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 않는 사람이 성당안에서 두려움이 생긴다고 한다
그 두려움이 깊은 사람은 이로 인해 적지않는 사람이 냉담의 길로 들어선다고 합니다.
오래전의 일이고 그때와 다른 환경에서 살기에 말할수가 있는데요
저는 결혼하기 직전인 1980년도 대구주교좌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가 살고 있던 구역에는 봉덕성당이 있었지만 알지 못했지요
그러던 어느날 결혼을 한달 앞두고 있었지요
경상도에는 결혼 한달전에 신부측에 함파는 일이 있습니다
그안에는 신부가족들에게 주는 예물이 들어있는데 양복감같은 것이어서 이를 옷으로 만들어입을려면
한달정도 기간이 필요했지요 갑짜기 할려니까 저의 사촌형이 지고 갔습니다
그 처가 친척중에는 교우가 있었지요
그분이 혼배는 어떻게 할것인가에 대해서 물으셨습니다
그때에서야 혼배를 해야겠구나 하고 본당신부를 찾아갔지요
본당에는 거의 미사에 참여하지 않고 주교좌성당에만 단던 제가 본당신부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곳 지역은 단독주택뿐이어서 교우수가 얼마되지 안하서 본당신부님이 미사참석한
교우를 다 꿰고 있었지요
그래서 경우 혼배일정을 잡았지요 결혼식은 일요일에 하는데 토요일저녁에 관면혼배의 일정을 잡았지요
아내가 대구 가톨리대학전신인 효성여대를 다니고 있어서 그 친구중에는 교우가 있었지요
저는 제일모직 방적과 선배에게 부탁해서 신랑신부의 보증인이 되었지요
그리고 여러가지 이유로 냉담을 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서울로 직장을 옮기면서 서울근처인 서을근처 의왕시 내손동에 있는 포일공소에서 미사를 드렸지요
교구를 정리하기 위해서 대구로 내려가서 봉덕성당에서 카드를 갖고 올라와서
포일공소에 제출하였지요 포일공소는 안양에 있는 호계성당의 소속 공소였지요
그대에는 그곳이 공소인줄 몰랐지요 다만 미사가 끝나면 신부님은 그곳에 머물지 않고 승용차로
떠나는 것이 이상하게 할뿐이었지요
직장은 서울역앞이고 회사에서 출퇴근시 제공하는 버스가아니면
서울로 나오기도 어려웠고요 그 근처 과천시로 나올때에는 과천시에 있는 백화점버스를 이용했고
안양으로 나올때에는 안양시립병원차를 이용하였지요
차츰 서울남대문시장에서 출발해서 포일리까지 가는 좌석버스를 알게되었고
늦은시간에는 사당동에서 총알택시로 합승해ㅐ가면 갈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어느날 긎게 결심하고 고해성사를 드렸지요
신부님은 대뜸 '한번 냉담한 사람은 믿을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ㄴ때문이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할려고 하라고하시면서 보속으로 6개월동안 평일새벽미사를 드리고
하루 3번기도를 바치라고 했습니다
주일날에는 다른곳으로 가는 차편을 얻기가 어려워서 제가 신앙을 회복하는 다른길을 찾지 못했지요
저는 죽을힘을 다해서 하겠노라고 말씀드렸지요
서울역앞에 있는 대우센터의 출근시간은 8시였지요 그래서 내손동연립단지에서 7시출발합니다
캄캄한 새벽6시전에 일어나서 공소에서 미사를 드리고
조금 기다렷다가 연립마당으로 오는 버스를 타고 서울로 출근합니다
버스는 서울로 들어와서 남산 순환버스를 통해서 대우빌딩으로 들어오곤 했지요
겨울에는 눈이 내리면 남산순환도로가 미끄러워서 정시보다 한시간 늦은 9시에 도착하는데요
버스안에서는 온통 잠을 잤지요
만일 회사버스를 퇴근때 타지 못하면 좌석버스를 타고 오게되는데 그러면 큰도로변에 내리게되는데
내가 사는 연립까지 가는데 20여분이상을 걸어야 하고 여름이면 개구리소리가 정겹기만 했지요
본당에서 아는 교우들은 늘 두려움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기도를 잘 해야한다든지 아니면 미사독서를 하기 위해서 수십차례 읽어봐야 한다든지
하는 애기를 많이 들었지요그래서인지 피정등에서 신부님이 대표기도등을 맡기거나
아니면 공동기도를 할려고 해도 두려움에서 잘 나서지 않게 되고 숨어있기도 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여러사람들앞에서 기도드리는 것이 세련된후에 두려움이 사라진것이 아니고
내가 하는 기도중에서 버벅거림이나 실수가 있ㅇ도 별로 신경쓰지 않게 되면서부터였지요
본당에서는 원래 자신은 직접 하지 않으면서 하고나면 얼른달려와서 여러가지를 지적합니다
독서를 할때에 주일미사와 토요특전이나 아니면 평일새벽미사를 할때가 있지요
평일미사는 제1독서뿐이어서 저혼자 그것을 하게되는데요
보통 독서후에 잠시 묵상후에 화답송을 바치게되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독서자가 화답송까지
같이 해야 한다고해서 독서대에서 할때에 독서후에 잠시 뜸을 들였다가 화답송을 하는데 미사가
끝나자마자 어떤 자매님이 와서 여러가지로 따지는 것이었지요
이런일이 한두번이 아니라서 그때가 되면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하였지요
독서대에는 전례서가 펼쳐져있었고 독서대에 올라오는 사람들이 자신의 부분을 읽고
다음사람이 읽을수 있도록 페이지를 넘겨놓고 오지만 그다음 사람이 이를 잘 찾지 못할때가
있다. 제가 1독서를 하고 내려오면 어떤 자매님이 2독서를 준비하면서 드려움이 온것입니다
그래서 저더러 대신 올라가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때 저는 용기를 줘서 올라가게 합니다
사실 성당안에서 직접 해보면 별문제가 아닌데 다른사람들이 조언한답시고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로인해서 두려움이 생간다는 것입니다
다들 서로에게 용기를 주고 작은오류를 탓하지 않고 즐거운마음으로 미사를 하였으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이런일은 독서단의 얼례모임에서 선배들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용기를 얻은것이
제가 큰힘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고백성사의 드려움으 주제로 작성하는데 다른길로 빠져나가서 두려움에 대한 애기를 했네요
어느 피정에서 저녁에 단체로 고해성사시간을 갖게됩니다
어느 한방에 사람들이 모여서 성찰을 하고 성찰이 끝난사람부터 먼저 고해소로 갑니다
고해소로 가는 복도에는 컴컴한데 양쪽에 촛불로 길을 내어서 고해소로 안내됩니다
고해서 안은 이란성당의 고해소와는 달리 신부님과 마주 보게됩니다
이런것은 두려움보다는 신부님과 마치 상담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신부님과 함께 신부님의 도움을 받아서 하느님께 고백하는 것 말입니다. 다른사람은 어쩐지는
모르지만 저는 이방법이 훨씬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저의 본당에서 갈라진 성당에서 판공성당을 여러 고해소에서 드리게 되는데
그중 하나는 대면식으로 하기에 일부로 그 성당에 가서 하기도 하였지요
어떤분은 자신의 본당에서 고해성사를 하면 본당신부가 목소리를 알게되어서 그 다음부터는
그 신부의 얼굴을 잘 보기가 어렵다고 하는 분도 계신다고 합니다
혹시 목소리를 알아듣더라도 정작 신부님은 기억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고해소에서 저에 대한 소개를 한후에 죄고백을 합니다
저는 몇살이고 아내와 아들이 있는 중년남자입니다라고 말하면
저에 대해서 자상하게 상당해주고 충고도 해주신후에 보속과 사죄경을 주십니다
저에게도 편한 고해성사는 전체와 같이 하든지 충분한 성찰후에 하는 것입니다
저도 잘 몰랐지만 저의 이런모습을 잘 살펴보는 다른사람에게도 그 두려운문제가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