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영화라는, 나날이 영토를 확장해가는 거대한 왕국에 드니 빌뇌브호가 날아왔다. 1965년 프랭크 허버트의 소설 〈듄〉이 발표된 때부터 치자면, 무려 55년 동안이나 기다려왔던 비행선이다. 1974년,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감독은 초현실주의 미술가 살바도르 달리, 〈시민 케인〉의 감독이자 배우인 오손 웰스, 당대 최고의 배우인 글로리아 스완슨, 데이비드 캐러딘 등을 캐스팅하고 믹 재거,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으로 영화 〈듄〉을 만들려고 했다. 조지 루카스 감독의 영화 〈스타워즈〉가 나오기 3년 전이다.
만약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면 영화사를 바꾼 것은 〈스타워즈〉가 아니라 〈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1984년 컬트 무비의 대가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다시 이 프로젝트에 도전했지만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참패했다. 크랭크인조차 하지 못한 무수한 제작 시도들까지 치면 영화 〈듄〉을 둘러싼 역사는 인간이 우주여행을 하겠다고 덤벼온 역사만큼이나 길고 무모한 도전이었다. 이번 우주선은 무사 착륙하였는가? 드니 빌뇌브호에서 날아온 대답은 “다음 비행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중세에서 21세기로
귀족들이 각기 자신의 행성들을 영지로 살아가는 우주. 은하를 지배하는 세력은 황제 가문과 귀족평의회, 길드조합이다. 주인공 폴은 아트레이드 가문을 대표하는 레토 공작의 아들이다. 아트레이드는 사막 행성인 아라키스에 가서 스파이스라는 물질을 채굴하는 책임을 떠안게 된다. 기사들의 운명이 그렇듯 폴도 레토 공작도 함정인 줄 알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운명으로 달려들어 간다.
〈듄〉의 가장 독특한 점은 첨단 기술이 없는 SF, 중세사회를 그대로 재현한 우주를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기계파괴, 러다이트 운동을 벌였던 노동자들처럼 〈듄〉의 인물들은 컴퓨터를 부수고 인간이 직접 컴퓨터 노릇을 하고, 더 중요한 통찰은 교황청을 닮은 신비주의 집단 베네 게세리트가 해낸다. 〈듄〉이 영화적 정체성을 갖기가 그토록 어려웠던 이유가 실은 이 중세적 원형을 공상과학 영화의 틀에 부었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형상이 튀어나왔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드니 빌뇌브 감독은 잠자리 날개를 단 구식 헬리콥터들을 가지고 장대한 21세기형 스펙터클을 선보였을 뿐만 아니라 인종과 자원갈등, 생태라는 21세기의 주제를 쏘아 올렸다. 영화는 고대인들이 동굴에 그렸던 벽화를 모티브로 사막을 지키는 모래벌레벽화를 넣었다. 이로써 〈듄〉은 아마존을 모티브로 신비로운 과학 영화를 만들었던 〈아바타〉와 같은 계열에 서려고 한다.
사막에 갇힌 사람들
“처음이란 균형을 맞추는 데 가장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하는 시간이다.” 소설 〈듄〉은 이렇게 시작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방대한 우주 서사시가 될 첫 번째 〈듄〉을 만들면서 허버트의 이 말을 여러 번 되새겼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그러니까 〈듄〉의 모래언덕은 아랍전쟁을 예견한 원작자 허버트와 인간의 숙명적 비극을 말해왔던 감독 빌뇌브의 세계가 균형을 이루는 곳이다.
착취당하면서도 모래 언덕 사이에 숨어 결국 사막을 지배하는 프레멘 부족은 현실의 아랍인들에 대한 묘사라고 해야 한다. 행성 간 전쟁의 원인이 되는 스파이스라는 물질은 석유 전쟁에 대한 명백한 우화다. 베두인족의 문화에 매료당했던 허버트는 소설에 베두인족의 언어를 넣기도 했다. 그러나 9.11 테러부터 아프가니스탄 사태까지를 지켜본 21세기의 관객은 이미 허버트의 상상을 넘어서는 경험을 했다. 군용 비행기들이 사막 위를 날고 반란군을 수색하는 장면은 마치 미군의 이라크 작전 수행을 보는 듯하다. 먼 곳으로 와서 싸워야 하는 아트레이드 군인들은 파병됐던 군인들이 그랬듯 피로하고 불안하다. 아트레이드 가문은 부족들과 공존하려고 했으나 부족들의 대표는 “당신들이 관심있는 것은 우리의 자원뿐이지 않느냐”고 거리를 둔다.
결국 무기를 빼앗기고 사막 속으로 스며들기 전에는, 부족의 일원이 되기 전에는, ‘좋은 정복자’라는 말은 듣기 좋은 헛소리에불과하다. 9.11 이전이었다면 〈듄〉은 전쟁이 없는 계몽과 화해의 영화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듄〉이 이제서야 만들어졌기 때문에 허버트의 메시지를 완성할 수 있었다는 아이러니다.
레바논 내전을 배경으로 한 〈그을린 사랑〉(2010),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에서 만들어진 〈시카리오〉(2016) 등에서 드니 빌뇌브감독은 정치적 폭력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그려왔다. 감독은 늘 이 암울한 드라마에 어떤 출구도 주지 않으려는 태도를 지켜왔다. 인간이 자신의 불행을 안다면 과연 거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을린 사랑〉의 어머니는 왜 자식에게 네가 오이디푸스의 굴레에 갇혔음을 알렸을까. 〈컨택트〉의 주인공은 고통스러운 운명을 반복하기를 선택했을까. 〈시카리오〉의 형사는 왜 총을 들었을까. 〈듄〉에서 아트레이드 군인들은 IS가 포로들을 처형하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희망도 기대도 없이 죽어가고 폴은 그래도 사막에 남기를 선택한다. 〈듄〉에서 모래바람에 시달리며 타들어가는 사막을 건너는 사람들이 너무나 아름다운 이유는 이 이야기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서사시처럼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스 짐머만의 음악을 배경으로 고대 영웅들처럼 자신의 운명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걸어가는 모습은 빌뇌브만이 만들 수 있는 드라마다.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무슬림이든 기독교이든 메시아는 광야에서 온다. 소설 〈듄〉이 그려낸 메시아는 사막에서 왔지만 유럽 귀족 같은 혈통을 지닌 백인 남성이다. 백인 남성 메시아주의에 대한 한계를 의식했음 인지 영화는 폴을 지도자로 키워내는 모계적 혈통을 강조한다. 폴을 구하는 카인즈 박사라는 인물은 소설에선 남성이었지만 영화에선 여성으로 설정됐다. 그래서 억눌린 사막의 부족들을 다른 나라의 백인 남성이 와서 구원한다는 식민주의적 관점은 극복됐는가. 이 가상의 세계 이야기를 통해 듄은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듄〉의 모래언덕이 더없이 아름답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질문과 비판도 여전하다. 〈듄〉의 세계는 이제 막 시작됐다. 1편이 균형의 시간이라면 앞으로는 드니 빌뇌브의 시간이 될 것이라는 추측이 좀 더 우세하다.
글 남은주 〈한겨레〉 자유기고가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