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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제의 토대(4부)
국가의 지배적 위치(1)에서 세계화까지
“사회의 생산적 발전과 지금까지의 생산관계 사이의 점증하는 비(非)양립성은 극심한 모순, 위기, 경련으로 나타난다. 자본의 외부 관계가 아니라 자기 보존의 조건으로서 자본을 폭력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자본이 사라지고 더 높은 사회적 생산 상태를 위한 여지를 주라는 조언이 주어지는 가장 두드러진 형태이다.”(2) (맑스, 「그룬트리세」)
20세기 세계에서 제국주의 전쟁은 자본주의의 순환 위기의 결과로 “자본의 상당 부분”(맑스는 나중에 같은 구절에서)이 소멸하여 새로운 축적의 토대를 제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경기 상승기(호황)와 경기 침체기(브레턴우즈 체제 붕괴 이후) 모두 훨씬 더 장기화하여 뚜렷한 대조를 이뤘다. 이는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30년대의 무역 전쟁과 독재 정책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국제 자본이 역사에서 얻은 교훈이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먼저, 1944년 브레턴우즈에서 JM 케인즈(Keynes)와 해리 덱스터 화이트(Harry Dexter White)가 중개한 협정의 중요성을 상기해 보겠다. 무엇보다도 미국이 영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제국주의 강대국 자리를 차지했음을 확인했다는 점, 즉 모든 서명국이 자국 통화를 달러에 연동하도록 의무화함으로써 미국 통화를 러시아 블록(Comecon) 밖의 국제 무역 단위로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국의 통화가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보증하기 위해 온스당 35달러로 가격이 고정된 미국 달러를 금으로 직접 전환할 수 있는 환율 시스템을 제공했다.
세계 경제에서 군사력으로 확보된 미국 불굴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서독이, 그다음에는 일본이 회복했고, 결국에는 농업 사회에서 도약한 한국이 세계 최고의 경제 강국 중 하나로 부상하면서 미국의 주요 수출 지위는 특히 최근 전시의 적들로부터 빠르게 도전받았다.
서독의 호황은 1950년에 시작되었다. 안정된 새로운 통화, '현대적 자본 축적량', 동독에서 이주해 온 숙련된 노동력을 바탕으로 산업 성장률은 1950년 25.0%, 1951년 18.1%를 기록했다. 1960년까지 산업 생산량은 1950년의 2.5배 수준으로 증가했고, 독일 전체로 보면 1930년대 나치가 달성한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3) 1951년 냉전이 구체화하면서 미국은 유럽 철강공동체(EEC와 이후 유럽연합의 전신)의 창설을 추진함으로써 서독을 '서방 블록'으로 통합하여 수출과 지속적인 산업 확장을 장려했다. 실제로 냉전은 서독 경제 성장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수출은) 처음에는 동독에서 나토 회원국으로 무기를 수출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고가의 무기 무역에 집중되었다. 이는 미국과 아데나워(Adenauer) 총리가 '소련 제국의 국경을 후퇴시키기 위한' '힘의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무기 수출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활성화되었고, 이러한 고부가가치 수출 덕분에 1950~1960년 수출액은 국내총생산의 10%~19%까지 증가하여 국내 순환 자금 흐름에 훨씬 더 많은 돈이 유입되는 데 기여했다."(4)
1950년대와 60년대 일본의 경제 부흥에는 전쟁으로 인해 산업 기반이 완전히 파괴된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이는 최신 기술을 사용한 일본의 새로운 공장이 경쟁국보다 더 효율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일본 상품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고, 일본 정부는 강력한 수출 정책을 추진하여 고용을 촉진하고 내수 시장 확대를 촉진하기 시작했다. 일본 상품에 대한 해외 수요의 증가는 매년 무역 흑자로 이어졌고, 1960년대 후반까지 흑자가 지속되었다.
한국은 내전(또는 제국주의 대리전)의 참화와 그에 따른 생산 기반 시설과 원자재 손실로 인해 미국과 일본의 자본 투자가 기술적으로 발전된 자본주의 경제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군사 통치의 보호 아래 노동 집약적인 '경공업'(섬유, 신발)은 1960년대에 성장한 국가 지원 수출 지향 경제의 기반이 되었다. (1970년대에는 최신 기계와 기술을 갖춘 자본 집약적인 중공업(철강, 조선 등)으로, 1980년대에는 전자제품과 자동차가 그 뒤를 이었다).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엄밀히 말해 경제력은 가장 강력한 자본/국가의 정치 정책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후 서독과 일본의 경제 성장을 단순히 마셜 원조와 미국이 자국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취한 기타 경제 외적 조치에 기인한다고 볼 수는 없다. 전쟁의 파괴로 인한 자본의 평가절하 덕분에 이들 국가는 적어도 기술적으로는 미국만큼 생산성이 높지만, 일반적으로 훨씬 낮은 임금으로 기계와 장비로 새로운 축적에 참여할 수 있었다.
전쟁 후 무역이 회복되고 서독과 일본과 같은 국가들이 국제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 달러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유로달러 시장에서의 금융 거래도 증가했다. 1960년대 초에는 포트 녹스(Fort Knox)의 금과 맞먹을 만큼 미국 밖에서 달러가 많아졌다. 1960년대 말 인플레이션이 상승하면서 달러는 점점 더 금으로 전환되었고, 공식 환율인 온스당 35달러에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 점점 더 많아졌다. 이 체제는 지속 불가능했다. 이윤율 하락의 영향이 확연히 드러났다.
미국의 재정 적자는 이미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지출로 인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1971년 미국의 무역 수지는 전쟁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그해 닉슨 미국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협정의 핵심을 이루던 이 협정을 '일시적으로'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닉슨 쇼크'는 세계 경제의 브레턴우즈 경제 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73년 닉슨이 금에 대한 고정 환율의 영구적 종료를 확정했을 때 금 가격은 온스당 100달러에 달했다. 현재(이 글을 쓰는 시점) 그에 상응하는 가격은 약 2,034달러이다. 분명 되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다.
모든 것이여 안녕
달러와 금의 분리로 미국 재무부는 마음대로 달러를 '인쇄'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사실상 달러의 평가절하로 이어져 세계 시장에서 주로 달러로 거래되는 상품, 특히 석유 가격이 반등했다. 이는 경쟁 관계에 있는 일본과 유럽(주로 서독) 제조업체의 원자재 가격을 상승시켰을 뿐만 아니라 서구 전역에서 전형적인 노동계급 소비재의 지속적인 가격 상승을 촉발했다. '닉슨 쇼크'의 주요 설계자는 존 코널리(John Connally) 재무장관으로, 그는 “달러는 우리 통화이지만, 당신들의 문제”라는 악명 높은 발언(로마에서 열린 G10 회의에서)을 하며, 수입품에 10%의 세금을 부과하고 미국 내 노동자들에게 90일간 임금과 가격을 동결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의 노동계급은 세계 '선진국' 및 그 밖의 다른 나라 노동자들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에서 막대한 부채를 안고 나왔고 1949년 이미 브레턴우즈 체제에서 지속 불가능한 초기 환율을 포기한 상태였다. 1967년 IMF는 14억 파운드의 대출에 대한 대가로 추가 평가절하를 의무화했다. 그러나 영국은 여전히 옛 제국의 특권을 유지하려 했고, 주로 영연방과 같은 식민지 시절의 '스털링 지역'을 유지하려 했다.(5) 달러 대비 환율이 엄청나게 상승하자 해외 보유자들이 스털링(sterling)을 매도하면서 달러의 변동은 종말의 시작이었다.
1974년 OPEC의 산유국들은 달러화 가치 하락에 따른 수출 가격 하락을 자체 가격 인상으로 상쇄하기로 했다. 전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이 상승했다.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히스(Edward Heath)가 이끄는 보수당 정부가 인플레이션 보상을 위해 임금 인상을 요구하던 탄광 노동자들과 투쟁의 하나로 주 3일 근무제를 시행했다.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실업률 상승, 높은 인플레이션의 조합)으로 향하자, 노동당은 '누가 영국을 지배할 것인가?'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과반수를 차지했다. 1976년 새로 선출된 노동당 당수 제임스 캘러헌(James Callaghan)은 노동당 회의에서 유명한 정책 유턴을 발표했다:
"우리는 예전에는 세금을 줄이고 정부 지출을 늘리면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 고용을 늘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런 선택지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6)
따라서 '대처주의'가 등장하기 전에 이것은 케인즈주의 적자 재정, 즉 화폐의 발명은 재정 적자보다 더 심각한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인식의 시작을 알렸다. 그래서 재무부 장관인 데니스 힐리(Dennis Healey)는 또 다른 IMF 대출 조건에 동의하게 된다: 정부 지출 25억 파운드 삭감, 세금 인상, 금리 인상에 대한 대가로 39억 파운드를 지원한다는 조건이었다. 더 근본적으로는 1946년부터 1950년대 초까지 영국의 중공업과 공공시설의 상당 부분이 지속적인 자본 확충 없이 국유화되었기 때문이다. (산업에 대한 국가 소유는 공장과 기계를 업데이트하거나 노동력을 '재숙련' 시키는 수단이라기보다는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혜택을 받고 있다고 믿도록 달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79년까지 공공부문 고용은 최고 수준인 707만 명으로 전체 고용의 28.1%를 차지했다.)(7) 산업 자본주의 발상지인 영국의 일반 이윤율은 1945년 이후 꾸준히 하락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경쟁국보다 낮았다.
따라서 영국의 산업 구조조정은 대처 정부 시절 '탈(脫)국유화'에 국한되지는 않았지만, 약 113개의 과거 국유 산업과 기업에 대한 '민영화'를 포함했으며(8), 이후 해체와 전면 폐쇄 또는 손쉬운 금융 수익을 추구하는 금융 자본의 구조조정과 인수를 허용했다. 수익성이 없거나 수익성이 매우 낮은 기업의 수명을 연장하는 데 사용되는 케인즈주의의 본질인 적자 금융은 그 자체로 수익성 위기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장기적으로는 맑스가 자본주의 수익성 위기 때마다 뒤따랐다고 설명한 것처럼 자본의 집중과 집중화를 통해 이윤율을 되살리기 위해 불변 자본의 평가절하와 구조조정을 요구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인 미국의 경제 불황이 세계 인플레이션을 촉발했고, 미국 재무장관의 안일함에도 불구하고 달러의 평가절하는 경제 경쟁국들의 위기를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국 자체의 전후 기록적인 인플레이션 상승과 수익성 위기를 유발했고, 특히 러스트 벨트(Rust Belt)로 알려진 북동부의 철강 및 제조 도시에서 대규모 폐쇄와 일자리 감소를 불러일으켰다.
이미 1970년대에 미국 기업들은 한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와 같이 새로 산업화하고 노동력이 저렴한 지역으로 생산을 이전하기 시작했다. 많은 실직 노동자들은 저임금 서비스 산업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미국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제조업 고용은 1979년 미국에서 정점을 찍었다. 국내 경제의 '3차화' 추세가 시작된 것이다.
서유럽과 일본의 경우 전후 호황이 끝나고 수익성 하락과 저성장이라는 위기가 이어진 것은 1979년 2차 '석유 파동' 이후 아랍 석유 수출국들이 원유 가격을 인상하기로 한 정치적 결정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그러나 사실 유가 상승은 대부분의 세계 무역에 필요한 통화를 발행하는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는 미국에 의해 촉발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러스트 벨트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에서 미국으로 유입되는 석유 달러의 재활용으로 인한 재정적 이익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다. 한편 미국의 주요 경제 경쟁국인 일본, 독일, OECD 국가들은 원자재 가격이 전반적으로 상승했고, 적어도 1980년대 중반까지는 미국보다 높은 석유 가격에 직면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자본 수익률 하락', 즉 이윤율 하락의 위기라는 일반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국내 인플레이션이 상승하고, 기업들이 파산하고, 더 많은 부실기업이 국가 적자 금융을 통해 파산을 피했다. 이윤율 하락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새로운 기술(주로 컴퓨터화된 전자 장비)을 도입하고 줄어든 인력의 '생산성과 유연성'을 향상하기 위해 새로운 작업 방식을 도입하는 경제 '구조조정'의 일반적인 패턴이 등장했다.
전형적으로 유럽 국가들은 산업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력을 축소하여 국제 금융 자본의 투입 가능성을 허용하는 동시에 국내 기업에 의한, 이른바 국경 사이 인수합병 기회를 제공했다. 따라서 분데스방크(Bundesbank) 통계에 따르면 서독 경제에서 국가의 역할은 1982년과 1990년 사이에 GDP의 52%에서 46%로 감소했다.
일반적으로 독일의 성장률은 다시는 연방 공화국 초기의 위기 이전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일본의 경우, 국내 대체 에너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유가 급등으로 인해 일본 정부는 국제무역 산업성(MITI)을 통해 경제 정책을 검토하고 1979년 '기술 집약적 국가'로서의 새로운 '산업 정책 비전'을 제안했다,
"서구의 모판에서 개발된 기술을 '수확'하는 산업 패턴에서 더 큰 창의성을 발휘하는 '씨를 뿌리고 가꾸는' 패턴으로 전환할 것이다. ... 따라잡기형 현대화의 세기가 끝나고, 1980년대부터 우리는 새로운 미개척 단계로 접어들 것이다."(9)
이것이 국제무대에서 미국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맥락이다.
플라자 협정
미국은 달러가 국제 무역과 금융의 기축 통화라는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었지만, 브레턴우즈 체제가 폐지된 지 10년이 지난 후, 폴 볼커(Paul Volcker)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예상치 못한 결과, 즉 달러의 엄청난 평가절상에 직면하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레이건 대통령의 방만한 재정 운용에 맞서 볼커 의장이 긴축 통화 정책을 펼친 결과라고 설명하기도 하고, 단순히 석유 부광대(富鑛帶)(10)를 보관할 곳을 찾던 OPEC 국가들의 석유 달러가 유입된 결과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1980년 초부터 1985년 3월까지 달러는 유명한 통화 바구니에 대해 47.9% 이상 평가 절상되었다. 달러 강세는 수입품을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만들어 미국 제조업에 압력을 가했고, 캐터필러(Caterpillar)부터 IBM, 모토로라에 이르기까지 많은 주요 기업이 보호무역주의 캠페인을 벌이며 의회에 로비를 벌여 보호무역 장벽을 도입하도록 했다. 따라서 미국은 노골적인 보호무역주의를 피하고 대신 플라자 합의를 했다.
미국, 일본, 서독, 프랑스, 영국 사이의 협정은 미국 달러의 가치를 낮추는 것을 목표로 했다. 미국은 연방 재정 적자를 줄이겠다고 약속했고, 다른 당사국들은 감세 등의 정책을 통해 내수를 부양하기로 했다. 모든 당사국은 통화 시장에 직접 개입하여 “경상수지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즉, 달러를 매도하는 데 동의했다. 즉각적인 결과는 달러 대비 엔화와 마르크화의 급격한 상승으로 이어졌고, 이후 2년 동안 25.8%까지 가치가 하락했다.
협정은 독일과 다른 유럽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무역 적자를 크게 줄였지만, 대일 무역 적자에는 같은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미국은 신산업에 대한 국가 지원과 사양 산업을 보존하기 위한 수입 장벽을 세우는 일본의 '불공정' 경제 정책에 대한 '구조적 수정'을 계속 요구했다. 일본의 경우 1980년대 중반 이후 세계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감소하고 있는데, 이는 1985년 엔화 재평가로 인한 경쟁력 상실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이 단순한 원인이 간과하는 것은 최신 기술을 도입하고 전자 및 자동차 제조업에 진출하여 훨씬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할 준비가 된 경쟁국 자본의 부상, 특히 80년대 중반까지 일본 외국인 투자의 주요 수혜국이었던 한국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플라자 협정은 경제 정책에 대한 국제적 조정의 '최고 수준'으로 평가되었다. 그 후 2년 뒤에는 달러화 하락을 막기 위한 루브르(Louvre) 협정이 이어졌다! 보다 일반적으로 플라자 협정은 중국이나 구소련 제국 모두 전환 불가능한 통화 뒤에 숨을 수 없는 세계 자본주의 세계에서 점점 더 공허해지는 경제 정책을 조율하기 위해 매년 모임을 하는 G7, G20 등 다양한 명칭의 그룹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1년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여 자본주의 세계 경제에서 자기 위치를 확인했다. 모든 이데올로기적 신비화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현대사는 자본주의가 아닌 적이 없었으며, 전후 경제 여정은 이를 확인시켜 줄 뿐이다.
1989년 천안문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도 경제특구 조성으로 외국 자본의 투자 문이 열렸고, 이는 중국 경제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확인시켜 주었다. 따라서,
"1978년부터 1999년까지 2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전 세계 외국인 투자 총액의 약 1/3이 천상의 제국으로 유입되었으며, 이는 연간 400억 달러에 달한다."(11)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은 브레턴우즈 체제에서 벗어나 내부 상품 교환(생산품에 대한 대가로 러시아에서 석유와 가스를 제공)에 의존하려 했지만, 세계적인 위기는 더 넓은 세계 경제와 더 많은 경제적 관계를 맺고 있는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에 먼저 영향을 미쳤다. 특히 폴란드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대규모 노동계급 투쟁을 불러일으킨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았다. 소련은 우주 분야에서 뛰어난 과학 및 기술 발전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의도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신기술 수출을 금지했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로 제조업을 다시 갖추지 못해 자체적인 관성에 빠지게 되었다. 세계 경제의 나머지 부분으로부터의 고립, 그리고 더 넓은 경제의 건전성보다 자신의 저택을 장식하는 데 더 관심이 있는 부패한 노멘클라투라가 발표한 공식 통계의 완전한 허구는 결국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경쟁적인 억만장자 과두제의 러시아로 변모했다. 2012년 러시아는 WTO에 가입했다.
그 이후로, 1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자본주의는 전 세계를 자유롭게 지배하고 있다. 이 시리즈의 다음 편에서는 이러한 '완전한 글로벌' 세계화의 결과를 살펴볼 것이다.
-ER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주>
(1) 한때 노동당과 다른 좌파 자본주의 진영에서 익숙했던 '지휘소(commanding heights)'라는 용어는 1922년 레닌이 NEP가 민간 자본에 일정한 역할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 영역의 모든 지휘소”는 여전히 국가의 손에 남아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 작성한 메모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물론 국가의 본질은 다루지 않았다. 레닌, 「전집」, 프로그레스 출판사, 1971, 모스크바, 36권, 585~587쪽 참조.
(2) 인용문은 『그룬트리세』, 750쪽, 펠리칸 맑스 도서관, 펭귄북스 1973에서 발췌함.
(3) 1950년대와 1960년대 서독의 경제 부흥, 카메론 페인, 2011년 8월 7일,
https://www.e-ir.info/2011/08/07/economic-revival-of-west-germany-in-the-1950s-and-1960s/
(4) 위의 글
(5) 스털링 지역 국가들은 대부분의 준비금을 영국 중앙은행에 보관했고, 그 대가로 런던 금융 시장에 접근할 수 있었다. 1979년 영국은 모든 외환 통제를 폐지했고, 스털링 지역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6) 이 인용문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널리 퍼져 있다. 보기를 들어, 서평(노동당 연설가들의 서평!)의 일부인 academic.oup.com에서 찾아볼 수 있다.
https://academic.oup.com/manchester-scholarship-online/book/13722?login=false
(7) 1979년과 1998년 사이에 통계청에서 '공공부문 고용에 대한 공기업의 기여도'라고 부르는 비율은 27.7%에서 7.1%로 감소했다. 그러나 이것이 노동력의 고용주로서 국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최신 통계청 수치(2023년 12월)에 따르면 오늘날 공무원은 전체 노동력의 17.8%를 차지한다.
(8) Wikipedia의 '영국의 이전 국유화 산업' 목록 참조(15.6.21 기준).
(9) https://www.meti.go.jp/english/press/2021/1116_001.html
(10) 그 자체로 완전히 자발적인 움직임은 아니었다: OPEC 국가들은 지역 군사 보호를 약속하는 대가로 미국에 달러를 예치하도록 '설득'되었다.
(11) 중국: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22호, "진흙 발을 가진 경제 거인“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03-08-01/china-a-boom-with-feet-of-clay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4-02-07/capitalism-s-economic-foundations-part-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