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미사響尾蛇
어제, 처형님 댁에 가서 오랜만에 청국장찌개를 곁들인 점심을 잘 먹고 이세돌과 박정환의 명인전 결승 2국 중계를 보고 있는데 처형님이 시집 '響尾蛇' 를 두 권을 내왔다. 파하巴下 이원섭 선생께서 1953년에 내신 시집, 그 이름은 수없이 들어 보았지만 실체는 볼 수 없었는데 62년 만에 내 앞에 등장한 것이다. 전시戰時에 낸 시집인데도 표지와 속표지만큼은 고급 종이를 쓰고 색깔을 넣어 인쇄한, 문신 화백의 표지화는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 선과 색에서 단순하면서도 세련되어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였다. 표지 그림은 본문 내용에 비해 아주 선명한 빛이어서 세월을 뛰어넘어 갓 그린 것처럼 신선하였다. 꼬리를 움직여 소리를 내면서 분홍빛 혀를 날림거리며 유턴하는 향미사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내게 '서주西疇'라는 호와 함께 서주기라는 글을 지어 주셔, 언젠가는 늘 호에 걸맞은 글을 쓰겠다는 꿈을 꾸게 하신 분이지만 섭섭한 일도 있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뜬금없이
“자네 혹시 ‘향미사’ 시집 가져가지 않았나.”
하시는 것이었다.
본 적도 보여달라고 말한 적도 없는 시집을 내가 가져갔다고 조금은 의심을 하신 것이다. 너무나 귀중한 책이어서 눈에 안 띄는 곳에 숨겨 두시곤 오랫동안 찾다가 안 나오니 누가 가져갔다고 결론을 내리신 것인데 내가 당첨된 것이다. 그 당시 말은 못했지만 좀 섭섭했는데 나중에 찾으셨다는 얘기를 하시면서도 꺼내서 보여주지 않았는데, 어제는 처형님이 한 권도 아닌 '향미사響尾蛇' 두 권을 내놓으며 한 권은 파하 선생이 아끼던 후배 시인에게 주기로 했다는 말을 듣으니 섭섭했다. '나한테 주지'하는 생각이 저절로 났다. 나중에 미안한지 나머지 한 권을 내게 주겠다고 했지만 마지막 한 권을 부인이 간직해야 한다는 생각에 덥석 받을 수가 없었다.
파하 선생이 돌아가신 지 7년 만에 존경하는 어른의 첫 시집을 대하니 감회가 남달랐다. 태블릿에 내장된 카메라로로 표지와 속표지를 찍고 내용을 다 찍으려고 했으나 활자가 작고 흐려 선명하게 나오지 않아, 나중에 이메일 '내게 쓰기'에 입력해 보내기로 하고 전문을 작은 소리로 읽어 보았는데 예상 외로 기독교적인 내용이 많았다. 오래 전에, 귀뚜라미 소리를 '가인'이 죽인 '아벨'의 피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로 그린 형님의 시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첫 시집에서는 성경 내용을 소재로 한 새롭고 독특한 시각의 여러 시가 내 마음을 울렸다. 혜화 전문학교 불교학과를 나오신 분으로 웬만한 기독교인보다 성경도 많이 읽으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러한 독서력이 시 작품으로 이렇게 많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늘 듣던 이야기와는 다른 독특한 시각으로 성서를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향미사'에는 두 달도 채 안 되는 기간에 쓰신 시 60여 편 중에서 뽑은 시를 실었다는데 2001년에 내신 파하 선생의 두 번째 시집 ‘내가 뱉은 가래침’도 마찬가지였다. 형님은 전반기와 후반기, 긴 세월 품고 있던 시정신을 두 달 동안에 콸콸 쏳아 놓으신 것이리라.
파하 선생의 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뭔가 다른 시에 비해 감동을 주는 무엇이 있고 다른 시와는 달리 이미지가 더 선명하다. 그런데 향미사는 여러 번 읽어도 항상 어려워 내가 좋아하는 파하 선생의 시 ‘진주’ 오랜만에 다시 읽어 본다.
바다가 그리운 날은
조개껍질이라도 내어서 보자
이것인들
진정 얼마나 목마르리오?
사발 가득히
물을 떠다 담가 주자
아마 울리니
달밤에 구렁이 울듯
제 고장 그리워 울리니
이 차갑고 딱딱한 것이
그리움에 어쩌면 진주를 배리니
현직에 있을 때, 직장 동료가 모 신문 수요 시단에 실린 '진주'를 오려 와 그 존재를 알게 된 작품인데 명시임이 분명하다.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그 소리를 알 수 없지만 구렁이 울음소리와 진주조개의 이미지로 선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죽음의 이미지가 가득한 곳에서 바다의 왕성한 생명과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몸부림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한데 다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진주'는 인간 생명의 핵심에서 빛나는, 인간미의 절정이거나 한 편의 완벽한 詩라고 감히 해석해 본다.
첫댓글 귀한 책을 손에 넣으신 보람이 크실 것 같습니다. 독서하는 열망 본받겠습니다.
얇은 시집이어서 단숨에 읽었지만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읽었으니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겠지요.
귀중본은 값이 엄청 난다든데요
갖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멋진 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