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드로의 눈물에서 발견한 사랑의 사명오늘 특별 새벽기도회에서 미국에서 오신 노진준 목사님의 베드로에 관한 설교를 들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는 말씀도 익숙하다.나는 오랫동안 이 두 사건을 하나로 연결하여 이해해 왔다.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으니 예수님께서도 세 번 사랑을 확인하신 것이 아닐까. 베드로가 세 번 사랑한다고 대답함으로써 세 번의 잘못은 용서받고,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그동안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다.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하기도 전에 이미 그의 연약함을 알고 계셨다.“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누가복음 22장 32절의 말씀이었다.예수님은 베드로가 넘어질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넘어지지 않도록 꾸짖으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가 다시 일어날 것까지 바라보고 계셨다.나는 문득 궁금해졌다.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선택하실 때부터 그들의 내면을 모두 알고 계셨던 것일까. 그들이 얼마나 충성스러울지, 얼마나 쉽게 흔들릴지, 그리고 어떤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까지 알고 계셨던 것일까.그렇다면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그의 실패를 모르고 시작된 사랑이 아니었다.그의 연약함을 아시면서도 선택하신 사랑이었다.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던 당시의 상황도 다시 생각해 보았다.자신이 그토록 믿고 따랐던 스승이 군인들에게 붙잡혀 갔다. 사람들에게 심문을 당하고 모욕을 받았다. 조금 전까지 나라와 민족의 희망이라고 믿었던 지도자가 무력하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베드로는 얼마나 두려웠을까.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너도 저 사람의 제자가 아니냐?”자칫하면 자신도 붙잡혀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나라면 어떻게 했을까.과연 나는 당당하게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쉽게 자신할 수 없었다.그런데 오늘 설교에서 새롭게 발견한 것은 베드로의 두려움보다 오히려 그의 사랑이었다.다른 제자들이 모두 흩어진 뒤에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걱정되어 대제사장의 집까지 따라갔다.자신의 안전만 생각했다면 숨어 있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었다. 그분을 향한 사랑이 두려움 속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던 것이다.그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인한 것이 아니었다.사랑했지만 두려움을 이겨낼 만큼 강하지 못했던 것이다.이렇게 생각하니 베드로의 눈물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그 눈물은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눈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했으나 끝까지 지키지 못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는 눈물이었을지도 모른다.그러나 더 놀라운 일은 그 이후에 일어났다.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다.나는 이 대목에서 잠시 생각이 멈추었다.우리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제자들과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식사했다는 성경의 기록을 읽는다.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이나 자연과학적 이해만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믿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일 것이다. 나 역시 그 어려움을 이해한다.하지만 만일 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뜻은 아닐까.우리의 경험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곧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나는 그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다만 인간이 알고 있는 세계와 아직 알지 못하는 세계 사이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경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한 생각 속에서 다시 갈릴리 바닷가의 장면으로 돌아왔다.밤새 물고기를 잡지 못했던 제자들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베드로는 주님이라는 말을 듣자 물속으로 뛰어들어 그분께 다가갔다.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다.“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베드로는 대답했다.“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나는 예전에는 이 장면을 세 번의 잘못을 세 번의 사랑으로 지워 주시는 용서의 장면으로만 이해했다.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른 의미가 다가왔다.베드로는 이제 자신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주장할 수 없었다.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장담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 번이나 부인했다.그렇다면 다시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이제는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는 고백이 아니었을 것이다.주님, 저는 주님을 끝까지 지킬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제 마음만은 진실입니다.어쩌면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오늘 설교는 나에게 사랑의 고백과 사랑을 실천하는 능력이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했다.우리는 진심으로 사랑하면서도 실수한다.사랑하면서도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선한 뜻을 품고 시작한 일에서도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넘어지곤 한다.그렇다고 그 사랑이 모두 거짓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베드로를 꾸짖는 대신 새로운 말씀을 주셨다.“내 어린 양을 먹이라.”“내 양을 치라.”“내 양을 먹이라.”나는 이 말씀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양을 먹인다는 것은 무엇일까.먹을 것을 주어 배고프지 않게 하는 일일 것이다. 위험한 곳으로 가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병들거나 약해진 양을 살피고, 어린 양이 자라도록 돌보는 일도 포함될 것이다.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늘 나에게 같은 말씀을 하신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나는 목회자가 아니다.교회를 이끄는 사람도 아니다.그저 오랜 세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하다가 이제 은퇴하여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한 사람일 뿐이다.그러나 내 주변에도 사람들이 있다.나이가 들어 새로운 것을 배우기 어려워하는 동료들이 있다. 서로의 소식을 모르고 지내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반가운 이름을 발견하는 옛 동료들도 있다. 작은 관심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있다.그동안 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노력해 왔다.때로는 소식을 전하고, 때로는 만남을 주선하고, 때로는 사진과 영상을 만들어 지난 시간을 다시 떠올릴 수 있도록 도왔다.그런 일들이 누군가에게 작은 기쁨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오늘 문득 새로운 질문이 생겼다.나는 왜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그저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일까.누군가가 고맙다고 말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일까.아니면 정말로 그 사람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고 싶어서일까.물론 이런 마음들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누군가를 돕는 일이 나 자신에게도 기쁨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그러나 그 기쁨이 어느 순간 나의 목적이 되어 버린다면, 내가 돌보아야 할 사람보다 나 자신의 만족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될지도 모른다.양을 돌보는 목자는 양이 자신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기를 기다리며 먹이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양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이 목자의 일이다.나는 오늘 그 차이를 다시 생각했다.사람들을 내 방식대로 행복하게 만들어 주려고 애쓰는 것과 그 사람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며 곁에서 돕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일 수 있다.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해 왔던 여러 활동도 이 관점에서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그러나 모든 사람을 내가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나에게는 모든 사람을 책임질 능력도 없고, 그럴 권한도 없다.다만 오늘 내 곁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이 무엇인지 살피면 될 것이다.한 사람의 안부를 묻는 일.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다시 인사를 나누도록 돕는 일.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싶어 하는 동료에게 내가 아는 것을 나누는 일.누군가의 소중한 순간을 사진과 영상으로 남겨 주는 일.그리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 주는 일.이런 작은 행동들도 누군가를 먹이고 돌보는 사랑의 한 모습이 될 수 있지 않을까.물론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양은 우선 베드로에게 맡기신 주님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나는 오늘 그 말씀을 내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보라는 개인적인 부름으로 받아들이고 싶어졌다.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느냐고 물으시지 않았다.먼저 사랑을 물으셨다.그리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로 이어 가도록 하셨다.오늘 새벽, 나는 그 말씀을 들으며 한 가지를 새롭게 깨달았다.사랑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나는 베드로처럼 넘어질 수 있다.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일에서도 서운함을 느낄 수 있고, 때로는 내가 한 일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기대할 수도 있다.그러나 그런 연약함 때문에 사랑하기를 포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그의 실패보다 사랑의 가능성을 보셨다면, 나 역시 나 자신의 부족함만 바라보며 머물 필요는 없겠다.오늘 새벽기도회를 마치면서 나는 하나의 질문을 마음에 품었다.주님, 오늘 제가 먹이고 돌보아야 할 양은 누구입니까?그리고 그 양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시오.아직 그 대답을 알지는 못한다.어쩌면 내일도 모를 것이다.그러나 조급하게 답을 만들어 내지는 않으려고 한다.하루를 살아가면서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내 마음을 살피다 보면 조금씩 알게 될지도 모른다.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이 질문을 다시 드려 보기로 했다.“주님, 오늘은 제가 누구를 어떻게 돌보면 좋겠습니까?”베드로에게 주셨던 그 오래된 말씀이 오늘 새벽에는 내 삶을 향한 질문으로 다가왔다.그 질문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어쩌면 그것이 오늘 나에게 맡겨진 작고 조용한 사명인지도 모르겠다.[1]https://suno.com/song/713b157f-c6e6-4467-a013-da920edc95de
Dawn over the Sea of Gal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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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https://suno.com/song/9e05ab8e-43f9-4d0b-b08d-b605346ca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