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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62편 12절-63편 3절.
62편 12절: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63편. 다윗의 시. 유다광야에 있을 때에.
1절-3절: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62편 12절: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인자’란 아가페 사랑을 말하는 건데, 이 아가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인고로 편견이 없다. 누구는 더 사랑하고 누구는 덜 사랑하고, 누구는 더 미워하고 누구는 덜 미워하고, 밉게 생겼으면 더 때리고 예쁘게 생겼으면 덜 때리고 이런 감정이 아니다. 다만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유무식을 막론하고 우리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얼마나 닮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즉 질적 본질적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닮은 것만큼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받게 되는 거다.
이 세상에 영원히 가는 참 사랑은 아가페 사랑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우리에게 이 사랑을 나타냈으니 아가페 사랑의 그 분을 인격적으로 믿고, 교훈적으로 믿으면서 성도들끼리도 이 사랑을 맺어야 한다.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 친구끼리 이 아가페 사랑으로 인격적 결합이 된다면 여기에 뭐가 더 필요하겠느냐? 그럼에도 아직까지 뭔가가 부족하다고 생각이 된다면 여기에는 뭔가 벌어져 있는 거고, 벌어져 있는 만큼 의사소통이 덜 되는 거고, 이럴수록 대립이 되는 거고, 이럴수록 고통이 되는 거다.
일반적인 고깃덩어리 사랑은 사람에 따라, 물질에 따라, 시간에 따라 항상 변질 변동이 된다. 그러니 늘 의사충돌이고 그 고통이 얼마나 많겠느냐? 하나가 되어서 항상 기쁨과 행복과 평안을 주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밖에 없다. 이 아가페 사랑은 하나같이 진리지식을 가져야 된다. 이러려면 내가 아가페 사랑을 많이 가지고 이 아가페 사랑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성을 가져야 한다.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것이 주의 사랑이다. 행한 대로 이뤄지고, 행한 대로 갚아지고, 행한 대로 받아지는 것이 주의 사랑이다. 악을 행한 자에게는 심판으로, 선을 행한 자에게는 상급으로 갚으시는 게 주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입지 않은 자는 악한 자요 하나님의 성품을 입은 자는 선한 자다. 만들어졌으면 만들어진 대로, 안 만들어졌으면 안 만들어진 대로 갚아주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사랑이다. 만일 하나님의 성품을 입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어서 영광을 입힌다면 하나님은 악한 자가 되는 거다. 악한 세상은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일이 없으시다.
타락되고 악한 유혹과 미혹이 많은 세상이요 사단 마귀의 활동이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원망치 않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면서 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결합하여 진리의 말씀을 강하게 붙잡고 세상을 이기고 견딘 자에게는 칭찬과 상급으로 갚으시는 것이 마땅하고, 이런 사람이 의로운 참 사람으로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이런 선하고 의로운 자를 높이 선하게 대우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63편. 다윗의 시. 유다광야에 있을 때에.
다윗은 사울 왕이 자신을 죽이려 할 때도 광야로 나갔고, 아들 압살롬의 반란에 의해 피난을 갈 때도 광야로 나갔다. 광야는 육신의 눈으로 보면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 광야는 물도 없고, 뜨거운 햇빛이 내리 쬐이고, 목이 갈하고, 배가 고프고, 기진맥진해서 탈진으로 쓰러지기 쉬운 곳이다. 광야에서 쓰러지면 짐승들이 ‘우’ 몰려와서 뜯어먹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왜 광야를 만들어 놓았을까? 그 이유를 성경을 통해 보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영능의 실력대로 누리게 되는 신령천국의 누림을 전제로 하고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게 해 주려 하심이다. 그래서 ‘광야’는 교회, 즉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광야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첫째로 애굽사람들은 광야로 따라오지 못하는 거다. 애굽사람들은 절대로 광야로 따라오지 못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애굽사람은 자신들이 어디를 떠나면 죽는 것으로 알고 있느냐? 세상이라고 하는 애굽을 떠나면 죽는 것으로 안다. 이걸 신앙적으로 보면 성도가 세상소원 목적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만 붙잡고 사는 게 광야생활인데, 세상 속화된 기독자들은 자기가 물질적 소원 목적을 떠나면, 그 소원을 품지 않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세상에서 도태되고 죽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애굽의 정신을 가진 자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영적 이스라엘의 정신 사상을 가지지 못하는 거다. 따라오지 못하는 거다. 그러나 영적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광야로 산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 정신이 광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은 애굽사상을 가졌기 때문인데, 이렇게 되면 절대로 영적 이스라엘을 따라오지 못한다. 그러면 마음은 애굽에 있으면서 몸만 따라온다면 현실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느냐? 하나님께 대한 원말불평, 하나님의 종에 대한 원망불평, 현실에 대한 원망불평이 일어난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광야에서는 사울 왕이 다윗을 붙잡지 못하는 거다. 사울과 다윗 사이에 한 쪽에서는 잡으려 하고, 한 쪽에서는 도망을 다니느라고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사울은 광야사상을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광야사상은 사울의 정신과는 질적으로 다르고 광야사상을 가진 성도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보호가 아니면 살아갈 도리가 없다.
성도가 광야사상을 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 속으로 들어갔다는 거다. 그러니 이런 성도를 세상이 따라오지 못하는 거고, 또한 이런 성도를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기 때문에 세상이 따라오지 못하는 거다. 이 말이 기도원의 굴 속에 들어가서 열심히 기도를 하면 이렇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광야의 정신은 이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상이다.
세 번째는 압살롬은 광야에서 다윗을 붙잡지 못하는 거다. 성도는 광야로 나가야 만이 원수를 피할 수 있다. 세상이 자기를 잡으러 올 때, 세상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이 자기를 정복하려고 할 때 여기에 죽지 않으려면 자기의 정신 사상이 광야로 나가야 한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진리를 붙잡는 것이 광야로 나간 거다. 광야로 나가야 만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가 있게 된다. 광야로 나간 자에게 이런 인도가 있는 거지 애굽에 있는 자들에게는 이런 인도가 없다. 신앙사상 면에서 이걸 잘 알아야 한다.
네 번째는 광야로 나오지 않고 애굽에 그대로 있으면 열 가지 재앙을 다 받게 되는 거다. 그러니 예수를 믿으면서 애굽사상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예수를 믿으면서 왜 열 가지 재앙을 받겠느냐? ‘광야’란 이런 신앙사상을 말하는 거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육의 눈으로 보면 빈들인 광야는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 그러나 영적 신앙사상으로 보면 광야란 진리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신앙사상을 말하는 거다. 광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 정신은 세상을 의지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세상의 일을 한다고 해도 세상을 의지하는 게 아니라 그 정신 사상은 하늘을 향해 있다. 반대로 육적 세상적인 신앙사상을 가진 자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정신 사상이 늘 세상을 향해 있다. 이런 자는 아무리 종교적인 열심을 낼지라도 속이 세상이고 세상 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정신은 광야가 아닌 세상과 같이 있는 거다.
광야의 신앙사상을 가진 자는 늘 하나님과 같이 있다. 그래서 육적 신앙사상을 가진 자는 영적인 신앙사상을 가진 사람을 절대로 따라잡지 못하고 그 신앙을 죽이지 못한다. 그러나 성도가 세상정신 사상을 가지게 되면 이 자는 자기가 스스로 세상이 좋아서 세상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이 신앙은 세상에게 먹힐 수밖에 없는 거다. 이건 스스로 자기를 죽이는 거다. 이런 자는 원수들에게, 비진리적 세상적 육적인 신앙사상들에게 잡혀서 종노릇하게 되고 노예가 되어서 신앙의 성장이 안 된다.
영적 이스라엘은 신앙 사상적으로 반드시 광야로 나가야 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거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거고, 그 신앙이 살 수 있는 거다. 다윗은 이와 같은 광야의 신앙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세상 육적 신앙사상을 가진 사울 왕이나 압살롬이 이 다윗을 죽이지 못하는 거다. 본 장이 이걸 말하고 있다. 광야는 성도들의 영적 훈련장소다. 영능의 신앙실력이 커지는 장소다.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런 곳이다. 그래서 광야는 진리성도에게 없어서는 안 될 곳이다.
1절: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주님을 믿는 사람치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며 기도를 안 하는 사람이 있느냐? 모두가 ‘나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이라고 한다. 다윗도 본문에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고 있는데, 우리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구별을 해야 한다. 믿는 사람들이 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건지 그 뜻을 분별해야 한다.
다윗이 기도하면서 ‘나의 하나님도 되시고, 사울의 하나님도 되시고’ 이렇게 말을 하면 안 되는 거냐? 왜 꼭 ‘나의 하나님’이라고 기도를 하는 거냐? 성도들이 자기가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면서 ‘나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달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너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았으니 안 채워준다’ 라고 하시느냐?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다윗이 주를 찾으면서 왜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주를 갈망한다고 하는 거냐?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다윗이 광야에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기도를 한 것은 세상의 생활조건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영혼에 대하여 부르짖는 거다. 곤핍한 땅이라면 광야의 돌짝밭이고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곳인데, 이것과 다윗 자기의 영혼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성도다윗은 유대광야에서 육신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당했다. 낮에는 더위를 밤에는 추위를 견뎠고, 낮과 밤에 나타나는 맹수들을 피해 다녔다. 한 마디로 사람이 살 곳이 못되는 곳에 살면서 하나님을 찾고 있는데, 왜 하나님을 찾는 거냐? 육신의 곤고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거냐, 영혼의 곤고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거냐? 영혼의 곤고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유대광야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40일간 금식으로 주리셨을 때 마귀의 시험이 있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라는 시험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라고 하시고 이겼는데, 이 말이 사람은 떡을 안 먹어도 산다는 뜻이냐, 아니면 떡을 먹는 목적으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조끔씩은 먹어야 살 수 있다는 뜻이냐, 아니면 음식을 먹어야 살지 안 먹으면 죽는다는 뜻이냐?
이 말의 뜻은 ‘무엇은 먹고 무엇은 먹지 말아야 한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사는 목적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하겠느냐?’ 하는 의미다. 그렇다면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오늘날까지 뭘 먹고 사느냐? 밥을 먹고 사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느냐? 어느 것을 자기의 주격적 양식으로 삼고 있느냐?
진리성도 다윗이 광야에 거하면서 육신의 배고픔과 고통 속에서도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라고 기도를 하는 것은 자기의 육신이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이니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은 오직 하나님의 뜻만 찾는다는 거다.
우리가 이걸 좀 더 생각을 해 보면 다윗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이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물을 찾는 사람의 간절한 심정과 같다는 거다. 광야에서는 사람이 마실 물을 찾기가 매우 힘든 것처럼 세상이라고 하는 광야에서는 진리의 성도가 마실 물을 찾기가 그만큼 힘이 든다는 거다.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거다. 우리가 이런 면으로 깨달으면 다윗이 광야에서 하는 기도의 사상과, 예수님께서 유대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신앙사상이 일치가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다윗이 광야생활을 하면서 한 말이나 기도들을 육신 쪽으로 해석을 하게 되면 다윗의 신앙은 완전히 세상판이 돼버린다. 그리고 다윗이 육신적인 기도를 하는 차원이라면 사울 왕이나 압살롬을 피해서 광야로 나오기 전에 사울이나 압살롬을 얼마든지 죽였을 거다. 그러나 다윗이 광야로 도망을 나온 것은 자기의 육신이 살려는 목적이 아니고, 또한 광야에 거하면서 자기의 육신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은 육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그 속에는 육신적인 어려움 가운데서도 자기의 신앙을 굳게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는 거다.
성도의 양식은 하나님의 본질인 진리 생명수의 말씀인데, 세상이라는 광야에는 이 물은 없고 선악과 따먹은 물밖에 없다. 거짓된 세상적 비진리는 성도가 마셔서는 안 될 독극물이다. 진리성도가 아무리 먹을 것이 없다고 해도 독극물을 마시면 되겠느냐? 아무리 먹을 것이 없다고 해도 자기 살을 뜯어먹으면 먹었지, 자기 오줌 물을 받아먹으면 먹었지 어찌 독극물을 마시겠느냐? 말이 안 된다.
성도가 비진리의 독극물을 먹으면 그 영혼은 죽는다. 신앙성장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무리 자기 집과 가까운 곳에 교회가 있을지라도 비진리를 주는 교회라면 그 교회에 나가면 안 된다. 그런 곳에 가면 자기의 정신이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이 세상광야에서 우선적으로 누굴 찾는 거냐?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도 이 세상광야에서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못 찾으면 목말라 죽는다. 이 세상은 광야이니 성도가 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못 찾으면 목말라 죽는다.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성도다윗은 광야에서 영혼의 갈급성을 느끼고 있다. 영과 육이 주를 갈망하고 육체도 주를 앙모한다는 것은 성도다윗이 전 인격을 기울여서 주를 찾는 것을 말한다. ‘전 인격’이란 온 몸과 마음과 정신이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된 걸 말한다. 세상광야에서 성도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밖에 없다.
2절: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보면 다윗이 광야로 나가 있는데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다고 하는 것이니 말이 통 안 된다. 이 외에도 시편을 글자대로 보면 말이 안 되는 게 참 많다. 우리가 믿는 것은 성경은 오류가 있다거나 잘못된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니 이런 모순되는 것 같은 말씀들을 말이 되도록 깨달으려면 천상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신앙정신과 마음이 어디에 가서 앉아 있느냐? 어느 위치에 있느냐? 하는 걸 봐야 한다.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하나님께서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니까 아담이 어디에 숨어서 무엇이라고 대답을 했느냐?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서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라고 대답을 했다. 아니, 하나님이 부르시면 기뻐서 쾌히 ‘예,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지금 아담이 서 있는 곳이 어디냐?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있다. 원래 아담과 하와가 정신적으로 서 있을 장소가 어디냐? 생명과를 따먹는 그곳이다.
아담과 하와가 생명과를 따먹는 곳에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쾌히 ‘예’ 라고 대답을 할 텐데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대답이 빨리 안 나온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빨리 대답이 안 나온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기쁘게 쾌히 대답을 할 수 있는 곳을 떠났다는 의미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상태를 봐야 한다. 그런데 세속화된 교회는 이런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띄워주지 않는다.
진리성도 다윗은 광야에서 무엇을 보기를 원했느냐?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주의 권능’이란 ‘주님의 권세와 능력’을 말하는 거고, ‘주의 영광’이란 성도의 구원을 위해 이적이나 기사나 또는 어떤 방법으로 건 주님의 의사가 나타나는 걸 말한다. 그런데 성도다윗이 이것을 어디에서 봤다고 하느냐?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성소에서 그 주님을 보았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진리성도 다윗이 광야생활을 하면서 전 인격을 기울여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을 가졌으니 다윗의 이 신앙사상은 질적으로 주의 성전에 있는 것과 같다는 거다.
다윗의 이 신앙고백을 통해 다윗은 아무리 환경이 고통스럽고 어려워도 질적인 면에서 그 신앙사상이 전혀 변함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다윗은 항상 성소 안에서 산 신앙이었다. 광야로 나가 있어도 그 신앙사상은 질적 본질적 신앙 사상적으로 항상 성소 안이다. 즉 하나님 품 안이다.
사도바울은 어디를 가나 누구 안이냐? 그리스도 안이다. 사도바울의 서신을 보면 ‘예수 안에’ 라는 말을 많이 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혔어도 예수 안이다. 이런 사도바울에게는 외부에서 주는 고통이 침범치 못하고, 감염이 되지도 않는 거다. 이걸 못 느끼겠느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들어갔는데, 이 때 이들이 불이 주는 고통으로 풀무에서 뛰쳐나왔느냐? 불의 고통이 그들을 잡아먹지 못했다. 이런 걸 신앙적 느낌으로 느껴봐라. 이들이 항상 주님과 동행을 하니 그들이 물질적인 불에 타지도록 내버려 둘 수 없는, 불은 고통을 의미하는데, 이들을 불이 주는 고통 가운데 있도록 놔둘 수 없는 주님의 심정을 느껴봐라.
불의 고통이 이들을 침범하지 못했다. 잡아먹지 못했다. 그러니 이들의 신앙사상은 성소 안이다. 하나님 품 안이다. 하나님의 보호 안이다. 이런 것을 혹 이방 불신세상에서는 정신적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서 ‘정신통일을 하면 가능하다느니’ 라고 할런지 모르겠지만 이건 그런 게 아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로 된 거다.
이 세 사람의 신앙이 누구의 영광으로 나타나느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거다. 불에 타지지지 않고 나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거하는 거다. 이처럼 주님의 영광은 성도로 통해 나타나는 거다. 이 영광은 의사성적인 면에서도 교훈적인 면에서도 있는 것인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이것은 절대성이 있다. 즉 그 어떤 것보다 위에 있다는 말이다. 높이 들려져 있다 그 말이다. 다른 것은 다 죽었는데 나만 안 죽었다면 나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거다. 노아홍수 때 이 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가 주님의 영광을 나타낸 거다. 영광에는 자랑도 들어있고, 면류관도 들어있고, 칭찬도 들어있고, 상급도 들어있는 거다.
3절: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주의 인자’란 아가페 사랑을 말한다. 아가페 사랑은 인간의 생명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은 늙고 병들고 살아있는 시간이 짧지만 아가페 사랑은 창조의 능력이 있고, 영광이 있고, 영원히 쾌락과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물론이고 모든 인간의 임시적인 생명은 아가페 사랑 안에서만 가치가 있는 거다. 인간의 생명이 아무리 귀중할지라도 다윗은 아가페 사랑 밖에 있는 자연생명은 큰 가치를 느끼지 않는다. 다윗은 자신의 육신의 자연생명이 아가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이 사랑을 느끼고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는 거다. 자기의 신앙사상 정신이 아가페 사랑 안에 들어있는 성도는, 즉 주님을 주격으로 삼고 사는 성도는 자기의 육신을 의의 병기로 쓰기 때문에 그 육신도 귀한 거다.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생명으로 살기 때문에 그 육신도 귀하다는 말이다. 영적인 면을 제해놓고 육신만 귀하다고 하게 되면 신앙의 이치가 어그러진 거다.
그렇다면 성도가 몸에 병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떤 면으로서 건 고쳐준다면 이것은 무엇이 무엇보다 귀하기 때문에 육신을 고쳐주시는 거냐? 육신 자체가 귀해서 고쳐주는 게 아니라 진리의 신앙생명이 육신보다 귀하기 때문에 이 진리의 신앙생명을 살리기 위해 육신을 고쳐주고 살리는 거다. 우리는 해석의 주격이 육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
성도의 진리의 신앙생명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좀 잘못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놓고 있는 거다. 고깃덩어리가 가치가 있어서 살려놓는 게 아니다. 돼지라면 고깃덩어리가 가치가 있겠지만 우리는 영적 차원에서 이룰구원이 있으니 이게 귀해서 살려두는 거고, 이를 위해 훈련을 시키는 거다. 그렇다면 지식적으로 이 사실을 잘 아는 우리에게 막상 어려움이 닥치면 영적인 면을 먼저 생각하느냐, 육적인 면을 먼저 생각하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