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이에 답사 여행이라는 열병이 번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여행이라고 하면 모두 학교 다닐 적 설레임을 안고 갔던 수학여행의 추억을 상기하고, 중년배들에겐 한 일 년 꼼꼼히 곗돈을 부어 설악산이나 제주도로 한 며칠 집을 비우는 안타까움과 미지의 낯섦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갔던 그런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돈이 조금은 흔하게 되고 살기가 나아지자 자신의 신분 과시용으로 혹은 명절처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행사로 여행을 받아들이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비좁은 이 땅에 대해 많은 불만을 토로했고 어느 사이 관광객들의 발길은 외국으로만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IMF 구제금융이라는 상황을 유발한 큰 원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 땅의 넓이를 10배 정도 늘려 준 새로운 유형의 책이라고 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나오고서부터 많은 돈을 들여 국외로 가는 사람들보다는 등에는 배낭, 한 손에는 카메라, 다른 한 손에는 책을 끼고 길을 나서는 이들이 많았으니 호화와 사치라고 일컬어지는 국외 여행과 대별되는 답사 여행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답사 여행은 경주나 제주, 설악으로 대표되는 거대한 관광지를 찾아 우리의 전통적인 모습과는 전혀 상반된 콘크리트 문화를 쫒기보다는 깨어진 와편, 허물어져 가는 건물, 땅에 깊숙이 뿌리를 박고 있는 노송, 철이면 피어나는 꽃, 이끼로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말하는 빗돌을 보면서 가슴으로 느끼는 그런 소중한 여행의 즐거움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의미 있는 여행은 또 다른 아픔을 양산하고 있었다. 조용하던 마을에 갑자기 늘어난 개 짖는 소리, 부산하게 울어 대는 까치 소리, 이집저집을 기웃거리는 배낭을 맨 사람들의 발길. 그리고 숙박지와 교통편과 안내 자료를 문의하는 전화로 공무를 집행하기도 어려울것 같은 행정 관청의 직원들…….
드디어 내 고장이 세상에 알려졌구나! 줄 잇는 답사자들의 동향을 상관에게 보고하는 공무원들, 이러한 보고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 자치단체의 장은 내친 김에 관광으로 수입을 창출하고 지역민들에게 자신의 치적을 알릴 수 있는 절대절명의 기회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무언가 색다른 것을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까지 들게 했다.
바로 이것이 지금까지 관광 개발을 위한 정책의 입안 단계였던 것이다. 오해와 무지의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관광 개발은 그 지역의 소상한 내력과 더불어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특성을 바탕으로 차분차분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여기를 찾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들이 이 장소에서 제공받고자 하는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그들을 위한 진정한 서비스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이곳을 다시 찾을 수 있는 매력은 어떻게 만들어 줄 것인지, 이러한 고민 속에 관광 개발은 진행되어야 했던 것이다.
누정과 원림 그리고 송강 문학의 산실
답사 여행의 열풍은 어김없이 무등산 자락을 강타했다. 학문을 연마하고 자연을 품에 안고자 했던 옛 선인들의 지혜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 취가정, 풍암정사, 송강정, 면앙정을 담고 있는 원효계곡(무등산의 북쪽에서 발원하여 담양을 거쳐 영산강으로 합류)이 바로 그곳이다.(과거에는 이러한 정자가 100여 개가 넘었었다)
지리적으로 이 유산들은 전남 담양군에 독수정, 소쇄원, 식영정, 송강정, 면앙정이 있고, 광주광역시 북구에는 취가정, 환벽당, 풍암정사가 있다.
소쇄원을 보면 그것을 꾸미고 있는 공간 구조가 나무 등 식물로 구성된 요소, 흐르는 물을 활용한 수공간 요소, 주변의 돌을 헛되이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올려 대와 담을 만들고 수양의 자리를 만들었던 석물 요소, 알맞은 자리에 쌓은 돌 위에 자리하고 있는 건축물의 요소, 학문의 연마와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사상적 요소까지 다섯 가지 구성 요소로 대표되는 특징을 안고 있다.
소쇄원은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민간 정원이며, 식영정과 송강정은 국문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 중의 한 분인 송강 정철이 한글 문학의 금자탑이라 할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과 수많은 한시와 시조를 남겼던 곳이다. 환벽당 또한 송강이 청년기에 수학을 하였던 매우 의미 있는 곳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소쇄원과 환벽당, 식영정을 한 마을에 있는 세 개의 명승이라 일컬었다.
또한 옛 선인들은 원효계곡을 따라 자연이 수려한 곳에 누정을 짓고 단지 자연을 즐기는 데 그쳤던 것이 아니라 주변을 이루는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시와 가사를 지었으며, 그 장소에서 바라보는 공간 요소과 청각 요소, 행위 요소 등을 식영정 20영, 소쇄원 48영, 독수정 14경, 면앙정 30영 등을 통해 문학적 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문화유산을 본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학적 모티브인 주변 경관과 청각적인 요소, 행위의 요소까지 깊이 생각함으로써 과연 문학의 산실이 이러한 곳이구나 라고 느낄 수 있는 걸 의미하며, 이러한 소재는 문화재 이상의 가치 부여를 해 두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문화유산의 원형 파괴가 저질러지고 있다
송강 문학의 산실이자 누정과 원림의 집합지인 이곳을 찾는 사람이 1년에 자그마치 15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그 주요 탐방객은 부모의 손을 잡고 조선 중기의 국문학의 산실을 보러 오는 어린 학생들과 전공이 건축, 조경, 한학, 국문학, 철학, 사학, 미학인 전국의 대학생들이다. 여기에 수변 공간이 적은 광주 시민들이 휴일이면 가족과 함께 원효계곡 자락에 만들어진 광주호와 주변 문화유산을 보러 오는 것이다.
이렇게 탐방객이 많은 것은 이곳에 산재한 문화유산과 더불어 자연 경관이 공존하기 때문이며, 그것들이 아직 인간의 손때에 덜 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데 이들 탐방객들이 어렵사리 찾아온 발걸음을 아쉬움 속에 묻고 가야 하는 아픔이 있다. 문화유산이 무참히 훼손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 참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의 산실인 식영정 바로 아랫자락에 담양군에서 군비 60억 원을 들여 가사문학관을 짓는다고 지난 4월 10일 삽을 떴다. 이에 질세라 광주광역시에서도 시가문화학습장이란 것을 지으려는 안을 연구중에 있다. 원래 잠잠하던 이곳에 관심이 집중된 것은 과거 노태우 정권이 공약 사항으로 원효계곡에 만들어진 광주호 주변 관광 개발을 외친 이후였으며, 광주광역시는 이를 빌미로 3억 2천5백만 원을 들여 금호엔지니어링에 광주호 주변 관광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했다. 이에 질세라 담양군에서는 담양가사문화권 관광 개발 계획이라는 용역을 동신대학교 지역개발연구소에 맡겼다.(이 중 금호엔지니어링의 용역은 수주는 마치었으나, 과대한 개발로 인한 무등산의 훼손 및 이 지역의 위락공간화는 안 된다는 시민 단체의 여론에 힘입어 시 의회에서 백지화하도록 하였다.)
가만히 보면 그 모양새가 시가문화권을 둘러싼 자치단체간의 주도권 다툼인 것이다. 먼저 삽질을 시작한 담양군이 가사문학관을 짓는 목적은, 가사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문화 탐방객이 급증하고 있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안내 소개할 만한 시설이 없어 모두들 선조들의 내면 세계를 이해 못 하고 외형적 관람에 그치고 있는 게 현실인 바, 일정한 문화 공간을 마련하여 문화 유적의 효과적인 안내와 이해를 증진시키고 주변 문화 유적 및 유품·유물의 보존 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후세에 길이 전승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담양군에서는 1994년 2월부터 계획하여 4년여 동안 이 일에 매달렸는데, 학계와 언론인, 향토사학자 등을 대상으로 하여 이런 기능을 수행할 공간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을 얻고 그 위치로 식영정 아랫자락이 적지라는 데 중지를 모으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 이 땅이 그린벨트 지역이라서 개발 행위가 제한되므로, 94년 10월 건설교통부에 도시계획법 시행규칙을 개정토록 건의하고 95년 12월 이 일대의 부지 5,017평을 매입하였다. 1996년 12월 국무회의 의결로 관련 법이 개정되어 97년 9월 기반 공사를 완료, 자치단체장 선거를 목전에 둔 1998년 4월 10일 기공식을 가진 것이다. 그 공사의 개요는 5,017평의 부지에 건평 541평(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을 높이 17미터 콘크리트 슬라브로 짓고서 주변과 융화되지 않으니 한옥 팔작지붕을 올린다는 것으로 2000년 상반기까지 공사를 마친다는 계획이다.
참으로 훌륭한 목적이요 의미 있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어려운 군 재정에 60억 원을 투여하여 문학관을 짓는다는 것은 어지간한 군에서는 문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없고선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송강의 가사문학에 대한 공적을 널리 알리고자 짓는다는 가사문학관이 바로 송강 문학의 발상지를 뒤엎어서 세워지고 있다는 데에 있다.
가사문학관은 그 자리에 들어서면 안 된다
원효계곡 자락은 비단 송강 문학의 태실일 뿐만 아니라 호남을 상징하는 사상의 중심지이자 의병들의 창기지였으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줄을 이어 시조와 가사와 시를 읆었던 시가문학의 산실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정자와 원림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그 당시의 건축과 조경을 이해할 수 있는 값진 보물이 있는 곳인데, 거기에 전혀 이질적이고 위압적인 건물을 올린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우리 조상들은 수려한 자연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정자를 짓고 학문을 수양하고 제자를 길러내고 문학적 심성을 유감없이 발휘해 냈다. 관동의 팔경이 그러하고 함양의 화림동계곡이 그러하고 원효계곡이 그러하다.
일반적인 정자는 흙과 나무와 돌을 이용하여 대여섯여 평의 건물로 주변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개방 구조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가사문학관은 그 정자와 연관된 모든 것을 다루게 된다고 하면서도 기실 콘크리트 건물에 지상 높이 17m로 6층 정도에 달하고 1층 건평이 208평에 달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기 그지없는 것이다.
선조들이 그 주변의 경관을 바라보고 지었던 문학적인 업적을 찬미하기 위해 짓는다는 문학관이 문학의 주제가 되었던 아름다운 경관은 없애 버리고 우람한 건물로 치장한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더욱이 가사문학관이란 말은 이 지역의 문화를 대표하는 용어가 아니라 국지적인 용어이며 오히려 그 지역의 문화를 낮추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가사가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원효계곡 일원은 한시와 시조와 가사가 공존했고 더욱 활발했던 곳이며, 송강 정철 또한 한시와 시조에서도 그 빼어남이 가사 못지않았던 사람이기에 이를 함께 아우를 수 있는 용어의 선택이 매우 중요한데, 담양군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문화를 평가절하하고 있는 셈이니 아쉽기 그지없는 것이다.
가사문화권이란 말이 쓰인 것은 1970년대 초반 문화유산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지면서부터이다. 이때 호남의 문화권을 고산 윤선도의 시가문화권과 송강 정철의 가사문화권으로 양분하면서부터 불려진, 급하게 만들어진 용어이다. 오히려 원효계곡 일원은 발전적인 의미에서 시가문화권이란 말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문학적인 부분만을 조영한 한계를 지니고 있으므로 앞으로 지속적으로 연구·논의되어야 할 사안이다.
수려한 자연 경관과 아우러진 정자와 원림이 상존하는 곳에 이질적인 콘크리트 건물을 거대한 공룡과 같이 들어서게 한다는 것은 관광객의 유입을 통해 수익 효과를 노리다가 오히려 주변 경관을 망가뜨려 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 곳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크다.
또한 그 위압적인 건물은 주인과 객을 바꿀 수 있는 여지가 너무도 크다는 사실이다. 조상들의 내면 세계를 알린다는 목적하에 세워진 건물이, 탐방객들에게 문학관이 전부인 양 비춰지고 시각의 압도 현상이 이뤄진다는 것이며, 그로 인해 누정과 원림의 문화가 거대한 콘크리트 문화인 양 보여질 수 있다는 점은 경계해야 할 중요한 대목이다.
더불어 가사문학관이 들어서면 전국의 여느 관광지가 그러했듯이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될 식당과 유흥 시설과 숙박 시설에 의해 문화 환경이 없어지고 우스개 말처럼 시가문화권이 아니라 가든(식당)문화권으로 전락하는 유인 시설이 되고 만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 원효계곡의 물은 수변 공간이 적은 광주 사람들에게 유일한 휴식처로 제공되는 광주호로 유입되고 있으며, 이 물은 휴식처로 제공될 뿐만 아니라 담양 사람들에게 농업 용수로도 쓰여 준상수원으로 지정되어 있다는 걸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맑고 푸르던 물이 개발의 연쇄 현상에 의해 오·폐수의 점령지로 변해 갈 것은 눈에 보이는 뻔한 현실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껏 환경의 파괴란 바로 눈앞에 벌어진 폐수 문제, 오염 문제, 식생의 문제로만 생각해 왔지만, 문화 환경 또한 한 번 망가지면 그 문화가 담고 있는 세월은 영구히 복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담양군은 명심해야 한다. 이미 관광지로 변해 버린 안동의 하회마을과 수변 유희 시설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경주 보문호가 말해 주지 않는가.
광주시가 추진하고자 하는 시가문화학습장 또한 문제가 많다. 광주시의 시가문화학습장 계획안은 기존의 학교를 활용한다는 면에서 문화 환경을 위해하는 시설은 아닐지 모르지만, 담양군이 그동안 가사문학관을 건립하기 위해 노력해 왔던 모든 노력을 허사로 만들 뿐만 아니라 혹여 이것이 시가문화권의 선점을 위한 자치단체간의 싸움으로 비화될 소지도 지니고 있으며, 두 개의 시가문화 관련 시설을 갖는다면 이는 재정 낭비가 될 것이다. 더불어 이런 싸움으로 인해 지역 주민간의 갈등은 더욱 조장될 것이고, 이를 둘러싼 이권 싸움이 벌어질 여건 또한 충분하기 때문이다.
담양군과 광주시와 전남도에 드리는 공개 질의
담양군민으로서 나는 담양군의 문화에 대한 애정에는 진심으로 갈채를 보낸다. 하지만 그릇된 애정은 자칫 더 큰 과오를 범할 수 있다고 여긴다. 지금 가사문학관 건립이 바로 그렇다. 따라서 현 담양군의 자치단체장에게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묻고 싶다.
현 위치에서 가사문학관의 건립은 앞서 제기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담양군은 그 부적절성을 인정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전을 검토할 수 없는가를 첫번째로 묻고 싶다.
둘째, 이 지역은 이미 행정구역상 광주시 북구와 전남 담양군의 접경 지역으로 자칫 지역 주민의 감정을 자극할 소지가 많다. 따라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남도와 광주시의 행정협의회에 북구청과 공동 참여를 통해 시가문화권 일원에 대한 논의를 처음부터 합의를 통해 이룰 수 있는가?
셋째, 시가문화권 일원에 대해 구체적인 지리학적 조사 및 학술 조사가 이루어진 바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저마다 제 분야의 목소리만 있었지 종합적인 조사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현상이 유발된 것이다. 따라서 행정협의회를 통해 광주시와 공동으로 지리 조사와 시가문화권에 대한 종합 학술 조사를 할 용의는 없는가?
넷째, 광주시 북구청에서는 식영정 20영시 중 이미 광주호에 잠긴 부분은 제외하고 담양군과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복원, 발굴하고자 하는데, 담양군은 북구청과 공동으로 그 일에 참여할 수 있는가?
다섯째, 원 위치조차 확인하지 않고 복원된 식영정 아래의 부용당(건물이 아니라 연못이었는데 지금은 건물과 함께 연못이 있다)과 서하당을 유구 조사를 통해 밝히고 원 위치에 재건립할 의지는 없는가?
그리고 담양 군수에게 부탁한다. 자신의 입신을 위해 가사문학관을 이용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적어도 선조들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는 숭모정신을 근본으로 한 문학관이라면 선조들의 근원적인 자연관과 문학 정신을 승계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가사문학관은 오히려 그를 빌미로 거대한 빌딩을 올려 위화감을 주는 쪽이 훨씬 강하며 그 활용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조차 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담양 군수가 적어도 이 정도의 사안에 대해 문화를 사랑하는 군수로서 긍정적인 결단을 내려 주리라 믿는다.
다음 광주광역시에 묻고 싶다. 그 동안 원효계곡을 둘러싼 개발의 논쟁은 그 시원지가 바로 광주였으며, 이로 인해 담양은 늘상 피해의식을 갖게 되었다. 광주에서 일어났던 시가문화권 보존을 위한 활동을 보면 그 풍치가 아름다웠던 풍암정사를 정비한다고, 자연석의 위치를 이리저리 옮겨 원형을 앗아가고 원래의 정자보다 더 큰 초현대식 화장실을 짓는 일을 하였다. 아니 아예 유원지화한 거나 진배없다. 이것은 문화유산을 정비한다는 미명하에 훼손을 앞장서서 주도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 아닌가?
그런 광주에서 이미 담양에서 추진하고 있는 가사문학관이 시민 단체의 반대에 밀려 난항을 겪는 와중에 별다른 대안도 없이 그리고 담양군과 어떠한 논의도 없이 시가문화학습장을 짓는다는 안건을 상정하여 용역 보고를 받는 것은 어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가? 앞서 말했듯이 지역간의 접경지에서 일어나는 일은 자칫 지역감정으로 이어지며 이러한 일은 문화유산에 손괴를 입히는 것보다 더 큰 일이다. 광역 자치단체답게 담양군의 가사문학관 건립에 다른 뜻을 지니고 있다면 머리를 모아 바람직한 방향을 도출할 용의는 없는가?
전라남도에도 묻고 싶다. 도는 군의 행정에 대해 지도 감독의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지방자치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지금껏 제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시가문화권 보존위원회를 비롯한 시민 단체는 누차에 걸친 토론회와 간담회·성명서를 통해 담양군의 가사문학관 건립 위치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해 왔으며, 그 부당성을 지적해 왔다. 그런데 상급 행정기관인 전남도는 이 일을 강 건너 불 구경하듯이 안일하게 방관만 해 왔다. 상급 기관으로서 자치단체의 과오를 견제하고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도의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심화되어 가는 시가문화권의 문제를 바라보는 전라남도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번에 구성된 광역행정협의회를 통해 시가문화권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점과 현 시기 가장 중요한 가사문학관 건립에 대해 중지를 모아 해결할 의사는 없는가?
원래 광주와 전남은 한 지역이었으며, 무엇보다 문화유산은 어느 특정 지역 혹은 특정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며 인류 모두의 유산인데, 귀찮다고 이 문제를 피하는 것은 광역자치단체로서 직무 유기라고 여긴다. 따라서 전남도는 더 적극적으로 시가문화권의 보존을 위해 광주시와 북구청, 담양군과 함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 그림은 추상화된 그림이 아니라 지금 갈수록 피폐해 가는 문화유산에 대해 응급 조치를 하도록 하고 앞으로의 건강한 시가문화권을 만들 수 있는 마스터플랜을 설정하는 데 중지를 모으는 것이어야 한다.
시가문화권의 보존과 활용 방안
바람직한 가사문학관의 건립 방향은 적어도 누정과 원림의 본향답게 옛 모습의 원형을 이용한 한옥 구조로 짓는 것이 바로 현 군수가 취해야 할 바른 길이다. 물론 그 위치는 재론할 여지 없이 현 위치는 안 된다. 현 위치는 식영정과 환벽당, 소쇄원 삼각 지점의 핵으로서 누정과 원림의 공간을 파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학 창작의 산실로서 남아 있는 목가적인 전원의 원형을 영원히 잃게 하는 작업이다. 또한 가사문학관이 지어짐으로써 가려지는 지실마을은 조선 중기 옛 마을의 원형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작은 것을 얻기 위해 큰 것을 버린다는 것은 분명히 어리석은 짓이다. 담양군이 용기를 발휘하여 현 장소를 과감히 버리는 것은 매우 용기 있는 일이며 이 지역을 찾는 모든 이들께 기쁨을 줄 것이다. 문화유산의 보존을 위한 그런 조치에 대해 어느 누구도 공감을 할 것이다.
이미 조성이 된 부지는 자연스럽게 원상 회복을 하거나 녹지대를 형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문학관의 건립 위치는 광주호의 하류 쪽으로 이전하여 탐방객들에게 사전 교육의 장으로뿐만 아니라 문학인들과 전공인들의 연구 기능을 겸한 교육 및 휴식 공간으로 꾸며지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는 제 분야 특히 건축, 환경, 조경, 문학, 철학, 미학, 관광 분야의 전문가와 시민 단체, 문중 대표, 지역 주민들과의 공동 연구와 공론화를 통해 바로잡아야 한다. 아울러 근본적으로 시가문화권을 형성하는 지역에 대한 종합적인 학술 조사를 각 자치단체와 합의하여 실시하고 이의 이용 방안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세운 후 실시하여야 한다.
문화유산은 어느 특정 개인의 것도 아니요 문중의 것도 아니며 자치단체의 것도 아니다. 문화유산은 우리 국민 모두의 것이며, 나아가 인류의 재산으로서 보존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가문화유산 또한 재론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현 상태의 원효계곡 일원은 음식점이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이며 이로 인해 문화의 원형이 상실될 수 있는 소지가 많은 상황이다. 따라서 담양군은 광주시와 더불어 공동 조례안을 통해 개발의 억제에 최선을 다해야 하며, 탈법적인 영업 활동이나 불법 행위에 적극 대처해야 한다. 지역민들의 편익을 위한 노력 또한 함께 경주해야 한다. 개발 제한 구역으로 인한 지역민들의 불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되 주변의 경관과 환경을 위해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공익을 우선해야 함도 관이 나서야 할 일이다. 아울러 문화재 지정 구역으로 인해 이주가 불가피한 주택의 개축과 같은 경우 주변과 융화되는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최대한 계도하며 자금 지원 방안도 함께 마련하여야 한다.
현재의 차량 중심의 도로를 보행 탐방자 중심으로 이끌 수 있는 도로의 정비가 시급하며, 편리함만을 위해 도로를 직선화하는 것은 그나마 복원할 수 있는 문학적 소재가 영원히 함몰되는 과오임을 인식하고 중지하여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각 누정에서 창작되었던 시를 통해 복원 가능한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한 연구를 통해 복원 및 재현하는 방법을 마련하여 시가문화 유적이 더욱 원형에 충실하도록 하여야 한다. 문화 탐방객들의 욕구는 물질적인 근사함보다는 정신적인 측면에 더 관심을 두고 있음은 이미 수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이다.
시가문화유산은 보존에 투철하면 할수록 빛나는 보배이다. 인간의 손이 닿으면 닿을수록 훼손되는 것이 바로 문화유산인 것이다. 보존에 충실함으로써 그 값진 유산을 문화 관광 상품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시가문화유산이 지닌 정적인 면과 무관하지 않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따라서 무분별한 개발은 오히려 자원을 훼손하는 것 말고는 다른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곳을 찾는 탐방객을 위한 안내센터의 개설이 시급한 현안이다. 외면적인 경관의 수려함에 그 뜻까지 알게 되면 만족도는 더욱 증가하며 잊히지 않는 시가문화권을 가슴에 담아 주기 때문이다.
끝으로 국민 모두에게 부탁하고 싶다. 이번 가사문학관의 건립의 일은 비단 담양군과 광주시에 한정된 일이 아니다. 이 땅 곳곳에서 문화유산을 빌미로 자본의 논리를 앞세운 개발이 횡행하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이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한다. 특히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문화에 대한 애정이 깊거나 그것을 공부했거나, 혹은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밥을 챙기는 사람들은 한시도 자신의 눈을 게을리 두지 말아야 한다. 모두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문화유산은 비단 눈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슴 속으로 느끼는 감회가 더 크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유산이 하루속히 그 소중함을 인정받고 국민들의 각별한 애정속에 보호·관리되길 바라며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