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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 대통령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다.
남미에서 1인당 GDP가 가장 높은 국가인 우루과이의 대통령이지만,
재산은 약 3억 5천만 원인데,
이 중 1억 5천만 원은 농장이고,
나머지는 약간의 현금과 트랙터 2대,
농기구, 1987년형 오래된 자동차 한대 등이다.
이 중 농장은 부인 소유이다.
2010년 우루과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는
대통령궁을 노숙자 쉼터로 제공하고 화려한 삶을 멀리했다.
대신 수도 몬테비데오 근교의 부인 소유 농장에서 기거하며 직접 화초를 가꾼다.
그렇게 국가에서 제공한 관저를 거절한 채 원래 살았던 농가에서 살면서,
우리 돈 1300 만원 정도인 대통령 월급 중 90%를 기부,
한 달 130 만 원 정도만을 받고 살고 있다.
그의 나머지 월급은 무주택자를 위한 사업에 쓰이고 있다.
그는 자신을 독특하게 바라보는 해외 취재진들에게
“우루과이의 대다수 시민들도 이와 다를 바 없이 생활한다”고 말한다.
올해로 만 77세가 된 호세 무히카 대통령은 동네 평범한 음식점에서 식사하고
직접 변기뚜껑을 사러 돌아다니면서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축구를 하면 다가가 응원을 하는 등
서민적이고 소탈한 모습으로 좋은 인상을 주고 있다 한다.
"사람들이 나를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전혀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난한 사람들은 사치스런 삶을 살면서도 더 많은 것을 욕망하느라
노동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진 재산이 많지 않다면 가진 것을 유지하려고
노예처럼 일하지 않아도 되고,
자신을 위한 시간은 더 많아지지요.
남들 보기에 내가 정신나간 늙은이 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건 선택의 자유일 뿐입니다."
아랍의 부호로부터 대통령의 오래 된 차를 자신의 총 재산의 4배인 100만 달러 (13억원)에 사겠다는 제의를 받았지만
는 제안을 거절했다.
이 사실이 화제를 모으자
그는, “내가 타는 차에 큰 관심을 두지 않기 바란다.
모든 자동차에는 가격이 붙어 있지만,
삶에는 가격이 없다"고 말했다.
자동차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인간의 삶의 문제에 더 많이 고민하라는 뜻이다.
무히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가치 있게 삶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다."
소설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우루과이에 거주하고 있는 "
헤랄드 아코스타"는 자신이 일하는 공장에 출근했으나
신분증 기한 만료로 작업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던 그는 더위를 피해서
승차 요청 (히치하이킹)을 시도했고,
지나가든 관용차 한 대가 그를 태워 줬다.
차안에 탄 ‘헤랄드’는 깜짝 놀랐다.
운전석에는 ‘호세 무히카’우루과이 대통령이
조수석에는 부인인 ‘루시아 토폴란스키’상원의원이 타고 있었다.
헤랄드는 그때 상황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대통령이 나를 차에 태워줬다.
그리고 상황을 설명하니 집까지 데려다 주셨다.
이 사실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대통령 부부는 매우 친절했다.
그날 하루 동안 비록 일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 짧은 여행은 더 없이 소중하고 유쾌했다"
본받고 싶은 샤를 드골 대통령 (Charles de Gaulle)
대통령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를 구한 드골 대통령이 1970년 서거합니다
그는 유언에서 가족장으로 할 것과 대통령이나 장
관들이 참례하는 것을 못하도록 하라고 하면서
그러나 2차 대전 전쟁터를 같이 누비며 프랑스 해방을 위하여 함께 싸웠던
전우들은 참례를 허락하라고 하였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이 유언을 존중하여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영결식을 거행하였으나
대통령과 장관들은 영결식장에 가지 않고 각자
자신들의 사무실에서 묵념을 올리는 것으로 조의를 표했습니다.
드골 대통령은 자신이 사랑했던 장애자 딸의 무덤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도 남겼습니다.
그뿐 아니라 내가 죽은 후 묘비를 간단하게 하라.
이름과 출생 사망 년도만 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드골 전 대통령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Charles de Gaulle (1890 ∼ 1970)
그리고 드골은 태통령 퇴임 후 정부가 지급하는 퇴임 대통령 연금과 가족에게 지급하는 연금도 받지 않았습니다. 드골은 그 돈은 가난한 국민들을 위해 사용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에 따라 정부는 드골 퇴임 후 본인은 물론 서거 후
미망인 가족들에게 지급되는 연금도
무의탁 노인들과 고아원 어린이들을 위해 사용하는
신탁 기금에 보내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드골 대통령의 가족들은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드골 대통령이 출생하고 은퇴 후 살던 생가를 관리할 능력이 없어
그 저택을 팔았습니다.
그 저택은 그 지방 영주가 구입 정부에 헌납하여
지방 정부가 문화재로 지정하고 지금은 드골 기념관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세계 유명 대통령의 장례에 대해 알아 본 즉 드골 같은 분도 계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 루즈벨트 대통령의 봉사 세계 2차 대전 때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전쟁터의 이슬로 사라졌다.
병력이 부족하고 또 졸지에 일어난 전쟁이기 때문에
각 지방의 젊은 청년들은 영장을 받은 후 큰 도시로 집결해서
기차를 타고 훈련소로 갔다.
당시 국민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장정들을 태운
기차는 주로 밤늦게 떠났다.
그러므로 위싱톤에도 밤마다 유니온 기차 정거장에는
수백 명의 장정들이 몰려들었고 시민들이 나와서
그들의 편의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때 시민들 가운데 밤마다 밤늦게까지 다리를 절면서
뜨거운 코코아잔을 쟁반에 들고
젊은 장정들에게 봉사를 한 사람이 있었다.
어떤 때는 임시로 마련된 주방에서 친히 코코아를 끓이기도 했다.
어느 장정 하나가 그 노인을 자세히 보니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대통령이었다. “
각하. 루즈벨트 대통령이 아니십니까.”
루즈벨트 대통령은 육체적으로 자유스런 사람이 아니었다.
육체의 불편을 무릅쓰고 밤마다 기차 정거장에 나와
기차로 떠나는 청년들에게 뜨거운 코코아를 들고 다니며 봉사했다.
대통령이 친히 기차 정거장에 나와서
따라주는 코코아를 마신 청년들의 사기는 대단했다.
이처럼 섬기는 일에는 위아래가 없는 법이다.
성경 말씀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라고 했다.
종이 되는 길이 으뜸이 되는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초등학교도 못나온 미국 대통령 Andrew Johnson 미국의 17대 대통령인
"앤드류 존슨"은 긍정의 힘을 발휘했던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세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몹시 가난하여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열세살에 양복점을 들어가 성실하게 일했고
열일곱살에 양복점을 차려 돈을 벌고 구두수선공의 딸과 결혼한 후에
아내로부터 글을 쓰고 읽는 법을 배웠으며
이후 공부에 취미를 붙여 다방면에 교양을 쌓은
"엔드류 존슨"은 정치에 뛰어들어 테네시주지사,
상원의원이 된 후에 16대 미대통령인 링컨을 보좌하는 부통령이 된다.
그리고 링컨 대통령이 암살 당한 후
미국17대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지만 상대편으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당한다.
"한나라를 이끌어 가는 대통령이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하다니 말이 됩니까 ?"
그러자 존슨은 언제나 침착하게 대답한다.
그리고 이 한마디에 상황을 역전시켜 버린다.
"여러분, 저는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초등학교를 다녔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초등학교도 못 나오셨지만 전
세계를 구원의 길로 지금도 이끌고 계십니다."
"이 나라를 이끄는 힘은 학력이 아니라 긍정적 의지요.
미국 국민의 적극적 지지입니다."
그가 바로 미국 17대 대통령 재임시 미 국무장관인 "윌리엄 수어드"에게
구 소련으로 부터 그 당시 720만 달러에 알라스카를 사들이게 만든
미 17대대통령 "엔드류 존슨 "이다.
그 당시 동토의 땅인 알래스카를 사들였다고 미친짓이라고 얼마나 욕을 먹었으면서도
긍정적인 마인드의 힘을 발휘해 성사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링컨 대통령 일화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로 추앙 받고 있는 에이브라함 링컨(1809~1865)은
남북 전쟁이 한창일 때 종종 부상 당한 병사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한 번은 심한 부상을 입고 거의 죽음 직전에 있는 한 젊은 병사를 찾게 되었습니다.
링컨은 병사의 침상 곁으로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 없겠소?"
병사는 앞에 서있는 사람이 링컨 대통령인 줄 알아보지 못했고 간신히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저의 어머니에게 편지 한 통만 써 주시겠어요?"
펜과 종이가 준비되자 대통령은 정성스럽게 젊은이가 말하는 내용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보고 싶은 어머니, 저는 저의 의무를 다하던 중에 심한 부상을 당했습니다.
아무래도 회복되지 못할 것 같군요.
제가 먼저 떠나더라도 저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동생 존과 메리에게도 저 대신 입을 맞춰 주시구요.
하나님께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축복해 주시기를 빌겠어요."
병사가 기력이 없어서 더 이상 얘기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링컨은 젊은이 대신 편지 말미에 서명을 하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위해 에이브라함 링컨이 이 편지를 대필했습니다.
' 젊은 병사는 조금 전에 쓴 편지를 자기에게 좀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침내 편지를 대신 써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는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대통령이신가요?" "
그렇소. 내가 대통령이오."
그런 다음, 링컨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없는 가를 묻자 병사가 말했습니다.
"제 손을 꼭 잡아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편안히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용한 실내에서 키가 크고 수척한 링컨 대통령은 청년의 손을 잡고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그에게 따뜻한 용기의 말들을 나직이 들려주었습니다.
이 일화는 에 소개된 내용으로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의 따뜻함과 편안함, 훈훈함을 느끼게 합니다.
대통령을 만든 정직함 한 시골 교회의 주일학교 예배시간이었습니다.
다섯 살짜리 꼬마 아이가 헌금시간에 돈을 넣는 척하면서 몰래 헌금을 빼냈습니다.
그리고 집에 가면서 아버지가 준 헌금까지 더해서 과자를 사먹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아버지는 헌금은 잘 했는지 물었습니다.
아이는 열심히 거짓말을 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추궁에 진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 날 무섭게 혼이 나고 회초리도 많이 맞았습니다.
아이는 그 날 이후로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
정직’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았습니다.
나중에 자라서 땅콩농사를 짓던 이 아이는 주지사가 됐고,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전 대통령인 닉슨의 거짓말에 신물이 났던 국민들은 정직한 지미 카터를 선택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정직함 때문에 재임 기간에는
그다지 국민들로부터 인기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우직한 정책들은 퇴임 이후에 재평가를 받았고,
그 후에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비롯한 각종 평화활동으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카터는 세계 어디를 가던
5일을 봉사하고 주말은 교회를 갔고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대통령의 제자 케네디 대통령의 뒤를 이어
1963년 제36대 대통령이 된 린든 존슨은 텍사스주립교육대학을 졸업한 뒤
초등학교에서 잠시 아이들을 가르친 적이 있다.
어느 날 존슨 대통령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백악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는데 “
나는 비밀이 있다” 라는 프로그램에서 마침
그의 고향인 텍사스 주에서 가구상을 한다는
한 40대 남자가 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네 다니엘 씨의 비밀은 무엇인지 속 시원히 털어놓아 보세요."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그는 소년 같은 웃음을 머금고 말을 시작했다 "
사실 이 이야기는 대단한 비밀이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만
제가 이야기하려는 분이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되지 않았다면 말이죠.
30년 전 제가 초등학생이었던 때입니다.
어느 날 제가 교실에서 너무 심하게 떠들어서 담임 선생님께 매를 맞은 적이 있습니다.
그 선생님이 누구신가 하면 바로 린든 존슨이었습니다.
아이쿠 아직 눈치를 못 챈 분이 계시군요..
바로 린든 존슨 대통령이시란 말입니다."
그리움이 가득찬 표정으로 TV 화면을 바라보던 존슨 대통령은 즉시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어
옛 제자와 전화를 연결해 달라고 말하였다.
수화기 잠시 시끌시끌하더니 "
각하 전화가 연결되었으니 제자와 말씀을 나누십시오."
라는 사회자의 대답이 들려왔다.
존슨 대통령은 제자와 반가운 인사가 끝나자 마자 농담 한마디를 던져
전 미국을 웃음 바다로 만들었으니
“다니엘 군 맞은 자리가 아직도 아픈가”
링컨 대통령의 격려 미국 남북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게티즈버그 전투였습니다.
운명을 건 한판 승부를 앞두고 링컨 대통령은
마이드 장군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공격 명령엔 한 통의 편지가 동봉되었습니다.
“존경하는 마이드 장군!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그것은 모두 당신의 공로입니다. 그
러나 만일 실패한다면
그 책임은 내게 있소. 만일 작전이 실패한다면 장군은
링컨 대통령의 명령이었다고 말하시오.
그리고 이 편지를 모두에게 공개하시오!
아브라함 링컨”
이 편지 한 통에서 훌륭한 리더십의 전형을 봅니다.
"공은 아랫사람에게 실패는 자신에게!"
이는 큰 인물이 지니는 도량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리더십은 용기와 충성심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결국 북군은 이러한 링컨의 리더십에 의하여 중요한 전투에 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승리의 자리가 없었다면
아마 그 유명한 민주주의에 대한 연설도 없을 것입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소멸되지 않을 것입니다.”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박정희대통령과 창녀 이야기
종규야! 옛 각하! 부르셨습니까?
1969년 서늘한 가을 어느 날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호실장 박종규를 찾았다.
수줍게 웃으면서 손짓으로 귀를 가깝게 대라고 한다.
종규야! 오늘 밤에 나 좀 조용히 나갔다 오고 싶다.
준비 좀 해 다오.
대통령을 쳐다보니 노동자들이 입고
다닐듯한 어설픈 잠바에 찌그러진 중절모를 쓰고 있다.
도대체 야밤중에 어디를 다녀오시겠다는 것인지?
상당수의 비밀 경호원을 대동하고 청와대를 몰래 빠져나온
박정희는 서울역 앞 양동 골목으로 향한다.
당시 서울에서 제일 큰 창녀촌 지역을 암행시찰하는 것이었다.
박종규와 경호팀들은 모두가 초긴장 상태다.
아무리 비밀리에 움직이는 민정 시찰이라도 그렇지?
이렇게 창녀촌을 급습하다니.
경호원들에게 절대로 표시내지 않도록 지시를 내린
대통령은 혼자서 터벅터벅 창녀촌의 골목을 후벼든다.
누가 보아도 중년의 노동자다.
빨간 전구불이 주렁주렁 매달린 어둠의 창녀촌에서는,
새악시들이 마구 튀어나와 대통령의 소매끝에 매달린다.
곳곳에 숨어서 지켜보는 경호원들은 침이 마른다.
입속이 바싹 바싹 매말라간다.
머리통에서 지진이 일어난다.
아니 저 가시나들이. 도대체 어느 안전이라고. 튀어나가 말릴 수도 없다.
소리칠 수도 없다. 각하가 특별히 소리치기 전에는 절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옴짝 달싹 말라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데 한 어린 아가씨가 아예 각하를 껴안으며 숫제 매어달려 버린다.
옵~빠! 잠깐만 쉬었다 가 용! 그래 좋다. 쉬었다 가자!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린다.
박종규는 절망의 한숨을 내어 뱉는다.
세상에나 맙소사 각하가 어떻게 똥 갈보랑 같이 하룻밤을
대통령은 창녀와 손을 잡고,
2층의 다락방을 올라가는 삐끄닥 소리가 들린다.
좁은 나무계단을 올라가는 것이다.
두사람이 눕기에도 비좁은 창녀의 방에서,
두사람은 마주 앉았다. ```옵~빠...__
타임은 200원이고, 긴밤은 1000원이에~~용..!
우선 화대부터 주세요
나는 씻고 와야 되니깐...
대통령은 깊게 눌러썼던 중절모를 벗었다.
워~매....``혹시 대통령 아저씨 아니세요?
여자아이는 깜짝 놀라며 소리를 친다.
영락없는 대통령의 모습이니깐.
(야. 이눔아. 내가 대통령이라면 네가 믿겠냐
그러지 않아도 어렵게 살아가는 판에.
여기저기서 감히 내가 대통령하고 비슷하게 생겼다고 놀려대서 이민이라도 가고 싶다.
괜한 소리 지껄이다가 잡혀가서 혼줄나지 말고 그만 닥쳐라 이눔아...)
여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한다.
대통령은 500원짜리 고액 지폐 몇장을 쥐어주면서 이야기한다.
(당시 500원은 요새 4~5만원과 비슷한 가치다)
열차 시간이나 기다리다가 갈련다.
그동안 나랑 이야기나 나누자구나 순간 어린 창녀는 당황을 한다.
쉬었다가 간다면, 타임이 분명한데.
이렇게 많은 돈을.... 횡재한듯이 받은돈을,
절대로 다시 줄수는 없고. 한마디 내어뱉는다. ````옵~빠...!
그러면 내가 나가서 쏘~주랑 오징어랑 사올테니깐...
술이나 한잔 하자....ㅎㅎ 그렇게 해서... 대통령과 어린 창녀는 양동의 창녀촌 2층 골방에서 한잔술이 시작되었고
한잔이, 두잔 석잔이 되고.한병 두병이, 서너병이 금방이닷
창녀 아이는 차츰 술이 취해간다.
아저씨, 여기 포주들도 경찰들도 정화위원도 모두가 도둑놈들이에요.
다~아..지네들끼리 짜고치는 고스톱이야~~~
우리들을 감시하면서 뜯어먹고,
서로 단속나온다고 알려주고 숨기고,
모두가 도둑놈 강도들이에요~~
옹나는 미용 기술이라도 배워서 깨끗한 미장원 한번 차려보고 싶은 것이 꿈인데 절대로 이뤄질수 없는 꿈이지 뭐에요..
.흥, 아저씨는 대통령하고 비슷하니깐 이야긴데,,
대통령도 도둑놈이에욧,
모른체 하면 도둑놈이지 뭐, 빡~`정희도 도둑~~~노~옴....!
어린 창녀는 혀꼬부라진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술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 쓰러져.
소로록 잠이 들었다 잠든 창녀의 모습에서 아롱진 눈물자욱을 쳐다보던 대통령은 글을 적는다. ``
밝은 세상이 될것이다.
너의 희망도 이루어 질것이다.
희망이 이루어지면 열심히 살자. 그
래서 가난을 이겨내고,
정직하게 일하면서 행복하게 살아보자구나.
그녀의 벼갯닢에 쪽지를 묻으며,
지갑에서 여러장 지폐를 빼어 놓는다.
저~벅 저~벅... 꼿꼿한 걸음으로 쪽방을 나오는 대통령의 모습에, 경호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뿜어낸다.
청와대로 돌아온 대통령은 새벽에 비상을 건다.
지금 즉시 내무장관을 비롯한 관계 기관장 집합!
님자들은 회전의자에서 폼만 잡으면 끝나는 줄 알~~앗...!! 다
음날부터, 서울역 앞 양동과 종로 3가의 창녀촌들은 철시가 시작된다.
갈곳 없는 창녀들을 보호하는 장소도 만든다.
미용기술을 비롯한 생계형 교육을 준비한다.
직업 훈련소의 새로운 시작이다 청와대 집무실에서 창밖을 본다.
키다리 코스모스가 빵~긋거리며 고추 잠자리를 희롱한다.
잘 살고 싶다고 소리치는 어린 창녀의 눈물을 생각하며 가만히 손수건을 꺼내든다.
조국 근대화를 생각하며,, 눈가에 비치는 눈물을 지워보려고...
이런마음, 이런 행동이 진정한 국민을 위한 대통령이다
대통령의 아침 식사 미국의 17대 대통령 존슨이
시카고의 힐튼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미리 알게 된 호텔 측에서는 이번 기회야말로
힐튼호텔을 사람들에게 알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다음날 먹을 아침 식사를 위하여 모든 인원을 총동원해서
훌륭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려고 계획하였습니다.
힐튼호텔이 자랑하는 국내 최고의 요리사들이 가장 신선하고 고급스러운 재료를 구했습니다. 그
리고 다음날 새벽 4시에 출근해서 조심스럽게 계획된 메뉴에 따라
실력을 다하여 대통령의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대통령은 일어나자 간단하게 아침 체조를 했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아침 식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대통령이 아침 식사로 주문한 음식은 한 조각의 샌드위치와 블랙 커피가 전부였습니다.
이 얼마나 허탈한 일이었겠습니까?
레이건 대통령을 있게 한 짝짝이 구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어렸을 때 일입니다.
그의 숙모가 구두를 사주기 위해서 레이건을 데리고 구두 가게에 갔습니다.
구두 수선공이 레이건에게
"구두 끝을 각지게 해줄까,
아니면 둥글게 해줄까?"
하고 묻자, 레이건은 빨리 결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구두 수선공이 "그러면 내가 알아서 만들어 둘 테니 며칠 후에 오나라"고 말했습니다.
며칠 후 구두를 찾으러 갔더니
구두가 한쪽 끝은 각지고 한쪽 끝은 둥글게 만들어진 짝짝이 구두였습니다.
구두 수선공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너는 이번 일을 통해 너의 일을 결코 다른 사람이 결정 내려 주지 못한다는 것을 배었을 거다.
" 레이건은 나중에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그 결정을 다른 사람이 대신하게 된다는 것을 바로 그때에 깨달았습니다."
성공은 다른 사람의 결정을 기다리기보다 자신의 판단하에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최선을 다해 달려갈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대통령의 가족 깡마른 얼굴에 빛 바랜 노동복,
베트남의 대통령이 된 뒤에도 낡은 타이어로 만든 샌들을 신고 다닐 정도로 청렴했던 호
치민. 세상을 떠난 지 36년이 넘었지만 그
는 여전히 국민들 가슴속에 살아 있는 지도자다.
스물 한 살 때 프랑스 식민주의 대한 저항 활동을 시작해 35년 동안 유럽, 아메리카, 러시아,
중국을 떠돌며 사회주의 이론가로 활약했다.
그의 가명이 50개가 넘는 다는 사실은 사선을 넘나들었던 그
의 위험한 삶을 짐작케 한다. 호치민이 베트남의 대통령이 된 뒤의 일이다.
그의 형은 30년 만에 대통령 궁이 아닌 친척집에서 동생을 만났다.
그때서야 형은 자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대통령 호치민'이 자기 동생임을 처음 알았다.
그가 워낙 여러 개의 가명을 썼기 때문이다.
누나 또한 신문에 실린 대통령의 사진을 보고서야 동생이라는 것을 알고
호치민을 찾아갔다.
누나는 동생을 만나 회포를 푼 다음날
바로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다.
호치민이 자신의 일을 도와달라며 누나를 붙잡았으나 누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네게 도움을 주기보다 구설수를 더 많이 만들지도 모른다.
네가 깨끗하고 공정한 대통령이 되려면 우리 남매가 먼저 깨끗하고 공정해야 해"
그 날 이후로 누나는 죽을 때까지 고향을 벗어나지 않았다.
흔히 호치민을 '반 레닌, 반은 간디'라고 말한다.
빈틈없는 사회주의 노선으로 베트남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략가인 동시에 국민들에게 '호 아저씨로'로 불릴 정도로 인간적이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호치민 뒤에는 대통령과 한 핏줄임에도
결코 특권을 내세우지 않았던 가족의 사랑이 있었다.
인간적인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무려 43개의 독점기업의 횡포를 법원에 제소 했던 테오도르
루즈벨트는 미국 역사상 가장 국민 모두에게 가장 공평한 정책을 펴려고 노력했던 대통령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를 모셨던 백악관 식구들은 누구에게나 관심을 쏟고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었던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태프트 대통령 재임기간 중 어느 날,
전임 대통령이었던 테오드르 루즈벨트가 백악관을 방문했다.
그는 자신의 재임 시절부터 근무하던 하인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그들의 얼굴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엌에서 일하는 하녀의 이름 까지
친절하게 불러가며 인사를 했다.
“에리스, 잘 지냈나? 요즘도 그 맛있는 옥수수빵을 굽고 있나?”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먹을 것만 가끔 구울 뿐이에요.
2층에 계신 분들은 드시질 않습니다.”
그 말을 듣자 루즈벨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
백악관에 새로 들어온 친구는 음식 맛을 모르는군.
대통령을 만나면 내가 말을 해두지.”
에리스가 접시에 담아 내미는 옥수수 빵 한 조각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면서 루즈벨트는 대통령 집무실로 갔다.
가는 도중에 정원사나 일꾼들을 만나면 그
는 예전과 다름없는 친절한 표정으로 그들 하나 하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을 걸었다. “
아이크, 요즘 자네 아이 몸은 괜찮은가?
예전에는 많이 아프다고 하지 않았나?”
그가 백악관을 떠난 지 2년을 흐른 뒤였다. 아이크는 훗날, 그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2년 흐른 그때까지 저에 대해 기억하고 있을거라 생가하지 못했습니다.
저처럼 작은 존재를 그날까지 잊지 않다니….
그는 제가 모신 대통령 중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대통령의 편지 암살된 케네디의 뒤를
이어 미국의 대통령이 된 린든 존슨.
1964년 대통령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재선된 그는 ‘위대한 사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사회적 경제적 개혁을 통해 복지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 개혁 방법 중의 하나로 그는 국민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백악관 보좌관들은 날마다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이는 편지들을 정리하여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때로는 바쁜 일정으로 일일이 편지에 답장하지 못하는 린든 존슨을 대신하여 답장을 작성한 뒤
대통령에게 최종 확인을 받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린든 존슨은 시간 여유가 날 때마다 보좌관에게 국민들이 보낸 편지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어느 날 포트워스 빈민가에 사는 ‘
패티’라는 소녀의 편지를 읽게 되었다.
편지에는 소녀의 간절한 소원이 담겨 있었다. ‘
제가 사는 빈민가에는 아이들이 맘껏 뛰어 놀 만한 놀이터가 없어요.
길거리에는 깨진 술병과 쓰레기가 넘치고 있어요. 그
래서 아이들은 자기 집 현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이야기를 할 뿐이랍니다.
제발 포트워스 빈민가에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
린든 존슨은 직접 패티에게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
귀여운 소녀 패티, 참 안타까운 소식이구나. 네가 사는 곳에 당장 놀이터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마.
’ 패티가 대통령에게서 받은 편지는 곧 포트워스 지역의 신문에 실리고 얼
마 뒤 대통령이 행정부의 담당부서에 적절한 조치를 취해
빈민가에는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만들어졌다.
린든 존슨은 패티뿐 아니라 다른 빈민가의 아이들,
어른들과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견해를 전했다.
그리고 때때로 그가 답장에서 도와주겠다고
답한 일들은 즉각적으로 시행되어 복지에 있어서만큼은 국민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만델라 대통령의 감사 훈련 이야기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전 대통령은 매우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있었다.
46세부터 73세까지 무려 27년이나 옥살이를 했으니,
인생의 3분의 1을 감옥에서 보낸 것이다
. 만델라가 출소하던 날 각국의 기자들이 교도소앞에서 그를 기다렸는데,
70세가 넘는 나이에도 밟고 건강해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고 다들 감짝 놀랐다고 한다.
그의 모습을 본 한 기자가 질문을 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5년만 감옥살이를 해도 건강을 잃는데,
어떻게 27년간 옥살이를 하고서도 이렇게 건강하십니까?"
만델라는 웃으며 대답했다고 한다. "
나는 감옥에서 중노동을 나갈 때 넓은 자연으로 나간다는 즐거움으로 일을 즐겼습니다.
하늘을 보고 감사했고,
땅을 보고 감사했습니다.
남들은 감방에서 좌절과 분노를 삭였지만
나는 마음을 내려놓고 용서를 했습니다.
매 순간 감사했습니다.
물을 마실 때도 음식을 먹을 때도 강제노동을 할 때도 감사했습니다.
그랬더니 세상의 모든 즐거움이 저를 감쌌습니다."
인생의 대부분을 억울한 감옥살이로 보냈으면서도 원망 대신
감사를 선택한 만델라는 그 후,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도 당선 되었다. ☆
알라스카 이야기 미국에서는 크게 바가지 쓴 거래를 두고 "Seward's Folly"라고 부른답니다.
"슈워드의 바보짓"으로 번역할 수 있겠는데
이 말이 생겨난 것은 역사적으로 한 획을 긋는 큰 사건이 배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윌리엄 헨리 슈워드(William Henry Seward)는
노예제도를 없애고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링컨 대통령 시절부터
미국의 국무장관을 역임했던 사람입니다.
슈워드는 국무장관(1861년∼1869년)에 재임 중이던 1
867년, 제정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명을 받은 주미(駐美) 공사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습니다.
"슈워드 장관! 본국의 황제로부터 알래스카를 귀국에
양도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장관께서는 인수할 의향이 있소?"
이 같은 사실은 대통령인 앤드류 존슨에게 즉시 보고됩니다.
존슨 대통령은 빅딜의 전권을 슈워드 장관에게 위임합니다.
급히 협상 팀을 꾸려서 러시아로 달려간 슈워드 장관은 1867년 3월 29일 저녁부터
러시아 측 담당자인 스테클 공사와 밤샘 협상을 벌여
이튿날 아침에 계약서를 완성시키고 내친 김에 양국의 대표가 서명까지 마침으로써 알래스카는 미
국의 영토가 된 것입니다.
계약의 세부 내용은 러시아 국영 무역회사가 미국 정부에 지고있던 채무 7
00만 달러를 탕감하는 대신 러시아 정부 소유의 알라스카를
미국 정부에 넘기는 조건이었습니다.
사실상 떼일 수도 있었던 미수금을 퉁 치면서
큰 대륙을 통째로 넘겨받기가 미안했던지
미국은 위로금 명목으로 20만 달러를 러시아에 더 지급하고 계약을 마무리했습니다.
우리 셈법대로 치면 평당 0.18원 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빅 딜을 성공시킨 슈워드의 공(貢)은 국내의 정치가들에 의해 크게 폄훼당합니다.
의회를 중심으로 "얼음 덩어리 애물단지를 떠 안았다",
"러시아의 농간에 넘어갔다" 등 앤드류 존슨 대통령을 탄핵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며
결국 이 계약으로 말미암아 존슨 대통령은 정치 생명에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슈워드 장관 역시 장관직을 사임해야 하는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국내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신상에 닥칠 위험도 감수한 채 슈워드 장관은
알래스카는 훗날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신념과 애국심으로 계약을 밀어 부쳤습니다.
그런 애국자였던 슈워드 장관은 그 일로 인해 목이 날아간 반면,
훗날 러시아가 두고두고 땅을 치게 만든 알래스카
양도의 주인공이었던 스테클 공사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신임을 받아 승승장구하는
아이러니가 역사 속에 실재했던 일입니다.
그 알래스카는 면적이 1,519,000평방 km로서 남한 면적의
15배가 훌쩍 넘는 거대한 땅입니다. 알래스카는 철광석, 금, 전 세계 부존량의
10%에 달하는 석탄, 석유, 천연가스는 물론이고,
임산자원인 목재와 빼어난 경관을 바탕으로 하는 관광자원에다
수산물에 이르기까지 돈으로 셈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보물이 되었습니다. 그
런데 알래스카의 가치는 정작 눈에 보이는 자원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알래스카는 지정학적으로 군사적 측면에서 러시아를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으로써 전략적으로도 미국을 지구상에서 최강의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 할 것입니다.
720만불이면 우리 돈으로 80억 원 쯤 되는데 현재 싯가로 환산해도
2조 원이 채 안 되는 금액이랍니다.
멀리 보고 크게 생각한 슈워드 장관의 거시적 안목과 희생정신이
오늘날 초강대국 미국을 만든 한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슈워드 장관이 알래스카를 인수하려고 뛰어다닐 때
미국인들은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모욕을 주었지만 그
는 묵묵히 자신의 주장을 관철해 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미국은 지구상에서 최고의 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 제39대 미국 대통령을 역임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24년 12월 29일 (현지시간) 10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언론은 카터 전 대통령이 이날 조지아주 플레인스 자택에서 호스피스
돌봄을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1924년 10월 1일생인 카터 전 대통령은 올해 100세로 생존했던
미국 대통령 중 최고령이었다.
카터 전 대통령은 흑색종 피부암으로 투병해왔으며,
지난해 2월부터는 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치료를 받아왔다.
카터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미국 안팎에서 어려움을 겪고 재선에도 실패했지만,
국제 평화 문제에 천착했고, 그 결과로 노벨평화상도 수상했다.
이에 ‘가장 위대한 미 전직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가장 겸허했던 대통령으로 불린다.
퇴임 후에도 돈 벌 기회가 숱했지만 모두 사절하고 방 두 칸 짜리 집에서 검소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집 시세는 22만3000달러, 환율 1470원대를 적용해도
불과 3억원 남짓. 그마저도 국립공원 관리청에 기부하고 갔다.
후임자들과 같은 욕심을 피했다.
사업가 친구들의 전용기를 마다하고 여객기 이코노미석을 타고 다녔고
건강이 악화될 때까지 교회 주일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봉사 활동에 헌신했다.
땅콩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77년 세계의 대통령으로 불리는 백악관 주인이 됐다.
1980년 대선에서 재선에 실패 뒤엔 군소리 없이 짐을 챙겨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임기 후에 따르는 정치적 부 챙기기를 거부하고 참으로 평범한 삶을 살았다.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 달리 강연이나 기업 컨설팅을 해주며 떼돈을 벌려 하지 않았다.
대기업 고문 등 통과의례처럼 주어지는 제의들도 모두 고사했다.
땅콩 사업 재정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100만 달러 빚을 지고 있었다.
곧바로 사업을 처분하고 가계 회복을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양한 주제의 책 33권을 출간해 빚 갚는 데 보탰다. 전직 대통령 연금 21만700달러도 쏟아 부었다.
세금으로 충당되는 전직 대통령 연금, 경호 비용, 기타 경비를 최대한 절약했다.
클린턴 127만, 조지 W 부시 121만, 오바마 118만, 트럼프104만 달러에 비해 연간 49만6000달러로 줄였다. 그는 돈을 좇지 않는 자신에 대해 “그게 뭐 잘못된 거냐”며 “다른 사람들이 그런다고 탓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2024년 12월 9일 국립성당에서 장례식이 끝나면 그의 시신은 조지아주의 고향 마을로 옮겨진다.
기차 운송이 검토됐지만,
“차갑고 죽은 시신이 여기저기 거쳐가면
내가 죽어서도 여러분을 괴롭히게 되는 것”이라는
고인의 생전 바람에 따라 군용 비행기로 직송한다.
77년 간 해로했던 아내 로잘린 여사가 2023년 11월 먼저 묻힌 고향 마을
연못 가장자리 버드나무 옆 묘소에 나란히 눕혀진다.
이 인류 모든 나라 대통령이 이렇게 인간미가 넘치는
훌륭한 국가 지도가 되길 소망해 본다.
우리도 이런 지도자 한 분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나라 모든 공직에 계시는 분들은 물론
국민모두가 윤동주 시 한 구절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붙들고
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