산등성이의 뒷면에 모습을 숨겼고, 나폴레옹의 근위대는 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전진했다. 산병과 격전 끝에 능선을 확보한 순간, 영국 근위 사단이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불패의 근위병은 이 공격에 무너졌고, 반격도 격퇴되었다. 웰링턴은 거꾸로 영국 기병대를 내보냈다. 거기에 프로이센군이 우익에서 돌격하자 프랑스군은 패퇴하고 말았다. 그 속에서 그 때까지 투입되지 않았던 고참 근위대의 일부가 정연히 방진을 조직하여 나폴레옹의 퇴각을 엄호했다. 그 희생으로 나폴레옹은 전장을 무사히 이탈했고, 프랑스군은 패주했다. 이 때 나폴레옹은 자신의 부하들이 죽든 말든 포병사격으로 영국군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퇴각했다.
나폴레옹의 전략은 분리된 적이 합치기 전에 기동하여 각개격파를 노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로이센군 섬멸이란 성과를 거두기 위해 추격군으로 3만을 보낸 것이 패전의 이유 중 하나였다. 그 지휘를 맡긴 그루시는 결단력이 부족해 워털루 전투가 시작된 것을 알면서도 프로이센군 추격을 계속했으나, 그들을 붙잡지 못했다.
웰링턴은 방어에 치중하여 승리를 얻었다. 기병대는 기동력과 타격력을 지닌 반면 방어력이 부족해서 총검의 벽을 만든 보병 방진에는 유효한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 결과 나폴레옹은 완전히 실각하여 세인트 헬레나섬으로 유배되었으며 미셸 네는 이 전투의 패배에 대한 죄로 인하여 체포당했다가 그해 말 총살당했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크림 전쟁 이외에는 국가간의 무제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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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말 번역판 수십 종이 나왔던 <생활의 발견>으로 유명한 린위탕. 그는 소설가, 중국 고전 번역가, 산문가, 문예비평가, 언어학자, 문명비평가였다. ‘생활과 사상의 소박함이야말로 문명과 문화의 숭고하고도 건전한 이상’이라 말했던 그는, 중국 문화를 서양에 널리 알린 사람이면서도 당대 중국의 현실에는 눈감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동양은 직관적인 통찰로 현실에 대한 전체적인 반응을 보이고, 서양은 분석적, 이론적 추리로 반응을 보인다. 동양은 그 철학에서 진실로 감정이 중요한 구실을 하지만, 서양에는 그런 철학이 거의 없다. 그리하여 동양에서는 서양처럼 군사, 정치 등 어떤 여건에서도 좀처럼 통계로 설명하지 않는다. 중국의 도(道)는 서양의 진리 개념처럼 추상적, 이론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적인 가치가 되어 인생과 관계되는 진리다. 오늘날에는 동양사상의 비중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인생의 여유와 운치가 물씬 묻어나는 특유의 산문만큼이나 맑은 외모를 지닌 링위탕
1968년 6월 18~20일 서울 경희대학교와 워커힐에서 31개국 154명의 대학 총장 및 학자들이 참석한 제2회 세계대학총장회의가 열렸다. 한국에서 열린 사실상 최초의 대규모 국제학술대회였기 때문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개막축사를 하는 등 큰 관심을 모았다.
린위탕은 대학 총장은 아니었지만 세계적인 석학으로서 참석했다. 그는 6월 19일 서울시민회관 강연에서(‘전 인류 공동 유산의 추세’) 위와 같이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대한뉴스 681호가 전하는 린위탕의 다음과 같은 강연 내용
“비틀즈풍은 부잣집 자식들이 복에 겨워 누리는 폐풍에 불과한 것이며, 건설도상 국가의 젊은이들이 흉내 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 비틀즈가 전 세계적으로 젊은이들 사이에 얼마나 큰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는지 짐작케 해준다(대한뉴스가 린위탕의 진의를 제대로 옮겼는지 여부를 일단 접어두고 보면). 또한 린위탕이 지녔던 일종의 문화보수주의적 태도, 전통적 가치를 중시하는 태도를 엿보게 해준다. 그는 1970년 6월 서울에서 열린 제37차 국제펜클럽대회에도 참석해 ‘동서문화의 유머’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린위탕은 복건성 평화(平和)현 남부 판자(坂仔)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허러(和樂)였고 중학교 때 위린(玉霖), 대학 입학 후에는 위탕(玉堂), 1925년 이후 위탕(語堂)이라는 이름을 썼다. 아버지는 상인 출신의 목사였다. 소학교부터 기독교학교를 다니며 서양문화의 세례를 받았고, 자신의 집에 기거한 미국인 전도사의 영향을 받아 12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1912년 17살 때 상하이 세인트존스대학에 입학하여(1916년 졸업) 광범위한 독서에 탐닉했고, 칭화학교(칭화대학의 전신)에서 영어교사로 일하며 비로소 중국 전통 문화와 고전 지식을 집중적으로 쌓았다.
고향 마을 처녀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가 실명한 조부를 돌보느라 고향을 떠날 수 없어 이별해야 했다. 대학 시절에도 여대생을 사랑했지만 린위탕의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여성 쪽 부모가 반대하여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부모의 권유로, 상하이 세인트메리학교를 졸업한 랴오추이펑과 1919년 유학을 떠나기 직전 결혼했다. 훗날 어느 서양인이 자유연애가 아니라 부모가 골라준 신부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당신은 부모를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부모님을 사랑하고 효도하나요?”
칭화학교에서 유학 보조금을 받아 하버드대학에서 비교문학 석사학위를 받았지만 보조금이 끊어져 곤란을 겪다가 프랑스로 건너가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독일 예나대학에서 한 학기를 마친 뒤 라이프리치대학으로 옮겨 1923년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베이징대에서 비평과 언어학을 가르쳤고, 1925년에는 베이징사범대학 강사, 베이징여자사범대학 교수 및 교무처장이 됐다. 이 시절에 대한 회고다. “나도 학생들의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깃대와 벽돌을 들고 경찰들과 싸웠다. 경찰은 부랑아들을 고용하여 학생들에게 돌을 던지게 하여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때 나는 내 야구 솜씨를 발휘할 기회를 많이 가졌다.”
1926년에 복건성 하문(厦門)대학 문과 주임교수로 옮겼지만 이듬해 1927년 3월 우한(武漢) 정부 외교부장 천유런(陳友仁)의 비서로 초빙 받아 한 때나마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같은 해 9월 우한정부가 소멸한 이후 상하이로 옮겨 문필가 생활로 일관했다. 귀국 후 1920년대 말까지 그는 루쉰이 주도하여 1924년 창간된 주간지 <어사>(語絲)를 무대로 활동했다. 그 시절에 대한 회고다. “배워서 여유가 생기면 벼슬이나 하려는 생각을 갖고 글을 쓰는 이들이 싫었다. 우리는 매 개인이 모두 자신의 진심에서 우러나는 말을 해야지 남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 스타일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어사>를 우리 마음에서 솟아나는 소리와 말이 자유롭게 뛰어 놀 수 있는 공원으로 여겼다.”
1920년대 린위탕은 언어학자이자 문예평론가로서의 면모가 강했지만, 30년대 이후부터는 산문가, 번역가로서 중국 문화를 서양에 소개하는 일에 주력했다. 1936년 8월 린위탕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을 무대로 전업 문필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미국 이주에는 작가 펄 벅의 권유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린위탕은 이미 1935년에 미국에서 출간한 <내 나라 내 국민>으로 미국 독자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었고, 1937년에 내놓은 <생활의 예술>(영어 원제는 The Importance of Living. 우리나라에서는 <생활의 발견>)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국내에서도 한 두 해에 걸쳐 벅역판이 새롭게 출간되는 <생활의 발견>.
94년 일신서적,95년 범우사,99년 문예출판사,06년 혜원 출간(왼쪽부터)
미국에서 린위탕은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는 글을 자주 기고했고 1940년과 1943년에 잠깐 귀국해 강연했지만, 중국 문예계에서의 영향력은 크지 못했다. 그는 <경화연운>(1939), <풍성학려>(1941), <당인가>(1948), <주문>(1953) 외의 많은 소설과 <소동파전>(1947), <노자의 지혜>(1948), <장자>(1957), <측천무후>(1957) 등 중국 문학, 사상, 고전 관련 책도 발표했다. 그가 낸 책은 중문, 영문을 합쳐 50여 권에 달한다.
1954년에는 싱가포르에 화교들이 세운 난양(南洋)대학 교장(총장)으로 추대되었지만 학교 측과의 마찰로 반 년 만에 그만 두었다. 1967년 홍콩 종원(中文)대학 연구교수로 초빙되어 <당대한영사전> 편찬 책임을 맡아 1972년에 출간했고, 1975년 <경화연운>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린위탕은 30년 넘게 미국에서 살았지만 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고 집도 사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미국 국적을 취득하라 권했지만, 이곳은 내가 뿌리를 내릴 곳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집을 사지 않고 월세를 내며 살았다고 말해주었다.”
『중국은 실천을 중시하고 서양은 추리를 중시한다. 중국은 정을 중시하고 서양인은 논리를 중시한다. 중국철학은 천명을 따라 마음의 평안을 얻는 임명안심(立命安心)을 중시하며, 서양인은 객관적인 이해와 해부를 중시한다. 서양은 분석을 중요하게 여기며 중국은 직감을 중요하게 여긴다. 서양인은 지식추구에 중점을 두고 객관적 진리를 추구한다. 중국인은 도의 추구를 중시하여 행동의 도를 추구한다.』(<동서 사상의 차이> 중에서)
『중화 민족을 서양 국가와 비교해보면 진취성이 모자라고 보수적이며, 용감하고 의연한 정신이 모자란다. 반면 인내심이 매우 깊다. (…) 중국 문화는 정적인 문화고, 서양 문화는 동적인 문화다. 중국은 음(陰) 위주이고 서양은 양(陽) 위주다. 중국은 정(靜) 위주고 서양은 동(動) 위주다.』 (<중외의 국민성> 중에서)
많은 서양인들에게 린위탕은 중국과 서양을 비교하면서 특히 중국 문화의 특징을 입담 좋게 해설해주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가 펼친 중서(中西) 문화비교론의 핵심을 위의 인용에서 엿볼 수 있다.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측면도 없지는 않지만, 중국과 서양의 문화적 특징을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단순하게 대비시킨다는 비판도 받는다. 물질의 서양과 정신의 중국,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서양과 보수적이고 정적인 중국이라는 통념적인 이분법이 자리 잡게 하는 데 린위탕의 역할이 컸다는 비판적 지적도 있으며, 그러한 이분법에 대해 이른바 오리엔탈리즘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린위탕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재치, 위트, 유머, 풍류, 그리고 인생에 대한 여유로운 관조가 돋보이는 산문가이자 중국과 서양 문화의 가교 구실을 한 문명비평가. 중국의 복잡다난한 현실에서 사실상 도피하여 한가로운 글줄이나 희롱한딜레탕트. 이러한 상반된 평가에는 모두 일리가 있다. 굴곡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국의 현실과 미래를 고민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당시 중국의 많은 학자, 작가, 사상가들에 비하면 린위탕은 분명 한가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중국과 서양의 문화를 비교론적 시각에서 흥미롭게 논하고, 인생의 여유와 운치가 물씬 묻어나는 특유의 산문으로 하나의 경지를 이룬 문필가였다.
만년의 그는 타이완과 홍콩을 오가며 생활했지만 타이베이 교외 양음산 기슭에 세낸 정원이 딸린 저택에서 은거하기를 좋아했다. 1971년 큰딸이 자살한 뒤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고 급격히 병약해졌다. 1974년 타이완 문화계가 열어 준 80세 생일 파티 이후 외부 생활을 사실상 마감하고 1976년 82세를 일기로 홍콩에서 세상을 떠나 양음산 기슭에 묻혔다.
<유머와 인생> 유머에 관한 글과 함께 공자, 노자, 장자, 자사, 맹자, 도연명 등에 관한 일종의 비교문화론적 산문과 만날 수 있다. 말미에 실린 부록, 임어당의 문학 생애, 주요 저작 목록, 생애 및 작품 연보 등은 요긴하다. 이 가운데 ‘문학 생애’는 <임어당선집> 출간을 위해 완핑진(萬平近)이 1987년에 쓴 글로 중국 ‘대륙’의 시각, 즉 사회주의 문학론의 관점에서 린위탕에 접근하지만 지나치게 편파적이지는 않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린위탕의 문학적 의의를 평가하려 한다.
<쾌활한 천재> 린위탕이 1947년 영문으로 출간한 소동파 전기 「The Gay Genius: The Life and Times of Su Tung Po)」의 번역서. 린위탕은 ‘소동파한테서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에’ 소동파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소동파)는 삶이 짐스럽고 고해와 같다”는 말에 전혀 수긍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 자신은 그가 살고 있는 순간순간을 즐겼기 때문이다.
<베이징 이야기> 1960년에 초판이 나온「Imperial Peking: Seven Centuries of China 의 번역서. 린위탕의 개인사만으로 보면 베이징과의 인연이 그리 깊지 않지만, 베이징은 그에게 중국, 중국인, 중국 역사와 문화의 상징과도 같았다. 이 책에서도 린위탕의 필치는 자유롭지만 광범위한 사료에 바탕을 두어 ‘역사적 베이징’을 그려내는 데 충실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