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원의 확신과 기쁨 (w.v그랜트 著 1987년6월30일 재판 발행,은혜의 말씀사)
1. 이 책을 소개 하게 된 동기
책장에서 읽을 만한 책이 없을까 뒤적거리다가 30여 페이지 밖에 않된 가볍게 읽을 수있는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전에 읽었던 책이라 생각되었고 대강 읽어서 그랬던지 별로 감명 깊게 읽었다는 기억이 남아있지 않은 책이었다.
읽을까 망설이다 특별히 읽어 볼만한 책도 없어서 읽기시작 하였는데 마침 수양회 시점이라 그랬던지 마음에 와 닿아 믿음이 흔들려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오래토록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구원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좋은 내용이라 생각되어 키 보드를 두들겨 올려 봅니다.
2. 내용의 핵심은
구원이 흔들리는 신자들에게 =믿음의 대상 기준이 “변치 않는 하나님이 믿음의 대상인가?
아니면 자기 마음이 믿음의 기준인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한 것으로
“ 믿음이란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하는 불완전하고 죄악 된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다 이루신 사실을 알고 그분들이 거짓말 하지 않으신 영원히 변함없는 거룩한 대상임을 아는 것 그분들의 구속을 알고 약속이 변함 없음을 아는 것이라는 좋은 설명들입니다.
왜 ? 이러한 내용을 초 신자들이 꼭 읽어보기를 권하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내가 참으로 구원을 받았을까 ? 하는 흔들림이 많고
또한 머리로는 복음을 알지만 자기 고집에 마음의 눈이 가리워져 마음이 열리지 않아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이 책의 내용을 깊이 상고해 가면서 읽어가노라면 그 마음이 열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리라 생각되어서입니다.
“ 본문 ”
1. 당신은 몇 등차로 여행 중이십니까 ?
우리는 이 질문을 얼마나 자주 듣는지요 ?
그런데 독자여 나는 당신에게 이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당신은 틀림없이 지금 여행을 하고 계십니다, 순간에서 - 영원으로 !
그리고 당신이 도착 할 최후 종점은 매우 매우 가까웠는지 누가 압니까 ?
그렇다면 나는 공손하게 당신에게 묻습니다 ,
당신은 몇 등차를 타고 계십니까 ?
등급은 셋뿐입니다.
“ 우리와 상관 하실분” 앞에서 당신 자신을 시험해 보시도록
그 세 등급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1등 : 구원을 받았고 그것을 아는 사람들
2등 : 구원의 확신이 없고 , 확신을 가지기를 열망하는 사람들
3등 : 구원 못 받았을 뿐만 아니라 , 그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
다시 질문 하겠습니다- 당신은 몇 등차로 여행 중이신지요?
영원한 문제를 두고 무관심 하지 마십시오 !
얼마 전 일인데,
어떤 사람이 허둥지둥 정거장에 뛰어 들어서 , 막 떠나는 기차에 뛰어 올라 간신히 자리에 털석 앉았습니다.
“ 잘 달리시는군요 ”.
옆자리의 사람이 말하자 , 그는 숨을 연거푸 헐떡이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 덕분에 4시간을 절약 했습니다, 달린 보람이 있었지요”
4시간을 절약했다 - 나는 속으로 되뇌어 보았습니다.
4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저렇게 애를 쓰니... 영원을 절약하기 위해서는 ...?
이생의 유익은 먼 앞날까지 내다보고 민첩하면서도 그들 앞에 있는 이 영원에 대해서는 깜깜인 사람들이 땅위에는 얼마나 많은지요 !
불쌍한 반역자들을 향하여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이 갈보리에서 선포됐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죄에 대한 무서운 증오가 공포됐음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서의 인간의 역사가 짧은 줄을 앎에도 불구하고, 돌이킬 수 없는 구렁 “ 저쪽의 지옥에서 잠이 깼을 때의 견딜 수 없는 후회를 엄숙히 예상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이 아니 계시는 것처럼 , 사망이 없는 것처럼 심판도 천국도 지옥도 없는 것처럼 ...
그 종착역을 향해 질주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가 이런 사람이라면 이 시간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사 ,
이 글을 읽는 동안 당신의 눈을 띄워 주셔서 영원한 재앙의 미끄러운 언저리에 서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친구여 ,
당신이 신용하든지 아니하든지 , 당신의 경우는 절망적입니다,
영원에 대한 생각을 다시는 버리지 마십시오 .
이 문제를 미루게 되는 것은 “ 도적”이라기 보다도 “강도”와 같이 당신을 속이는 자임을 기억하십시오 .
“ 차차” 라는 길은 “ 단념” 이라는 거리로 인도한다 는 스페인 격언에는 많은 진리가 있습니다.
나는 알지 못하는 당신에게 간청합니다 - 이 (차차)의 길을 더 이상은 걷지 마십시오 “
“지금은 구원의 날입니다”.
“그런데 나는 내 영혼의 평안에 대해서 무관심 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분이 말 합니다 “ 내 깊은 걱정거리는 불확실이라는 말 속에 들어있습니다. 즉 나는 당신이 말하는 2등차에 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
“그런데 독자여, 무관심과 불확실은 다같이 한 어머니 - 불신(不信)이 낳은 것입니다.
첫째 것은 인간의 죄와 파멸에 대한 불신의 결과요,
둘째 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믿지 않음에서 온 결과입니다.
이 글은 특별히 자신의 구원에 관해 충분히 그리고 의심 없이 확신하기를 원하는 영혼들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영적인 불안을 잘 이해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참으로 영원히 구원된 줄 분명히 알게 되기 전에는 , 이 극히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당신이 열심을 품으면 품을수록 당신의 갈증은 더할 줄울 나는 분명히 압니다.
“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독자가 바다에 나갔습니다. 그가 탄 배가 어떤 외국 해안에 조난했다는 소식이 들어 왔습니다. 그 때에 가장 신용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소식통에 의해서 그 아들이 안전하고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 아버지의 불안의 고통을 누가 다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혹은 당신이 집을 멀리 떠나 있다 합시다.
밤은 어둡고 추운데 길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 곳에 와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그 사람의 말이, 그의 생각에 이러이러한 길이 옳을 것 같고, 아마 그 길을 가면 무사하길 바란다는 식으로 길을 가르쳐 주었다 합시다.
당신은 그의 생각과 바라는 것과 아마 같은 것으로 만족 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확실한 길을 알아야 하며 , 그러기 전에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불안을 더 가져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자기의 영혼의 영원한 안전성 여부가 확실치를 않을 때,
그가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
그대의 재물은 잃음도 크다.
그대의 건강은 잃음도 크다.
그대의 영혼을 잃은 일은 , 아무도 회복 못할 큰 손실이다.
사랑하는 동지여, 이제 나는 세 가지를 성령님의 도우심을 얻어 그대에게 밝히고자 합니다.
그 것들은 성경의 말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구원의 길 (사도행전 16:17)
2. 구원의 지식 ( 누가복음 1 :77)
3. 구원의 기쁨 ( 시편 51:12)
이 세 가지는 비록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 또 서로 독립된 면들도 있는고로, 어떤 사람이 그 자신이 구원 받은 줄은 모르면서도 구원의 지식 얼마를 알 수 있고 , 혹은 구원의 지식에 따르는 기쁨을 모르면서도 , 자신이 구원 얻은 줄은 아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 구원의 길
청컨대 당신의 성경을 펴시고 출애굽기13:13을 주의 깊게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 할 것이요 , 그렇게 아니 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너의 아들 중 모든 장자 된 자는 다 대속 할지니라” .
이제 나와 함께 3,000년 전에 있었던 한 장면을 상상해 봅시다.
제사장 한 사람과 가난한 이스라엘 사람 하나가 무슨 얘기를 열심히 주고 받습니다.
그들의 허락을 얻어 그들 곁에 서서 그들의 얘기를 들어 봅시다.
두 사람의 몸짓으로 보아서 얘기의 내용은 심각한 일임을 곧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고 두 사람의 곁에 서서 떨고 있는 한 마리의 어린 나귀 새끼에 관한 얘기인 것 같습니다.
가난한 이스라엘 사람이 말합니다.
“ 이번 한번만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 수 없는지 알고 싶어 왔습니다.
이 어린 나귀 새끼는 우리 암나귀의 첫 새끼인데, 물론 저는 이것에 관한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압니다만, 특별히 자비를 베푸셔서 이 나귀 새끼의 생명을 살려주셨으면 해서 왔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중 가난한 사람으로써 이 나귀 새끼를 차마 잃기가 아깝습니다.
“ 그렇지만 ”
제사장의 말은 굳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명백하고, 어길 수 없습니다.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 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 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네 저에게는 어린 양이 없습니다.
“ 그러면 돌아가서 한 마리를 사가지고 오시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나귀의 목을 꺾어야 합니다.
어린양이 반드시 죽든지 나귀가 반드시 죽든지 해야 합니다.
“ 아, 그러면 내 소망은 다 깨어졌습니다! 나는 어린양을 살 돈이 없습니다.
이런 얘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셋째 인물이 등장 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슬픈 얘기를 듣고 있던 그는 그를 향해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 낙심하지 마시오, 내가 당신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저 언덕 위에 있는 우리 집에 막 잡아 먹으려고 하던 어린양 한 마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점도 흠도 없는 것입니다.
집을 빠져 나간 일도 없었고, 우리 집안 온 식구들의 사랑을 받던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끌어오지요 .
그는 언덕 위로 급히 사라졌습니다.
얼마 안 있어서 그는 예쁜 어린 양을 끌고 언덕을 내려 왔습니다.
그리하여 어린 양과 나귀 새끼는 나란히 섰습니다.
드디어 어린 양은 묶여서 제단 위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 피는 흐르고, 불이 그것을 살랐습니다.
공정한 제사장은 이제야 그 가난한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나귀 새끼를 맘대로 끌고 가십시오, 그 목을 꺾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린 양이 나귀 대신 죽었고 따라서 나귀는 정당하게 자유를 얻었습니다.
당신의 친구에게 감사 하십시오.
자 불안 중에 있는 불쌍한 영혼이여,
당신은 여기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까?
죄에 대한 그의 요구는 “목을 꺾는 일 ”
즉 당신의 죄 있는 머리 위에 그의 의로운 심판이 선고 되었습니다.
여기서 모면되는 길은 오직 하나, 그것은 하나님의 인정하시는 대리자 의 죽음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으로서는 그 대리자를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몸을 통하여 하나님 스스로가 어린양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세례 요한은 그 복되고 흠없는 이를 보자 제자들에게 외쳤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 요 1: 29 )
그는 갈보리로 오르셨습니다, “ 도수장에 가는 어린양 같이 ” 그리고 거기서 그는 “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 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 하심이었습니다 ( 엡3:18 ) 그는 우리의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습니다 (롬 4:25 )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죄인이 예수를 믿는 고로 의롭다 하심에 있어서 그의 의는 한 획도 떨어뜨리지 아니하셨습니다 ( 롬3:26)
이러한 구주를 주시고 이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 합시다.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가 ?
이 질문에서 그대는 :
“나는 불쌍한 죄인이지만 , 예수는 내가 안전하게 믿을 수 있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나는 그를 믿습니다 라고 대답 했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그대에게 밝히 말하는데, 예수의 희생과 죽음으로부터 이루어진 모든 공로, 하나님이 보시는 그 공로는 마치 그대 자신이 이루어 놓는 것 같이 그대에게서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아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구원의 방도입니까!
이야말로 훌륭하고 장엄하며, 하나님의 방법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심정의 만족, 그의 귀한 아들의 영광, 그리고 한 죄인의 구원이 한데 묶인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결합체냐 !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모든 일을 하게 하시고 , 또 모든 찬송을 받으게 하시고, 그대와 나 같은 가련한 죄인들이, 그 아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그 복되신 분들의 대열에 영원히 영원히 동참케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 합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 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시34:3)
그러나 그대는 이렇게 안타까이 반문 할지 모릅니다.
“ 나는 나 자신과 내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하는데도,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는 이유가 무었입니까?”
“ 내가 단번에 구원 받았다는 신념이 내 기분에 달려있다면, 그 기분은 순식간에 모든 희망을 소멸시키고 ,나는 마치 닻을 주지 않은 배 같이 풍랑에 밀려다니게 마련입니다.”
아, 그대는 거기서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전에 배의 닻을 배 안에다 주려는 선장이 있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결코 없을 것입니다.
닻은 언제나 배 밖에 푸는 법입니다.
그대는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그대에 대한 안전한 구원을 준다는 점은 분명해졌으나, 그러나 확신은 내가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면 다시 성경을 펴봅시다, 이제 나는 우리가 구원의 지식을 얻는 법을 말하려고 합니다.
2. 구원의 지식
신자가 영생을 가진 줄을 알게 하는 성경 구절을 자세히 상고하여 보기 전에, 나는 지금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내용으로 그 성경 구절을 바꿔서 적어보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 즐거운 기분)을 주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자 이제 그대의 성경을 펴 보고 하나님의 복되시고 변치 않는 말씀과
그대의 (감정 위주)의 잘못된 생각을 비교해 본 다음 그래도 다윗 처럼 내가 두 마음(허망한 생각)품는 자를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 하나이다(시119:113)라고 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위에서 내용을 바꿔서 인용한 성경 구절은 요일 5;13절인데 그 본문은 이렇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즐거운 기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들은 유월절과 애굽의 심판이 있던 밤에 그들은 안전하다는 것을 무엇으로 확신했던가?
이제 우리는 그들 중 두 집에 가서 그들의 하는 말들을 들어 보기로 합시다.
첫째 집에 들어가니 온 가족들이 파랗게 질려서
두려움과 긴장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 왜 이렇게 떨고 두려워 합니까 ?”
하고 물었더니 그 집 장자가 말하기를 사망의 사자가 온 땅을 두루 돌아 오는데, 자기 집에 다다르는 그 무서운 순간에 제 일이 어떻게 될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 사망의 사자가 우리 집을 지나간 뒤에야 이 심판의 밤이 지난 후에야 나는 내가 안전 했다는 것을 알 것이지 그 전에는 확실히 알 수가 있나요,
뒷집에서는 구원을 받을 줄 확신 한다는데 , 우리 생각엔 너무 건방진 것 같애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길고 무서운 밤을 희망을 가지고 지새는 것 뿐이지요.
이 말을 듣고 우리는 물어 보았습니다.
“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서 안전한 길을 마련하시지 않았습니까?”
물론이지요 우리도 그 피할 길을 마련해 놓기는 했습니다.
점 없고 흠 없는 일년 된 양의 피를 우슬초에 듬뿍 찍어서 문설주와 인방에 하라는 대로 뿌려 놨지요.
그러나 우리는 암만해도 안심 할 수가 없어요 .
자 이번에는 다른 집으로 들어가 봅시다.
이 집에 들어서니 이 얼마나 대조적인 광경이 우리 눈에 띄는가?
식구마다 얼굴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들은 모두 허리띠를 동이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불에 구운 양고기를 맛있게 먹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엄숙한 밤에 이 집 식구들의 이 즐거워하는 모양은 웬 까닭인가 ?
우리가 물었더니 그들은 일제히 대답합니다.
“예, 우리는 여호와의 진군 명령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명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우리는 저 잔인한 간역관들의 채찍과 이 애굽 나라의 고역에 작별 인사를 하는거죠.
“ 잠간만 , 당신들은 이 밤에 애굽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 잘 압니다 , 그러나 우리나 우리 맏아들은 안전 하거든요, 우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피를 뿌렸으니까.”
“ 이웃집에서도 그렇게 했지만 그들은 모두 확실치 않아서 걱정 하던데요.”
“예?”
그 집 장자는 힘 있는 어조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뿌려진 피보다 더 확실한 것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 피에 대해 하나님이 하신 틀림없는 말씀을 우리는 가졌거든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밖에 있는 피를 보시고 안심하시고,
우리는 안에서 그의 말씀을 가지고 안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뿌려진 피는 우리를 안전케 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십니다.
확 실 성
뿌려진 피보다 더 우리를 안전케 해줄 것이 무엇이 있으며,
하나님 말씀보다 더 우리에게 확신을 줄 것이 무엇이 달리 있겠는가?
아무 것도 다른 것은 없습니다 !
나는 독자에게 한가지 묻습니다,
위에 찾아본 두 집 중 어느 집이 더 안전해 보입니까 ?
온 식구가 즐거워하던 둘째 집이라고 그대는 대답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대는 틀렸습니다,
두 집 다 안전 합니다.
그들의 안전성은 집 밖에 뿌려진 피에 대해 하나님이 작정하신 바에 달려 있는 것이지, 집 안에 있는 그들의 기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독자여 , 그대가 받은 축복을 확신하고 싶거든, 그대의 정함 없는 기분의 말을 듣지 말고, 오직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요6:47)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예를 한 가지 들어 봅시다.
어느 시골 농부가 가축에 먹일 목초가 넉넉지 못했는데 마침 이웃에 사는 부자의 농장에서 초장 얼마를 세 놓는다는 말을 듣고, 청탁을 넣었다 합시다.
그런데 얼마 지나도록 부자에게서 소식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이웃 사람이 들려서 하는 말이 ,
“ 자네가 그 초장을 얻을 것이 틀림 없다고 생각하네.
자네 작년 크리스마스에 그 부자가 자네에게는 특별한 선물을 보낸 것을 생각해보게, EH 저번에 그이가 마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자네를 내다보고 고갯짓을 하지 않던가?“
이런 소리를 들은 농부는 마음이 희망으로 부풀었습니다.
그 이튿날 다른 이웃을 만나서 애기하던 끝에 그 이웃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 자네가 그 초장을 얻을 가망은 도저히 없다고 보네 그 아무개가 그 땅을 달라고 했다는데 자네도 잘 알지 않나 그 부자는 그 사람을 아주 좋아 하거든 그 언젠가도 둘이 같이 어디 다녀오지 않던가?”
이러구 저러구 하는 소리를 듣자 가련한 농부의 어제의 꿈은 땅에 떨어져 물거품같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하루는 희망을 가졌고 다음날은 불안과 의심이 꽉 찼습니다.
그러자 며칠 후 우편배달부가 와서 편지를 전했습니다.
부자의 필적을 알아본 농부는 봉투를 뜯으며 가슴이 뜁니다.
편지를 읽고 또 읽는 그의 얼굴에서 불안이 가시고 기쁨이 번지는 것을 보십시오.
“ 이제 결판이 났다 !”
그는 아내에게 소리칩니다.
“ 이젠 의심하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가장 유력한 조건으로 내가 원하는 동안은 그 땅을 나더러 쓰라고 부자는 말했다 이제 누구의 말도 들을 것 없다
그의(주인) 말이면 그만이지.
자 , 많은 가련한 영혼들의 상태가 이 의심하던 불쌍한 농부와 같아서 이 사람들의 의견이나 자신의 거짓된 마음의 느낌에 따라 동요하고 혼돈을 거듭하고 이지 않은가!
의심과 요행심 대신 확신을 가지는 길은 ,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데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느니라.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3절)
하나님이 말씀 하셨다면 불신자의 멸망이나 신자의 구원이나 확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나이다(시119:89)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 하셨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 전서 1장 25절)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는 신자에게는 그의 말씀이 모든 것을 굳게 확정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아니하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 민 23 : 19 )
나에게 다른 말이 필요 없고 ,
다른 구실을 원치 않는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나 위해 죽으셨으니 - 이제 족하다.
신자는 여기에다 이렇게 첨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 그렇다면 , 내가 올바른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무엇으로 확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하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올바른 대상을 신뢰합니까?
즉 하나님의 복되신 아들을 신뢰하느냐 말입니다.
예수를 신뢰한다는 일
어떤 대상의 사람을 신뢰한다는 일의 참 뜻은,
*. 당신이 품는 신뢰의 분량에 달려있지 않고,
*. 당신이 신뢰를 두는 그 대상자의 신임성에 달려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신뢰하기를 마치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이 생명줄을 붙잡듯이 붙잡고.
어떤 사람은 그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정도로 붙잡는다 합시다.
그렇다고 해서 전자가 후자보다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다 같이 동일한 진리를 발견한 것뿐입니다.
즉 자아의 전체는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신뢰 할 수 있다는 것,
그의 말씀을 고요히 의지할 수 있고
그의 다 이루신 속죄의 영원한 효력에 확신을 갖고 안식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발견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를 믿는다는 일의 뜻입니다.
진실로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 :47)
그런즉 독자시여, 그대가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 그대 자신의 수양의 노력이나 종교 의식이나 종교적 감화를 받을 때의
* 그대의 감정이나 또는 그대의 어릴 때부터의 도덕적 교양이나 기타 등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대가 비록 어떠한 것들 중의 어느 한 가지 혹은 그 전체에 대해 아무리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대가 그런 것들을 의존하다가는 영원히 멸망 받습니다.
어떠한 육신의 아름다운 모양으로라도 그대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연약한 믿음이라도 그것은 그대를 영원히 구원할 것이며,
그 이외의 어떤 것에 대한 가장 강한 믿음이라도 그것들은 속은 마음의 산물입니다.
그것들은 영멸의 지옥을 위장하는 사단의 덫의 눈가림들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에서 당신에게 주 예수그리스도를 단순하게 소개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즉 그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너희 자신의 마음은 자책 없이는 믿을 수가 없으나 예수의 마음은 전적인 신용을 가지고 믿어도 좋다는 말씀입니다.
복되신 주님, 복되신 주 예수여 누가 당신을 못 믿으며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지 아니 하오리까!
“ 나는 정말로 그를 믿습니다.”
어느 날 얼굴에 수심을 띈 한 부인이 말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구원을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예. 라고 답을 못하는 까닭은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될까 두려워서 못합니다.”
이 젊은 부인은 영국 중부 지방의 작은 도시에 사는 정육점 주인의 딸이었습니다.
그 날은 마침 장날이어서 그녀의 부친은 장에 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 했습니다.
자 이제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 더러 오늘 양을 몇 마리 샀는냐고 물었더니, 열 마리라고 대답 하셨다고 합시다.
다른 이가 들어와서 오늘 부친이 양을 몇 마리 사 오셨느냐고 물으면
당신은 내가 거짓말을 하게 될까봐 두려워서 말 못 하겠습니다, 그러겠습니까 ?
그 때 곁에 섰던 그녀의 어머니가 다분히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말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아버지를 거짓말 장이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까?
자 사랑하는 독자여 이 젊은 부인은 비록 겸손하고 조심스러운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 자신이
“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 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 그러나 내가 거짓말을 하게 될지도 모르므로 나는 내가 구원 받았다고 말 할 수 없다“고 함으로서 결국은 그리스도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그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참으로 믿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나는 믿어보려고 여러 번 애 썼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을 가졌는가 하고 내 속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나는 그것을 가진 것 같지를 않습니다.
아마 친구여, 그것을 발견하려는 그대의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대가 믿어보려고 노력한다는 자체가 그대의 잘못된 길에 섰다는 것을 밝히 보여줍니다.
내가 당신에게 깨우쳐 드리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비유 하나를 또 들겠습니다.
당신이 어느 조용한 저녁에 난로 가에 앉아있는데 , 어떤 사람이 집에 들려서 하는 말이 역장이 그날 오후 열차에 치여 철도 상에서 죽었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하는 사람으로 말하면 정직하지 못한 성품을 가지고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자주하는 사람으로 근방에 소문이 났습니다.
당신은 그 사람의 말을 믿겠습니까? 믿어보려고 하기나 하겠습니까?
“ 물론 안 믿습니다.
그런데 왜 안 믿습니까 ?
“그야 그 사람이 어떤 인물이라는 걸 내가 너무 잘 아니까요.”
“ 그러나 당신이 그 사람을 믿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
그것은 당신의 속을 들여다보거나 당신의 감정을 보고 그렇게 단정합니까?
“ 아니요 나는 그 소식을 가지고 온 사람을 보고 그렇게 단정 하지요.”
잠시 후 다른 이웃 사람이 또 들려서 하는 말이 ,
“ 역장이 화물차에 깔려서 그 즉석에서 사망 했답니다.
이 사람이 떠난 후에 당신은 조심스레 이렇게 말 하겠지요.
“ 이 소식은 이제 절반쯤 믿을 수 있구나 , 이 이웃 사람은 내가 어려서부터 아는 사람인데, 내 기억에 그 동안 내게 거짓말을 한일은 단 한번도 없으니까.”
나는 다시금 당신에게 묻습니다.
이번에도 당신이 그 소식을 절반쯤 믿게 된 것은 당신의 속을 들여다보거나 당신의 기분을 보고 그렇게 정했습니까?
아니요 나는 내게 소식을 전해준 이 이웃 사람의 성품을 보고 그럽니다.
자, 이 사람이 나간 후 잠시 있다가 셋째 번 이웃이 들려서 다시 그 섭섭한 소식을 전합니다.
그 때 당신은 이렇게 말 합니다.
“ 그래요 ? 당신이 말씀하니 이젠 믿겠습니다.
다시 나는 내 질문 ( 그러나 사실은 당신이 자신의 질문의 메아리입니다)을 던집니다.
“ 당신의 이웃을 그렇게 자신 있게 믿는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
내 이웃이 누구며 어떤 사람인지를 내가 아니까요. 그는 내게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 자 보십시오. 이와 꼭 같이 내가 복음을 믿은 까닭은 이 복음을 내게 전해 준 그 분을 내가 믿기 때문입니다.
“ 만일 우리가 사람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 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요일 5: 9.10)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 롬4:3)
어떤 불만스러운 신사가 목사에게 말 했습니다.
“ 목사님, 어쩌면 좋아요 ? 저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은 지혜롭고 조용하게 반문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 그러면
당신이 믿을 수 없는 그 분은 누구십니까 ?
이 질문이 해결의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이 신자는 천국에 가는 보장을 주는 믿음은
*. 그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그 어떤 형용할 수 없는 무엇으로 생가하고
*.그것을 자신 안에서만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언제나 자아의 외부에 계시는 한분을 쳐다보는 것이요.
신실하신 하나님의 증거를 고요히 청종하는 것임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부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은 외부를 바라보는데서 옵니다.
*. 사람이 해를 바라보면 자신의 그림자는 뒤로 숨습니다.
*. 우리는 나 자신과 하늘에 계시는 영광의 주님과를 동시에 볼 수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내 확신의 근거는 하나님의 복되신 아들의 품격 이라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즉 그가 완성하신 사역이 나를 영원히 안전하게 만들었습니다( 염소와 송아지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장12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 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9:28)
믿는 자에 관한 하나님의 마씀이 나를 요지부동하는 안전지대에 둡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서 구원의 길을 찾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구원의 지식을 찾았습니다.
“ 그러나 내가 구원을 이미 받았다면 내 믿음은 왜 이렇게 기복이 심합니까?.
이렇게 묻는 독자가 계실 것입니다. “ 나는 쉽사리 모든 기쁨과 위안을 다 잃어버리기 쉬우며 , 믿기 전과 꼭 같은 비참한 심령 상태에 빠질 때가 자주 있으니 왠 일입니까?
이런 질문은 우리들은 셋째 문제로 인도 합니다.
구원의 기쁨
성경의 교훈에 의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을 갖게 되는데 그 구원의 기쁨과 위안을 유지하게 되는 것은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에 의한다고 합니다.
먼저 당신이 기억해 둬야할 것은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누구든지 속에는 여전히 육 즉 우리가 자연인으로 출생할 때 타고 나온 악한 성품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그 악한 성품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이 육을 거스려 싸워 주십니다, 육의 행동 하나하나 그 동기와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거스려 싸우십니다.
신자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할 ” 때에는 성령은 그의 속에서 그 복된 열매들 - 사랑.희락.화평..“등등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갈5:22)
반대로 신자가 육적이요 세속적인 걸음을 걸을 때는 성령은 슬퍼하시고 그 열매는 그 육적 타락의 정도에 따라서 감소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성경 교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로 )
당신의 구원 ) 동행함
당신의 행실 )
당신의 기쁨 ) 동행함
만일 그리스도의 공로가 무너진다면 ( 하나님을 찬송하라 ! 그것은 결단코 무너지지 않는다!) 당신의 구원도 무너질 것입니다.
당신의 행실이 무너진다면 ( 조심하라 그럴 수가 있으니 ! ) 당신의 기쁨도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의 사도들에 관해 이런 기록이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리라 (행9:31)고 하였고, 또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행13:52)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 신령한 기쁨의 분량은 내가 구원 받은 후에 내가 걷는 신령한 생활의 분량과 정 비례하는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당신의 오해를 깨달았습니까?.
당신의 두 가지의 매우 판이한 사실, 즉 구원의 기쁨과 구원의 안전성을 혼돈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방종한 생활, 분노, 세속주의 등으로 당신이 성령을 근심케 한 결과 당신의 구원의 기쁨을 잃었던 것인데 그것을 당신의 구원의 안전성이 동요된 줄로 오해한 것입니다.
나는 다시 되풀이 합니다
당신의 안정성은 당신을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공로위에 달려있습니다
당신의 확신은 당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했습니다.
당신의 기쁨은 당신 안에 계시는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않는데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당신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하는 무슨 일을 하든지 , 아버지와 아들과의 당신의 교통은 당분간 실제적으로 중단되는 것이며, 다만 당신이 자신을 심판하고 , 당신의 죄를 고백 했을 때에만 교통의 기쁨은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어린 아들이 무슨 잘못을 범했다 합시다 무엇인가 과오를 저질렀다는 표시가 그의 얼굴에 분명히 보입니다.
반시간 전까지도 그 아이는 당신의 손을 잡고 뜰을 산보하면서 당신이 칭찬하고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도 좋아 하였습니다.
바꿔 말하면 그는 당신과의 교통을 누렸으며 당신의 느낌과 애정을 같이 즐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모든 것이 변하고 그 아이는 말썽꾸러기 불순종하는 아이 모양으로 방 한 구석에 서있습니다.
바로 한 폭의 불쌍한 그림입니다.
그가 제 잘못을 고백했기 때문에 그를 용서 한다고 다짐했지만
그의 교만과 고집이 풀리지 않고 그는 여전히 거기서 훌쩍이고 있습니다.
반시간 전의 기쁨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다 사라졌습니다. 왜... 당신과 그와의 교통이 방해되었기 때문입니다.
반시간 전에 있었던 그와 당신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것도 사라졌습니까? 그것도 틈이 생기고, 방해를 받았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
그와 당신과의 관계는 그의 출생에 달려있는 것이지 그의 행동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얼마 후 그는 방구석에서 나와서 마음을 풀고 겸손하게 모든 잘못을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에게 자복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그가 당신과 같이 불순종과 방종을 미워한다는 것을 알았고 이제 당신은 그를 품에 안고 연방 입을 맞춰줍니다. 교통이 회복되자 그의 기쁨도 회복되었습니다.
다윗 왕이 우리아의 아내로 말미암아 그 흉한 죄를 범했을 때 그는 기도하기를
주의 구원을 내게 회복 시키소서 하지 않고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 시키소서 하였던 것입니다. (시51:12)
이 비유를 조금 더 연장시켜 생각해 봅시다.
그 아이가 구석에 훌쩍이고 있을 때 “ 불이야!” 소리가 온 집안에서 일어났다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
아이는 방구석에서 집과 함께 타게 내버려 둡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마 당신이 맨 먼저 들어낼 사람은 그 아이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제 혈연의 사랑과 교통의 기쁨이라는 것은 다른 것들임을 잘 아셨을 줄 믿습니다.
이와 같이 신자가 죄를 지으면 교통은 일시 중단되고 기쁨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가 뉘우치는 마음으로 아버지께로 나아와 자신을 판단하고 죄를 자복하면 그 교통과 기쁨은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 히 12;7~13)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그의 죄가 사함 받은 줄을 확신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9)
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여, 그런즉 언제나 이 두 가지를 마음에 명심하고 있으라.-
구속의 결합 이상으로 강한 것이 없다는 것과,
교통의 결합 이상으로 자애로운 것이 없다는 것을 땅 위에와 지옥에 있는 모든 힘을 다 합쳐도 하나님의 구속의 결합은 \끊을 수 없으며
반대로 하찮은 농담 한 마디, 불순한 동기만으로서도 후자는 끊어지고 맙니다.
잡시 동안의 우울로 그대가 괴로운 중에 있다면 지체 말고 하나님 앞에 낮아져서 당신의 길을 살펴보고 당신의 기쁨을 빼앗는 그 원인을 발견 했으면 곧 그것을 빛 앞에 가지고 와서 당신의 아버지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고 도적을 쉽사리 용납했던 당신의 부주의와 방심을 가차 없이 자판하십시오.
그러나 결코 결코 결단코 당신의 안전성과 기쁨을 혼돈하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또 조심할 것은 신자의 죄에 대해서는 불신자의 죄에 대해서 보다 하나님의 심판이 조금 관대하게 내린다고는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사실(査實)하심에 있어서 두 가지 기준을 가지시지 않았으며 하나님은 그의 귀하신 아들을 부인하는 죄인들을 심판하지 아니하실 수 없슴과 꼭 같이 신자의 죄도 심판하시지 않고는 지나가실 수가 없으신 분입니다.
다만 두 죄인 사이에는 이 큰 차이가 있습니다.
즉 신자의 죄는 다 하나님이 아시는 바가 되고 하나님이 친히 예비하신 어린양이 갈보리의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에게 그 죄를 다 지우신 것이다, 그때 그곳에서 그 신자의 죄에 대한 최대 최종적인 심문이 끝났으며 심판은 신자를 대신한 그 복되신 대리자 위에 내렸던 것이다.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 하셨느니라. (벧전 2:24)
한편,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은 자신의 죄를 자기가 몸소 불 못에서 영원히 담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가 EH 죄를 범했을 때 그는 다시 “죄의 심문”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심판자 자신이 그 죄를 십자가에서 영원히 해결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통의 문제가 성령에 의해 제기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비유를 한 가지 더 들어 봅시다.
아름다운 달밤이어서 달빛이 유난히 빛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깊고 고요한 우물을 들여다보니 수면에 달이 선연히 떠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는 곁에 있는 벗에게 말합니다.
“ 오늘밤 달이 얼마나 둥글고 아름답습니까?”
그러자 그의 벗은 조그만 돌을 우물 안에 던졌습니다.
달을 감상하던 사람은 소리를 지릅니다.
저런 ! 달이 산산이 깨어지고 조각들이 어지럽게 흔들립니다.
그 때 그의 벗을 말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말입니까 !
“ 여보 위를 쳐다보시오 !”
달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변한 것은 달을 반사하던 우물의 상태입니다.
자 신자여 이 단순한 비유를 우리의 지식에 적용합시다.
당신의 마음은 그 우물입니다.
악을 용납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복되신 성령의 그리스도의 영광과 보배로움을 그대의 마음에 비춰서, 당신을 위로하며, 즐겁게 하십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에서 잘못된 생각을 품거나 생각 없는 농담 한마디라도 당신의 입술에서 새어나가는 순간 성령은 그 우물을 휘젓기 시작하십니다.
그러면 당신의 즐거운 체험은 산산 조각이 납니다.
당신의 마음은 불안하고 괴로와 지며 그러다가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죄를 자백하게 될 때 당신은 다시금 고요하고 아름다운 교통의 즐거움에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이 그렇게 온통 불안 할 때에라도
그리스도의 공로가 변했습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러니 당신의 구원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변하는 일도 있습니까. ?
분명히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구원도 추호도 흔들림도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변 했습니까 ?
당신 앞에 계시는 성령의 행동이 변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영광을 그대에게 계시하셔서 그대의 가슴에 그리스도의 열납 하시는 안도감을 주시는 대신 그대의 가슴에 그대의 죄와 무가치함을 깨닫게 하시는 일을 하시게 되므로 성령은 근심케 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대가 가지고 있던 평안과 기쁨을 제거하시고 당신이 당신의 죄를 재판하고 거부하시기를 성령님이 그것을 재판하시고 거부하시듯이 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과의 교통은 다시 회복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렇게 분부 하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 있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 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사랑하는 독자여 당신의 믿음이 아무리 약할지라도 당신의 의지하는 복되신 이는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신하라
예수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 (히13:18)
그가 이뤄놓으신 공로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느니라. (전 3:14)
그가 하신 말씀도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벧전 1;24,25).
이처럼 나의 믿음의 대상과 내 안정의 기초와 내 확신의 토대는 다 같이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내 사랑은 자주 식기도 하고
내 기쁨은 줄었다 늘었다 해도
그와 나 사이의 평화는 변함이 없다
여호와는 변함을 모르신다.
나는 변해도 그는 변치 않으신다.
내 사랑이 아닌 그의 사랑이 내 안식처
내 진리가 아닌 그의 진리가 나를 붙든다.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몇 등차로 여행하시고 계십니까?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키고 이 질문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롬3:4)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 쳤느니라. (요3:33)
그러면 사랑하는 독자여 이 “ 큰 구원”을 소유한 기쁨이 지금 그리고 “ 그가 오실 때 까지”
그대의 것이 되시기를 빕니다.
첫댓글 시간이 걸리는 글 이지만? 천천 히 읽어야 겠어요.
수고 하셧습 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1등차를 타고 있습니다.
[고전] 11: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고전] 11: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잘 보앗습니다. 스크렙해갑니다.
성도들이 성령을 근심케하는일이나 성령을 소멸(억누르는 것)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우리(자신)를 살피는 것으로 자기 양심에 꺼리낌이 있을때 하나님께 자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느니라, 데살로니가 전서 2장13절,,,아멘!
깊고 세밀하게 읽어야 할 내용이네요. 길어서 모니터상에서 읽는건 눈이 아파요.^^ 출력해서 찬찬히 보겠습니다.
글 써주신 것 하나 하나가 제게 필요한 주옥같은 내용들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