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눈물을 통해서 깨달아지는 하나님의 마음(창45:1-5)
2024.2.4 김상수목사(안흥교회)
바닷가에 살다보면,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밀려오는 바닷물 보면 아름다움을 넘어 두려움이 느껴질 때도 있다. 우리들의 삶에도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쓰나미같은 파도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찾아올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왜 나에게(Why me)?”라는 의문과 함께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힘든 감정에 사로잡히기 쉽다. 심지어 마음 한 구석에 하나님께 대해서 검은색까지는 아니지만 살짝 회색빛 서운함에 젖어들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실은 인생의 어려운 일들이 “나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일어났을 뿐이다. .이때 그 고난의 터널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바로 사랑과 믿음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고, 둘째는 온 가족과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하나 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믿음으로 지켜내는 것이다. 이렇게 사랑과 믿음으로 살아내면(단지 ‘사는 것’이 아님), “아하,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구나!”라고 깨달아지는 반전의 순간이 온다. 나를 향하신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순간 그 동안 모든 힘든 일들이 다 녹아내리고, 감사가 넘치게 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서 그의 삶이 변하는 벅찬 반전의 장면들을 수 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의 빼놓을 수 없는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들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의 설교본문이다. 오늘 본문은 요셉이 자신을 종으로 팔아 넘겼던 형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눈물 흘리는 장면이다. 요셉은 17살 때, 그의 형들에 의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다. 그 후 13년 동안이나 종살이(옥살이 2년 포함)를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30세 때 애굽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고, 총리의 자리에까지 이른다.
오늘 본문은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해 준대로 7년 풍년의 기간이 지나고, 7년 흉년의 기간 중에 2년째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요셉의 형들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애굽까지 왔고, 여러 과정을 거쳐서 요셉의 친동생인 베냐민까지 요셉 앞에 왔다. 그때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을 알리면서 그 동안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그가 얼마나 크게 울었는지 애굽 사람들에게 들렸고, 바로의 궁중에까지 그 소식이 알려졌다(창45:1-2). 요셉은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다(창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요셉의 울면서 했던 이 말은 단지 감정에 북받친 말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사람이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요셉은 자신 앞에 머리 숙인 형들의 모습을 보면서, 왜 하나님이 자기에게 그토록 모진 고난을 허용하셨는지, 왜 자기를 애굽으로 먼저 보내셨는지를 깨달았다. 그러면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이 눈물은 논리나 법조항으로는 이해될 수 있는 눈물이 아니다. 이 눈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모든 응어리가 녹아지고, 의문점이 풀리고, 심하게 찢어졌던 마음이 치유되는 눈물이다. 요셉의 이 눈물은 용서의 눈물이었다. 요셉의 눈물에서 참된 용서의 방법이 무엇인지도 깨달아진다.
이 시대 세상의 똑똑한(또는 똑똑한척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나 논리적인 법조항으로만 문제를 풀려고 한다. 그래서 솔로몬의 지혜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머리 좋은 사람은 마음이 깊은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처럼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머리를 넘어 말씀 안에서 마음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반면에 요셉의 형들의 입장에서 보면, 요셉의 눈물은 흉악한 죄로 인해 죽을 위기에서 살아나게 하는 은혜의 눈물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셉의 형들과도 같은 아니 그 보다 더 흉악한 우리(나)를 위해서 우셨다(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예수님의 눈물은 예수님 자신에게는 고난의 눈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지옥의 불 못에서 건짐을 받는 은혜의 눈물이다. 주님의 눈물과 대속으로 인해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들은 한 평생 사는 동안 수많은 사망의 골짜기들을 지나게 된다. 이런 골짜기들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런 고통들이 현재진행형인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나의 길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거친 광야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온 몸으로 경험했던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물론 우리의 육신의 눈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만 보이고,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은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2차 대전 당시에 영국의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고통 속에 있는 영국 국민들에게 “지옥 길을 걷고 있다면 계속 나아가라. 왜 지옥에서 멈추려 하는가?”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그의 말에 덧붙여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지옥 길을 걷고 있다면,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 계속 나아가라. 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멈추려 하는가?”
여기서 잠시 요셉의 나이를 정리해 보자. 요셉은 17세 때 꿈을 꾸었고, 형들에게 의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다(창37:2). 그 후 13년 동안 종살이(11년 종살이, 2년은 감옥)를 하다가 30세에 총리가 되었다(창41:46). 그리고 39세 때에 22년 만에 형들과 재회했고(창45:11), 110세에 죽었다(창50:26). 그러니까 총리가 된 후로 80년을 더 살았고, 형들과 다시 만났을 때를 기준으로 보아도 무려 71년을 더 살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13년 동안 종살이를 하면서 고생할 때는 그 순간이 굉장히 긴 것처럼 느껴졌겠지만, 110년이라는 인생의 긴 여정에서 보면 13년은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오히려 그 고난의 13년은 총리가 된 이후의 나머지 80년의 인생을 위해 준비 시킨 기간이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들도 인생을 거시적으로 크게 보아야 한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고난의 산 때문에 ‘왜 나에게?’라는 의문이 들고, 하나님을 향한 서운한 마음 때문에 우울해지지고 하고, 때로는 음식도 먹기 싫고, 만사가 귀찮아지는 무기력증의 파도가 엄몰해 오는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도 ‘지금 이 기간은 더 크고 긴 은혜를 주시기 위한 일시적인 기간일 뿐이며, 욥의 고백처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순금과 같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욥 23:10).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고난의 산 너머에 이미 더 큰 축복의 땅을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 정확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실수로 나에게만 고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믿음이란 이러한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예비하심을 미리 보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요셉의 눈물을 통해서 깨달아야할 하나님의 계획과 마음이 바로 이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우리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때, 우리 안에서 참된 요셉의 눈물이 터진다. 그때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고, 내가 먼저 손 내밀 수 있고, 나에게 내민 손을 맞잡을 수 있고, 마음에는 평안과 안정감이 가득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렇게 될 수 있도록 항공기 조종사가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는 계기판을 보고 계기비행 하듯이 우리들도 말씀의 계기비행을 하자. 지금 말씀의 계기판을 펼치자. 그러면 말씀 속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깨달아지고, 요셉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 반전의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