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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덴사람들에게 전한 복음(행 17:16-21)
사도 바울은 드디어 아덴이라고 하는 도시에 도착합니다. 아덴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대단히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구약 율법에 능통한 바리새인이었고, 그와 동시에 어느 철학자 못지않게 헬라 철학을 많이 공부한 철학자였습니다. 그런 사람이었으므로 철학의 도시였던 아덴을 흠모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종교'하면 예루살렘이요, '정치'하면 로마요, '철학'하면 아덴이었습니다. 아덴은 곧 철학의 본산지입니다.
이곳은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철학을 연구하고 논의했던 곳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기라성들이 다 아덴사람들입니다. 저들은 다 아덴에서 나고, 아덴에서 살고 아덴에서 죽었습니다. 철학뿐만 아니라 또한 대단한 예술가, 미술가, 음악가들이 있는가 하면 마라톤이라는 것도 아덴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고 보면 고대 문명의 대단히 중요한 곳이 바로 이곳 아덴입니다. 일반 역사에서는 아테네라고 지칭합니다.
헬라 철학을 공부한 사도 바울이 바로 이 아덴에 이르렀을 때 가슴이 부풀었습니다. 감회가 남달랐을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먼저 도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웅장한 건물들이나 건축물의 장엄함에 압도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곳곳마다세워져 있는 우상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도시 전체가 우상에게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1.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한 바울(16-17)
16절,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바울은 지금 베뢰아에 두고 온 디모데와 실라가 빨리 오기를 기다리면서 둘러 보았던 아덴시내는 수많은 신전들과 조각품들로 가득차 그야말로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의 눈에는 그 건축물이나 조각들이 예술품이 아니라 무익하고 사악한 우상들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격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격분하다”는 말은 마음 속에 아주 고통이 있고 분통이 터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심한 자극을 받아서 분노했다는 뜻입니다. 화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덴을 보면서 의분을 품은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셔서 노를 발하시며 채칙을 들어 휘둘렀던 것같이 불의와 타락에 대한 의분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불의를 보고 분을 품습니까? 악한 것을 보고 내일처럼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까?
오늘날처럼 개인주의가 팽배한 세계에서는 남의 일에 대해 고통을 느끼고 주님의 심정으로 불의에 대해 가슴 아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나만 잘된다고 해서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세계는 결코 혼자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힘쓰지 않으면 결코 평안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법을 대적하는 동성애법이나 성평등조례라든지 하는 것은 인륜을 저해하는 법인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법인 것입니다. 이러한 법의 제정을 보고 방관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처럼 분노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상숭배하고 이단에 빠져서 헤메는 이웃을 보고 그저 지나치고 그들과 관계하지 않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힘써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엇을 했습니까? 17절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바울은 날마다 그들을 찾아가서 변론을 벌입니다. 여기서 변론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강론했다는 말입니다. 또한 바울사도는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장터는 그리스문화의 중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시의 한 가운데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이 시장은 장사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철학적 담론을 하는 도시의 중심지였었습니다.
2. 철학자들에게 전도한 바울(18)
18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아덴에 있는 철학자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하게 됩니다. 이 두 학파는 그 당시 헬라 철학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이 인생의 주된 목표라고 주장했습니다. 신이 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일들이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스토아학파는 인생의 목표를 이성에다 두고 엄격한 금욕주의를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이란 존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범신론 사상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만나서 복음을 전했으니 대화가 될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그들사이에 쟁론이 일어났습니다. 전도하기가 가장 어려운 대상이 바로 철학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믿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 대해서 ‘말쟁이’로 여겼습니다. 그저 또 하나의 어떤 신을 전하는 한 사람인 줄로 여겼습니다. 마치 약장수가 떠돌아 다니면서 말을 잘해서 약을 팔아먹듯이 그런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가 아덴에 있는 많은 신들 외에 또다른 어떤 신인 줄로 여겼습니다. 그 철학자들 앞에서 사도 바울이나 예수님이 아주 기분 나빴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약파는 말쟁이로 여기고 우상과 같은 한 신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기분 나빠 하지 않고 그들에게 분명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에 대해서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은 헬라 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그들과 쟁론하면서 철학에 젖어 있어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당시에 철학은 저들의 사고방식이요, 저들의 생각이요 문화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문화가 발달하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복음을 쉽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인간중심적인 사고와 자기 생각으로 가득차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이런 철학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네 젊은이나 지성인가운데 에피쿠로스식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떤 사상입니까?
첫 번째는 현실주의입니다. 미래나 내세는 상관할 것 없다, 현재가 중요하다.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는 게 중요하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말조차 말하기를 싫어합니다. 기분나쁘게 죽음 얘기는 하지 말라고 합니다. 죽은 다음은 생각하고 싶지않다는 것입니다. 그저 오늘 내가 살아있다는 것과 오늘 내게 주어진 현실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다가올 영원한 미래에 대해 생각을 거부하는 것은 진정한 무지입니다. 죄악으로 어두워진 심령의 어리석은 몸부림에[ 불과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향락주의입니다. 행복의 근원은 육체적 향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없는 행복, 고통없는 쾌락만 인간의 최종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최대한도로 쾌락을 즐기는 것이 인생을 바로 사는 길이라고 합니다. 쾌락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가장 큰 죄악입니다. 가장 큰 교만입니다. 자기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주의입니다. 이런게 헬라철학입니다. 또 유물주의입니다. 쾌락을 물질에서 찾고, 육체에서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유물론적 쾌락주의라고 평가를 합니다.
또하나는 무신론입니다. 신을 믿기는 합니다. 원자론적 우주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에 대한 신앙은 전적으로 부인하지만 신이 있기는 있다고 하자, 그래도 신은 인간에게서 멀리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세계에 대해서는 간섭이 없다, 그러니 있다고 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주장을 합니다. 철저하게 현실적 육체적 물질적 쾌락주의입니다.
예전에 우리 동네어른들이 자주 불렀던 노래 중에 하나가 이런 노래입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 일견 맞는 애기인 것 같습니다. 노인들 여기저기 구경한다면서 지팡이 짚고 어정어정 다니다 보니까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관광도 여행도 좀 젊었을 때 다녀야지 늘어서 힘이 없어지면 할 수 없다는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노래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 에피쿠로스학파와 상통하는 얘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과 변론을 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쉽지않은 변론이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가득찬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변론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정말 답답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전에 자기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나도 예전에는 저런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세례를 받고 보니 참으로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인간의 무지였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바울은 안타까웟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이렇게 철학에 사로잡혀 있고 자기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을 전합니다. 영생을 전합니다. 쉽게 먹혀들겠습니까? 변론을 벌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계속 변론을 벌이는 동안 저들은 사도 바울을 보고 '말쟁이'라고 조롱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가 새롭고 이상한 신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가 하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은 그 조롱을 견디며 굳게 서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아무리 거절하고 대적해도 저들가운데 나처럼 구원받을 영혼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꺼이 모욕을 참고 복음을 전함으로써 우리에게 얼마나 생생한 본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 철학자들을 당황케 한 것은 역사적인 예수와 그분의 부활이었습니다. 바울은 내가 만난 예수,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고 무덤을 문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였습니다.
뿐 만 아닙니다. 우리의 생이 끝이 아니라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한번 죽은 것은 정한 것이지만 그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그 심판자가 바로 우리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일생의 끝은 하나님앞에 마지막 결산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깨어서 준비하여 하나님앞에 서는 날 고개를 들고 주님을 기쁘시게 맞이할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고 많은 재산을 쌓았다 할지라도 예수없는 인생이 헛되고 예수없는 지식이 무익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을 전해서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또한 바울사도는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부활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확실한 복음입니다.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도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습니다.
핍박자요 폭행자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셔서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길은 오직 미련한 것같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의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가득한 아덴이었지만 저들에게 이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머뭇거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오늘 전할 복음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의 복음입니다. 이땅에 삶은 반드시 끝이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인생도 저 가을 낙엽처럼 언젠가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후에 영원한 삶이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의 부활로 일어날 것입니다. 그 기준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는 거하는 자가 생명의 부활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그 어떤 지식이 충만하고 물질이 충만하다 할지라도 결코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 복음을 증거하는 확신있게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전도에 대한 철학자들의 반응(19-21)
19-20절에서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몸의 부활을 전파하니까 헬라 철학자들이 바울을 붙잡아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갔습니다.
아레오바고는 법정을 뜻합니다. 도덕적인 문제나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판결을 내리는 곳입니다. 지금은 그 아레오바고가 빈터만 남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강한 확신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몸의 부활을 증거하는 모습을 보고 철학자들이 좀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도대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무슨 뜻인지 깨달을 수는 없지만 어디 한 번 자세히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회당이나 시장터에 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 공식적인 기관인 아레오바고에 가서 들어보고 판결을 내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전하리라고 하는 것은 감히 생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는 어떤 장소든지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곳이 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려는 사람에게는 어떤 곳이든지 전도할 수 있는 곳이 되게 하십니다. 바울이 매 맞고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복음을 전하려고 하니까 그곳이 바로 복음 전하는 곳이 되게 해 주셨고 간수장의 가정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아덴도 역시 복음을 전파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곳이었지만 그래도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하니까 아덴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아레오바고에 세워져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처한 환경이 어디든 그곳은 가정이든 직장이든. 사업장이든 하나님이 여러분을 파송하신 곳입니다. 그곳이 선교지입니다. 그곳에서 구원할 영혼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내가 만난 예수를 증거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서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고치고 생명을 세우는 생명사역에 쓰임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1절에서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고 말씀합니다. 아덴은 그 당시 세계 제일의 문화도시로서 철학, 문학, 예술로 유명했기 때문에 세계 각국으로부터 돈 있는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나그네된 외국인들'이란 바로 그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아덴에서 주로 하는 일은 아레오바고에 모여서 날마다 새로운 철학이야기를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의 내용은 처음으로 듣는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들으려고 아레오바고로 모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는 그들에게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듣지 않고 철학적인 개념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베뢰아 사람들은 복음을 들을 때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랬을 때 많은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모하는 마음으로 듣는 자에게 은혜가 되고 변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우상으로 가득했던 아덴과 오늘 우리가 처한 환경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우리 사회에도 우상이 얼마나 많습니다. 자기가 우상입니다. 돈이 우상입니다. 이념이 우상입니다. 권력이 우상입니다. 명예가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서낭당에다 제단을 차려 놓고 숭배하는 우상에서부터 지식이라는 우상, 쾌락이라는 우상, 재물이라는 우상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우상이 우리 사회 속에 퍼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득한 우상을 보고 의분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덴은 철학의 본산지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우상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니까 지성과 우상이 공존하는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지식이 풍부하면 하나님을 알고 쉽게 믿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지성의 바벨탑이 높아져서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판단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가 진리인 줄로 착각해서 우상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누가 만들어 냈습니까? 하나님없는 저 지성인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한 아덴을 보았던 바울은 분노했습니다.
도대체 인간이 철학이 발달하고 예술이 발달하면 하나님을 더 사모하고 하나님을 알고 인정할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오히려 우상으로 가득한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성과 신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신앙문제에 관한 한 그건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무엇을 전했습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가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시다는 부활의 복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 복음을 맡겨주셨습니다. 이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여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고치고 생명을 살리는 생명사역에 여러분 모두가 쓰임받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