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청려장(靑藜杖)
최 화 웅
봄이다. 창가에 봄 햇살 살포시 내려앉는다. ‘한 노인이 청려장(靑藜杖)을 짚고 진종일 나돌았으나 끝내 봄을 마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매화나무 끝에 봄이 와 있더라.’는 고사(古事)가 봄을 기다리는 마음 같다. 탈출기 4장에 나오는 말씀을 들어보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물으셨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지팡이입니다.”하고 대답하자, 그 분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을 땅에 던져라.” 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던지니, 뱀이 되었다. 모세가 그것을 피해 물러서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아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붙잡으니, 뱀이 그의 손에서 도로 지팡이가 되었다. 순종의 모세가 하느님의 기적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족과 함께 이집트로 돌아갔다.
절기는 어느새 우수(雨水) 경칩(驚蟄)을 지나 신춘의 기운 머금은 춘분(春分)이다. 기상학적으로 봄은 양력 3월부터 5월까지고 천문학적으로는 춘분으로부터 하지(夏至) 전까지 석 달 동안이다. 3월 들어 봄의 전령 개나리와 진달래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4월이면 강남 갔던 나그네새 제비가 돌아와 헌 둥지를 손질하고 새집을 짓기에 분주할 때다. 효심 지극한 자식들이 어디선가 부모님께 드리려고 겨우내 곧게 말린 청려장을 봄 햇살에 내다놓고 마지막 손질에 정성을 다 할 그런 사랑과 돌봄의 계절이다. 이제 무겁고 두터운 겨울 외투를 벗고 영랑시집을 펼칠 때다. 봄은 부활과 소생, 생명과 희망을 꿈꾸는 계절이다. 봄은 우주의 모든 생명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슈만과 모차르트, 베토벤과 슈베르트, 멘델스존과 비발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까지 앞 다투어 나선다.
청려장이란 명아주의 잎이 푸른색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예로부터 가볍고 튼튼한 명아주 줄기로 지팡이를 만들었다. 청려장은 좋은 재질에 기품이 있어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노인에게 선물하는 지팡이로 안성맞춤이다. 장수지팡이의 재료가 되는 명아주는 삽작을 나서면 동구 밖 길섶과 빈터, 논밭두렁, 강둑과 들, 어디에서나 무리지어 자란다. 그러나 지방마다 그 이름을 달리했다. 강원도에서는 ‘능쟁이’, 경상도에서는 ‘도트라지’, 특히 거제에서는 ‘개비름’이라 부르고 그 외 지역에서는 홍심려 · 학정초 · 연지채로 한의학에서는 여(藜). 낙려(落藜), 회려(灰藜), 지연채라는 약명을 가졌다. 줄기는 1.5~2m까지 굵고 곧게 자란다. 명나라 의학서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는 “명아주로 만든 청려장을 짚고 다니면 중풍을 예방하고 신경통에 좋다.”고 했다.
해서 명아주로 만든 청려장 지팡이는 예부터 효자들이 부모에게 드리는 장수 선물이었다.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짚고 다니던 청려장이 아직도 보관되어 있고 지난 1999년 4월 21일 우리나라를 국빈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안동 하회마을에 들러 김치와 고추장 담그는 모습을 지켜본 뒤 신을 벗고 직접 방에 들어가 환담을 나누었다. 그 자리에서 청려장 지팡이를 선물했다. 신라 때부터 청려장을 사용한 기록이 있다. 부모가 50살이 되면 자식이 명아주 줄기로 만든 가장(家杖)을 드리고 60이 되면 마을에서 향장(鄕杖)을 드렸다. 고희를 맞으면 나라에서 국장(國杖)을 여든이 되면 임금이 조장(朝杖)을 내렸다. 지난 92년부터 어버이날이나 노인의 날이면 100세를 맞은 노인들에게 청려장을 선물로 드렸다.
나는 일흔여덟이 되는 새해 이웃에 사는 딸, 사비나로부터 손잡이가 갈고리처럼 구부러져서 손목에 걸 수 있는 크룩(crook)형 도플러(doppler) 우산을 선물로 받았다. 나는 젊은 날부터 우산은 꼭 손잡이가 달린 스틱형 우산을 고집해왔다. 그것을 시집간 딸이 기억하고 해외 직구를 통해 1947년 창업한 오스트리아 도플러사의 손잡이가 있는 우산을 구입해 어느 날 “아빠, 이거.”하며 건네는 것이었다. 고맙고 반가웠다. 여름이면 해풍이 세차고 비바람이 흩날리는 부산에서는 살이 튼튼하고 가벼운 실용적인 우산이 필요하다. 거기다 전통적인 품위와 현대적 세련미를 갖춘 우산 손잡이의 감촉과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생각하면 딸아이가 늙어가는 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하고 비오는 날 외출 때 안전을 고려한 심청의 효심이 깃든 선물이리라. 며칠 뒤에 그 우산을 다시 꺼내보며 아버지를 생각하는 딸의 마음을 헤아리며 감격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새해 들어 어느 월간지의 ‘연간 기획, 콘서트 순례’의 원고 청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딸 원영에게 전하자 지난해 12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을 시작으로 1월에는 <빈 필하모니 멤버 앙상블 신년음악회>, F1963에서 2월에 열리는 ‘2020 F1963 MUSIC FESTIVAL’ 티켓을 차례로 예약해주었다. 딸이 나에게 선물한 도플러 우산은 시집간 딸로부터 받은 청려장(靑藜杖) 지팡이다. 한자 늙을 ‘老’ 자를 들여다보면 마치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허리 굽은 늙은이가 지팡이를 짚고 걷는 모습이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같은 永郞 김윤식이 노래한 아름다운 이 봄의 서정으로 떠오르는 시상(詩想)과 더불어 오늘 하루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바람이 불고 하늘을 구름이 뒤덮는다. 한 줄기 봄비가 내리려나보다.
첫댓글 다시 맞는 봄이 원숙의 미를 더해가심과
부녀지간의 정이
마치 하느님과 자녀의 모습 같습니다.
말씀의 지팡이를 얻으러
이 방에 다녀 갑니다
감사합니다^^
신춘의 푸르름이 자매님의 나날에 가득하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