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노래
타이틀이 거창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원자폭탄으로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박살내버리거나 멀쩡한 강바닥을 파내서 생태계를 초토화시키는 정도쯤이나 되야 세상을 바꿨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노래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투표의 작동원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한 장의 투표권이 공동의 지향과 만남으로써 세상을 (좋게든 나쁘게든)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의 노래는 대중의 정서와 호응함으로써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규정하는 이정표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바꾼 노래'들을 주목했다. 당초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전체를 아우르는 기획으로 준비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의 제약으로 여기서는 1970년 이후 발표된 노래들을 시대순으로 소개하기로 했다는 점도 밝혀둔다. 더불어, 여기에 미처 소개하지 못하는 노래들은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을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드린다.
장덕 '소녀와 가로등' (1979)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전범으로 남은 아려한 흔적
1977년 열린 제1회 MBC 서울국제가요제. 한국을 대표해서 진미령이 '소녀와 가로등'이란 노래를 들고 무대에 올랐다. 당시 대회 규정에 따라 작곡가도 함께 무대에 올라야 했다. 함께 무대에 오른 작곡가는 놀랍게도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고1 여학생 장덕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소녀와 가로등'을 그가 중학교 2학년 때 만들었다는 것이다. 진미령이 노래를 하는 동안 그 소녀는 반주를 맡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소녀와 가로등'은 대회에서 입상했다.
이 전설적인 일화에서 장덕이란 인물을 천재, 혹은 신동으로 연결하는 것은 그리 무리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장덕은 음악계의 신동이었고 천재였다. '소녀와 가로등'을 비롯해 중학교 때부터 만들어놓은 노래들이 상당수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음악적인 재능은 그의 불운한 어린 시절로 인해 발견됐다. 첼로 연주자인 아버지와 서양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장덕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불화를 보며 커야 했다. 초등학교 때 오빠인 (가수) 장현으로부터 기타를 배운 장덕은 음악을 통해 외로움을 달랬다. 중학교 2학년 소녀가 만든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소녀와 가로등'에서 전해지는 외로움과 슬픔의 정서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었다.
'소녀와 가로등'의 성공은 장덕을 자연스럽게 가요계로 안내했다. 계속해서 국제가요제와의 인연을 이어간 장덕은 장현, 박경희, 최병걸 등에게 가요제 출품작을 만들어주며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또한 장현과 함께 현이와 덕이를 결성해 가수 활동도 병행해갔다. 그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는 가수로서의 성공도 예견하게 하였다. 1979년 자신의 이름을 건 첫 앨범을 발표하였다. 앨범 제목은 그의 풋풋한 이미지에 어울리는 [장덕의 고운 노래 모음: 첫사랑]이었다. 진미령이 불렀던 '소녀와 가로등', 장현이 불렀던 '더욱 큰 사랑'을 본인이 다시 불렀고, '첫사랑'과 같은 새로운 노래도 수록했다. 절정의 인기였다. 매력적인 외모와 고등학생이라는 신분 덕에 여러 하이틴 영화에까지 출연하며 인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삶은 여전히 평탄하지 못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자살시도까지 한 적이 있는 장덕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결혼을 하고 남편과 함께 음악 활동을 이어가지만 결혼생활은 짧게 끝나버렸고 향수병까지 찾아왔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하지만 그의 절실함과 달리 예전만큼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여전히 스스로 노래를 만들고 불렀지만 1980년 초반은 장덕에게 가혹했다. 전환점은 오빠 장현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1985년, 현이와 덕이를 재결성해 발표한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가 큰 인기를 모았고, 이듬해 발표한 독집 앨범에선 '님 떠난 후'가 ‘가요톱텐’ 5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장덕에게 최고의 순간을 선사했다. 아마도,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오랜만에 느낄 수 있던 기쁨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1988년 발표한 5집 앨범은 '님 떠난 후'만큼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얘얘'와 '나를 불러줘' 같은 빼어난 곡들이 수록돼 있었다. 음악은 점점 더 성숙해갔다. 이은하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을 비롯해 이선희, 임병수, 양하영 등 많은 가수들에게 곡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외롭고 불안했다. 이미 자살시도를 했던 적이 있는 이 불안한 영혼에게 이혼과 귀국 후의 계속된 실패는 우울증과 불면증을 더 심화시켰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예정된 시간을 위해'가 수록된 6집(1989)을 발표한 장덕은 이듬해 2월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사망한다. 겨우 28살이었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오빠 장현도 6개월 뒤 설암으로 동생을 따라갔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그, 혹은 그의 집안만의 불행이 아니었다. 이는 한국 대중음악계 전체의 불행이었다. 그는 단순한 가수가 아니었다. 싱어-송라이터라는 말도 그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는 당시 가요계에서 보기 드문 ‘여성’ 싱어-송라이터였을뿐 아니라 앨범 전체를 총괄하고 조율할 수 있는 음악감독(프로듀서)이었다. 당시 영화음악 작업을 여성 음악인이 맡는다는 건 몹시 드문 일이었다. 장덕만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두를 놓고 그는 예정된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가요계는 유일무이했던 여성 프로듀서를 잃어버렸다. 그의 죽음 뒤 전영록, 이선희, 최성수 등이 참여한 추모 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1990)가 만들어졌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단순히 '요절'이나 '남매의 죽음'과 같은 호사가들의 얘기가 아니라, 음악으로 그는 더 많이 알려지고 얘기돼야 한다. 그의 재능과 음악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