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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30 - 40 (제248호 - 제291호) / 2011.12.11 ~ 10.07 / 중앙SUNDAY Magazine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 30 - 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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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냉장고야!
문제는 냉장고다. 김기덕의 영화 ‘피에타’를 보면 중반쯤 흰색 대형 냉장고가 바닥에 누워 있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을 해독해야 영화가 제대로 보인다. 이 대목에서 엽기적인 설정에 치를 떠는 사람과 찬사의 박수를 치는 사람으로 나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지만 영화에 대해서는 여전히 잔혹하고, 불편하다는 말이 많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가 상을 받은 이유라면? 우리에게는 단점인 그 모든 것이 외국 사람들에게는 장점이라면?
우리에겐 안 보이고, 그들에겐 분명한 코드들
영화 곳곳에 우리에게는 잘 안 보이고 그들에게는 분명히 보이는 어떤 코드들이 배치돼 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서 따온 포스터뿐 아니라 김기덕은 서양미술의 전통적인 도상을 아주 명민하게 이해하고 영화 곳곳에 교묘하게 배치해 놓았다. 젊은 시절 영화를 하기 전 프랑스에서 거리 화가로 살던 그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공개한 그림 중에는 성경의 요한 계시록을 그린 그림이 있다. 죄와 구원이라는 서양 문화의 오래된 질문에 대한 김기덕 특유의 재해석이 돋보인다.
다시 말하건대 문제는 냉장고다. 누워 있는 흰색 대형 냉장고는 바로 21세기형 시체보관함이다. 누워 있는 성인 남자 크기의 하얀 직육면체. 그것은 바로 서양미술사에서 죽은 예수를 매장하는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석관(sarcophagus)이다. 1559년 티치아노의 ‘그리스도의 매장’에도 이런 석관이 묘사돼 있다. 영화에서 여주인공 조민수는 죽은 아들의 시체를 이곳에 보관한다. 석관을 21세기 차원으로, 종교적 신화를 냉장고라는 일상적인 삶의 차원으로 전치시킨 것은 김기덕의 놀라운 감각이다.
| | | 시모네 마르티니 ‘그리스도의 매장’(1340) | | 영화의 공간도 예사롭지 않다. 청계천의 작은 철공소들.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비좁고 숨막히는 공간. 녹슬어 가는 금속 공구들의 어둡고 차가운 색조. 언제부터 쌓이기 시작했을지 모르는 갖가지 물건이 뿜어내는 퀴퀴한 냄새들. 배트맨 시리즈에서 유명 감독들이 그토록 보여주고 싶었던 고담시(성경의 타락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서 따온 이름)의 어두운 뒷골목이자 타락과 죄악의 장소 그 자체다. 이곳은 더 이상 대한민국 서울의 단순한 청계천 뒷골목이 아니라 ‘죄와 구원’이라는 오래된 화두를 풀어나가는 보편적인 장소가 된다.
현대판 석관에 아들의 시신을 둔 여자, 조민수의 의상과 헤어스타일은 모두 성모 스타일이다. 그녀는 눅눅한 초록색 머플러를 느슨하게 걸쳤고, 빨간 치마를 입고 있다. 빨간 싸구려 나일론 치마는 대한민국 사람 누구도 입지 않는 옷이다. 붉은색과 푸른색(경우에 따라서는 영화에서처럼 초록색)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하늘로 승천한 성모의 전통 복장 색이다. 붉은색은 피를 가진 인간을 의미하며 푸른색은 신을 상징한다.
영화 중간에 조민수의 옷은 흰색으로 바뀐다. 성경에서 예수는 자신이 신(神)이라는 것을 빛으로 변해 증명한다. 라파엘이 그린 ‘그리스도의 변용’(1520)에서처럼 서양미술사에서 흰색은 빛의 색이다. 30년 만에 어머니를 인지한 이강도(이정진 분)의 눈에 그녀는 사랑의 신이었다. 헤어스타일도 마찬가지다. 성모의 두건 대신 앞머리로 얼굴을 신비 스럽게 가린 헤어스타일도 성모스타일의 변형이다. 그러나 구원의 여성 성모는 영화에서는 복수의 여성이 되었다. 찬양받는 여성의 덕성인 모성은 잔혹한 복수의 도구로 변질된다.
좋은 영화, 그러나 준비 안 된 관객은 불편한
김기덕이 바라보는 세상은 끔찍하다. 그의 표현대로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는 여자도, 남자도 몸을 팔아야 한다. 여자들은 성을 팔고 남자들은 이 영화에서처럼 살기 위해 사지를 절단당한다. 이런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 에서 구원은 가능할까? 김기덕은 특유의 날것의 감각으로 죄와 구원이라는 오래된 문제, 유럽 문화의 전통에 깊숙이 칼끝을 들이민다.
주인공을 향해 쏟아지는 “불에 타 죽을 것이다”라는 저주를 들으면서 혹자는 노동자들의 분신투쟁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서양 사람들은 묵시록의 예언을 떠올릴 것이다. 구약에 묘사된 신은 곧잘 분노하고 인간을 벌한다. 그러나 신약의 예수는 신의 새로운 이름을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죄에 빠진 세상에서 사랑은 자기희생과 처절한 고통과 죽음을 통해 실천된다. 기독교를 문화 배경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극의 진행 과정은 낯설지 않은 것이다.
참혹한 죄악의 세상. 복수는 있었으나 부활(구원)은 없었다. 복수를 시도한 조민수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이강도에 대해 육체적으로 복수하지 않았다. 고통의 진정한 근원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이다. 연민과 공감의 능력이 없던 잔혹한 이강도의 마음에 사랑이라는 고통의 진원지를 심어놓음으로써 그녀의 복수는 시작된다. 그에게는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잃고 싶지 않은 것,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무엇인가가 생겼다. 생모가 아니라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찾아온 여자라는 것을 결국 알게 돼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그 사랑은 그에게 컸다. 조민수의 죽음으로 복수는 완성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함으로써 삶은 지옥으로 바뀌고 구원은 요원해진다.
조민수가 자신의 친아들을 위해 뜬 스웨터를 입고 이강도는 죽음을 택한다. 그 스웨터에도 색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앞서 말했듯 흰색은 신의 색이고 분홍색은 인간의 살색이다. 그 옷을 입고 강도는 시신을 묻은 곳에 심은 나무에 물을 준다. 서양 중세미술에 등장하는 ‘생명의 나무’라는 테마의 현대적 번역이다. 이는 죄와 구원, 인간과 신이라는 테마를 다시 한번 각인시킨다.
이강도의 마지막 선택은 악의 화신 자체였던 자신의 자발적 소멸이다. 차가운 새벽 그는 붉은 피를 길게 길게 흘리면서 길에서 죽어간다. 김기덕 특유의 잔혹함의 미학이 인상 깊게 각인되는 대목이다. 미술을 포함한 서구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이 잔혹한 아름다움에 전율을 거듭했을 것이다. 그게 황금사자상이 그의 손에 쥐어진 이유고, 이런 맥락을 모르고 영화를 보면 그저 불편함과 잔혹함만 남는 이유다. 재능 있는 감독의 좋은 영화, 준비 안 된 관객의 불편한 영화. 이것이 영화 ‘피에타’를 둘러싼 불편한 진실이다.
… 중앙SUNDAY 제291호·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 2012.10.07
39 回 레지스 드브레의 『이미지의 삶과 죽음』 |
| ▲ 1 레오니드 크레모니니의 ‘내 사랑하는 어머님께’(1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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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나라 시청자는 왜 구경꾼밖에 될 수 없을까
이번 런던 올림픽에 여느 때보다 열광적이 됐던 것은 0.00초 단위까지 측정 하는 과학기술의 정밀함과 수없이 돌아가는 비디오 판독기가 만들어내는 놀라운 시각적 풍요로움 때문이었다. 100m 남자 결승에서 1위인 우사인 볼트와 2위의 차이는 0.12초였다. 이 0.12초를 우리는 어떻게 체험했는가? 만지지도 듣지도 못하고, 물론 냄새로 맡을 수도 없었다. 시간의 차이는 오직 슬로 모션을 통해서 보는 수밖에 없었다. 시각이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되는 순간이었다. 양학선의 체조경기 장면은 여러 카메라가 동시에 찍은 화면을 합성해 영화 ‘매트릭스’ 같은 영상으로 방영됐다. 마린 보이 박태환의 경기에서는 선수의 의지에 저항하는 물의 표면장력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장면들이 쏟아졌다. 스포츠가 쇼비즈니스에 가까운 볼거리가 되는 순간들이었다.
나폴리 바닷가에서 격렬한 파도를 열심히 그렸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런 장면들을 보았다면 어떤 작품을 만들었을까? 수증기와 하나가 된 물을 그린 터너, 빛이 철렁대는 물을 그린 모네, 인공 수영장의 물을 장식적으로 표현했던 데이비드 호크니 등 많은 작가가 저마다 물을 그려 왔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본 것을 보지 못했다. 매개론의 주창자 레지스 드브레는 이런 신기술이 선보이는 새로운 시각적 체험은 새로운 이미지의 등장에 중요한 자극이 된다고 설명 한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예술가는 없다면서.
| ▲ 2 요하네스 베르메르(Vermeer, Jan)의 ‘델프트 전경’(View of Delft, 1661)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서 문인 베르고트는 베르메르 의 그림 ‘델프트 전경’ 앞에서 죽는다. “내가 이런 것을 써야 했는데….”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 의 말 없는 영원성에 압도당했다. 저자 드브레는 이 대목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의 감각적 상태’ 를 전하는 데 사용하면서 문인보다 화가가 유리하다는 예증으로 인용한다. |
드브레는 저서 『이미지의 삶과 죽음』(글항아리)에서 시각 이미지의 역사를 기술의 발전, 철학 · 역사 · 비평 · 심리학 · 사회학 · 기호학 등의 다양한 방법론을 동원해 설명한다. “태초에 이미지가 있었다” 라고 선언할 만큼 저자는 인류의 가장 중요한 소통 방법으로 이미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구석기시대의 동굴벽화처럼 이미지는 인류의 탄생부터 존재했으며, 어떤 문자 문명보다 먼저 등장했고, 또 인류사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르네상스와 19세기 말의 인상주의 시대는 시각 이미지가 시대의 감수성을 가장 잘 드러낸 시기며, 심지어 글로 쓰인 사상사보다 더 앞서서 시대정신을 형상화했다.
소위 ‘위지위그 (WYSIWYG · What You See Is What You Get · 보는 대로 얻는다)’ 사회인 현대는 시각 이미지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그는 사고방식, 과학적 패러다임, 정치적 변화를 예고하는 징후를 알고 싶으면 도서관보다 차라리 현대미술관으로 가라고 주장한다. 매개론이라고 일컫는 다층적인 설명방식으로 방대한 이미지의 역사를 다시 기술하면서 그는 우리의 ‘상식’을 아예 바꾸자고 제안한다. 자율적인 미술사가 존재한다는 오래된 착각을 버리자는 것이다. 미술사라는 허상은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진 ‘예술’이라는 관념에 의해 탄생한 것으로, 이미지 역사의 한 형태일 뿐이다. 상당히 오랫 동안 ‘예술’ 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특권을 누리던 미술사를 부정함으로써 그는 서구 위주의 편협한 사고에서도 벗어난다.
문화적 주도권을 가진 서구 소수 국가의 체험을 보편적인 원리인 양 주장하고 공격적으로 수출해 온 것이 지금까지의 미술사나 미술이론이라는 말이다. 동양권과 아프리카 등 다른 지역의 시각문화는 다른 궤도를 밟아 발전한 것이며, 서구에 견주어 미발전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미덕은 보편적인 예술사라는 환상을 깨고 각각 공동체의 고유한 예술사가 들어설 수 있는 이론적인 근거를 마련했다는 데 있다. 드브레는 서구 열강의 이론적 제국주의를 거두어들일 시동을 건 셈이다.
| | | 3 프랜시스 베이컨의 ‘거울 앞에서 글 쓰는 남자’ (1976) “우리는 죽음의 파괴에 ‘이미지라는 재생’으로 맞선다.” 레지스 드브레는 죽음에 대한 공포, 불멸에 대한 갈망이 불멸의 이미지를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된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불멸의 존재가 되지 못하는 한 실존의 불안을 다룬 프랜시스 베이컨, 레오니드 크레모니니 같은 작가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호소력을 갖는다. | | 그렇다면 동·서양이 실시간으로 연결되고 있는 현대의 시각문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현대사회는 1960년대 이후 TV의 보급과 더불어 본격적인 영상시대에 돌입하게 됐다. 이에 대해 그는 여러 가지 우려를 쏟아놓는다. 이미지는 어느 시대보다 넘쳐나지만 대부분 피상적이고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미국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프랑스 학자답게 강력한 자본을 앞세운 할리우드 문화를 정면으로 공격한다.
인류 탄생 이래 이미지는 늘 공동체의 염원 속에서 태어나 공동체의 결속을 위해 존재해 왔다. 그러나 제작 과정과 수용 과정에서 간접화되고 공허한 세계화를 지향하는 이미지에 자기 공동체를 위한 자리는 없다. “가난한 나라도 훌륭한 시인과 소설가, 훌륭한 신문은 가질 수 있지만 좋은 텔레비전은 가질 수 없다”고 드브레는 말한다. 거대 자본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생산 앞에 가난한 나라의 시청자는 무기력한 구경꾼들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미국적 시각의 유포를 세계화라고 착각하는 상황에서는 지역의 특수한 역사와 자기 삶의 구체성을 상실한 ‘살균처리된’ 이미지들만이 양산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제작국 자본의 이해가 표현된 이미지를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무의식적으로 소비하는 어리석은 추종자들만이 존재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피상적이고 공허한 이미지의 양산은 영상시대의 미래를 어둡게 만든다. 변화를 타락으로 읽어버리는 지나친 조심성을 드브레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자기 공동체 발전에 유의미한 이미지라는 윤리를 내세우는 한 우리는 여전히 이 인문학자의 꼼꼼한 잔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과학의 질주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인간 공동체의 윤리는 절대선이기 때문이다.
… 중앙SUNDAY 제285호·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 2012.08.25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
“조선 목가구의 핵심은 ‘가늘다’는 것입니다.” 박종선(43)은 조선조 목가구의 전통을 세련된 감각으로 현대화하는 ‘하이브리드 목수’다. 그는 ‘가늘다’ 는 말을 최적의 상태에서 얻어지는 “적절히 비어 있는 검박함” 이라고 설명한다.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제하고 난 후 비로소 얻어지는 아름다움이라는 말이다. 2년 전 강원도 원주의 작업실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는 한창 페어 출품작의 마감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그의 대표작인 우주인처럼 생긴 긴 다리 조명도 있었다. 창고에는 이 작품을 위해 만든 다리가 세 개나 더 있었다. 깎아 보니 나무의 결 등이 마음에 들지 않아 네 번째 것을 다시 만들었단다. 내 눈에는 다 똑같이 훌륭해 보이는데, 그의 눈은 세심한 차이를 모두 구별해냈다. 그날 나는 장인적 완결성이 무엇인지 보았다. 그러니 그의 작품이 세계 최고의 디자인 페어인 바젤 디자인 마이애미에서 3년 연속 매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장인』(21세기북스, 2010)을 쓴 리처드 세닛은 예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회학자다. 그는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인간이라는 문제를 놓고 오랫 동안 연구해 왔다.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 이라는 화두를 내세운 이 책에서 그는 ‘삶의 가치와 일의 의미’ 를 추적한다.
장인에서 너무 멀어진 현대 예술가
장인과 예술가가 결정적으로 분리되는 시점은 르네상스 시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장인에서 예술가로 바뀌는 근대적인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준 예들이다. 대부분의 미술사는 초월적인 천재로서의 예술가 숭배를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는 미술사에서 벗어나 ‘예술가’라는 현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현대의 예술가들은 이제 그 출발점인 ‘장인’으로부터 너무 멀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미술관에 남자용 소변기를 들고 등장했던 뒤샹은 예술가의 개념을 또 한번 바꾸어놓았다. 뒤샹과 더불어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개념’이 되었다. 기성제품(readymade), 소위 오브제(object)의 도입은 분명 현대미술의 언어를 풍부하게 만든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손이 아닌 머리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개념의 판단 기준은 논리적 적확성이다. 물론 복잡해진 사회 속에서 분명 예술가들이 전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개념의 대두 속에서 ‘아름다움’의 가치는 망실됐다. 리처드 세닛이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이라는 화두를 내건 것만큼, 나는 “현대미술이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만드는 손”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고 싶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세닛의 일반론적인 분석에 귀를 기울여 보자. 세닛은 정성을 들여 장인 노동의 특수성에 대해 논구한다. 고대 도공부터 벽돌공, 바이올린 명인 스트라디바리, 요리 전문가, 현대의 리눅스 시스템 참여자들까지 그가 드는 예는 매우 다양하다. 어떤 일에 종사하건 중요한 것은 장인의식이다. “장인의식은 면면히 이어지는 인간의 기본적 충동이며, 일 자체를 위해 일을 잘해내려는 욕구”, 궁극적으로는 양이 아니라 질을 추구하는 의식이다. 그는 책 곳곳에서 손의 건강함과 “손과 머리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주장한다. 인간 두뇌의 발전은 손의 노동과 함께 이루어졌다. 문제의 설정 과정이 문제의 해결 과정이며, 그 문제의 해결이 곧 새로운 과제를 설정하는 장인의 노동 과정은 인류의 진보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는 것이다.
손과 머리가 분리될 때,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는 것은 오히려 머리라고 그는 주장한다. 나치의 살인 기술자들과 원자폭탄을 발명한 과학자들은 손과 머리가 분리되면서 생긴 가장 큰 문제점을 노정한 역사적 사건이다. 장인의 노동 과정에서 목적과 수단은 분리되지 않는다. 앞서 든 예는 목적과 수단이 분리돼 노동이 단순한 수단으로 전락한 예다. 그 결과는 무시무시한 윤리적 타락이었다. 손과 머리가 조화로운 관계에서 상호 협조하는 장인의 노동 과정을 존중함으로써 세닛은 사회의 건강함을 회복하고자 한다. 그는 장인노동의 특징을 분석하면서 감성과 지성성의 통합, 경쟁보다는 협력, 대결보다는 적응과 조절이라는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손 · 머리가 황금비율일 때 아름다워
현대미술은 이미 개념미술과 더불어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재주 좋은 손’만으로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 아니 원래 ‘생각하는 손’의 최정수였던 미술에서는 손과 머리가 원래 분리될 수가 없었다. 좋은 재주를 부린 작품이 아니라 감동적인 작품이 미술사에 기록된다. 예술에 담긴 사유는 글로 배워서 예술로 옮긴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과 함께 탄생하고 조탁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좋은 작품은 사람의 눈만 빼앗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송두리째 빼앗는다.
다시 하이브리드 목수 박종선에게로 돌아가 보자. 최근 그의 작품은 ‘조선시대 선비의 사랑방’을 현대적으로 꾸민 것이다. 그것은 최소한의 크기로 최적의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다. 예컨대 테이블을 만들 경우 예전 선비들이 쓰던 서안처럼 객과 주인이 공유하는 최소한의 크기를 지향했다. 시각적으로 최적인 상태의 추구는 삶의 최적의 상태에 대한 사유와 연관이 있다. 질을 추구하는 장인적인 노동은 늘 새로운 사유를 촉진시킨다. 그리고 이런 노동 속에서 나오는 사유는 삶이라는 굳건한 뿌리를 가지고 있어 흔들림이 없다. 손과 머리가 황금비율을 이룰 때 아름다움은 찬란한 그 얼굴을 감동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 중앙SUNDAY 제277호·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38 | 2012.07.01
| ▲ 가브리엘 메추(Gabriel Metsu,1629~1667)의 '편지 쓰는 청년' 과 '편지 읽는 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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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존재에 고루 스민 아름다움 당신은 보이는가
가수가 노래한다. 절절한 사랑 노래다. 카메라가 관람석을 비춘다. 운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남자도 울고, 알 없는 안경을 쓴 젊은 여자도 운다. 사연이 많다. 주말의 TV를 보면 대한민국은 영락없는 사연 공화국이다. 사랑이 주요 매스미디어를 장악한 보편적인 사랑의 시대다. 사랑은 일찍이 시문학을 지배했지만, 그림에 등장한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물론 사랑은 있었으나 신이나 권력을 가진 자들의 사랑만이 그림 속에는 등장할 권리가 있었다. 아니, 사랑에 빠진 남녀뿐 아니라 술 취한 주정뱅이,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아낙네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도 후반이 지나고 나서였다.
이런 그림을 본 미켈란젤로는 가차없는 독설을 날렸다. “혹자의 눈에는 괜찮아 보이는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예술성도 없고 논리도 없으며, 대칭도 없고 비례도 없으며, 엄격한 선택도 없고 분별력도 없으며 데생도 없다. 한마디로 말해 골격도 없고 힘줄도 없다.” 독설도 이 정도면 예술이다. 미켈란젤로는 직접 시를 쓰기도 했으니, 독설도 예술적일 수밖에.
“회화는 본질적으로 그려진 것을 예찬하는 것”이라고 츠베탕 토도로프는 『일상예찬』(뿌리와 이파리, 2003)에서 말한다. 미켈란젤로에게 일상은 예술적으로는 예찬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현실을 그리되 끊임없이 이상적인 것(골격과 힘줄)을 추구하던 이탈리아 르네상스 대가의 눈에는 시시한 일상을 그린 그림은 고귀하지 못한 것이었다. 역사화/신화화-초상화-풍경화-정물화-풍속화 순으로 회화 장르에 차등을 두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 깊은 관념이었다. 예술은 고귀한 자의 고귀한 것이었다. 이 세계는 웃음조차 허락하지 않는 엄숙함의 세계였다.
그런데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이런 고정관념이 본격적으로 깨졌다. 당시 네덜란드는 왕정이나 교회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 일찍이 안정적인 시민사회가 건설된 나라였다. “벽에 재미난 그림 한두 점을 걸어놓지 않은 나막신 가게가 없을 정도로” 네덜란드에서 그림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친숙한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예술은 그들의 일상을 예찬의 가치를 가진 것으로 바라보았다.
평범한 사람들의 그림에 그나마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은 거기에 ‘도덕적 교훈’이 있기 때문이라고 후에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토도로프는 이 생각에도 의문을 갖는다. 그림 속 여인은 편지를 받아든다. 사랑을 암시하는 강아지는 발 밑에서 끙끙대고, 하녀는 말없이 커튼을 들춰 그림을 보여준다. 격랑에 휩싸인 배가 그려진 풍경화는 편지가 야기할 수 있는 어떤 상황을 암시한다.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편지를 읽는다. 자세를 보니, 아마 남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내용인 듯하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가브리엘 메추(Gabriel Metsu, 1629~1667)가 그린 그림 ‘편지를 읽는 여인’ 이다. 이 그림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헛된 사랑에 대한 경고인가? 그러나 그러기에는 여인의 자태가 너무 곱고 화가의 솜씨가 너무 좋아서 그림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다. 잠시 도덕적 훈계를 잊게 된다. 여기에는 도덕적 훈계 이상의 것이 있다. 그것은 “진실에 대한 애정” “현실에 대한 따뜻한 호의”다.
풍속화들은 스텐과 테르보르흐, 호흐, 베르메르, 렘브란트 그리고 할스 같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모두의 공통점이다. 일상에 대한 긍정은 지렛대가 되어 서양문화사에 빛나는 한 대목을 만들어냈다. 네덜란드 풍속화는 전 유럽을 감염시킨 “찬양과 비방, 선과 악, 정신과 육체라는 이원론적인 바이러스” 에 저항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문화를 지배하던 이원론이라는 두터운 도식의 틀을 깨어버린 것이다.
토도로프는 문학과 회화의 차이를 지적하면서 논의를 이끌어 나간다. 문학 텍스트에 도덕적 교훈이 들어가면 텍스트 전체에 그 메시지가 스며들어 형식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그림의 경우에는 도덕적인 교훈 때문에 이미지가 반드시 변형되는 것은 아니다. 화가들은 예쁜 여자의 비단 옷자락을, 잘 정돈된 정갈한 실내를, 싱겁게 웃는 사람의 미소를, 빗자루를 꼼꼼히 그렸다. 그러면서 도달한 것은 “아름다움이란 세상 모든 존재 속에 고루 스며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인 이미지들 앞에서 신학이나 철학은 한걸음 물러선다. 네덜란드 풍속화는 미덕도 악덕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들을 존재하는 세계 앞에서의 충일한 기쁨으로 초월한다.”
좀 길지만 이러한 태도에 관해 토도로프가 어떻게 설명하는지 직접 들어보자. “인간 세계에서는 불화, 불만족, 미완성이 군림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런대로 세상은 좋은 것이다. 테르보르흐는 세상에 열광한 사람도, 절망한 사람도 아니다. 인간 조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미망에서 깨어난 공감, 헛된 공상을 버린 호기심 같은 것이다.” 대가의 문장이고 촌철살인의 통찰이다. 나는 이 구절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아주 여러 번 읽고 여러 번 인용했다. 한 작가에 대한 설명을 넘어 책 전체에 흐르는 시대의 태도이고, 토도로프의 태도다.
토도로프는 세계적인 석학으로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유명한 문학이론가다. 그러나 이런 통찰은 지식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요는 츠베탕 토도로프라는 사람 자체다. 그가 삶을 그렇게 이해하고 들여다볼 줄 아는 원숙한 인간이기에 가능한 말들이다. 그는 이론에 선행하는 구체적인 삶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토도로프의 지적대로 일상을 그리는 미술은 19세기, 심지어 20세기를 넘어 지금까지 이어진다. 팝아트의 등장으로 현대미술에서는 영화, 만화, 상품 라벨까지 ‘일상’이 넘쳐난다. 그러나 과거 거장들의 특징인 “진실에 대한 애정” “현실에 대한 따뜻한 호의”도 더 이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실제로 팝아트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이해보다 상품에 대한 부러움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고, 기꺼이 상품을 닮고자 한 차가운 예술이다. 반대로 현대인들의 일상은 더 위태롭고 각박해졌다. 그래서 “진실에 대한 애정” “현실에 대한 따뜻한 호의”는 더욱더 필요하다. 17세기 풍속화가 더욱 소중해지는 이유다. 그러나 그런 축복받은 시대는 지나갔다. 그때는 삶에 대한 긍정성을 모두 공유하고, 화가들은 의심하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시대였다. 축복받은 시대의 또 다른 징표는 평범한 재능을 가진 작가들도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예술적 솜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 지혜의 문제”였기에, 렘브란트나 베르메르 외에도 많은 작가가 함께 활동하면서 다채로운 시대를 만들어 나갔었다.
그림보다 인생의 현안이 급한 사람에게도 나는 이 책을 권한다. 그림은 돈을 버는 법도, 취업을 하는 법도, 승진하는 법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삶의 비법을 하나 가르쳐준다. 17세기 풍속화가들은 우리에게 세상을 제대로 보는 법을 보여준다. 이것이 비록 절판된 책이지만,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든 이유다.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 -이것이 츠베탕 토도로프가 네덜란드 풍속화 속에서 찾아낸 보석 같은 진실이다. 우리는 현실을 지나치게 타계하고 개선해야 할 무엇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 ▲ 가브리엘 메추의 '편지 쓰는 청년' 아일랜드 국립미술관, 더블린 |
| | ▲ 가브리엘 메추의 '편지 읽는 연인' 아일랜드 국립미술관, 더블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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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SUNDAY 제272호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37 | 2012.05.26
| ▲ 2 ‘커튼과 정물’(1899), 캔버스에 유채, 74*54.7㎝ 사진 한길아트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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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형님? 마티스의 형님? 아니 ... 그 이상 !
| | | 1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 (1890~95), 캔버스에 유채, 80*64㎝ | | ‘현대 회화의 아버지’ 폴 세잔(1839~1906)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단조로웠다. 고흐의 비극이나 피카소의 화려한 연애 같은, 예술가적 낭만 드라마 따위는 그에게는 없었다. 그는 고향 엑스 프로방스에서 은둔자가 되어 그림만 그렸다. 1895년 볼라르가 그의 첫 개인전을 열기 전까지 세상은 그를 잊었고, 그도 세상을 잊었다. 세상의 소란과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이 설정한 창작 과제에 고독하게 몰입할 수 있는 조건과 능력을 세잔은 가지고 있었다. 고독과 창조에의 몰입이 그의 전부였다.
『세잔의 사과』(한길아트, 2008년, 2만4000원)의 저자 전영백 교수가 적절히 표현했듯 “서로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을 그린 인물화, 먹지 못하는 과일을 표현한 정물화, 그리고 접근할 수 없는 장면을 보여주는 풍경화”인 세잔의 그림을 이해하는 동시대인은 아주 적었다. 죽마고우인 소설가 에밀 졸라도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세잔의 그림은 그때까지의 서구 미술의 모든 관행을 의심하고, 거부하는 낯선 그림이었다. 그에게는 “병에 걸린 눈을 가진 작가” “향후 15년간 미술사에서 가장 기억되는 웃음거리로 남을 작가”라는 등 가혹한 평이 쏟아졌다.
은둔의 화가 세잔은 사건 대신 몇몇 인상 깊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볼라르의 초상화를 그리던 중 세잔은 버럭 화를 낸다. “이 바보 같으니라고! 당신이 자세를 망쳐버렸소. 내가 당신에게 사과처럼 앉아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사과가 움직이오?” 사과만도 못한 취급을 받은 불쌍한 볼라르는 115번이나 모델을 섰지만, 초상화는 결국 미완성으로 남았다. 이 에피소드는 세잔의 전형적인 작업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사과가 있는 정물화, 목욕하는 사람들, 생트 빅투아르산의 풍경화 등 몇 개의 테마를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 그렸다. 마치 과학자의 실험과 같은 무수한 반복을 통해 그는 느리게 한 걸음씩 진척하면서 현대 회화로 나가는 길을 열었다.
2800억에 팔린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불친절하지만 세잔의 그림은 묘하게 아름답다. 오래 보게 만들고, 오래 보아야 보이는 그림이다. “불편하고 긴장감을 자아내는 세잔 그림의 수수께끼 같은 시각 구조에 매료”된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늘어났다. 세잔의 드라마는 죽고 나서 비로소 시작됐다. 피카소가 세잔을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고 칭할 정도로, 당시의 많은 젊은 작가가 그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그들은 현대미술의 아방가르드가 되어 20세기를 질주했다. 세잔 드라마의 한 꼭지점은 2012년 2월, 그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 역대 미술품 최고가로 팔린 일이다.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라는 테마로 세잔은 총 5점의 유화를 완성하는데, 이 중 유일하게 개인소장으로 남아 있던 한 점을 카타르 국립미술관이 구입한다. 세잔의 작품 한 점이 부여한 의미는 실로 막대했다. 이 작품 구입으로 카타르 국립미술관은 나머지 4점이 소장돼 있는 오르세미술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필라델피아 반스 재단, 코톨드 갤러리 등과 나란히 언급되는 자격을 갖게 되었다. 중동 작은 산유국의 신흥 미술관은 “세계 미술의 중심지로 가는 입장권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세계 최고가 작품의 두 배에 가까운 금액인 2억5000만 달러(약 2800억원)에 팔리면서 그동안 여러 ‘아들’들에게 양보해 왔던 최고 기록을 세잔은 단숨에 갱신했다. 당분간 깨지기 힘든 기록이다. 이런 떠들썩한 돈놀음에 세잔이 살아있다면 어떤 말을 할까? 아마 그 괴짜 화가는 “그 작품은 내 최고 작품도 아니다”라며 억만장자를 기겁시킬 말을 쏟아낼지도 모른다. 그러곤 언제나처럼 화구를 챙겨서 생트 빅투아르산을 향할 것이다. 이제는 ‘세잔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그 길을 걸어서 말이다.
2008년 발간된 전영백 교수의 책 『세잔의 사과』 역시 사후 세잔 드라마의 역동성을 잘 보여준다. 20세기 중반까지 모더니즘적인 논의는 형태론적인 분석에 집중해 세잔을 “피카소의 형님”으로 평가했다. 그 후 몇몇 학자가 형태론적 분석에 의미론적 해석을 연계해 설명하면서 세잔 색채의 의미를 재해석했다. “마티스의 형님”으로 부각된 이유다.
그러나 세잔은 그 이상이다. 세잔 회화의 핵심은 “지각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모더니즘의 틀을 넘어서는 것으로, 심리학과 역사적 인식론에 기반한 “최근의 포스트모던 이론에서도 계속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책은 크리스테바, 프로이트, 바타유, 들뢰즈, 라캉, 메를로퐁티 등 여섯 현대 사상가들의 시선으로 세잔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본다. 정신분석학자 크리스테바의 멜랑콜리아 이론으로는 무표정한 세잔 후기의 초상화들을, 프로이트의 이론으로는 “관능적이지 않은 세잔의 누드”, 특히 ‘대수욕도’들을, “배설의 철학자” 바타유의 이론으로 세잔의 초기 누드화들을 분석한다. 라캉의 이론으로는 세잔의 자화상을, 메를르퐁티의 이론으로는 세잔의 수채화를 들쳐본다.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는 세잔에게서 얻은 개념적 영감을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론에서 구체화시키는 과정이며 들뢰즈 자신의 예술론을 펼치는 계기가 됐다.
6명의 사상가들은 저마다의 이론 전개를 위해 세잔을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뜯어내 언급하고 있다. 저자는 한 사상가의 견해를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여섯 개의 견해로 세잔을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한다.
세잔의 회화는 마르지 않는 이론적 영감의 샘이다. 조금씩 다른 지점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잔이 지금까지의 서양미술사에서 없었던 전대미문의 것을 그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세잔의 야망은 대단했다. “산이 접히는 힘” “씨앗을 틔우는 힘” “풍경에서 열이 오르는 힘” “공기” 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려고 분투했다. 이 야망은 서구사회를 지배하던 인식론의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진정한 사건이 되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다”라는 위대한 원리를 세잔은 알고 있었다. 원근법에 입각한 근대적 자아가 포착하지 못했던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그는 원했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미술을 지배한 원근법의 원리는 이성으로 무장된 근대철학적 주체를 설정했다. 결국 이 주체는 단일 시점의 감옥에 갇혀서 세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성철의 통찰은 진실로 위대하다. 서구 철학의 주-객 대립 논리를 뛰어넘어 주·객관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세상을 파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잔이 그토록 그리고자 했던 것은 바로 성철의 철학이 바라본 것이었다.
원근법이 잡아내지 못한 세상을 탐구
서양미술사를 살펴보면 미술의 시각 논리 정립이 철학에 앞섰던 시대들이 있었다. 르네상스의 원근법은 데카르트의 철학에 앞섰고, 세잔은 당연히 이 6명의 사상가보다 앞서 있었다. 세잔의 회화에서 보이는 ‘지각 과정’에 관한 탐구를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100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잔은 자신의 과제를 풀기 위해 40년 동안 몰두했다. 현대 작가들은 2년 주기의 비엔날레, 2~3년마다 한 번씩 있는 개인전 등 현대 사회의 빠른 속도의 환경에 놓여 있다. 음반 기획이나 영화 제작의 속도와 경쟁해야 되는 것처럼 보인다. 진득해지기, 하나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매일매일의 실험을 견디어내기 -세잔의 단조로운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창 밖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세잔이 그리워진다. 세잔에게는 하나의 그림만이 유일한 사건이었다. 다른 사건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축적돼 현대미술의 빅뱅을 이뤄냈다.
… 중앙SUNDAY 제268호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36 | 2012.04.28
35 回 리타 해튼 & 존 A. 워커의『슈퍼 콜렉터 사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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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시장 쥐락펴락, 작전세력 원조?
| | | 스벵갈리(Svengali)사악한 동기로 남을 조종하고지배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종해 나쁜 짓을 하게 할 힘을 지니고 있는 사람.조지 듀 모리에의 소설 『트릴비(Trilby)』에 나오는 인물 | | ‘21세기의 메디치’ ‘영국 미술사의 성공적 인 발명가’ ‘예술가-제조자’ ‘시장-제조자’ ‘천박하고 욕심 많은 이기주의자’ ‘미술시장의 스벵갈리’…. 이 상반되는 평가는 모두 찰스 사치(Charles Saatchi·1943~)에게 쏟아지는 말들이다. 그는 2002년 아트 리뷰지 선정 세계 미술계 파워 100인 중 1위로 꼽혔다. 2008년 쿠티엔 레츠가 쓴 책 『영국을 망친 50명』중에는 7위로 선정됐다. 죄명은 전 국민의 미적 취향을 망친 ‘아트 딜러’(컬렉터가 아니라!!!)라는 것이었다. 미술시장에서는 영웅이지만, 문화 발전에서는 간웅(奸雄)이란 말이다. 그는 컬렉터인가? 아트 딜러인가? 사치는 대답한다, “나는 미술중독자다”라고. 사치의 덕을 톡톡히 본 작가 데이미언 허스트는 코웃음을 친다. “사치는 지갑으로 미술작품을 인정했다. 그는 쇼핑중독자다.”
사치는 ‘슈퍼 컬렉터’ 현상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슈퍼 컬렉터는 수백만 달러의 재산가로, 다량으로 작품을 구매하며 미술관과 세계 미술 시장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제적인 컬렉터를 일컫는다. PPR 그룹의 회장이자 경매회사 크리스티의 대주주인 프랑수아 피노를 예로 더 들 수 있겠다. 『슈퍼 콜렉터 사치』(북 치는 마을, 2011, 1만5000원)를 쓴 리타 해튼과 존 A 워커는 매우 비판적인 태도로 슈퍼 컬렉터 현상과 그를 둘러싼 현대미술의 한 단면을 잘라 보여준다.
사치에게 붙는 첫 번째 타이틀은 “미술 사조를 만든 최초의 컬렉터”다. 사치는 세계적인 광고 회사 ‘사치&사치’를 운영했던 성공한 광고인이었다. 광고인의 특성이 컬렉션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사치는 새로운 상품을 광고하듯 yBa라는 새로운 미술 사조를 론칭해 마케팅에 성공했다. 그는 오랜 컬렉션 경험 끝에 음악에서 비틀스나 롤링스톤스 같은 영국을 대표하는 미술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실제로 영국을 대표하는 미술, 즉 yBa를 만들어낸다.
1992년 그의 갤러리에서 있었던 젊은 영국 미술을 주제로 한 전시는 yBa라는 표현의 기원이 됐다. 이때 참석했던 데이미언 허스트, 세라 루커스, 마크 퀸, 레이철 화이트리드 등은 yBa의 대표작가로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이들 외에도 젊은 영국 작가들을 위한 여러 기획전을 꾸준히 진행했다. 젊은 작가들을 발탁하는 사치의 안목은 획기적이었고, 혁신적이었다. 미술계에서만 잔뼈가 굵은, 구식 인물들은 생각해내지 못했던 획기적인 방식들로 작가들을 프로모션했던 사치는 분명 성공적이고 색다른 컬렉터였다.
| ▲ 젊은 날의 찰스 사치(오른쪽)와 동생 모리스 사치. [북치는마을 제공] | |
동시에 그는 컬렉터를 위장한 ‘아트 딜러’라고 의심받는다. 그것도 시장을 조작하고 왜곡시키는, 나쁜 취향을 유포시키고, 어마어마한 이득을 챙긴 사악한 아트 딜러라고. 존경받는 많은 전통적인 컬렉터들은 평생 소장한 미술품을 미술관 건립, 공공 기관 기증 등을 통해 사회 공동체와 함께 공유한다. 이는 작가의 창작을 고무하는 일이며, 미술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을 공개해 인류의 문화발전에 기여하는 행위다.
미술품 컬렉터들은 당연히 돈을 벌어야 한다. 경제적인 이득은 명예만큼이나 컬렉션을 이어갈 수 있는 동력이 될 것이다. 사치가 비난을 받는 것은 작품 판매로 돈을 벌었던 것 자체보다 시장을 왜곡·조작했다는 혐의 때문이다. 그는 작가들이 뜨기 전에 싼값에 작품을 다량으로 구매했다. 작품이 비싸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지 않았다. 영세한 일반 딜러들은 할 수 없는 컬렉터의 힘이라는 초강력 무기를 사용해 소장품의 가격을 올렸다. 본인이 직접 갤러리를 운영하기도 했고, 컬렉터라는 비영리적인 명함으로 국공립 미술기관에 작품 기증·대여 등 다양한 방식으로 후원했다. 이것은 사치가 소장한 작품과 작가들에게 멋진 이력을 만들어주었고, 가격은 계속 상승했다. 98년 12월 런던 크리스티에서 사치 컬렉션의 대규모 경매가 거둔 성공은 97년 ‘센세이션’전의 효과였다. 런던·베를린·뉴욕 순회 전시로 세계적인 이름을 얻었던 사치 컬렉션의 작품들이 나오자 시장은 열광했고 비싼 값에 팔려나갔다.
그는 팔면서 계속 샀다. 자신이 프로모션했던 yBa 작가들의 초기 작품들도 거의 다 팔았다. 사치가 팔아 버렸다고 소문이 난 작가는 가격이 폭락했다. 한 작가의 운명, 미술시장 전체가 한 명의 컬렉터에 의해 출렁였다. 그래서 피터 블레이크 같은 일군의 작가들은 사치에게 작품을 판매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결국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것은 평범한 관람객들이다. 생존 작가들의 작품이 수억~수백억원 사이에 거래가 되니 일반 컬렉터들은 작품 소장을 꿈도 못 꾼다. 대부분 보조금으로 운영되는 국공립 기관들 역시 이런 고가의 작품들을 구입할 수 없으니 나라를 대표하는 국공립 미술관에서 좋은 작가의 좋은 작품을 보기란 어렵게 됐다. 전 세계적으로 사치를 따라 컬렉터가 된 사람도 많고, 그는 여전히 시장에서의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최근 그의 행동을 보고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사치의 행동방식을 참조는 하되, 그의 리스트는 참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어떤 작가를 또 어떻게 갈아치울지 아무도 모르니까.
이 책은 사치에 관해 쓰인 몇 권의 책 중 하나일 뿐이다. 그가 악마인지 천사인지 아직은 다 판가름 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살아 있고 행동하고 있다. 저자들은 말한다. “자신의 이름을 붙인 미술관이나 재단을 설립함으로써 사람들은 불멸의 존재가 된다. 게티 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 세인즈버리 미술관처럼. 부자도 죽을 때는 빈손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많은 부자가 유언으로 자신의 미술관을 국가에 기증해 공공기부자로 남기를 결정한다.”
30초에 승부를 거는, 빠르게 왔다가 사라지는 광고에 종사했던 사치가 오랜 생명력을 가진 예술에 탐닉하는 이유를 우리는 이해한다. 사치 또한 그의 컬렉션과 갤러리를 공공에 헌납해 불멸의 존재가 되는 길을 택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사치’라는 사람이 아니다. 미술품 컬렉션의 투자적인 측면이 그동안 너무 부각되었다는 것이 문제다. 컬렉터가 아니라 아트 딜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사치는 컬렉션이 꽤 좋은 돈벌이 수단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컬렉션의 공익적인 성격에 대해 더 심각하게 생각할 때다. 사치만큼 떠들썩하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독일의 페터 루트비히나 이탈리아의 주세페 판자 디 비우모 백작 같은 존경받을 만한 컬렉터도 많다.
돈은 힘이 세다. 돈의 힘이 너무 세기 때문에 돈에 귀를 달아놓아야 한다. 돈은 공공의 선에 대해 이야기하는 철학이나 예술의 잔소리와 푸념을 끊임없이 들어야 한다. 이게 내가 아는 상식이다. 비난을 받는 것은 컬렉터 사치가 아니라 아트 딜러 사치다. 사치에게 우리 모두가 여전히 바라는 것은 그가 선한 이름으로 미술사에 남는 것이다.
… 중앙SUNDAY 제260호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35 | 2012.03.03
박수근의 무채색, 그건 묵묵한 희망의 색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 한 구석에 박수근을 한 조각씩 지니고 살아간다. 고향집, 시골, 장터, 그리고 이런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소박한 정경의 기시감. 이런 것들의 유래는 모두 박수근(1914~1965)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월 21일, 박수근의 탄생 98주기를 기념하며 박완서(1931~2011)의 『나목』(민음사, 1만1000원)을 골랐다. 박수근과 박완서라니! 이름만으로도 근사하지 않은가?
『나목』은 우리 문화사에서 보기 드문 미술과 문학의 행복한 조우의 순간이다. 박완서는 박수근을 모델로 한 이 소설로 데뷔했고, 박수근은 박완서의 소설을 통해 영원히 서가를 장식하는 기념비적 존재가 되었다. 박수근과 박완서는 한국전쟁의 한복판, 용산의 PX에서 만났다. 한 사람은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환쟁이였고, 또 한 사람은 초상화 주문을 받는 점원이었다. 후에 그 환쟁이가 한국 최고의 화가가 되리라는 것을, 그 어린 점원은 한국 문단의 거목이 되리라는 것을 그때 어찌 알았겠는가? 『나목』이 발간된 것은 1970년. 화단에서 박수근에 대한 본격적인 재평가가 있기 전의 일이니 박완서의 안목이 깊다고 할 수밖에 없다.
나는 박완서 문학이 가진 위대한 상식의 힘을 사랑한다. 박완서에게는 ‘인간이라면 그 순간 응당히 그래야 할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있다. 그것은 세속적인 도덕과 사상을 뛰어넘는 위대한 것으로 세상에 대한 폭넓은 통찰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의 근간이 된다. 박완서는 박수근의 그림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이 소설의 주요 모티브는 ‘색채’로, 박수근의 그림이 소설의 중요한 전제가 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 | | ▲ 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 하드보드에 유채, 1956년 | | 소설의 주인공이 본 시대의 색은 회색이다. 모든 것이 피폐해진 전쟁기의 절망적인 회색의 삶. 하지만 그 속에서도 청춘은 ‘황홀한 빛들’에 대한 꿈을 버릴 수 없다. 그 꿈은 ‘어리석지 않게 선량한 눈’을 가진 화가 옥희도(박수근을 모델로 한 인물)와의 은밀한 사랑으로 폭발한다. 예술이 유보되고, 청춘이 유보된 두 사람의 사랑은 시대가 허락하지 않은, 삶을 ‘재미있어 하고 싶은’ 안타까운 욕망의 펄떡거림이다. 소설 속에서는 두 사람의 소소한 밀회를 즐기는 순간만은 빨갛고 노란 색채가 살아나는 것으로 묘사된다.
소설에는 박수근의 그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두 번 나오는데, 소설의 전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처음 그림을 보았을 때 주인공의 눈에 들어온 것은 “무채색의 불투명한 부연 화면”이었다. 꽃도 잎도 열매도 없는 ‘한발(旱魃)에 고사한 나무’를 그린 그림. 그 나무는 ‘잔인한 태양 광선도 없이 말라 죽은’ ‘태생적인 고목(枯木)’이었다. 피폐한 시절을 살아갔던 꿈 없는 사람들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절망적인 회색의 삶을 거부하는 주인공에게는 잔인할 정도로 실망스러운 그림이었다.
그러나 50~60년대, 박수근의 작품을 낯설게 보았던 것은 젊은 박완서만이 아니었다. 박수근의 화풍은 당시 화단의 주요 화풍과 거리가 멀었다. 박수근이 그린 농민들은 당시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관변에서 권장되었던 ‘향토색’적인 소재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또 독특한 질감, 단색조에 평면성이 강조된 독창적인 기법은 지나치게 새로워서 낯설어 보였다.
박수근은 미술계에 학연도 지연도 없었다. 그 말 많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계속 응모했던 것은 그것이 그가 미술계에서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수근은 12번 응모해 초기 세 차례 낙선, 단 한 번 특선, 그리고 여덟 번 입선한 만년 입선 작가로 남았다. 평론가 이경성과 최순우 외에 그의 작품을 제대로 알아보는 한국 사람들은 당시에 없었다.
박수근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다시 그림을 보게 된 것은 10여 년이 흐른 후 1965년 화가의 유작전에서다. 소설에서 박완서가 언급하는 작품은 ‘나무와 여인’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소설 속 주인공은 못견디게 아렸던 청춘과 한 시대의 의미, 그리고 박수근의 작품세계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지난날 ‘한발(旱魃) 속의 고목’이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의 나목(裸木)”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 나목이 헐벗을지언정 의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봄에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무채색의 단조로움은 절망의 색이 아니라 박수근의 성품 같은 묵묵한 희망의 색이었다. 박완서의 탁월한 통찰이다.
박수근이 그린 마을 풍경은 어디라고 꼭 집어 말할 수가 없다. 강원도 사람이건, 서울 사람이건, 부산 사람이건 그의 그림 앞에 서면 그저 각자 ‘우리 동네’를 떠올린다.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아내 김복순은 몇 시간씩 모델을 서주곤 했지만 박수근은 그 고운 얼굴을 그리지 않았다. 그저 하얀 무명 한복을 입은 한 여인, 어려움 속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여인을 그렸을 뿐이다. 박수근은 “가난한 사람들의 어진 마음을 그려야 한다는 극히 평범한 예술관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평범하다지만 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예술관인가?
박수근 덕분에 한국 사람들은 근대화 이전의 돌아가고 싶은 고향의 풍경, 만나고 싶은 고향 사람들의 원형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박수근은 한국적인 촉감을 현대적인 시각 언어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 ‘가장 한국적인 서양화가’였다. 박수근은 스스로에게 아름다운 돌, 미석(美石)이라는 호를 붙일 정도로 우리나라의 옛 석물들을 사랑했고, 그 “아름다움을 조형화에 도입하고자” 애썼다. 우리가 보는 바탕화면의 오톨도톨한 질감과 단순하고 우직한 선은 이러한 그의 노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2월 말의 창 밖 풍경은 아직 메마르다. 봄에 새잎을 틔우기 위해서 전지를 한 가로수들은 상고머리를 한 옛날 시골 아이들처럼 껑충하다. 저 나무들을 메마른 겨울 나무가 아니라 “봄에의 믿음”을 가진 나목으로 볼 수 있게 해준 사람은 박완서다. 지금 박수근의 그림을 닮은 익명의 나목들은 말없이 새봄을 기다리며 속 깊은 나이테를 늘려가고 있을 터다.
… 중앙SUNDAY 제258호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34 | 2012.02.16
33 回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정병모 교수의 민화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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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福 부르는 용, 三災 쫓는 호랑이
| | | ▲ ‘용호도’, 19세기, 장지에 채색, 용 117.4 x 71.5 cm, 호랑이 118.3 x 71.3cm, 미국 Smithsonian Institute | | 정병모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 미국 민간미술 연구가 베트릭스 럼포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민화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예술"이다. 무명화가들은 전통의 틀을 깨뜨리고, 자연의 느낌을 질박하게 드러내며, 서민의 친근한 정감을 화폭에 담았다. 그들은 천진난만한 그림을 통해 정통화가들과 다른 자유로운 예술세계를 보였다. 민화는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위대한 예술이다.
아주 흡족한 그림을 보았다. 너무나 사랑스러워 요리 보고 조리 보고, 신기해서 뜯어보고 붙여보다 키득키득 웃었다. 표지의 한 귀퉁이를 장식하고 있는, 세 송이 커다란 모란꽃을 들고 있는 선녀와 꽃을 악기처럼 불고 있는 선녀의 모습은 현대적이면서 어여쁘기 짝이 없다. 어떤 그림은 제목은 ‘봉황’인데, 아무리 보아도 목을 길게 뺀 닭을 그린 것 같다. 봉황은 본 적이 없지만, 마당의 닭은 실컷 보고 살아온 서민 화가의 유쾌한 그림이다. 호랑이는 순박하다 못해 바보 같고, 용은 기우제를 한 상 받아먹고도 비를 못 내린 듯 낭패한 표정이다. 물고기 한 마리가 출세해 보겠다고 등용문 앞에서 펄쩍 뛰어오르지만, 저놈의 물고기가 용이 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평범한 어종이다. 더러 표현은 서툴지만, 그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욕망과 꿈을 절절히 담고 있다.
책의 말미에 오면 입이 딱 벌어지는 장대한 유토피아 장면이 펼쳐진다. ‘십장생도’와 ‘해학반도도’가 그 그림들이다. 속속들이 들어 있는 상징과 꿈이 풍요롭고 찬란하다. 신분, 재산과 상관없이 누구든지 배부르고 아프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행복하게 사는 세상이 그림 속에 담겨 있다. 정병모의 책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2011, 다할미디어, 2만원)가 펼쳐 보여준 세상이다. 한국의 아름다운 그림, 민화에 관한 책이다. 그림만큼 흥에 겨워 저자도 짧고 명료한 문장으로 말한다. “민화는 자유다!” “민화는 밝고 명랑한 그림이다.” “민화가 춤을 춘다. 흥에 겨워 춤을 춘다.” “민화는 무명화가들의 소리 없는 반란이다.”
민화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민중들의 꿈과 희망, 자유로운 상상을 표현한 그림이다. 18세기 영·정조 시대 문화부흥기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경제적인 안정은 민화의 전성기를 이끌어냈다. 구성과 표현의 자유분방함과 더불어 해학은 저자가 꼽는 민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대표적인 민화의 한 장르인 ‘까치 호랑이’는 처음에는 악귀를 쫓는 호랑이가 새 소식을 전하는 까치와 함께 등장하는 벽사·길상(吉祥)용 그림이었다.
그러나 여러 세대를 거치며 반복해 그려지다가 새롭게 해석된다. 바로 바보 호랑이와 당찬 까치의 등장이다. 호랑이는 폭정을 자행하는 관리를, 까치는 힘없는 민중을 대변한다. 호랑이는 어리석고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민화는 웃음 속에서 사회를 비판하는 능청스러운 해학의 힘을 가지고 있다. 18세기의 풍속화에 담겨 있던 건강한 웃음은 19세기 초반이면 사라진다. 풍속화에서 사라진 웃음을 보존한 것이 민화다.
저자는 ‘민화를 세계로’라는 목표를 세우고 지난 10여 년간 민화 관련 연구작업과 전시작업을 이어왔으며,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책거리 그림에 대한 설명이 흥미로운데, 저자는 이를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 번째는 정조의 책거리 그림이다. 책거리 그림은 정조의 정치적인 이념을 대변하는 중요한 그림이었다. 문체반정을 단행해 당시 유행하던 잡기류의 글을 멀리 하고 전통적인 유교의 고문을 진흥하고자 했던 정조는 자신의 뜻을 알릴 수 있는 그림이 필요했다. 저자는 책으로만 가득 찬 책거리 그림이 정조가 원하는 바였을 것이라고 넌지시 추측한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책거리 그림에는 책뿐 아니라 다양한 기물이 함께 그려져 있다. 자세히 보면 대다수가 알록달록한 중국산 수입 도자기류들이다. 조선시대의 도자기 산업은 궁중 직속 사업으로 검약과 검소를 앞세운 왕실의 취향을 반영해 소박하고 세련된 백자가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조선의 상류계층에서는 중국이나 일본처럼 다채색 도자기들이 유행했다.
두 종류의 책거리 그림 분석으로 저자는 “조선 상류층 사람들의 명분과 실제”를 역동적으로 읽어낸다. 서민들의 집에 걸린 민화풍의 책거리 그림들은 이와는 또 다르다. 이 그림들에는 ‘행복, 장수, 출세, 득남’ 등 세속적인 염원을 담은 물품들이 책과 함께 등장한다. 서민들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은 책 옆에 다산을 상징하는 다양한 과일, 여성의 바느질 도구와 결합시키며 새로운 유형의 책거리 그림을 만들어냈다. 책거리 그림의 분석 과정은 왕실 직속의 궁정화, 상류 계층의 그림, 서민들의 민화라는 단계적인 발전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는 민화의 뿌리에 대한 추측을 가능하게 해준다.
김용권의 『민화의 원류, 조선시대의 세화』(2008, 학연사, 3만원)는 민화의 뿌리에 대한 좀 더 새로운 접근을 보여준다. 교과서적으로 쓰였기 때문에 읽기 쉽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민화의 기원을 연말연시 벽사와 길상의 의미로 문에 붙였던 세화(歲畵)로 본다. 이러한 관점은 민중 화가들이 그린 민화뿐 아니라 ‘십장생도’와 ‘해학반도도’ ‘모란도’ 등과 같이 궁정에서 전문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던 세련된 채색화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
벽사와 길상은 서민들에게뿐 아니라 양반·왕에게도 중요한 일이었다. 저자는 세화의 근거를 고구려 벽화, 대문에 붙여 악귀를 쫓았다던 신라의 처용 그림, 고려 불화와의 연관성 등에서 다양하게 찾아낸다. 세화는 도교·불교·유교 이전부터 한반도 사람들의 관념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무교적인 생활감정과 사상이 스며들어 이어져 내려오는 그림이다. 오랫동안 이어져 오던 세화의 풍습은 조선시대부터 제도화되었다. 도화서 화원들이 그림을 그리면 예조에서 등급을 매겨 왕에게 진상하거나 근신들에게 하사했다. 이 궁중문화는 16세기께 민간에도 퍼져나가 민화의 뿌리가 된다. 일종의 “연하장과 부적의 용도를 동시에 지니는 그림”으로 해마다 새로 그리는 소비물이었기 때문에 현재 전해지는 세화는 극히 드물다.
벽사와 길상의 목적을 위해 그려진 그림들에 부귀·자손번창·무병장수·사후영생·액막이 같은 현실적인 욕구가 담기는 것은 당연하다. 장식적인 목적과 실용적인 목적을 동시에 가진 그림들은 출입문·우물·굴뚝·아궁이·변소·가구 등 집안 구석구석 붙여졌다. 20세기 초 주한 이탈리아 총영사 카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가 쓴 기록에 따르면 “지전에서 값싸게 살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용과 호랑이 그림이 있으며, 한국의 어느 집에나 이러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설날에는 무엇보다 닭·호랑이·용 그림을 주로 붙였다. 특히 삼재를 쫓아내는 호랑이와 오복을 부르는 용이 짝을 이룬 ‘용호도’는 인기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와도 관련이 있고, 좌청룡 우백호라는 풍수상과도 연관이 있다. 값싸게 구할 수 있는 판화로 찍은 ‘용호도’도 있었지만, 더 많은 복을 받고 싶은 욕망들은 더욱 다채롭고 풍성한 ‘용호도’를 만들어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책은 매우 흥미로운 풍경을 우리에게 상상하길 권유한다. 새해 첫날 집집마다 대문에 세화를 내걸어 갤러리로 변한 거리를! 정월 초하룻날 혹시라도 북촌에 가볼 일이다.
… 중앙SUNDAY 제254호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33 | 2012.01.21
| ▲ “호랑이는 백수의 왕이고 맹수성을 대표하는 동물이죠. 왼쪽에 보시는 호랑이가 김홍도가 그린 호랑이고, 오른쪽은 민화가가 그린 호랑이입니다. 김홍도의 호랑이는 맹수성이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된 데 반해, 민화가의 호랑이는 약간 바보스럽게 그려졌죠. 눈이 사팔뜨기고 그런 호랑이 옆에 까치가 당당하게 앉아 있습니다. 다른 그림을 더 보시겠습니다.” |
| ▲ “왼쪽 그림부터 보시면, 어미 호랑이와 새끼호랑이의 모습이 나옵니다. 어미 호랑이는 무슨 약을 먹은 것처럼 눈이 뱅글뱅글 돌고 있고 치아가 부실해요. 그런데 새끼호랑이도 어미를 닮아 눈이 뱅글뱅글 돌고 치아가 부실합니다. 모전자전인 거죠. 그리고 가운데 호랑이 가족은 밝은 웃음을 띠고 까치와 사이좋게 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호랑이의 발톱은 모두 뽑혀서 위협적인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죠. 그리고 오른쪽의 호랑이는 도리어 까치한테 겁을 먹고 있군요. 까치의 눈치를 살피고 있어요. 보신 그림들은 다소 소박하고 거칠게 표현되었지만, 사실적인 호랑이와는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이런 그림들에 숨겨진 뜻은 무엇일까요? 다음 그림을 보시면 그 의도가 더욱 명확해집니다.” |
| ▲ <닭과 모란> 일본 구라시키민예관 소장 “삼지창처럼 생긴 잎이 모란 잎입니다. 모란꽃 없이 잎만 있는 화병에 닭이 슬며시 머리를 가져다 댑니다. 닭의 볏이 모란꽃 역할을 하는 거죠. 식물과 동물이 절묘하게 조합되어 있습니다. 이름 없는 무명의 화가가 그린 그림이지만 대담한 상상력과 재치가 유쾌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
| ▲ <기린과 책거리> 파리 기메박물관(좌) <신자도> 일본 민예관(우) “왼편의 그림을 보시면 산속의 기린이 보이실 겁니다. 그런데 산 뒤로 마치 UFO가 떠오르듯이 책거리와 꽃병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민화가의 상상력 속에서는 가능한 일이죠. 그리고 오른쪽의 그림은 책거리와 문자도가 결합한 것입니다. ‘믿을 신(信)’을 표현한 것이죠. 이런 그림들은 당대의 민화가들에게만 가능했던 자유로운 상상력의 표현입니다.” |
| ▲ <삼고초려도> 19세기말~20세기초, 종이에 채색, 54x38cm, 개인소장 “보시는 그림은 관우를 표현한 그림입니다. 관우는 중국에서 신적인 존재입니다. 왼쪽은 그런 관우를 그린 중국의 그림이고 오른쪽은 우리나라의 민화입니다. 둘 다 삼고초려를 표현한 것입니다. 왼쪽 그림에서는 위엄 있는 관우가 동자에게 깍듯하게 안내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른쪽 그림에서 관우는 어디에 있을까요? 아래쪽에 그려진 두 명 중 오른쪽이 관우입니다. 자고 있는 제갈량이 건방지다고 장비가 화를 내자 관우가 장비를 말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
| ▲ <봉황> 삼성미술관 리움(좌) / <제자도> 선문대학교 박물관(우). “왼쪽 그림엔 봉황 두 마리가 웨이브를 하듯 X자로 교차해있습니다. 그리고 구불구불한 매화가지 위에는 닭 한 마리가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그려져 있죠. 그리고 오른쪽의 그림에는 꽃과 나무와 글자의 획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습니다. 민화 속에는 이렇게 밝고 명랑한 모습과 색채가 두드러집니다. 그림 자체가 마치 흥겹고 즐거운 노래를 합창하는 듯한 분위기죠.” |
| ▲ <약리도> 개인소장. “보시는 그림은 3,600마리의 잉어 중에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한 마리의 잉어를 그린 것입니다. 나머지의 잉어는 거센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떠내려가 버렸죠. 끝까지 목표에 이른 이 한 마리의 잉어는 용이 됩니다. 몸의 아래쪽에 난 36장의 비늘이 거꾸로 돋으며 몸을 흔들어 용으로 변하는데, 그 비늘에 닿으면 뭐든지 부서져 버립니다. |
| ▲ '항아리와 매화'(1954), Oil on Canvas, 45.5*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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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 별 사이 어딘가에서 색점 총총히 찍고 있을까
“육시랄, 점도 많이 찍었군. 지겹지도 않았을까?” 미술평론가 고(故) 이경성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1971년 9월 신세계화랑에서 있었던 ‘김환기 근작전’ 에서였다. 김환기가 뉴욕에서 보내온 낯선 추상화들에 안 그래도 의견이 분분했다. 이를 기존 구상화의 연장선에서 보고 옹호하던 이경성으로서는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경성은 순간 발끈했지만, 그 자리에서는 참았다가 나중에 글로 복수를 한다. “사실 그 ‘육시랄 관람객’ 은 그 자신이 그 무수한 점의 하나임을 몰랐던 것이다”라고. 김광섭의 시 ‘저녁에’ 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뉴욕에서 김환기가 고국을 그리워하며 그린 그림이다. “점들은 많은 군상의 모습” 이니, 이경성의 말대로 그 ‘육시랄 관람객’ 도 그 점 중 하나였을 것이다. 40년이 지난 지금, 2월 26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본관과 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장의 관람객들은 그와 달랐다. 진지하게 보고, 열심히 설명문을 읽고, 아트 숍에서도 기꺼이 관련 상품을 구매한다. 언론에는 ‘블루칩 작가’ ‘국민 작가’ ‘한국의 피카소’라 칭하며 전시 기사가 대서특필되고 있다. 이경성이 살아있었다면 박수를 치며 좋아했을 것이다. 살아있다면, 40년 전의 그 관람객도 혹시나 다녀갔을까?
| | | ▲ 김환기 초상, 사진작가 임응식,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 이번 김환기 전시는 2010년 박수근, 2011년 장욱진에 이은 갤러리현대의 세 번째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전’이다. 출품된 70여 점 대부분은 개인소장가들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일반인은 볼 기회가 많지 않은 작품들이다. 2004년 환기미술관에서 있었던 김환기 30주년 기념 전시 이후 8년 만의 개인전으로, 30년대 중반부터 작고한 74년까지 40여 년간의 화업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준다. 접근성이 뛰어난 사간동에서의 대규모 전시는 김환기를 ‘국민 작가’로 다시 한번 각인시킨다. 앞으로 옥션의 ‘블루칩’ 작가로서의 진일보한 상승세도 점칠 수 있다. 거장에 대한 예우를 갖춘 360쪽에 달하는 두꺼운 국·영문판 도록도 발간됐다. 내년 2013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리 열린 것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할 일을 상업 화랑에서 미리 당겨서 한 셈이다. 단 도록의 글들이 기존의 글들을 재수록한 것으로 학술적인 측면에서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다.
1913년 전남 신안군 기좌도 부농의 집안에서 태어난 김환기는 박수근·이중섭·장욱진 등과 더불어 한국 근대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다. 이번 전시를 보면서 나는 궁금증이 생겼다. 박수근·이중섭·장욱진의 그림들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등 격동의 역사를 살아온 민중들의 정서를 담아낸, 뼈에 사무치는 애틋한 그림들이다. 그런데 왜 같은 시대를 살았던 김환기의 작품들에는 이런 힘들었던 시절의 흔적이 별로 없는 것일까? 박수근·이중섭·장욱진은 구상회화로 일관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왜 김환기의 작품은 추상화로 변화해 갔을까? 물론 답은 작품 속에 다 있다. 그리고 환기미술관에서 각각 2005년 발간한 김환기 에세이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와 그의 부인 김향안의 에세이집 『월하의 마음』에서도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코리아는 예술의 노다지”
김환기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한국의 자연과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이다. 잘 알려진 대로 백자 항아리를 포함한 전통문화에 대한 김환기의 사랑은 극진했고, 보는 안목도 상당했다. 이것은 단순한 호사 취미가 아니었다. 그 속에서 김환기는 우리 민족이 일찍이 도달했던 아름다움의 깊이를 보았다. “코르뷔지에 건축 또는 정원에다 우리 조선조 자기를 놓고 보면 얼마나 어울리겠소”라는 그의 말처럼 한국적인 아름다움은 자부심의 원천이자, 도달해야 할 미의 기준점이었다. “세계적이려면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그의 유명한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 | | ▲ 1 39피난열차39(1951), Oil on Canvas, 37*53㎝ ▲ 2. 39달과 매화39(1961), Oil on Board, 23*40㎝ | | ‘사방탁자’ ‘매화와 항아리’ ‘영원한 것들’ 같은 작품에는 백자 항아리, 십장생, 산월, 매화 등 전통문화의 다양한 아이콘들이 등장한다. 1956년 파리에 가기 전까지 김환기는 이런 전통적인 아이콘들을 서양화 화풍으로 옮겨 그리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후 변화를 겪게 되는데, 파리 시절에 그려진 작품 ‘산’은 동양 산수화의 구성원리를 재해석한 것이다. 더 이상 표면적인 아이콘의 나열이 아니라 작품 구성의 원리가 중요시됨으로써 그의 작품은 추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결정적인 전환은 70년대 뉴욕에서 그려진 전면점화(全面點畵)에서 이루어진다.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처럼 무수히 많은 점이 찍힌 큰 화면은 ‘거대(巨大)와 미소(微小)가 하나의 공간 속에서 숨쉬고 있는’ 우주의 풍경이다. 한국적인 미학은 이제 추상적인 상징의 원리로 내재화되었다. 전통색인 오방색에 대한 실험도 다양하게 행해진다. 특히 김환기의 푸른색을 보면서 사람들은 깊은 동해의 물색과 유현한 하늘을 떠올린다. 종이에 번지는 운연(雲煙)의 효과를 내면서 점을 찍는 방식은 김환기가 서양화의 재료를 동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점화는 김환기의 대표작으로, 그의 긴 예술적 여정의 종착역이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적인 동시에 세계적인 수준의 작품들이다.
김환기는 “코리아는 예술의 노다지”이며 “우리 민족뿐 아니라 이제 전 세계 예술은 그 주제가 우리 코리아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말을 한 것은 53년의 어수선한 시점이었으나, 빈궁한 현실은 그에게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일만이 유일한 문제였다. 그의 말대로 “내일로 행하는 정신은 태양처럼 밝고 강한 것”이며, “화가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낙천가”였다. 특히 김환기 자신이 그랬다. 전통문화라는 든든한 곳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낙천가가 될 수 있었다. 한국적인 미에 대한 추구는 김환기의 작품이 시대의 우울에서 비켜갈 수 있었던 이유이자, 동시에 추상화로 변화해 나갈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지천명 나이에 뉴욕으로
현재보다 내일이 더 중요했던 김환기는 한국 미술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30년대 말 국내 최초의 화랑인 ‘종로화랑’을 개설하고, 최초의 근대미술 유파인 ‘신사실파’를 결성했으며, 63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를 주도했다. 홍익대 학장직을 맡을 때도 그의 머릿속에는 “세계적인 대예술가”를 배출할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한 구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미술행정가 이전에 무엇보다 작가였고, 작품의 완성이 가장 중요했다. 프랑스·미국으로 이어지는 김환기의 끊임없는 해외 진출도 이런 생각과 관련이 있다. 그는 56년 마흔이 넘은 나이에 파리로, 63년 쉰의 나이에 뉴욕으로 떠났다. 63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가해 ‘회화 부문 명예상’을 수상하는데, 이를 계기로 뉴욕으로 떠난 김환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좁은 한국 화단이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 겨루어보고 싶은 야망과 자신감이 있었기에 한국에서의 안정적인 생활을 버리고 모험을 찾아 떠난 것이었다.
그가 뉴욕에서 쓴 일기들은 숨이 가쁘다. 숨돌릴 틈 없이 작업이 이어졌다. “미술은 질서와 균형이다”라는 깨달음 속에서, 임종을 맞이할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 드로잉을 포함한 3000여 점의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74년 7월 뉴욕의 병원에서 그는 눈을 감는다. 이듬해인 75년 포인덱스터 화랑에서 추모기념전이 열렸다. 그는 지금도 미국에 있다. 뉴욕 허드슨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너른 터에 그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부인 김향안은 김환기 사후 환기재단을 설립해 열정적으로 작품을 정리해 소개했다. 92년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열었다.
이상 · 김환기 두 천재의 아내, 김향안
김환기가 굳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평생의 지지자인 김향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경성은 김향안에 대해 “수필가이기도 한 김향안은 어느 쪽이냐 하면 차가운 성질의 소유자”라고 표현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김환기에게만은 최고의 아내였다. 그녀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고, 말이 통하는 친구이며, 사무적 수완을 갖춘 훌륭한 비서였고 통역관이었다. 김환기의 에세이에는 김향안에 대한 애틋한 묘사가 나온다. “아내는 먹을 것이 있든 없든 항상 명랑하고 깨끗하다. 아내는 낙천가다. 아내는 나에게 지지 않게 목공예품들의 고완품을 좋아한다… 나는 생활에 있어서나 그림에 있어서나 아내의 비판을 정직하게 듣는다.”
그 가난했던 시절, 예술만 아는 예술가의 아내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다. 그러나 김향안의 수필집 『월하의 마음』에는 그늘이 없다. 씩씩하고, 긍정적이고, 김환기 말대로 ‘낙천적’인 마음 씀씀이를 볼 수 있다. 이 책의 말미에는 김향안의 본명인 변동림이 다시 등장한다. 한때 시인 이상(李箱)의 아내였던 변동림은 반세기 만의 침묵을 깨고, 이상의 소설은 상상의 산물일 뿐 이상과 자신의 결혼생활과 이상이 쓴 소설과는 별개라고 해명한다. 이상의 소설에 등장하는 아내의 이미지가 그에게 오버랩되면서 진실이 왜곡되었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이상은 안타깝게 요절했고 젊은 과부 변동림은 세 아이가 딸린 이혼남 김환기와 다시 인연을 맺어 김향안이 되었다. 이상과 김환기, 시대의 두 거물과 깊은 인연이 있었던 작은 여인 김향안(변동림).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고 있을까?
| ▲ 3 39산39(1958), Oil on Canvas, 73*50㎝ ▲ 4 39무제23-XII-71#21839(1971), Oil on Cotton, 211*291㎝ ▲ 5 39무제03-II-72 #22039(1972), Oil on Cotton, 254*201㎝ ▲ 6 39무제39(1969), Oil on Cotton, 77*63㎝ ▲ 7 39무제04-VI-71 #20539(1971), Oil on Cotton, 235*127㎝ |
… 중앙SUNDAY 제253호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32 | 2012.01.14
32 回 에바 헬러의『색의 유혹』 · 빅토리아 판레이의『컬러 여행』, 이재만의『한국의 전통색』 |
| ▲ 홍경택 39 존레넌(2007), 145*145㎝ , 사진 작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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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옷 여인 그리다 골병...'퍼펙트 화이트’의 저주
세상 만물의 색은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 중의 축복이다. 우리 일상은 사물들이 가진 다양한 색으로 채워져 있다. 색은 경험 자체다. 진홍빛에서 시작돼 회청색과 보라색을 넘어가 마침내 검파랑으로 종결되는 일몰의 아름다움을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색을 다루는 색채학은 신생 학문이다. 디자인에서의 색 조합, 색채 테라피 같은 실용학문의 성격이 강하다. 건축, 의복, 각종 디자인, 다이어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색이 거론되기 때문에 오히려 색채학에서 순수미술이 차지하는 부분은 크지 않다. 튜브에서 짜낸 물감이 아닌 바에야 색은 순수한 것이 아니라 사물의 질감과 형태 등과 연관돼 인식된다. 예컨대 “검은 밤, 하얀 뼈, 붉은 피…”처럼 색에 대한 인식은 체험 대상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색에 대한 관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문화적으로 변화해 왔다. 색에 대한 흥미로운 책으로는 에바 헬러의 『색의 유혹』(예담, 2002, 1만7600원)과 빅토리아 판레이의 『컬러 여행』(아트북스, 2005, 1만6500원)을 들 수 있는데, 아쉽게도 이 책들은 현재 절판 상태로 도서관에서만 읽을 수 있다.
심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13가지 색을 기호도, 사회역사적 측면, 문화심리적 측면에서 다양하게 훑어보고 사전적으로 정리해 준다. 색에 대한 관념은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예컨대 노랑은 중국에서는 황제의 색으로 귀하게 여기지만, 서양에서는 시드는 풀의 색 즉 배신자의 색으로 여겨져 선호되지 않는다. 저자가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세계인이 가장 선호하는 색은 파란색이다. 삼성 등 글로벌 기업 로고의 대부분이 파란색을 채택하는 이유다.
그러나 파랑이라고 다 같은 파랑이 아니다. 가장 고귀한 파랑은 성모 마리아의 옷을 그릴 때 쓰는 울트라마린(Ultramarine)이다. 울트라마린은 원래 ‘바다 건너’라는 뜻으로, 재료가 되는 청금석은 전량 중동에서 수입했다. 16세기 당시 고귀한 광채를 내는 극상의 푸른색을 얻을 수 있는 청금석은 황금보다 비쌌다. 너무 비쌌기 때문에 울트라마린은 19세기 중엽 화학염료로 곧바로 대체된다. 파랑이 제왕의 자리를 내놓고 서민적인 분위기로 돌변해 ‘블루 컬러’라는 명칭을 만들어낸 것은 값싼 파란색 안료가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쪽이라는 식물에서 얻어내는 인디고 블루는 영국의 식민지 무역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식량을 재배해야 할 땅에 쪽을 재배할 것을 강요함으로써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는 ‘인디고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흔한 색으로 잠시 시들했던 인디고 블루가 다시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은 청바지의 대대적인 유행 덕분이다. 이 정도면 현대를 ‘인디고 블루의 시대’라 할 만하다.
『컬러 여행』의 저자 빅토리아 판레이는 과거 장인들의 물감상자에 담겨 있던 색의 원료를 찾아 긴 여행을 떠난다. 에바 헬러가 청금석의 산지로 막연히 말한 중동은 바로 탈레반 점령지역이었던 아프가니스탄 분쟁지역이었다. 판레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세계 최고의 청금석 광산을 찾아가서 우리에게 생생한 현장을 보고한다. 청금석이 채취·가공·유통되는 현장과 그 역사에 대해 두루 이야기를 들려준다. 표준화된 화학염료 사용이 일반화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낯선 이야기지만, 19세기 중반 화학염료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인류는 가장 아름다운 색, 가장 완벽한 색을 얻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좋은 염료는 해상무역의 가장 중요한 품목 중 하나였으며 국가 간 치열한 경쟁이 이어졌다. 아름다운 안료를 만드는 방법은 장인의 숨겨진 비법으로, 지금은 전승되지 않는 것이 태반이다. 청자의 아름다운 색을 내는 비법이 전승되지 않은 것처럼. 명장 스트라디바리가 바이올린에 바른 오렌지빛 니스는 아름다운 광택감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소리의 울림과도 관련 있다고 여겨지지만 그 비법은 전수되지 않아 영원한 신비로 남아 있다.
화가들의 노력도 눈물겹다. 흰색 배경 위에 흰색 옷을 입은 여인을 그린 제임스 휘슬러는 작품을 완성하고 병들어 눕는다. 그가 원했던 완벽한 흰색에는 많은 납 성분이 들어 있어 건강을 해쳤던 것이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색이 있다. ‘색채 실어증’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색을 표현하는 언어는 부족하다. 1675년 뉴턴이 프리즘으로 빛을 분석해 색의 영역을 일곱 가지로 나눔으로써 요즘 같은 색 체계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무지개는 정말 일곱 가지 색일까? 빨·주·노·초·파·남·보라는 뉴턴의 무지개색 분류는 옳은 것일까? 에스키모는 무지개를 다섯 가지 색으로 본다고 한다. 뉴턴은 ‘7’이라는 숫자에 집착했다. 일주일도 7일이고, 음계도 7가지다. 뉴턴은 빨강과 노랑 사이에 주홍을, 파랑과 보라 사이에 남색을 끼워넣어 일곱 가지 색 체계를 만들었다. 이런 분류에 대해 뉴턴 자신도 혼란스러워 했지만 세상과의 조화를 위해 뉴턴은 결국 ‘7’이라는 숫자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색 분류는 무수히 많은 색을 정리하려는 노력의 하나일 뿐이다. 동양권에서는 음양오행사상에 입각한 오방색(황·청·백·적·흑)이 기본 관념이다. 이재만의 『한국의 전통색』(일진사, 2011, 2만5000원)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오방색에 의한 정색과 간색, 잡색 등을 다양하게 사용해 왔다. 뚜렷한 사계절의 자연환경 덕분에 우리 민족은 다양한 색에 대한 감식안이 발달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전통표준색명 및 색상 제2차 시안’에 따라 그가 정리한 색은 무려 90가지에 이른다. 90가지 색의 이름만 들어도 황홀하다. 호박색, 추향색, 주홍색, 담주색, 선홍색, 연지색, 훈색, 분홍색, 진홍색, 흑홍색 등 적색 계열만도 21가지에 이른다.
또한 무채색인 흰색도 백색, 설백색, 지백색, 유백색, 소색으로 나누어 즐길 줄 알았다. 아름다운 백자를 만들 수 있는 이유였다. 여기에 나열된 색들의 미묘한 차이를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제시된 자료를 보는 수밖에 없다. 책은 한국의 자연환경과 복식, 규장 문화, 전통 공예 등 다양한 문화유산에서 찾아낸 이미지를 보여주어 색을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20세기가 지나면서 새로운 색감이 생겨났다. 자동차 등의 번쩍이는 금속, 매끄러운 플라스틱, 작열하는 인공조명, 컴퓨터 모니터 등이다. 이런 현대적인 색감의 발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는 홍경택이다. 그는 우리 시대 최고의 컬러리스트다. 홍경택을 통해 우리 미술은 1980년대 무채색 중심의 단색 회화였던 모노크롬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현대적 파스텔톤의 캔디컬러를 포함해 다채로운 중간색들을 사용한다.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탁월한 색에 대한 감식안 DNA가 그에게 유전되고 있는 것이다. 세련된 보색대비, 난색과 한색의 재기발랄한 배치로 ‘시각의 쾌락’의 한 정점에 도달한 그의 작품은 짜릿한 색의 축복이다.
… 중앙SUNDAY 제252호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32 | 2012.01.08
31 回 바우터르 반 데르 베인 · 페터르 크나프의 『반 고흐, 마지막 7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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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인정 못 받아 자살했다고? 천만의 말씀
| | | ▲ 1 오베르의 노트르담 성당, 캔버스에 유채, 94x74㎝ 사진 지식의 숲 제공 | | 미술사에 등장하는 유명 작가를 추려 ‘나는 화가다’라는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대중 평가단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1위를 차지할 사람은 단연 빈센트 반 고흐다. 어렵지 않은 내용에 강렬한 감동 코드를 담았기 때문이다. 구두 · 해바라기 · 의자 · 자기가 살던 마을 풍경·우체부 ·화방 주인·카페 여주인 등 반 고흐는 거창한 것이 아닌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진정성을 담아 그려냈다. 여기에 예술가적 광기와 고독, 충격적인 연애사건과 비극적인 자살까지 그의 일대기는 ‘불우한 천재 예술가’ 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킨다. 오죽하면 “나보다 더 고독하게 살다 간 고흐라는 사내도 있는데…”라는 유행가가 다 나왔을까.
1934년 처음 발간된 어빙 스톤의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청미래, 2007년, 1만5000원)는 반 고흐의 신화를 완성하고 대중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성공한 전기작가인 스톤은 미술작품에 대한 이해가 높았고 글 재주 역시 탁월해 ‘불우한 천재 예술가’에게 ‘미치광이’라는 수식어를 하나 더 붙이는 데 성공한다. 그럴 만한 근거가 반 고흐의 삶에 충분히 있다.
반 고흐의 아버지는 개척교회 목사였으며, 그 형제들은 모두 사업적으로 성공해 부를 쌓았다. 후에 다른 사람에게 지분을 팔았지만, 삼촌 중 한 사람은 유럽에 몇 개의 지점을 가진 구필 화랑을 운영하는 막강한 미술가문이었다.
반 고흐는 화랑 판매사원, 전도사 등 진로를 여러 번 바꾸다 스물일곱의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가족들은 더 이상 그를 믿지 않았다. 추문에 가까운 몇 번의 연애사건까지 일으킨 골칫거리였다. 오로지 동생 테오만이 그를 이해했으며, 죽는 그날까지 10여 년간 헌신적으로 돌봐준다. 테오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빈센트 반 고흐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감정 조절에 미숙하고,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을 그렸으며, 간질 질환으로 의심되는 발작을 여러 차례 일으켰다. 여러모로 상식 밖의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반면에 1890년 7월 29일 사망하는 날까지 파리 북부 오베르에서 보낸 마지막 70일의 행적을 꼼꼼히 살펴본 『반 고흐, 마지막 70일』(지식의 숲, 2011년, 2만2000원)의 저자 바우터르 반 데르 베인 · 페터르 크나프는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에 반기를 든다.
“가난과 인정받지 못해 자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심할 정도로 순진한 일” 이라고 주장한다. 테오는 재료 값을 제외한 생활비로 매달 200프랑씩 보냈다. 당시 반 고흐가 초상화를 그렸던 우체부 룰랭의 월급이 135프랑이었다고 하니, 적지 않은 후원을 받은 셈이다. 다만 그 돈을 육체적 웰빙을 위해 쓰지 않은 것이 문제다. 그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뜨거운 태양 아래 ‘그림 그리는 기관차’처럼 앞으로 내달리기만 했다. 반 고흐는 860여 점의 유화를 남겼다. 대부분 죽기 직전 4년간 그린 것들이다. 남들은 한평생 그릴 분량 이다. 정신적·육체적으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짧은 시간에 소진해 버린 것이다.
이미 유명한 화상이었던 테오는 통찰력 있는 투자가였다. 그는 인상주의 화가 피사로의 후원자였고, 고갱 · 세잔 등 파리의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거래했다. 형의 그림이 유명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생활비와 작업비를 대는 대신 그림을 가져갔으므로 “생전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했다” 라는 말도 그다지 옳은 말은 아니다. 빈센트는 언제나 자신의 모든 그림을 테오에게 팔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빈센트의 그림으로 테오의 가족들은 큰돈을 벌 수 있었다.
담당의사였던 가셰 박사 역시 상당한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꺼리던 인상주의 작품 여러 점을 이미 소장하고 있었다. 그는 반 고흐의 작품도 좋아해서, 흔쾌히 치료비를 작품으로 받았다. 생전에 이미 유명 잡지에 반 고흐를 높이 평가하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대중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림을 본 동료 화가와 미술인은 모두 높게 평가했다. 1990년 ‘가셰 박사의 초상화’ 가 8250만 달러에 팔리며 정점을 찍었던 반 고흐 열풍은 사망 후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책은 반 고흐 작품들의 사후 처리 같은 세속적인 궁금함을 충족시켜 준다. 언젠가 테오의 초상화를 그리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빈센트는 예상치 못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형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테오 역시 6개월 뒤에 죽는다. 사인은 “마비 증세를 동반한 정신질환·유전·만성질환·과로·슬픔” 이었다. 테오마저 덧없이 죽고 나서, 모든 것을 감당한 사람은 테오의 젊은 아내 요한나 봉허다. 그녀는 반 고흐의 작품을 세상에 보이고 가치를 최대한 높이는 일에 평생을 바친다. 수차례 전시회를 조직했고, 형제가 주고받은 편지를 몇 년간 꼼꼼히 정리해 출간하는 등 다양한 각도에서 유산을 관리했다. 그녀는 200여 점의 그림을 평생 간직하고 있다가 아들에게 어마어마한 유산으로 만들어 물려주었다. 형제 간의 우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요한나는 테오의 무덤을 형의 무덤이 있는 오베르로 이장해 나란히 쉬게 했다.
작품은 두 번 태어난다는 말은 언제나 진리다. 한 번은 창작자의 손에서, 다른 한 번은 그 작품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말이다. 생전의 고흐는 자신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사랑받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림이 보여주듯 반 고흐는 지상에서의 진실을 사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리려 할수록 그는 평범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갔다. 뭐라고 불리든, 그는 세상을 아파하면서도 사랑했다. 그것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에 여전히 그의 작품은 사랑을 받는다. 지금도 여전히 세계 어디선가 반 고흐 관련 전시가 기획되고, 젊은 화가들에 의해 그의 이미지가 그려지고 있다. 반 고흐에 관한 책이 수없이 많이 나왔지만, 여전히 새로운 책들이 쓰이고 있다. 반 고흐 신화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 중앙SUNDAY 제250호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31 | 2011.12.25
| Wheat Field under Clouded Sky, Auvers-sur-Oise 1890 |
| Vincent van Gogh (1853-1890), Wheatfield with Crows, 1890 / 까마귀가 나는 밀밭 |
| The Pieta(after Delacroix), Saint-Remy: May, 1890 |
르네상스 화가들은 왜 왼손잡이를 즐겨 그렸을까
『명화의 비밀』(한길아트·2003년·6만원)을 쓴 데이비드 호크니(74)는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하나다. 추상미술, 각종 미디어 아트, 설치 미술의 등장으로 현대미술에서 구상회화가 잊혀지고 있을 때 그는 묵묵히 그림을 그렸다. 단단한 소묘, 밝고 장식적인 색채, 시원하고 세련된 붓질로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회화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 이 책은 그림을 실제로 그리는 화가만이 볼 수 있는 신비한 세계를 우리에게 펼쳐 보여준다.
50여 년 전 학생 시절 그는 앵그르의 드로잉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앵그르의 드로잉들을 복사기로 확대해서 선들을 상세히 검토했다. 드로잉의 선들은 단호하고 대담하며, 빠르게 그려졌다. 수정한 흔적도 없었다. 앵그르는 미술사에서 데생이 가장 뛰어난 작가로 알려져 있다. 앵그르뿐만 아니라 많은 거장들이 디테일에 충만한 ‘완벽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 사람들은 거장들의 위대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거장이니까.
그러나 호크니는 화가였고, 같은 화가로서 ‘어떻게 이렇게 그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작업실 큰 벽에 여러 시대의 그림들을 연대기적으로 쭉 붙여놓고 비교하면서(오른쪽 사진) 거장들의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들처럼 카메라 루시다나 카메라 옵스쿠라 같은 옛 도구들을 직접 실험해 보고 관련 분야 학자들에게 도움도 받았다. 그리고 이 놀라운 그림들의 비밀은 거울-렌즈의 광학적인 이용이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광학적 도구의 사용을 중심으로 그는 서양미술사를 다시 들여다보며 흥미로운 사실들을 밝혀낸다. 그는 1430년께 플랑드르 지방에서 광학이 이용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아르놀피니의 결혼’으로 유명한 반 에이크 같은 플랑드르 지방의 작가들은 사물 하나하나를 렌즈로 세심하게 관찰해 사실주의적으로 그려냈다. 르네상스적 원근법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당시 사용된 렌즈 성능이 제한적이어서 초점을 다시 맞추느라 렌즈와 캔버스를 자꾸 이동시켰기 때문에 이 화가들의 그림에는 다시점이 존재한다.
이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이후 400여 년간 서양 미술사를 지배하는 원리인 일점 소실점에 근거한 수학적 원근법이 고안됐다. 이탈리아의 원근법과 광학적 도구의 사용이 결합되면서 미술사에는 ‘완벽한’ 그림들이 등장하게 된다. 광학의 사용은 은폐된 반면, 원근법의 사용은 신념으로, 일종의 세계관 으로 격상되며 이후 서양미술사를 지배하게 된다.
1500년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미 광학적 도구인 카메라 옵스쿠라에 대해 글을 쓴다. 그보다 후배인 라파엘이나 조르조네 같은 작가들 역시 광학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16세기 말 렌즈의 성능이 대대적으로 개선 되면서 광학적 도구의 사용은 그림에 여러 흔적을 남겼다. 그림 속에서 왼손으로 와인을 마시거나 무언가를 들고 있는 왼손잡이 인물들이 부쩍 많아진 것은 이 무렵이다. 거울 같은 광학적 도구를 사용해서 그리면 상이 반전되기 때문에 오른손잡이 모델이 왼손잡이처럼 그려지게 된다. 이런 장치들을 이용해 화가들은 이전 시기에는 볼 수 없었던 복잡한 양탄자, 옷감의 화려한 무늬, 갑옷의 번쩍거리는 질감들을 완벽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17세기 바로크 회화의 선구자 카라바조는 복잡한 구성의 그림을 그릴 때조차도 밑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드로잉도 전혀 남기지 않았다. 대신 반드시 모델들을 앞에 두고, 광학적인 투영법을 사용해 모델들의 윤곽을 체크하며 그려나갔다. 오랜 기간 동안 회화의 목표는 세상의 완벽한 재현이었다.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회화에는 중대한 변화가 초래된다. 일점 소실점을 가진 원근법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은 사진이었다. 이제 화가들은 광학적 도구를 버리고 자신의 눈에 의지해서 사물을 바라보게 되었다. 마네, 인상주의, 세잔, 입체주의가 대표적인 예다.
특히 세잔의 그림은 시각 원리에 근본적인 혁명을 가져왔다. 그는 눈의 진실에 따라 그림을 그렸고, 그 결과 원근법은 결정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한다. 세잔은 인간은 언제나 사물을 복수의 시점에서, 때로는 모순적인 위치에서 바라본다는 것을 그림으로 증명했다. 인간은 두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점 소실점에 근거한 원근법이 설정한 것은 한 눈을 가진 인간이었다 (우리는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습관적으로 한 눈을 감는다).
세잔과 더불어 서양미술사는 원근법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르네상스 이후로 원근법은 ‘지금, 여기’에 현존하고 있는 인간의 시각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방법이라고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에르윈 파놉스키가 지적한 대로 그것은 현실을 재현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동양에서는 이런 원근법 없이도 멋진 회화 작품들을 얼마든지 그려왔다. 원근법을 절대시하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서구의 특정 관념을 절대시하는, 폭력적인 일이었다고 호크니는 지적한다.
호크니가 이 이론을 처음 발표했을 때 많은 미술사가들은 호크니가 대가들의 권위를 훼손한 듯이 경악했다. 그러나 호크니는 분명히 말한다. 광학적인 도구는 사물의 위치를 정확하게 잡아주는 장치일 뿐 그림을 그린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앵그르나 되니까 그런 드로잉을 그릴 수 있었다고.
사소한 궁금증에서 시작된 연구가 미술사를 지배하던 절대적 관념을 해체한 셈이다. 관념의 자유는 시각의 자유와 연관되기 마련이다. 그는 컴퓨터와 디지털 도구가 지배하는 “흥미로운 시대가 곧 올 것이다”라고 말한다. 더불어 이 시대에도 “정적인 그림의 힘은 영원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요즘 그는 아이폰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데 푹 빠져 있다고 한다. 시대의 이름이 무엇이건 데이비드 호크니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화가’다.
… 중앙SUNDAY 제248호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30 | 2011.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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