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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통구라는 성지에서 만난 고구려 유적 1
통구(通溝)란 말을 어디서 들어보셨는지. 어딘가 모르게 낮 익은 이름이다 싶지 않은가. 통구는 봇도랑 구(溝)자가 있으니 시냇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통구는 실제로 환도산성과 국내성 앞을 흘러 압록강으로 합류하는 작은 강을 말한다. 이 강으로 인해 오래 전부터 통구(通溝)라는 지명을 얻었던 곳이 지금의 집안이다. 우리는 집안이라 부르지 말고 고구려 때 불렀다는 이름인 통구라고 부르는 게 맞다. 이 통구는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백두산 일대는 '용맥'이라는 신성한 땅으로 여겨져 금봉토로 지정되었고, 이 지역도 출입이 통제되었던 곳이다. 이후 1902년에 집안현(輯安縣)이 설치되었고, 1965년에 집안현(集安縣)으로 개칭한 후 1988년에는 현급 시로 승격해 현재에 이르는 것으로 굳이 나는 이를 따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알다시피 이곳은 1994년에 고구려의 풍부한 역사 유적으로 인해 국가역사문화명성으로 지정되었으며, 2004년에 랴오닝성 환인현(桓仁縣)의 오녀산성과 함께 이 지역의 고구려 전기(前期) 도성(都城)과 고분(古墳)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참 아쉬운 우리의 고토가 아닌가.
앞서 말한 대로 천리장성을 축조했다는 고구려, 그 흔적은 바로 요동벌을 경계하여 아직도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졸본성이라는 원류로부터 (혹자는 이를 환도산성으로 보고도 있다.)
오골성(봉성시 봉황산성), 신성(무순시 고이산성), 백암성(요양시 연주성), 요동성(요양시), 안시성(안산시 해성 영성자산성), 건안성(영구시 개주 고려성산성), 비사성(대련시 금주구 대흑산산성), 석성(대련시 장하 성산산성)등은 모두 고구려의 산성이다. 고구려산성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백암성, 만주 요녕성(遼寧省) 해성(海城)의 동남쪽에 위치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되는 안시성은 그곳의 성주, 양만춘으로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 통구에서 지척인 곳의 봉황성, 이 봉황성은 조선선비 1448년 최부가 지날 때만해도 명나라가 군사를 주둔을 강화시킨다고 조선을 걱정하던 곳인데 1780년 연암 박지원이 지날 무렵은 봉황성의 번창함에 놀라 글을 썼던 곳이기도 하다. 바로 봉황성을 통해 요동을 거쳐 조선 사신들은 연경을 향했다.
지금 중국 요령성에서 ‘오녀산성’을 모르면 간첩일 정도로 관광지로 각광을 받는 곳이지만 그러나 이 산성은 80년대 초반까지도 역사적인 실체를 알지 못했다. 본격적인 발굴은 중국인들에 의해 1986년부터 시작된다. 물론 우리나라와 외교관계가 없던 때다. 1985년 6월, 오녀산 위에 텔레비전 송신탑을 세우는 것이 발굴 계기가 되었다. 환인현에서는 탑 주변의 역사유물을 발굴하기 위해 요령성 문화재 관계부서와 공동으로 고고발굴단을 구성한다. 1986년 5월부터 3개월 동안 오녀산성을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이때 고구려 초기의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된다. 발굴조사단은 ‘오녀산성이 바로 고구려의 홍승골성(紇升骨城)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중국인들은 이 졸본성을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부른다. 요녕성(遼寧省) 본계시(本溪市) 환인현(桓仁縣) 오녀산(五女山) 정상에 쌓은 성(城)으로 해발 800미터 높이에 천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수축하였다. 이 성이 역사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삼국지’ <위지동이전>이다.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 기록하였다. 알다시피 광개토태왕비문에도 홀본성(忽本城)이라고 새겨져 있다.
삼국 시대에는 환도성(丸都城), 졸본성(卒本城)으로 불렀다. ‘고려사’의 공민왕조에는 오로산성(五老山城), 삼국유사에는 졸본주(卒本州)로 명칭이 계속해서 바뀌어온 역사적인 성이기도 하다. 누구는 환(丸)이란 단어로 고리란 고구려 의미가 담겨 있다고도 하고 한때 고구려 군이 주둔했다는 충북옥천, 우리는 관산성전투로 잘 아는 곳의 산의 이름을 고리산이라고 불렀다고도 하는 게 다 그 원류가 환(丸)이란 단어로부터다. 오녀산성은 묘하게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를 닮아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성은 동서 270m, 남북 150m이다. 서쪽의 입구를 제외하고 다른 3방향은 가파른 절벽이다. 서쪽 입구에 성벽을 쌓고 방어의 거점으로 삼았다. 신전(神殿)과 현문(玄門) 등을 갖춘 세계적으로 유명한 옛 성이다. 오녀산성의 지세와 성의 크기는 아크로폴리스보다 훌륭하다싶다.
우리는 비류수라 하는 혼강에서의 을불 이야기를 전설처럼 들어왔다. 들불 그는 누구인가. 그가 왕이 되는 과정은 눈물겹다. 고구려 14대 봉상왕은 폭군이었다. 충신들을 죽이고 향락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를 몰아내려고 하자 왕은 왕위찬탈을 염려한 나머지 서기 293년 9월 그의 동생 <돌고)는 죽는다. ‘돌고’ 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그가 <을불>이다.‘을불’은 영리했다.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평민 복장을 하고 백성들 속으로 숨어들어 농부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기도 하고 동촌이란 마을에서 <재모>를 만나 소금장수를 시작한다. 7년 동안 ‘을불’은 고구려의 대부분 지역을 걷고 뛰며, 지형지물을 익히며 소금장수를 한다. 그러던 중 봉상왕 9년 서기 300년 국상 <창조리>는 반드시 <을불>을 찾아 올 것을 은밀하게 명령한다. 드디어 창조리는 <을불>을 찾았다. 그가 고구려 15대 미천왕이다. 미천왕은 32년 동안 집권하며 영토를 확장한다. 낙랑,현 도 대방을 평정하고 서안평을 차지한다. 서안평은 훗날 고구려가 중국 중원을 공격할 수 있는 토대가 된 곳이다. 서안평은 현재 압록강 하구의 구련성 근방으로 보고들 있다. 구련성은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도 그렇게 건너갔듯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서면 바로 만나는 곳이다.
나는 8시쯤 집안 박물관으로 향해 다시 걸었다. 일찍 문을 열었다. 길 건너 건물에서 표를 샀다. 전표를 끊으면 돈이 절약이 되는 터라 나는 전표금액을 제시했다. 장수왕릉(長壽王陵), 우산귀족묘지(禹山貴族墓地), 호태왕비(好太王碑)와 대왕릉(大王陵), 환도산성급산성하귀족묘지(丸都山城及山城下貴族墓地) . 이들 용어는 티켓에 표기된 대로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산귀족묘지(禹山貴族墓地)는 수리중이라 120위안에서 30위안을 거슬러 준다. 사진을 못 찍는다 했는데 보니 익히 다 아는 터고 중요 진열품은 그들 역시 사진을 찍어 사진을 모셔둔 것이라 가치가 없다 싶었다. 보는 도중 아이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마도 토요일 특활시간을 맞아 이곳을 전체 관람하자고 온 것 같았다. 저 안내인은 아이들에게 뭐라고 말할까? 혹여 고구려는 순전히 고대 한국의 역사로 땅만 우리에 와 있을 뿐이라고 말을 할 것은 아니지 싶다.
한때 그 동네를 기웃만 하여도 공안원이 따라 붙던 시절이 있었다.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왕도의 비밀’을 쓴 고 최인호 선생은 끌려가기도 했고 고구려 학회장을 지낸 최길수선생은 아예 중국 입국이 안 되었었다. 한 때 그들은 고구려 유적지에 대해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라는 슬로건을 거의 앵무새처럼 반복하여 써먹었었는데 지금은 이를 서술하는 안내문은 일제히 사라졌지만 고구려를 중국 역사의 한 갈래로 포섭하려는 전시 방식은 좀 더 교묘하고 은밀해진 것만 같다. 그들은 그들 역사 속에 적힌 문구를 그대로 전용해 자연스럽게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라는 의미를 갖도록 작전을 바꿨다. 그런 그들은 이 집안이 큰 골칫거리임에 틀림이 없다. 중국 정부가 2000년대 초 동북공정을 시작하며 공을 들인 지역은 환인보다는 지안이다. 무려 420여 년간 도읍을 두었던 고구려의 역사의 산지를 어떠할 텐가.
2013년 정식 개관한 지안시박물관에서는 중국인 안내원을 제외하고 일체 설명을 금지한다고 했다. 현지 가이드 자격증을 보유한 가이드 역시 중국인 안내원의 설명 내용을 그대로 통역·전달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제지하며 급기야 퇴장을 시키기까지 했다고도 한다. 듣자니 고구려가 구석기 시대에 머물던 당시 중원은 철기시대였고 고구려는 자체 화폐가 없었다든지 네 귀퉁이 토기는 고구려인 자체로 제작 기술이 없었고 중원 지역에서 전해진 것이라는 둥 대부분의 설명이 고구려 문명이 중원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암시하는 투의 전달이라 한다. 거기에 장군총이나 광개토왕비 등에서도 단체를 인솔하는 가이드의 설명을 아예 금지했다고 한다.
역겨운 소리를 듣느니 나는 가이드가 없는 게 오히려 낫다싶다. 지난번 들른 명동학교출신들 시비를 보고 느낀 것은 공산당원 출신들을 애써 끼워 넣으려 무던히도 애썼다 싶었고 일송정에서도 중국이란 말을 어떻게 하든 껴 넣으려 했다는 상황인식을 했었는데 그럴수록 조선의 민족성은 더욱 빛이 난다 싶고 고구려가 한민족의 우상임을 더욱 확고부동하게 전해준다 싶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우겨진다하여 과거 역사의 진토가 시간을 거슬러 달라질 것이며 그 진토로서 빚어낸 의식의 정체성이 뭉개지고 말 것이던가. 어릴 적 달달 외운 역사는 남는 게 거의 없다 싶더니만 어느 날부터서 스스로 이 역사의 현장을 찾고 추적하는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닌가. 이는 의식의 자각이며 삶의 뿌리를 찾고자하는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박물관 전시장을 급히 보기는 했지만 내 의식 속에서 각인된 것은 역시 뭐니 뭐니 해도 광개토대왕의 비문이 그 첫째고 그 다음은 그들의 벽화그림 일 것이다. 그런 나는 또 나로선 진귀한 유물을 또 마주했다. 바로 이동식 구들장 혹은 화로라 할 것이다. 이는 훗날 아차산성에서도 충주의 어느 발굴터에서도 나왔다는 열 난로 형식의 구들장이다. 고구려의 일상 중 돋보이는 것이 바로 이 이동화로와 절구통이다. 우리는 바로 온돌문화다. 온돌은 삼국시대 이전에는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쓰이다 삼국시대 때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전파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고구려 고분(옛 무덤)인 안악 3호분의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주방을 보면 아궁이가 있는 것이 보인다. 중국 당나라의 역사책인 ‘구당서’는 ‘겨울에 모두 긴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아래에 불을 때서 따뜻하게 하였다’라고 고구려의 온돌 문화에 대해 쓰고 있다. 지금 북방에 길쭉한 집에 양 옆으로 난 굴뚝은 바로 이 구들장을 말하는 것이고 만주지역 어디를 가든 만나 볼 수 있다. 그런 온돌은 고려,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으로 퍼져 남쪽의 대청마루와 만남이 이루어져 지금의한옥형태가 완성된 것이다. 조선 4대왕인 세종 때 온돌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성균관의 학생들이 가려움증에 시달리는 일이 많다고 하자 세종은 성균관 건물을 수리해 온돌과 목욕탕을 설치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학자들을 귀하게 여기던 세종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인데 고구려 시대의 우리 조상의 지혜가 과연 어찌했는지도 이 참에 알아두었으면 싶다.
그런데 내가 여전히 의아해 하는 것이 고구려 불교에 대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중국의 전진(前秦)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시켜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에 보내면서부터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 이곳 통구에는 그 불교 흔적이 남아있어야 할 것인데 헷갈리지만 이곳 박물관에서 못 본 것도 같다. 물론 요즘 하도 돌아다녀서 어디선가 보긴 본 불상이 있는데 착각을 할 수도 있다. 인터넷을 들여다보니 통구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절인 아불란사 터로 추정되는 곳에 단지 교주만이 뎅그러니 남아 있다고 사진을 곁들여 보여준다. 암만해도 다음에 한 번 더 그곳을 가서 찬찬히 들여다 보야 할 모양이다. 이렇듯 역사적 비정은 다른 객관적 사실과 결부하여 시대의 흐름을 크로스 체크하며 조망할 수 있다.
나는 박물관을 나와 약속장소인 곳으로 가기위해 큰 길을 무단 횡단했다. 그러자 잠시 후 9시10분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나는 그녀와 흥정을 했다. 티켓을 보여주자 그녀는 100위안을 제시했다. 더 깎으려다가 그냥 그녀웃음 값으로 그러기로 했다. 그다음에 내가 찾은 곳은 장군총이다. 광개토대왕비를 지나쳐 더 안쪽으로 들어가는 그 동네에서는 제일 먼 거리다. 능(陵)이라기보다는 돌로써 지은 사각뿔 모양에서 윗부분 1/3을 잘라내 버린 것 같은 건축물 같은 무덤은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와 너무도 닮아 있다. 그래서 누군가 동방의 피라미드라 했나. 무덤 둘레 밖으로 세워놓은, 한 개에 10여 톤에 달하는 11개의 거석, 이를 호석이라고들 부르는데 신라의 선도산 기슭을 찾아도 이런 호석을 마주하게 된다. 내부 방출을 막고 견고함을 유지하기 위한 이 호석은 양식이 진화하여 자연적으로 땅 밑으로 숨고 사라져버린다. 대신 신라의 무덤들은 십이간지의 상징들로 테를 뺑 둘러 세웠다. 집안박물관에서 제작 배포한 소책자에 의하면, 5세기 초에 건립하였으며, 정방향 계단식 능묘로서 가로 세로가 각각 31.58미터에 높이가 13.1미터라 한다. 전체 1,146개의 석재를 사용하였으며, 석실은 5계단 정중앙에 위치하며, 2개의 석상(石床:시신이 안치된 바닥 석판)이 놓여 있다. 그리고 무덤의 꼭대기에는 50여 톤의 거석을 올려놓았다 한다. 비교적 온전하게 관리 보존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 능묘의 북쪽으로는 ‘동반무덤[배총(陪?)]’이라 하는 왕족의 무덤과 제단이 있다. 이 동반무덤은 적잖이 훼손된 상태이며, 무덤 밖으로 거석이 없고 규모가 훨씬 작다. 그래서인지 그 거석들이 세워져 있지 않았다. 무덤의 높이는 4.72미터이며, 묘실은 3개의 큰 돌로써 둘러 싸여 있다. 그런데 모양이 고인돌을 그대로 닮아 있다. 거석문화. 혹여 이는 고조선의 유물들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다음 목적지인 광개토대왕(고구려 제19대 왕 : 374 ~ 412)의 비(碑). 그의 이름은 ‘담덕’이고, 시호는 비문에 표기된 대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고구려 20대 장수왕이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414년에 세웠다는데, 그 높이 6.39미터 너비 1.34 ~ 2미터로 방추형의 응회암으로 되어 있고, 사면 전체에 한자(漢字)로 1,775자가 예서체로 새겨져 있으며 현재 1590여 자가 해독되었다. 고구려 건국신화, 초기 왕의 계보, 광개토대왕의 영토 개척 및 확장의 공적, 능묘관리제도 등이 바로 그 내용이다. 나는 ‘고구려 9백년의 자취소리’라는 책을 발간할 때 광개토대왕에 대해 할애를 많이 했다. 저 비문은 우리의 보물 중에 보물이다. 값으로는 도저히 매길 수 없는 가치, 저 보물로 고구려는 확고부동한 강국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며 일본놈 들은 몰래 비문을 왜곡할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중국은 동북공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직 끌어다 붙인 일본의 반도사관에 임나일본부설은 단박에 허위임이 명백해졌다. 후세가 시원치 않아 외세에 휘둘렸음에도 광개토대왕은 그런 우리를 확고히 지켜준 것이다. 그런 대왕 비는 더 이상 훼손을 막기 위해 유리문을 만든 것일 텐데 마치 제 말을 제대로 못하는 우리의 답답한 처지 같이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유리집 밖 뒤에서는 공안원 한 명이 난간에 기대어 앉아서 핸드폰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감시활동이 주 업무인 것 같이만 보였다. 괘씸하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천 오백년이 훨씬 지금에서도 그의 위엄은 여전하여 그가 호위를 한다는 생각도 같이 들었다. 나는 비석과 광개토대왕릉 사이에 잘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가로수 밑 그늘진 벤치에 앉아 쉬면서 주변 꽃밭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 인부 서너 명이 농약분무기를 메고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단체로 여행 온 중년쯤 되어 보이는 한국 사람들이 왕릉 쪽에서 걸어오고 있는데 보안 원 두 명이 앞과 뒤에 붙어 동행하고 있음을 또 볼 수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향했다. 이윽고 ‘제단유지(祭壇遺址)’라는 안내판이 보이고, 그곳은 텅 빈 작은 운동장처럼 격자형 평지로 다듬어져 있었고, 그 위로 작은 돌들이 일부 구역에 깔려 있었다.
그곳을 지나자 좀 내려앉은 듯한, 주변이 무너지고 기대어 세워놓은 거석(巨石)들도 군데군데 이빨 빠진 듯 일정치 않고 아예 누워버린 것들도 보였다. 한 바퀴 돌아보아도 계단(階段)이니 층(層)이니 하는 것들이 잘 식별되지 않는 상태였다. 나는 먼저 한 바퀴 돌고나서 묘실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길 초입에 안내문을 잠시 읽고 정상 부근에 있는 석실(石室)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안에는 두 구의 시신이 누워 있었을 석상(石床)이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그 빛깔이 검고 균열이 생긴 상태였다. 대개, 무덤이란 그 규모와 깊이, 그리고 내부 구조 및 장식, 그리고 외양과 그 보존상태 등 에서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다 지하(地下)로 내려가 있는데 고구려 대왕의 석실은 인공적으로 만든 돌산의 꼭대기 부분에 조성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싶다. 과연 이 묘가 광개토대왕의 묘이고 장군총이 장수왕의 묘가 맞는가.
나는 밖으로 나왔다. 동네는 과수원도 있고 밭도 널려 이곳이 과연 성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나는 고구려 책을 쓰기 전 신라에 대한 글을 썼었다. 경주에 밥벌이로 가 있는 때 자연 고적지를 넘나들이 하게 되었고 찾을수록 궁금증은 일었다. 그것들을 거듬거듬하다보니 자연 책 한 권이 꾸며졌다. 그 무렵 알게 된 것이 역사는 서로를 엮는 묶음이고 그 묶음은 바듯하게 꼬아진 함수풀이와도 같아 변수에 따라 다시 이해되고 달리 해석된다는 것이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이해되고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에 의해 또 다른 주변국에 의해서야 비로소 알게 되고 그 시대 상황도 제대로 파악이 된다. 그래서 신라에 이어 테마를 잡은 게 고리처럼 연결된 고구려다.
기실 내가 고대역사에 흥미를 갖게 된 것, 특별히 고구려에 매료되었던 것은 1996년 소설가 최인호 장편소설 「왕도의 비밀」이 TV다큐멘터리로 다시 태어나 방영되었던 것을 시청하고 부터다. 「왕도의 비밀」은 백제의 고도(古都)였던 이성산성에서 발견된 `#'문양의 조그만 토기를 실마리로 해서 한반도를 비롯해 멀리 만주벌판과 산동성 등 중국대륙에 널려 있는 고구려의 숨결을 되살려놓은 역사소설이다. 추리기법을 살린 원작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다큐멘터리는 단순히 역사무대를 방문하는 식의 탐방 개념에서 탈피, 수수께끼를 풀듯 우리 문화의 시원으로까지 거론되고 있는 찬란한 고구려 문화의 유적을 추적해 나간다.
기나긴 도정에서 제작진은 백제와 신라, 심지어 한반도 최남단 지역이었던 가야일대에서 `#' 문양 토기를 발견하기도 하며, 또 멀리 북으로는 고구려 5백년 도읍지였던 중국 길림성 집안시의 국내성을 찾아 고구려 유적들을 빠짐없이 둘러본다. 보다 생생한 화면을 전달하기 위해 컴퓨터 그래픽을 최대한 활용, 자료 고증과 전문가 자문을 거쳐 5-6세기 당시의 집안일대와 고분내의 벽화를 3차원 모델로 재현하기도 한 아주 드라마틱한 다큐 물이었다. 당시 만해도 한중수교(1992년)를 한 지 겨우 4년 정도 지난 때라 중공이란 말이 친숙하고 중국 땅을 밟는 것 자체가 여전히 두려움으로 여기던 때이라 최인호의 기행여정은 긴장되고 더더욱 빛이 나 보였다. 그가 그 무렵 왔던 곳, 이곳 통구, 그는 마차를 타고 이곳에 들어 왔으며 그는 많은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거간꾼이 갖고 있던 고구려 도자기를 거금을 들여 사야만 했다 #'문양의 조그만 토기가 단서가 되어 수십만 킬로를 누빈 그의 열정을 누가 따를까. 조그만 실마리도 단초가 되고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참으로 하뭇하고 새삼스럽다.
나의 역사탐구는 그로부터였다. 언젠가 만주일대를 누벼 볼 것이며 그들의 숨결을 마음 가득 느껴보겠다 한 것은 그의 덕분이다. 그가 알아보고자 한 우리 문명의 본질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그와 동질의 상상과 느낌에 닿는지 자문하고 싶었다. 역사는 발품을 팔며 현장을 직접 보고 추적하여야 제 맛이다. 지평선 너머로부터 끝없이 불어오는 시간의 바람은 흔적을 지우지만 알고자 하는 끊임없는 도전은 그 흔적을 또 들춘다. 고대국가 탐구는 그래서 늘 흥미롭고 매료된다. 문명은 추구하는 것이고 개척하는 것이다. 특히 역사탐구는 킁킁거리는 사냥개 같은 끈질김과 발품에 깊숙이 연유한다. 그러기에 그가 내게는 실마리이고 추적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는 왜 #'문양의 조그만 토기에 빠져 수십만 킬로를 달렸던 것일까. 이는 아직도 여전한 숙제이다. 앞서 소개한 신라 호우총에서 나온 광개토대왕의 #'문양의 토기, 이는 많은 역사적 사실을 남겨주었고 그 추적은 지금도 계속되는 것이다.
첫댓글 2010년 백두산 서파로 갔을 때 고구려 역사를 탐방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