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내가 상해와 중경에 있을 때 써 놓은 『백범일지』를 한글 철자법에 준하여 국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끝에 본국에 돌아온 뒤의 일을 첨가하였다.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그리고 하편은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었다. 나는 살아서 고국에 돌아와 이 책을 출판할 것은 꿈도 꾸지 아니하였다. 나는 우리의 완전한 독립국가가 선 뒤 이것이 지나간 이야기로 동포들의 눈에 비춰지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행이라 할까 불행이라 할까, 아직 독립의 일은 이루지 못하고 내 죽지 못한 생명만 남아서 고국에 돌아와, 이 책을 동포의 앞에 내놓게 되니 실로 감개무량하다. 나를 사랑하는 몇 친구들이 이 책을 발행하는 것이 동포에게 다소의 이익을 드림이 있다 하기로, 나도 허락하였다. 이 책을 발행하기 위하여 국사원 안에 출판소를 두고 김지림 군과 삼종질 흥두가 편집과 예약·수리의 일을 하고 있는바, 혹은 번역과 한글 철자법 수정으로, 혹은 비용과 용지의 마련으로, 혹은 인쇄로 여러 친구와 여러 기관에서 힘쓰고 수고한 데 대하여 고마운 뜻을 표하여 둔다. 끝에 붙인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을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맑스―레닌―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나의 소원]은 이러한 동기, 이러한 의미에서 실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품은, 내가 믿는 우리 민족철학의 대강령을 적어본 것이다. 그러므로 동포 여러분은 이 한 편을 주의하여 읽어주셔서, 저 마다의 민족철학을 찾아 세우는 데 참고를 삼고 자극을 삼아주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내가 이 책 상편을 쓸 때 열 살 내외이던 두 아들 중에서, 큰아들 인은 그 젊은 아내와 어린 딸 하나를 남기고 중경에서 죽었고, 작은아들 신이가 스물여섯 살이 되어 미국으로부터 돌아와 아직 홀몸으로 내 곁을 들고 있다. 그는 중국의 군인인 동시에 미국의 비행장교다. 그는 장차 우리나라의 군인이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동지들 중에 대부분은 생존해서 독립의 일에 헌신하고 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많다. 최광옥·안창호·양기탁·현익철·이동녕·차이석, 이들은 모두 이제 없다.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나는 만족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생에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발행하는 데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으로서이다. 백범(白凡)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는다.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단군기원 사천이백팔십년 십일월 십오일(1947. 11. 15) 개천절날.
너희들이 아직 어리고 반만리 먼 곳에 있어 수시로 나의 이야기를 말해 줄 수 없구나. 그래서 그간 내가 겪어온 바를 간략히 적어 몇몇 동지에게 맡겨 너희들이 아비의 경력을 알고 싶어할 정도로 성장하거든 보여주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너희들이 장성하였으면 부자간에 서로 따뜻한 사랑의 대화로 족할 것이나, 세상일이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내 나이는 벌써 쉰 셋이건만 너희들은 겨우 열 살, 일곱 살의 어린아이니, 너희들의 나이와 지식이 더할수록 나의 정신과 기력은 쇠퇴할 따름이다. 또한 나는 이미 왜구(倭仇)에게 선전포고를 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선(死線)에 선 몸이 아니냐. 지금 일지를 기록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한 사람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나를 본받을 필요는 없지만, 너희들이 성장하여 아비의 일생 경력을 알 곳이 없기 때문에 이 일지를 쓰는 것이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오래된 사실들이라 잊어버린 것이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부러 지어낸 것은 전혀 없으니 믿어주기 바란다. 대한민국 11년(1929) 5월 3일 상해(上海) 법조계(法租界) 마랑로(馬浪路) 보경리(普慶里)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집필을 완료하다. 1) 『백범일지』 상권의 집필을 완료하고 난 후인 1929년 7월 7일, 백범은 이러한 부탁의 서신과 더불어 『백범일지』 상권의 '등사본'을 미국에 있는 동지들에게 보냈다. 그중 하나가 현재 미국 콜롬비아대학에 보관되어 있다. 2) 원래는 54세였는데 해방 후 교열하면서 53세로 고쳤다. 발문을 서문으로 옮기면서 집필 종료시기가 아닌 집필 시작시기(1928년)로 고친 듯하다. 3) 장남 김인(金仁)은 1918년 11월 12일생(음), 차남 김신(金信)은 1922년 8월 1일생(음)이다. 따라서 1929년 당시 김인이 12세, 김신은 8세였다. 4) 이러한 사정으로 본문의 날짜나 인명 등 사실 관계에서 여러 가지 착오가 있을 수 있다. 5) 이것은 집필 종료시점이다. 백범은 1년 2개월만에 『백범일지』 상권의 집필을 완료하였다. 따라서 집필을 시작한 시기는 1928년 2월말에서 3월초이다. 6) 상해 임시정부 청사는 1919년 4월 10일 김신부로(金神父路)에 자리한 이후, 장안로(長安路)·고잉의로(高仍依路)·하비로(霞飛路)·포석로(蒲石路) 등으로 옮겨 다니다, 1926년부터 마랑로(현재 馬當路) 보경리(普慶里) 4호에 있었다. 이 건물은 상해시대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이다.
『하권』은 중경(重慶) 화평로(和平路) 오사야항(吳師爺港) 1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67세(1942년) 때 집필. 『백범일지』 상권은 53세 때 상해 법조계(法租界) 마랑로(馬浪路) 보경리(普慶里)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1년여 시간을 들여서 기술한 것이다. 그 동기로 말하면, 젊은 나이[弱冠]에 글공부를 걷어치우고 예순[耳順]이 되도록 큰 뜻을 품은 채, 나의 보잘것없는 역량과 고루한 재주를 돌아보지 않고 성패와 영욕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30여 년 분투하였으나, 하나도 이룩한 것이 없었다. 10여 년 동안 임시정부를 고수하였으나, 기미년(己未年: 1919) 이후 독립운동이 점점 퇴조하여 정부라는 명칭마저 간수하기 어려웠다. 당시 떠돌던 말과 같이, 몇몇 동지와 더불어 고성낙일(孤城落日)에 슬픈 깃발을 날리며 스스로 헤아리기를, 독립운동도 부진하고 나이도 죽을 때가 가까워졌으니,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지 못한다"는 말처럼 무슨 일이든지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침체한 국면을 타개할 목적으로 한편으로는 미국·하와이 동포들에게 편지하여 금전의 후원을 부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혈남아(鐵血男兒)들을 물색하여 테러(암살·파괴)운동을 계획하던 때 『백범일지』 상권을 기술하였다. 그후 이봉창의 동경의거와 윤봉길의 홍구의거 등이 진행되어 천만다행으로 성공하였으므로 쓸모 없는 이 몸[臭皮囊]도 최후를 고할까 하여, 본국에 있는 자식들이 성장하여 해외로 나오거든 반드시 전해 달라는 부탁으로, 상권을 등사하여 미국·하와이에 있는 몇몇 동지에게 보냈다. 그런데 하권을 쓰는 지금에는 불행히도 비천한 목숨이 잠시 보존되고 자식들도 이미 성장하였으니 상권을 등사하여 부탁한 것은 문제가 없게 되었다.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전후(前後) 정세를 논하면, 상권을 기술하던 때 임시정부는 외국인은 고사하고 한인도 국무위원들과 10여 명의 의정원 의원 이외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으니, 당시 일반의 평판과 같이 임시정부는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었다. 그런데 하권을 쓸 무렵에는 의정원 의원과 국무위원들의 얼굴에서 수심에 찬 기색[暮氣]도 싹 가시고 내무·외무·군무·재무 등 4부 행정이 비약적으로 진전되었다. 내정(內政)으로 말하면, 중국 관내(關內)의 한인 각 당 각 파가 모두 임시정부를 옹호·지지하고, 미주·멕시코·쿠바 각국의 한인 교포 만여 명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자금을 임시정부로 상납하였다. 외교로 말하면, 임시정부 원년(1919) 이후 국제 외교에 꾸준히 노력하였으나, 중·소·미 등 정부 당국자들의 비공식적인 찬조가 가끔 있었을 뿐 공식적인 응원은 없었다. 오늘에 이르러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羅斯福]가 "장래 한국이 완전 독립하여야겠다"고 전세계를 향하여 공식으로 널리 알렸고, 중국의 입법원장 손과(孫科) 씨는 공식석상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박멸하는 중국의 양책(良策)이 제일 먼저 한국 임시정부 승인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한편 임시정부에서도 워싱턴[華盛頓]에 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이승만 박사를 위원장에 임명하여 외교·선전 방면에 노력하고 있다. 군정으로는, 한국광복군이 정식 성립되어 이청천으로 총사령을 임명하고, 서안(西安)에 사령부를 설치하여 병사 모집과 함께 훈련작전을 계획·실시 중이다. 재정으로 말하면, 본국 동포들의 비밀 연납(捐納)과 미주·하와이 한인 동포들의 세금 명목 상납으로 충당했는데, 왜의 강압과 운동의 퇴조로 원년(1919)보다 2년(1920)의 숫자가 감소되고, 그후 점점 더 감소되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의 직무도 정지되고 총장·차장들 중에서 투항하거나 귀국하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러한 지경이니 그 아랫사람은 더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며, 그 중요 원인은 경제적 곤란이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의 홍구 사건 이후 내·외국인의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가 호전되어, 정부의 재정 수입고도 해마다 증가하여 23년(1941)에는 수입이 53만 원 이상에 달하니, 임시정부 설립 이래 최고 기록을 돌파하였다. 이때부터 수백 수천 배로 증가될 단계에 들어섰다. 상해 불란서 조계지 보경리 4호 2층에서 참담하고 고난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최대·최후의 결심을 하고 본 일지 상권을 쓰던 때에 비하면, 지금의 임시정부는 약간의 진보 상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나 자신으로 말하면 날마다 늙어가고 병드니, 상해시대를 '죽자꾸나 시대'라 한다면 중경시대는 '죽어가는 시대'라 하겠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入城式)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세상은 고해(苦海)라더니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타살보다 자살은 결심만 강하면 쉬운 듯하지만, 자살도 자유가 있는 데서나 가능한 것이다. 나도 옥중에서 두 번이나 ―치하포 사건으로 투옥되어 인천옥에서 장티푸스에 걸렸을 때, 그리고 17년 후 다시 인천감옥으로 돌아와 인천항 축항공사를 할 때― 자살하려다 실패하였다. 서대문감옥에서 안매산(安梅山) 명근 형이 굶어 죽기를 결심하고 조용히 묻거늘 나는 찬성하였다. 그가 3∼4일 동안 배가 아프니 머리가 아프니 하는 핑계로 음식을 끊었으나, 눈치 빠른 왜놈 간수가 알아차리고 의사에게 진찰케 하고 매산을 결박한 후 강제로 입을 벌리고 계란을 풀어 넣었다. 결국 매산이 "자살을 단념하겠노라"고 통고를 한 것을 보면, 자유를 잃으면 자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朴堤上)이, "내 차라리 계림(鷄林)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倭王)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제상은 왜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준다는 것도 물리치고 달게 죽임을 받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함에서였다. 근래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나라를 어느 이웃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고 밖에 볼 길이 없다. 나는 공자·석가·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어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이 어느 민족 안에서나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남는 것이다.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동포(四海同胞)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완전함을 안다. 나라마다 안으로는 정치상·경제상·사회상으로 불평등·불합리가 있고, 밖으로 국제적으로는 나라와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 시기·알력·침략, 그리고 그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작고 큰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어서, 많은 생명과 재물을 희생하고도 좋은 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심의 불안과 도덕의 타락은 갈수록 더하니, 이래 가지고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어 인류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이러하므로 우리 민족의 독립이란 결코 삼천리 삼천만의 일이 아니라 진실로 세계 전체의 운명에 관한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곧 인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自屈之心)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어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니,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양반 정치도 일종의 계급 독재이어니와 이것은 수백년 계속하였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일의 나치스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학문·사회생활·가정생활·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경제·산업에까지 미치었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시방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즉 헤겔에게서 받은 변증법,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 이 두 가지와, 아담 스미드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일획(一点一劃)이라도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에 조선의 사문난적에 대한 것 이상이다. 만일 이러한 정치가 세계에 퍼진다면 전 인류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하나로 통일될 법도 하거니와, 설사 그렇게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행히 잘못된 이론일진대, 그런 큰 인류의 불행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 학설의 기초인 헤겔의 변증법 이론이란 것이 이미 여러 학자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전면적 진리가 아닌 것이 알려지지 아니하였는가. 자연계의 변천이 변증법에 의하지 아니함은 뉴튼·아인슈타인 등 모든 과학자들의 학설을 보아서 분명하다. 그러므로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나는 노자(老子)의 무위(無爲)를 그대로 믿는 자는 아니어니와, 정치에 있어서 너무 인공을 가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는 자이다. 대개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가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생각,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 속한 진보를 보이는 듯하더라도 필경은 병통이 생겨서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많다. 개인생활에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국민은 군대의 병정도 아니요, 감옥의 죄수도 아니다. 한 사람 또 몇 사람의 호령으로 끌고 가는 것이 극히 부자연하고 또 위태한 일인 것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스 독일이 불행하게도 가장 잘 증명하고 있지 아니한가. 미국은 이러한 독재국에 비겨서는 심히 통일이 무력한 것 같고 일의 진행이 느린 듯하여도, 그 결과로 보건대 가장 큰 힘을 발하고 있으니 이것은 그 나라의 민주주의 정치의 효과이다. 무슨 일을 의논할 때에 처음에는 백성들이 저마다 제 의견을 발표하여서 훤훤효효(喧喧段段)하여 귀일(歸一)할 바를 모르는 것 같지만, 갑론을박(甲論乙駁)으로 서로 토론하는 동안에 의견이 차차 정리되어서 마침내 두어 큰 진영으로 포섭되었다가, 다시 다수결의 방법으로 한 결론에 달하여 국회의 결의가 되고, 원수의 결재를 얻어 법률이 이루어지면, 이에 국민의 의사가 결정되어 요지부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양으로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식이요, 그 내용은 아니다. 즉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 이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이다. 국론(國論), 즉 국민의 의사의 내용은 그때 그때의 국민의 언론전으로 결정되는 것이어서, 어느 개인이나 당파의 특정한 철학적 이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님이 미국식 민주주의의 특색이다. 다시 말하면 언론·투표·다수결 복종이라는 절차만 밟으면 어떠한 철학에 기초한 법률도 정책도 만들 수 있으니, 이것을 제한하는 것은 오직 그 헌법의 조문뿐이다. 그런데 헌법도 결코 독재국의 그것과 같이 신성불가침의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절차로 개정할 수가 있는 것이니, 이러므로 민주, 즉 백성이 나라의 주권자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라에서 국론을 움직이려면 그중에서 어떤 개인이나 당파를 움직여서 되지 아니하고, 그 나라 국민의 의견을 움직여서 된다.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이상에 말한 것으로 내 정치 이념이 대강 짐작될 것이다. 나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하여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그렇다고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그대로 직역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련의 독재적인 민주주의에 대하여 미국의 언론 자유적인 민주주의를 비교하여서 그 가치를 판단하였을 뿐이다.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기초로 한 자를 취한다는 말이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가까이 이조시대로 보더라도 홍문관(弘文館)·사간원(司諫院)·사헌부(司憲府) 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賢人)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도로 멋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역대의 정치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文運)에 보태는 일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國祖)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또 우리 민족의 재주와 정신과 과거의 단련이 이 사명을 달하기에 넉넉하고, 국토의 위치와 기타의 지리적 조건이 그러하며, 또 1차 2차 세계대전을 치른 인류의 요구가 그러하며, 이러한 시대에 새로 나라를 고쳐 세우는 우리의 서 있는 시기가 그러하다고 믿는다.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최고 문화 건설의 사명을 달할 민족은 일언이 폐지하면, 모두 성인(聖人)을 만드는 데 있다. 대한(大韓)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적이 우리를 누르고 있을 때에는 미워하고 분해하는 살벌·투쟁의 정신을 길렀었거니와, 적은 이미 물러갔으니 우리는 증오의 투쟁을 버리고 화합의 건설을 일삼을 때다. 집안이 불화하면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동포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 우리의 용모에서는 화기가 빛나야 한다. 우리 국토 안에는 언제나 춘풍(春風)이 태탕(鋏蕩)하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 국민 각자가 한번 마음을 고쳐먹음으로써 되고, 그러한 정신의 교육으로 영속될 것이다.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로 사명을 삼는 우리 민족의 각원(各員)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우리 말에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드는 일은 내가 앞서 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仁厚之德)이란 것이다. 이러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산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들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며, 촌락과 도시는 깨끗하고 풍성하고 화평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동포, 즉 대한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얼굴에는 항상 화기가 있고, 몸에서는 덕의 향기를 발할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불행하려 하여도 불행할 수 없고, 망하려 하여도 망할 수 없는 것이다. 민족의 행복은 결코 계급투쟁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개인의 행복이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끝없는 계급투쟁을 낳아서 국토의 피가 마를 날이 없고, 내가 이기심으로 남을 해하면 천하가 이기심으로 나를 해할 것이니, 이것은 조금 얻고 많이 빼앗기는 법이다. 일본의 이번 당한 보복은 국제적·민족적으로도 그러함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실례다. 이상에 말한 것은 내가 바라는 새 나라의 용모의 일단을 그린 것이어니와, 동포 여러분! 이러한 나라가 될진대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네 자손을 이러한 나라에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옛날 한토(漢土)의 기자(箕子)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孔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仁)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나도 일찍이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거니와 내가 교육에서 바라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70이 넘었으니, 직접 국민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 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1947년 샛문 밖에서 백범 출간사
『백범일지』 판본에 대한 해제 일반적으로 역사적 문헌에 대한 원전비평(textual criticism)은 매우 중요한 독자의 연구 영역으로 인정되고 있다. 더욱이 20여 종 이상의 다양한 출간본을 지닌 『백범일지』의 경우 원전 비평의 필요성은 그만큼 절실하다. 그래야만 판을 거듭함에 따라 생기는 와전을 수정하고, 텍스트(text) 본래의 순수성(purity)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94년 6월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가 소장한 『백범일지』 친필본이 영인되었고, 그외에도 국외의 등사본과 국내의 필사본이 남아 있어, 이러한 저본들을 활용하면 이미 출간된 다양한 교열본의 문헌적 친족관계와 내용의 차이를 검토할 수 있다. 1. 원본 확정 출간본 『백범일지』의 경우 다양한 종류 때문인지 몰라도 서로 원본에 의거하였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원본 의거가 책의 권위를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논의는 여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 먼저 원본에 대한 정의부터 간단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 저명한 저서의 경우 일반적으로 ① 원저자가 처음 집필하고, ② 이를 다른 사람들이 등사·필사하거나, ③ 공식적으로 출간되기도 하며, ④ 원저자 또한 첫 집필을 완료한 이후 이러저러한 수정과 보완을 하기도 한다. 여기서 ①과 ④를 원본이라 할 수 있다면 ②는 등사본·필사본, ③은 출간본이라 한다. 『백범일지』는 그 내용 구성이 상권과 하권 그리고 [나의 소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러한 모든 내용을 충족시켜 주는 완벽한 의미의 원본은 없다. 그러나 원본을 가장 많이 포함하고 있는 것은 분명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은 백범의 영식(令息) 김신 장군이 비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1994년 6월 집문당에서 영인한 바 있다. 이 책에는 우선 해방 이후 집필한 1942년 이후의 『백범일지』와 [나의 소원]이 없다. 또 『백범일지』 가운데 최초 집필 부분 이외에, 그후 수정하거나 추가한 부분이 있고, 더욱이 다른 사람이 필사한 부분도 섞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은 얼마 되지 않으므로, 이것을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하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저본으로 『백범일지』 원본의 기본적인 체제와 내용을 검토할 수 있다. 『백범일지』 원본은 한문과 고어가 많은 국한문 혼용체의 세로쓰기로 되어 있으며, 상권이 하권의 3배 정도 분량이다. 상·하권 모두 원고지에 씌어 있지만, 용지와 필기구는 서로 다르다. 상권의 용지는 450자(30×15) 파란색 원고지로 귀두에 '원고용지 국무원'(原稿用紙 國務院)이라 씌어 있고, 필기구는 대부분 펜 또는 만년필이다. 하권은 상권과 달리 2,400자(24×100) 빨간색 원고지에 대부분 붓으로 조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1) 상권 상권은 머리말에 해당하는 [두 아들에게 주는 글](與仁信兩兒書)과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신 소장본(영인본)의 [두 아들에게 주는 글]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이 부분이 이 책에서 유일하게 백범의 친필이 아니며, 사용된 용지 또한 본문의 원고지와는 다른 갱지라는 점이다. 또 다른 특징은 집필 당시 백범의 나이인데, 등사본·필사본의 54세와는 달리 53세로 기록하고 있다. 백범은 1928년(53세) 3월경에 『백범일지』 상권의 집필을 시작하여, 이듬해(54세) 5월 3일 종료했는데, 아마도 이 책에서는 집필 종료 후(54세) 쓴 서문을 앞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집필 시작 시기의 나이(53세)로 수정한 것인 듯하다. 아무튼 이 책의 [두 아들에게 주는 글]은 백범의 친필이 아니며, 시기적으로도 다음에 살펴볼 '등사본'보다 이후의 것이다. 상권을 집필한 동기와 당시의 실정은 머리말인 [두 아들에게 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는 백범이 어머니와 두 아들을 고국으로 보내고, 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피선되어 유명무실한 임시정부를 위해 고군분투하던 어려운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범일지』를 집필한 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어린 자식에게 남기는 일종의 유서(遺書)와 같은 것이었다. 상권의 본문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앞부분 일부(一. 祖先과 家庭, 二. 出生 及 幼年時代)는 본문 속에 일련번호로 목차를 정비하였으며, 붓으로 집필하였다. 반면 뒤의 대부분은 원고지 본란에 펜 또는 만년필로 기록하고 목차는 주로 원고지 상단의 여백에 일정한 표식(∞)과 더불어 병기하였다. 여기서 펜으로 기록한 뒷부분이 1928∼1929년 처음 집필 당시의 원본 그대로이며, 붓으로 정서한 앞부분은 책으로 출간하기 이전 어느 시점에서 시범적으로 다시 정비한 부분이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김신 소장본의 경우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이지만, 면밀하게 조사해 보면 머리말은 다른 사람이 필사한 것, 본문의 앞부분 일부는 백범이 다시 정비한 부분, 뒤의 대부분은 최초 집필 당시의 원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하권 하권 역시 머리말인 [서문](自引言)과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권의 [서문]도 본문 앞에 있지만, 본문 이후에 집필한 것이다. 그것은 필기도구가 본문의 후반부와 일치하며, 필사본에 서문이 책의 마지막에 첨부되어 있는 것 등으로도 방증할 수 있다. 하권의 집필 종료시기는, [서문]에 기록된 백범 나이 67세와 본문 내용의 끝부분이 대한민국 24년(1942) 2월인 점 등으로 살펴볼 때 1942년이다. 그런데 하권의 [서문]에는 1943년 11월의 '카이로회담'을 의미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시기가 어긋남을 알 수 있다. 이 점으로 보아 하권 역시 집필 종료 후 일정 시점이 지난 후 [서문]이 다시 수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권과는 달리 하권 집필 당시는 임시정부의 사정이 많이 개선되고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등 정세가 많이 호전되었다. 또한 백범의 두 아들도 장성한 상태였다. 따라서 백범의 지위, 가정의 형편, 임시정부의 사정 등을 고려할 때, 하권의 집필 목적은 백범의 개인사보다는 임시정부의 활동을 선전하고 기금을 확보하기 위한 측면이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세가 반영되어, 상권이 주로 백범의 성장과정과 다양한 경력을 소개하고 있다면, 하권은 임시정부와 그 저변의 일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하권의 본문에는 첫 목차(上海到着)를 원고지 여백에 병기한 것 이외에 어떠한 목차도 설정되어 있지 않다. 즉 백범은 상권을 집필하고 난 뒤 적절한 목차를 원고지 여백에 병기하였으나, 하권의 경우 그러한 여유마저 없었던 듯하다. 하권 집필 종료 당시는 태평양전쟁의 발발 등으로 백범이 매우 바쁜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검토에서 알 수 있듯 하권의 [서문]은 재집필한 것이며, 본문은 목차마저 설정되지 못한 일종의 수고(手稿)였다. 2. 등사본과 필사본 1) 등사본 백범은 『백범일지』 상권 집필을 끝내고 두 달 후인 1929년 7월 7일 그것을 등사(謄寫)하여 미주 지역 동지들에게 보냈는데, 이것은 현재 콜롬비아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이것은 줄이 전혀 없는 백지에 등사되어 있으며, 등사한 사람은 백범의 측근 엄항섭이라고 한다. "등사하였다"는 백범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백범일지』 상권 원문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이것은 일단 세상에 공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등사본은 원본의 수고적 성격을 정비하거나 교열한 흔적이 적지 않다. 목차를 본문 속에 일목요연하게 정비하였고, 본문 또한 현대어로 교열한 흔적―예컨대 '부친'(父親)을 '아버님'으로, '시'(時)를 '때'로, '조선'(祖先)을 '조상'(祖上)으로 수정한 것―이 그러한 예이다. 원본의 수고적 성격을 정비한 이러한 교열은 대체로 합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등사본은 단순한 교열의 수준을 넘어서 필요에 따라 내용을 축약하거나 생략하였다. 이러한 작업이 내용의 번쇄함을 줄일 수 있어 효율적이기도 하지만, 몇 군데의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예컨대 '삼각혼'(三角婚)은 곤궁한 세 집안이 가문의 존속을 위해 혼인동맹을 맺는 재미있는 풍속으로, 당시 백범 일가의 결혼 형편과 혼맥을 보여주고 있는 구절이다. 이러한 부분이 삭제된 점은 아쉬운 바가 없지 않다. 2) 필사본 이 책은 이동녕 선생의 손자인 이석희(李奭熙)가 고서점에서 입수하여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해방 직후 백범 측근이 김신 소장본(영인본)을 필사한 것이다. 이 책은 [대한민국임시정부주석용전](大韓民國臨時政府主席用箋)에 세로쓰기로 매우 빽빽하게 필사하여 읽어내는 데 상당한 고충이 따르며, 현재 상권의 2∼6쪽, 22쪽, 96쪽과 하권의 32쪽, 39쪽이 결락되어 있다. 이 책의 필사시기를 추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는 책의 말미에 원본 두 쪽을 첨부하고 있는 종이가 '재판소'(裁判所) 용지라는 것이다. 1947년 12월 2일 한국민주당의 정치부장 장덕수(張德秀)가 암살되자, 백범은 그 배후로 지목되어 결국 1948년 3월 12일 법정의 증언대에 서게 되었다. 필사본은 바로 장덕수 암살 사건의 재판 관계 자료로 준비된 것이었다. 이 필사본의 특징은, 우선 '1. 조선과 가정'(一. 祖先과 家庭) 이외에 어떠한 목차도 없다는 점이다. 김신 소장본에서 상권의 앞부분만 시범적으로 목차가 정비되어 있는 것을 상기한다면, '필사본'은 원본의 원고지 여백에 표시되어 있는 목차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원고지 안에 있는 본문만 황급히 필사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필사본에는 원본의 목차가 배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원고지 여백의 내용을 삽입한 것 등이 제외되어 문맥이 통하지 않는 곳도 적지 않다. 요컨대 필사본은 등사본과 비교하여 『백범일지』 상·하권을 모두 포괄하여 원본 결락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매우 황급하게 필사하여 권위가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3. 출간본 이제 원본이나 필사본을 기본 텍스트로 하여 출간된 『백범일지』를 검토할 순서이다. 출간본의 경우 공통된 특징은 원본이나 필사본을 대폭 교열하였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학술적인 목적의 영인본(facsimile)이 아닌 대중용 교열본(critical text)에서는 구철자법이나 한문을 현대문으로 교열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특히 『백범일지』 원본에는 구철자법과 한자성어는 물론 철자법이나 한문이 틀린 것, 시간적인 선후관계가 뒤바뀐 것, 전후 맥락이 어지럽거나 잘못된 곳이 적지 않다. 교열의 일반원칙과 원본의 수고적인 성격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교열은 불가피하며 바람직한 측면도 적지 않다. 현재 교열본으로 출간된 것은 20여 종 되지만 검토 대상이 되는 주요한 것은 최초의 출간본인 '국사원본'(1947), 이를 계승한 '교문사본'(1979), 새 원본을 발굴하여 교열하였다는 '서문당본'(1987) 등이다. 각각은 나름의 장점과 특징을 지니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열이 '원본의 순수성'을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1) 국사원본과 교문사본 『백범일지』는 1947년 12월 15일 국사원에서 최초로 출간되었다. 따라서 당연히 국사원본은 출간본의 시조(始祖)라는 의의와, 백범의 묵인 아래 출간되었다는 적지 않은 권위를 지니고 있다. 국사원본의 특징은 김신 소장의 원본에 없는 내용들을 처음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백범일지』 하권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1942년 이후 광복군과 임시정부의 활동(본서 하권 6장), 해방 이후 귀국 과정과 귀국 후 백범의 활동(본서 하권 7장), 그리고 마지막에 첨부한 [나의 소원]이란 백범의 정치논문 등이다. 이 부분에 관한 한 국사원본은 그간 원본에 준하는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부분에 관한 국사원본의 저본이 현재 남아 있다. 이것은 백범의 구술을 측근이 펜으로 받아 쓴 것인데, '계속'(繼續)이란 소제목으로 시작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주석용전]이라 표기된 용지에 세로쓰기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국사원본에서 원본에 준하는 내용은 [나의 소원] 하나뿐이다. 국사원본은 김지림과 김흥두 등이 편집 실무를 담당하였다고 하지만, 실무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사람은 춘원 이광수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되는지 몰라도 국사원본의 경우, 문학적 측면의 교열은 교열본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 특히 원본의 미비한 목차 구성을 고려한다면, 국사원본은 뛰어난 체제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문장의 교열이 지나칠 정도로 매끈하여 백범 특유의 투박미와 긴 호흡을 느낄 수 없는 것이 단점이다. 그런데 문학적 교열은 당연히 '원본 자체의 순수성'을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국사원본은 적지 않은 취약점을 지니고 있다. 백범의 스승 고능선의 학문적 계보를 언급하면서 류중교(柳重敎)를 조중교(趙重敎)로 오독한 것 등 인명·지명의 착오가 많고, 더욱이 내용을 반대로 기술한 것도 없지 않다. 예컨대 백범이 1895년 갑오농민전쟁에서 동학 접주로서 해주성 공략에 실패하고 재기를 모색하고 있을 때, 구월산 아래 사는 정덕현(鄭德鉉)과 우종서(禹鍾瑞)가 찾아와 5개항의 '비책'을 건의하고, 백범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중 '제1조'를 원본과 정반대로 기록하고 있다. 원본: 병졸을 대하여도 호상배(互相拜) 호상경어(互相敬語) 등을 폐지할 일. 국사원본: 병졸을 대하더라도 하대하지 아니하고 경어를 쓸 것. 백범의 동학군이 '농민적 평등주의' 때문에 군기가 문란해진 것을 보고, 정덕현이 수습책으로 상하의 엄격한 질서를 강조한 이 부분은 당시 황해도 동학 농민부대의 군율과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국사원본은 정반대로 교열하였다. 국사원본에서 가장 큰 문제는 원본을 대폭 생략한 것이다. 미리 상·하권의 체제를 예상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백범일지』 상권의 끝부분과 하권의 첫부분, 하권의 끝부분과 해방 이후 집필한 추가본의 첫부분이 많이 중복되며, 같은 내용이 흩어져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아 적절한 생략과 통폐합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국사원본의 생략은 출간본의 시조로서는 지나치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예컨대 1898년 3월 백범이 탈옥 후 삼남(三南)을 방랑하면서 남긴 다양한 견문록(見聞錄), 1911년 안명근 사건으로 투옥되어 심문받는 과정, 서대문형무소의 옥중생활에 관한 생생한 기록 등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소중한 내용들이다. 그외에도 원본에는 윤봉길 의사의 거사 직후 상해 민족운동권의 동향과 백범에 대한 비난을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국사원본은 완전 삭제하고 있다. 국사원본은 원본의 적자(嫡子)이자 출간본의 시조이지만, 이러한 삭제로 인해서 원본에서 가장 멀어진 교열본이 되었다. 원본이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부분의 『백범일지』가 국사원본을 저본으로 한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현재 유통되는 것으로 이러한 주류적 계보를 이어받은 대표적인 것이 교문사본(1979)이다. 교문사본은 국사원본을 다시 약간의 현대문으로 수정한 것이며, 변화라면 마지막에 [백범연보]를 추가한 정도이다. 사실 연보는 개인의 생애를 정리하는 데 초석과 같이 기초적인 것이다. [백범연보]에 관한 한 교문사본은 하나의 시조가 되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백범일지』의 내용에 의거하고 있다. 그런데 본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백범일지』의 내용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다름 아닌 시기 문제이다. 따라서 이에 의거한 연보는 당연히 시기의 앞뒤가 뒤범벅되어 있어 합리적인 인과관계를 도출해낼 수 없다. 『백범일지』 내용에 주로 의존하는 [백범연보]는 이후의 출간본들도 한결같이 따르는 특징으로 자리잡았고, 이로 인해 백범의 인생은 다소의 뒤범벅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2) 서문당본 국사원본·교문사본이 원본을 대폭 축약하였다는 점과 비교하여, "새 원본을 발견하여 한 자 한 구도 소홀히 하지 않고 모두 옮겼다"는 서문당본(1989)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먼저 밝힐 것은 이 책의 저본은 선전 문구대로 '새 원본'은 물론 아니며, 교열자가 착각하고 있는 엄항섭의 등사본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의 저본은 장덕수 암살 사건 재판 자료로 급하게 필사한 필사본이다. 서문당본은 저본의 권위가 약하지만, 기존의 교열본과 비교하여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삭제된 부분이 적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본인 필사본에서 누락된 부분이나 오류는 그대로 반복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를 현대문으로 교열하는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착오가 있다. 먼저 당시 통용되던 재미있는 풍속과 표현, 예컨대 '종의 종' '해방노' '머드레 공대(恭待)' 등이 생략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또한 문맥의 해석에서 적중하지 못한 부분이 적지 않으며, 특히 인명 등의 착오는 여럿이다. 예컨대 백범이 중국 동북지방(만주)의 정세를 논의하면서 거론한 '김일성 등 무장부대'에서 '김일성'(金一聲)을 '김일정'(金一靜)으로 오독한 것은 대표적이다. 정체불명의 인물 '김일정'이 등장함으로 인해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해석해낼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당시 백범은 임시정부의 주석으로서 국내외 정치세력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중국 관내(關內) 지방의 김원봉·민족혁명당 세력과 합작을 성사시키는 한편, 김일성의 만주 세력에도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문당본은 삭제된 부분이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저본이 원고지 본문만 주로 필사한 것이기 때문에, 이에 의거한 서문당본 역시 원본의 원고지 여백이나 별지[載後面]로 추가한 부분에서 누락된 것이 적지 않다. 예컨대 갑오농민전쟁 시기 동학군을 토벌한 안태훈의 한시, 청국 여행시 함흥지역의 특이한 풍물인 '솔대'와 남대천(南大川)에 관한 김삿갓의 한시 등은 논외로 치더라도, 서대문감옥의 옥중생활, 의병에 대한 백범의 논평 등은 중요한 것인데도 누락되어 있다. 서문당본에서 또 다른 문제는 목차이다. 원본의 목차를 누락시킨 필사본을 저본으로 하였기 때문에 완전히 독자적으로 목차를 부여하였다. 독자적으로 목차를 부여하였다는 것 자체가 단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목차 구성은 원본을 참고하면서 보완하였던 국사원본·교문사본에 비하면, 백범 인생의 큰 굴곡이 보이지 않는, 요컨대 평면적이고 나열적인 것이 되었다. 4. 맺음말 이상의 원전 비평과 판본 검토를 마무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백범일지 원본은 본문 구성, 내용 중복, 목차 체계 등에서 수고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원본 그대로의 영인본과 아울러 적절한 교열본이 필요하다. 2) 교열은 물론 원본의 순수성을 훼손하지 않은 범위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다만 원본에 가까운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대폭 생략하거나 정비할 수 있는 축약본이나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백범일지』 등 변형본의 순서로 나아가는 것이 좋다. 3) 기존의 출간본 중 국사원본·교문사본에서 취할 장점은 목차 구성과 문장 정리 등이며, 서문당본에서 취할 장점은 원본의 내용을 많이 삭제하지 않은 점이다. 4) 해방 직후 추가한 하권의 뒷부분은 이제까지는 국사원본에만 의존하였으나, 현재는 그 저본인 추가본이 존재하고 있다. 다만 [나의 소원]의 원본은 현재 확인할 수 없다. 5) 백범일지는 미리 전체 체계를 구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권의 마지막과 하권의 앞부분, 하권의 뒷부분과 해방 직후 구술한 추가본의 앞부분 등이 많이 중복된다. 원본에 충실한 1차 교열본이 아닌 앞으로의 2차 교열본에서는 정연한 전개를 위해 다소 내용의 통폐합이 필요하다. 6) 백범 연보의 경우 『백범일지』의 본문 기술에만 의존하지 않고, 많은 방증자료와의 대비가 필요하다. 정확하고 정연한 연보가 마련되어야 보다 수준 높고 다양한 『백범일지』 교열과 활용이 가능할 것이다.
1) 원본·영인본 원본: 『백범일지』, 소장가: 김신 장군. 영인본: 친필을 원색 영인한 『백범일지』, 집문당, 1994. 2) 등사본·필사본·추가본 등사본: 1929년 엄항섭이 등사한 『백범일지』 상, 소장처: 미국 콜롬비아대학 도서관. 필사본: 해방 이후 백범의 측근이 『백범일지』 상·하를 필사한 것, 소장가: 이석희(李奭熙). 추가본 : 해방 이후 백범이 구술한 하권 이후의 내용을 기록한 것. 3) 출간본 『백범일지』, 국사원, 1947. 『백범일지』, 교문사, 1979. 우현민 역, 『백범일지』, 서문당, 1989. 윤병석 직해, 『백범일지』, 집문당, 1995. 김학민·이병갑 주해, 『백범일지』, 학민사, 1997.
왜 『백범일지』를 권하느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무조건 읽어라." 그것이다. 나는 이제껏 『백범일지』를 다섯 번 읽고, 다섯 번 울었다. 그렇게 울고 날 때마다 나는 이 세상에 새로 나온 듯했다. 그 동안 내가 살아온 모자람을 뉘우쳐 백범 김구선생의 10만 분의 l이라도 다가설 수 있다는 꿈도 꾸어보았다. 옛날, 어른들은 젊은 날 『논어』를 만 번 읽었다 해서 별명이‘논어만독’이었다가 '만독이', '만득이’로 바뀌어지기도 했다.‘논어만독’, ‘맹자만독’만이 아니라, ‘금강경만독’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책을 읽어 그것을 마침내는 주룩주룩 비오듯 외우는 일에 익숙할 정도였다. 그런데 나는 내가 쓴 시(詩)한 행(行)도 외우는 것이 없는 터라 『백범일지』의 몇 줄이나마 외울 나위가 없다. 다만 읽어나갈 때의 그 억누를 수 없는 감명 때문에 울어버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어찌 울지 않을 수 있으리. 그 울음이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슬픔 때문이기도 하겠고, 나라를 잃은 식민지 젊은이의 울분 때문이기도 하겠다. 또한 울음은 삶의 여러 군데에서 갖은 슬픔과 아픔 그리고 수많은 괴로움을 만나게 되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겠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어찌 거기에 울음이 없겠는가. 또한 그렇게 헤어졌던 사람과 만나게 되면 기쁨의 눈물을 흘려야 하고, 너무 기쁜 나머지 흐득흐득 목놓아 울어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런 울음 따위가 점차 드물게 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나이 많은 할머니가 옛일을 떠올리면서 마른 눈물을 찔끔거리는 것을 보면 ‘아, 이 세상에 아직도 눈물이 있구나’하고 새삼 눈여겨보게 된다. 눈물은 그러나 어느 시대이건 낡은 것이 아니다. 눈물이 없는 사람은 어쩌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나도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지 않아서인지, 젊은 날 뚜렷한 이유도 없이 달이 휘영청 밝다는 것만으로도 새벽녘까지 운 적이 있었다. 제주도에 살 때는 제주항을 떠나는 정기여객선을 보고 울기도 했었다. 그 배에 탄 사람 중 누구 하나도 나와 상관없을 터인데도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타고 있는 것처럼 울었다. 그런 시절을 보낸 뒤 차츰 나에게도 슬픔이 있다 하되 눈물은 없었다. 그렇게 잘 울던 울음도 차츰 없어졌다. 그런데 이런 나에게 『백범일지』는 울음을 그때마다 찾아주는 것이었다. 1960년대 초 처음으로 그 책을 읽었다. 그 책을 읽을 이유가 없었는데도 우연히 그 책이 나에게 왔다. 많은 책 속에 묻혀 있었는데 오랜 불면증으로 의식이 몽롱하던 어느 오후 그 책을 펴보았던 것이다. 나는 누워서 읽다가 의자로 옮겨서 읽었다.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내 마음속의 허무와 교만이 조금씩 벗겨지는 것 같았다. 허리를 곧추세워 읽어갔다. 그러다가 한참씩 책에서 눈을 떼었다. 어린 시절의 일이 가끔 서늘한 찬바람처럼 떠올랐다. 김구선생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사건은 아버지한테서 들었다. 1949년 여름이었다. 아버지는“백범선생이 운명하셨다!”고 크게 외쳤다. 아버지는 그 길로 마을 남정네들과 함께 어우러진 비탈길에서 우는 것으로 조상(弔喪)하는 것이었다. 한두 사람은 서울로 떠나기도 했다. 며칠 뒤의 신문에서 백범선생의 국민장 거행 소식을 알 수 있었다. 백범 김구선생은 누구인가? 그 물음에 대한 대답도 없이, 시골의 두메 마을 사람들이 엉엉 울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그 울음과 내가 『백범일지』를 읽고 우는 일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백범 김구선생은 1876년(고종 13년) 조선 말기에 태어나서 1949년 암살자의 흉탄에 맞아 쓰러진 현대 한국의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지도자이다. 그는 한국 국민에게 가장 친화력을 발휘한 민족적, 국민적인 영웅이기도 하다. 그는 일제에 검거된 뒤 감옥에서 지은 호인 백범(白凡)의 뜻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이름자를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하는 뜻이요, 백범이라 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고자 하는 내 원(願)을 표하는 것이니, 우리 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이라도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한 독립국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본명은 김창암, 김창수였으나 그 뒤로 김구(金龜)라는 가명을 사용하다가 김구(金九)로 확정한다. 1928년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 주석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기에 이 자서전 『백범일지』상권을 썼다. 그는 이것을 유서로 쓴 것이다. 『백범일지』는 첫째, 무엇 하나 과장된 것이 없이 언제나 그 자신을 낮추되 당당한 바를 지키고 있다. 한편으론 본국에 있는 두 아들에게 알리기 위한 가족사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거짓도, 꾸밈도 끼어 들 수 없는 정직만이 일관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찬란한 문장의 수사(修辭) 따위가 끼어 들 여지가 없다. 그저 소박한 표현일 따름이다. 마치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어조이며, 옛이야기 책의 문체다. 나 같은 문학 종사자들은 우선 이런 책을 읽으면서 자기 자신의 문학을 뉘우칠 수 있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 그만큼 이 책은 문학이 아닌 문학인 것이다. 병자년 칠월 십일일 자시(이 날은 조모님 기일이었다.)에 텃골에 있는 웅덩이 큰댁이라고 해서 조부와 백부가 사시는 집에서 태어난 것이 나다. 내 일생이 기구할 예조였는지 그것은 유례가 없는 난산이었다. 진통이 일어난 지 육 칠일이 되어도 순산은 아니 되고, 어머님의 생명이 위태하게 되어 혹은 약으로 혹은 예방으로 온갖 시험을 다해도 효험이 없어서, 어른들의 강제로 아버지가 소의 길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에 올라가서 소의 소리를 내고야 비로소 내가 나왔다고 하니, 겨우 열 일곱 살 되시는 어머님은 내가 귀찮아서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짜증을 내셨다는 데, 젖이 말라서 암죽을 먹이고 아버지가 나를 품속에 품고 다니시면서 동네 아기 있는 어머니 젖을 얻어 먹이셨다. 이런 문장은 담담하게 들려주는 지난날의 이야기일지언정, 굳이 문학에 적용할 만한 것이 아니라 다만 홍명희의 『임꺽정(林巨正)』 문체와는 어느 만큼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백범일지』의 문체는 함석헌선생의 여러 논설들이 화롯가의 이야기 그대로인 구어체의 매혹을 듬뿍 지닌 것처럼 어디까지나 ‘입의 보석’이다. 김구선생은 소년 시절 동학에 귀의, 교주 최시형을 찾아서 충북 보은 장내에 갔다. 그곳에서 호남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을 알게 되었고, 그도 고향 황해도에 돌아와 동학농민군을 이끌게 되었다. 그와 맞서고 있는 동학군 토벌의 의병 노선인 신천 고을 안태훈의 극진한 배려로 김구 일가가 한동안 신천에 안존할 수 있었다. 안태훈은 바로 안중근, 정근, 공근의 아버지였다. 또한 그곳에서 그는 평생 은사인 고능선을 만나게 된다. 의병장 유인석과는 동문인 사람이었다. 이처럼 『백범일지』는 나라가 기울어지는 시대에 선 비범한 청소년을 통해서 역사와 인물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예로부터 천하에 흥하여 보지 아니한 나라가 없고 망해보지 아니 한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도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어느 나라 국민이 의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해서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그와 달라서 백성이 여러 패로 갈라져 한 패는 이 나라에 붙고 한 패는 저 나라에 붙어서, 외국에는 아첨하고 제 동포와는 싸워서 망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다." 이것은 은사 고능선의 말이거니와 이 말에 깨달은 바 있어 김구선생은 청나라에 가서 큰 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는 백두산을 넘어 북경으로 들어가는 여정에 올랐다. 백두산 언저리에는 마적이 들끓어 압록강 상류를 건너 남만주에 건너갔다. 거기서 그는 고구려 고토(故土)에 발을 디딜 수 있었고, 그 땅에 건너가서 목숨을 부지하던 동포들의 곤궁과, 그런 동포들을 짓밟는 악행을 목격하게 된다. 그곳에서 한동안 항일 의병에 참여하다가 다시 신천으로 돌아왔다. 그는 대동강 하류 치하포 나루에서 변복(變服)한 일본 육군 중위를 죽였다.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였다. 그런 뒤 그는 인천 감영에 갇힌 사형수가 되었다가 극적으로 감형되어 무기수로 된다. 그때부터 세상에는 김창수(김구)라는 이름이 널리 퍼져서 국운이 다하는 시대의 신화에 충실하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 곽낙원은 집안을 정리한 뒤 인천에 건너와 아들의 옥바라지를 위해서 식모살이도 해야 했다. 그는 감옥을 탈출한 뒤 그곳에서 사귀었던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된 여러 지역을 찾아다니다가 공주 마곡사에 가서 삭발 승려가 되기도 했다. 또한, 평양 대보산 영천암 주지 노릇을 하다가 그만두고 나서 다시 전국을 떠도는 풍운아가 되었다. 특히 그 시대의 뜻 있는 사람들은 그들 중의 누가 만난 사람을 서로 살폈다가 나라를 위한 인물로 만드는 일을 하는 미풍을, 이 책은 잘 서술하고 있다. 김구선생이 인천 감영에 갇혀 있을 때 그를 구해내기 위해서 옥을 부술 계획까지 세웠던 강화도 김주경과 부평 유인무를 비롯해서, 충남 연산 이천경, 전북 무주 이시발, 지례 성태영에 이어지면서 그들이 김구를 이모저모 살펴서 큰 인물로 만들고자하는 광경은 실로 나라가 다 거덜난 판국에 하나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는 다시 한번 모진 고문과 악형을 당하는데, 그때 다른 방의 동지를 다그치기 위해서“나의 목숨은 너희가 빼앗아도 나의 정신은 너희가 빼앗지 못하리라.”라고 소리 높여 외치기도 했다. 그 자신 고문으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지경임에도 그랬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 곽씨 부인이 서대문 감옥에 면회하러 와서 한 말이 있다. “나는 네가 경기감사나 한 것보다도 더 기쁘게 생각한다.” 그 동안 모진 고문을 이겨내면서 17년 징역을 받은 아들에게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그의 어머니와 아들은 오래 전부터 나라를 위한 헌신의 일치(一致)였다. 그것은 단순한 모자관계만이 아니었다. 어머니야말로 마침내 아들과 함께 독립운동가이며 혁명가였다. 이는 인간이 학문이나 어떤 교양에 의해서 위대한 인간이 되기보다, 바람찬 현실을 헤쳐나가는 동안 온몸으로 각성됨으로써 위대한 인간으로 발전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백범일지』는 그런 사실을 누구에게나 알기 쉽게 밝혀주고 있다. 그는 두 번째의 긴 감옥생활에서 활빈당이나 불한당 등의 전국적인 도적 단체의 현황에 대해서도 훤히 알게 됨으로써 사회와 인간의 이면(裏面)과 만날 수 있었다. 나라의 독립을 찾는다는 사람들이 그런 도적만도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깊은 수치(羞恥)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뒤 3·1운동 직후 중국 상해로 망명한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당시 그는 임시정부 문 파수를 보게 해 달라고 안창호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백범일지』 상권을 보면 그는 감옥에서 청소 도중에 우리 정부의 정청(政廳)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해 달라고 기도한 내용이 나오는데, 다같이 애국의 절박한 심정이라 하겠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이승만이 떠난 뒤의 임시정부를 이끌어 가는 국무령, 주석이 되어 임시정부의 운명을 지켜나갔던 것이다. 『백범일지』 하권은 상권을 쓴 지 14년 만에 쓰여졌다. 예로부터 아득히 먼 파촉(巴蜀)의 파(巴)가 바로 중경이었다. 그곳의 망명생활과 독립운동 끝 무렵에 쓸 때의 감회를 “이 붓을 드니 53세 때, 상해 법조계 마당로 보경리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상권을 쓰던 때에서 14년의 세월이 지난 후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그때, 그의 나이 67세. 이윽고 김구선생이 한국 광복군을 정식으로 조직하고, 서안에 총사령부를 두어 일제 식민지로 된 조국으로 무장 침투할 작전을 세워놓자마자 일제가 항복하였다. 그러자 민족의 자력으로 한번 싸워보지 못한 채 해방된 조국에 대해서 선생은 그 기쁨과는 다른 원통함을 느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는 3·1운동 이후의 상해 시대의 정파 분열과 좌우갈등 그리고 이봉창·윤봉길 의사들의 거사 지휘를 실감 있게 그리고 있다. 김구선생은 윤봉길 의사와 서로 시계를 바꾸고 헤어졌다. 선생의 마지막 말은“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였다. 그 길로 윤 의사는 홍구공원에서 일제 요인을 폭살하는 의거를 성공시키는 것이었다. 김구선생은 60만원 현상 수배인물이 되어 더 이상 상해에서 숨어 있을 수 없어서 중국인으로 위장해서 숨어 다니다가 끝내 머나먼 중경에까지 가게 되었다. 그는 새삼 한민족의 정신상태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었다. "오늘날을 보아도 요새 일부 청년들이 제 정신을 잃고 러시아로 조국을 삼고, 레닌을 국부로 삼아서, 이제까지 민족혁명은 두 번 피 흘릴 운동이니 대번에 사회주의 혁명을 한다고 떠들던 자들. 레닌의 말 한마디에 돌연히 민족혁명이야말로 그들의 진면목인 것처럼 들고 나가지 않는가. 주자(朱子)님의 방귀까지 향기롭게 여기던 부류들 모양으로 레닌의 똥까지 달다고 하는 청년들을 보게 되니 한심한 일이다." 본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건너온 어머니와 9년 만에 합류할 때도 그는 다시 어머니의 깊은 심증을 발견한다. “나는 이제부터 너라고 아니하고 자네라고 하겠네. 들으니 자네가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한다니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그 체면을 보아주자는 것일세.” 그는 이 말에 무척 감동했다. 또한 어머니가, 아들의 동지들과 청년들이 당신의 생일 축하연을 차리려는 것을 눈치채고, 생일잔치에 쓸 돈을 주면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사먹겠다 해서 그 준비금을 받아내다가, 그 돈으로 권총 두 자루를 사서 독립전쟁에 쓰라고 내놓은 일에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중경 생활 이후의 조국에 돌아와서 보낸 1,2년 간의 일도 덧붙여서 하권을 마무리하고 있다. 여기서 『백범일지』 속의 여러 곳에서 만나는 그 감동을 하나하나 다 나열할 순 없지만 이상 몇 가지 일만으로도 나는 김구선생의 인격·인간성·애국심 그리고 그 견실성이야말로 우리가 이어 본받아야 할 최고의 가치라고 확신한다. 김구선생은 인도의 간디, 중국의 손문, 베트남의 호치민,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에 해당하는 우리의 국부적(國父的)인 존재다. 한국전쟁 직전, 38선의 남북분단을 극복하려는 선생의 충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민족통일의 원칙으로 각인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는“·····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백범일지』 상권 서문에도 나오는 것처럼, 또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라.”고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에서 강조한 대로 끝까지 ‘문화’가 목적인 정치를 지향한다. 그에게는 결코 부국강병이 정치가 아니었다. 문화가 그의 정치적 최고 형태인 것이다. 이 책은 깊고 어려운 철리(哲理)나 지식을 담고 있지 않다. 또한 현란한 수사학(修辭學)이 동원된 것도 아니다. 이 책은 살아온 것 전부를 담은 긴 서술도 아니다. 투박하기까지 한 한문투로 쓴 수수한 원문을 그대로 한글체로 번역 해 놓은 이것은 읽는 사람에게 눈으로 판독하기보다 그 육성을 그대로 귀로 듣게 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어디 하나 거짓이 용납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허영이 끼어 들 겨를이 없는, 하늘 아래의 하심(下心) 하나로 민족의 양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나는 실컷 울고 싶을 때 또 이 책을 읽으려고 책꽂이에 꽂아두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하기에는, 나는 너무 뒤져 있는 사람일 따름이다.
백범 김구는 자신의 호의 유래에 대해 "독립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은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원(願)을 표한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다. 호에 이르기까지 '자주독립'을 염원한 이 노 독립투사의 절절한 애국심의 편린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범인의 자서전'이라고 스스로 부른『백범일지』이다. '국수주의'에 가까우리 만치 열렬한 김구의 민족주의적 신념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실천에 옮겨졌는가 하는 행적과 인간적 면모가 피력된『백범일지』는 자서전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 보다는 한 시대의 '귀감'으로서 그리고 '사상서'로서 읽힌다. 『백범일지』는 지난 47년 처음 출간된 이래 85년 교문사에서 다시 출간될 될 때까지 10여개 출판사에서 27판을 거듭했다. 이 책의 판권을 관리하고 있는 백범김구 기념사업회쪽에서는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힐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는 탓에 그 이후로는 아예 이 책이 어디에서 나오건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기로 하고 집계 작업조차도 중단하고 있다. 『백범일지』는 1928년과 42년 각각 중국의 상하이와 중징에서 임시정부 일을 맡아보고 있을 때 써놓은 상하 두권으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 8.15 해방된 뒤 환국하여 쓴 유명한 '나의 소원'이 덧붙여져 47년 11월 국사원에서 초판 출간되었다. 『백범일지』에 덧붙여 쓴 '나의 소원'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하나도 대한 독립, 둘도 대한 독립, 셋도 대한 독립"이라는 유명한 첫 구절을 인구에 회자시켰다. '나의 소원'은 우파 민족주의자로서, 자유주의자로서의 김구의 사상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글로 평가된다. 해방공간의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김구의 '자주독립'노력은 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참석으로 이어졌으나 결국 노독립운동가의 소원을 짓밟으며 38선을 경계로 남북분단은 고정되었다. 1949년 6월 26일 낮 12시 36분 그는 거처인 경교장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의 저격을 받아 운명했다. 그리고 그의 '소원'인 '자주독립'도 '자유'도 '통일'도 40여년의 세월을 건너 여전히 '비원'인채 미완으로 남겨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