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축구한준현 스포티비뉴스 축구팀장.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현지 특파원으로 유럽 축구 현장 취재.
[한준의 티키티카] “(어떤 선수를 기용하느냐는) 믿음과 결정에 대한 문제다.”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토트넘홋스퍼 감독은 유벤투스와 경기를 하루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에릭 라멜라의 출전 가능성을 어느 정도 암시했다. 포체티노 감독은 “우리는 조금 더 자유롭게 플레이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조직적이고, 기술적으로 뛰어난 ‘수비의 본산’ 이탈리아의 유벤투스를 상대로, 공격진에 창조성이 필요하다는 게 포체티노 감독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포체티노 감독은 유벤투스전 선발 명단에 기동성이 강점인 손흥민 대신 기술적인 라멜라를 선택했다. 더불어 “라멜라는 이곳에서 유벤투스를 상대해본 경험이 있고, 그 경험이 팀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근거를 댔다.
라멜라는 AS로마에서 검증을 마친 뒤 큰 기대 속에 토트넘에 입단했다. 특히 토트넘 입단 직전인2012-13시즌에는 세리에A 33경기에서 15골을 넣었다. 득점력을 검증 받았다. 지금은 차이가 벌어졌지만, 손흥민이 토트넘에 입단한 2015-16시즌에는 토트넘에서 전체 44경기를 뛰며 11골을 넣어 주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라멜라는 2016년 10월 말 엉덩이 부상을 입었고, 2017년 11월 말에 이르러 회복했다. 1년 이상의재활 기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 손흥민이 토트넘의 중심 선수로 성장했다. 포체티노 감독의 입장에서 손흥민의 성장세에 대한 기쁨의 반대편에, 불의의 부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 라멜라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다.
■ 포체티노의 선택, 손흥민 대신 라멜라 투입한 이유
포체티노 감독은 라멜라가 가진 재능과 잠재력을 믿고, 이를 다시 끌어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라멜라가 토트넘 공격진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축구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 경기를 즐겨야 하기도 한다.” 포체티노 감독이 말한 것처럼, 어떤 선수를 기용할 것인가는 믿음의 문제이고 결정의 문제다. 매번 그 결정이 적중할 수는 없다.
포체티노 감독은 유벤투스전에 라멜라를 향한 자신의 믿음을 택했다. 유벤투스와 2017-18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 경기가, 기나긴 부상과 부진의 터널에서 라멜라를 깨울 수 있는 모멘텀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포체티노 감독은 더 현실적인 선택을 내릴 수도 있었다. 손흥민은 아스널과 주말 경기에 후반 25분 일찌감치 교체되어 체력을 안배한 상황이었다. 늦어도 후반전 시작과 함께 투입될 것으로 예상한 손흥민이 후반 38분에 와서야 첫 번째 교체 카드로 선택된 것은 2-2로 따라 붙고도 꽤 시간이 지난 뒤의 결정이었다.
토트넘이 오는 주말 로치데일과 FA컵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손흥민을 아낄 필요가 없었다. 라멜라를 로치데일과 경기에 선발로 넣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포체티노 감독은 유벤투스와 이탈리아에서 치르는 경기가 라멜라의 감각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토트넘이 손흥민 대신 라멜라를 선발로 낸 것을 두고 BT 스포츠의 패널로 활동하는 리오 퍼디난드는 “손흥민은 토트넘에서 최근 가장 효과적인 활약을 하고 있는 두 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 유벤투스와 경기에서 토트넘은 손흥민을 그리워 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술적으로 올바른 선택이 아니라는 의견을 낸 것이다. 그러면서 “라멜라에겐 도약할 수 있는 완벽한 기회”라고 했다. 큰 경기에 선발로 나서 자신을 증명하고, 경기 감각을 끌어올릴 수 있는 장이 열린 것이기 때문이다. 퍼디난드가 정확하게 해설한 것이다.
라멜라는 뉴포트와 경기에서 득점하며 기대를 높였다.
포체티노 감독은 엉덩이 부상에서 돌아온 라멜라를 지난 해 11월부터 줄곧 교체 선수로 15분 내지 20분 가량 뛰게 했다. 11월 28일 레스터시티와 2017-18 프리미어리그 14라운드 경기에 후반 32분 투입되어 도움 한 개를 기록한 경기를 포함해, 유벤투스와 경기 전까지 16경기 동안, 라멜라가 선발 출전한 것은 세 차례뿐이었다.
지난 7일 뉴포트와 FA컵 재경기에서 선발로 뛰며 득점포를 가동한 것은 포체티노 감독에게 긍정적인 신호로 여겨졌다. 이 경기 후 인터뷰에서 포체티노 감독은 “그의 본래 수준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며 기대를 보냈다.
“이제 우리는 24명의 선수가 있다. 모든 선수들에게 선발 11명에 들어갈 기회가 있다. 24명의 선수가 매 경기 선발 명단에 들어가기 위해 싸울 것이다.”
포체티노 감독은 그동안 손흥민, 케인, 알리, 에릭센 등 네 명의 선수가 고정적으로 뛸 수 밖에 없는 빡빡한 상황에 대한 갈증을 갖고 있다. 라멜라의 회복과 루카스 모라의 영입으로 숨통이 트였다. 포체티노 감독은 건강한 경쟁이 팀을 체력적으로나 경쟁적으로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했을 수 있다.
유벤투스와 큰 경기에 라멜라를 선발 투입하고, 루카스 모라를 교체로 투입해 데뷔전을 치르게 한 것은 기회의 측면에서 상징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 비중이 낮은 경기에 로테이션 자원으로 허비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다.
포체티노 감독은 루카스 모라와 라멜라가 토트넘 선수단의 건강한 경쟁을 유도하길 바랐다.
■ 라멜라의 가치와 반대급부, 유벤투스전 불안했던 이유
라멜라는 지난 주말 아스널과 경기에 손흥민 대신 교체로 들어갔는데, 투입과 함께 득점에 근접한 장면을 연이어 만들었다. 손흥민이 최근 팀적인 측면에서 좋은 경기를 했지만 득점포를 가동하지 못한 것도 라멜라에게 기회를 줘보자는 결심을 굳힌 또 하나의 요인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손흥민이 나가고 라멜라가 들어오자 아스널 라이트백 엑토르 벨레린의 전진을 제어하지 못한 반대급부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제 막 회복의 기미를 보인 라멜라를, 그보다 오랜 기간 꾸준히 좋은 경기를 하던 손흥민 대신 큰 경기에 선발로 낸 선택은 무모했다. 유벤투스는 부상 선수가 많은 상황이었다. 토트넘이 기어코 0-2로 쫓기던 경기를 2-2로 쫓아간 데서 알 수 있듯, 최근 큰 경기에서 보인 토트넘의 전력은 토리노에서 승리를 챙길 수 있을 만큼 좋았다.
맨유, 리버풀, 아스널을 상대했을 때와 유벤투스전의 차이는 두 명이다. 공격 라인에 손흥민 대신 에릭 라멜라를 투입했고, 라이트백으로 키어런 트리피어 대신 세르주 오리에를 투입했다. 빠듯한 일정 속에 로테이션을 가동할 수 있지만, 이 두 선수가 공수 양면에 걸쳐 전반적으로 부진한 경기를 했다. 오리에는 전반 막판 더글라스 코스타의 돌파를 파울로 저지하며 또 한 번의 페널티킥 기회를 헌납했다. 이과인의 슈팅이 크로스바를 때리고 무산되지 않았다면, 유벤투스 원정의 결과는 패배가 됐을 수 있다.
잘 돌아가고 있는 팀에 변화를 줘선 안 된다 게 축구계의 불문율이다. 잘 하고 있는 팀의 라인업을교체하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포체티노 감독은 팀에 건강한 경쟁을 유발하기 위해 도박을 걸었다. 결과적으로 2-2 무승부를 거뒀기 때문에 나쁜 결과는 아니었지만, 근래 치른 경기 중 가장 불안정한 경기력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퍼디난드가 최근 토트넘에서 가장 효과적인 두 선수로 꼽힌 케인과 손흥민(오른쪽)
■ 결정권도 책임도 감독의 몫, 판단은 2차전 결과로
포체티노 감독의 선택에 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벤투스와 경기 내용은 합격점을 주기 어려웠다. 경기 시작과 함께 9분 만에 두 골을 내준 책임이 온전히 라멜라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라멜라의 중앙 침투 성향 움직임이 토트넘의 전방 지역 측면 수비 밀도를 떨어트렸다. 전반 9분 페널티킥 실점으로 이어진 전반 7분께 유벤투스의 빌드업 과정에 라멜라가 중앙으로 치고 들어가며 남긴 공간이 위기의 빌미가 됐다.
손흥민 대신 라멜라가 포함된 선발 명단이 발표되고 의아했던 것은 한국 팬들 만이 아니다. 영국신문 메트로는 “손흥민의 결장은 토트넘 팬들에게 충격으로 여겨졌다. 한국인 공격수는 북런던 클럽에서 인상적인 경기력을 펼치고 있었다. 스퍼스에서 34경기에 나서 11골을 넣고 있는 손흥민은 해리 케인 다음으로 팀내 득점이 많은 선수다. (Son’s omission, in particular, shocked Tottenham fans considering the South Korean’s impressive form for the north London club this term. The forward has scored 11 goals in 34 appearances for Spurs and only Harry Kane has scored more goals for the club.)”라고 썼다.
라멜라의 플레이는 후반전에 개선됐지만, 손흥민이 그동안 보여온 영향력과 비교하면 부족했다. 뒤늦게 그라운드를 밟고, 제한된 시간 속에 자신이 가진 것을 보여주기 어려웠던 손흥민의 표정은 어두웠다. 경기를 마친 뒤 토리노를 찾은 스포츠조선 등 한국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밤 늦게 기다려준 한국 팬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크다”고 했다.
이 결정이 손흥민과 포체티노 감독의 관계에 파국을 야기하지는 않겠지만, 라멜라의 기를 살렸을지언정, 손흥민에겐 실망감을 줬을 것이다. 모든 결정에는 반대급부가 있다. 기회는 논리적이고, 결정은 감독의 몫이다. 책임도 감독에게 따른다. 홈에서 치를 유벤투스와 2차전에서 포체티노 감독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 그리고 어떤 결과를 받아 들일지가 토리노에서의 선택이 낳은 파열음을 장기화할지, 일단락할지 결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