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현역시절- 검도, 럭비인 이종구 (대한럭비협회 초대회장)
약력
1908 서울 출생, 휘문고 졸, 동경농업대 수료, 보성전문(고려대) 법과 졸업, 보전 럭비팀 코치, 선수역임, 초대 대한럭비협회 회장 역임, 검도 9단
처음시작한 종목은 검도
거의 한 평생을 체육에 몸담아 오면서 한우물을 파기도 힘든 판인데 그것도 두우물을 판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하게 된다. 당시에는 체육인에 대한 인식도 그리 좋은편도 아니었고 시설이나 보수등도 형편없었기에 모두들 운동에 대한 매력을 가졌어도 계속하기가 매우 힘들었으나 나의 경우는 집에서 양조장을 운영했던 관계로 별탈없이 운동을 계속해 왔던것 같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운동에 대한 흥미가 많았으나 휘문고에 검도, 유도부가 생겨나 검도부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후 개인적으로 경성무도관에 다니면서 검도수업을 계속했었다. 당시 부원들의 수는 20-20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졸업 후 모교에서 검도부 사범으로 후배들을 지도한 적이 있다.
럭비와의 첫 인연
그 후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농업대에 입학했다. 여기서 럭비를 처음 대했고 럭비에 매료돼 상당기간 동안 검도를 게을리 한적이 있다. 당시 일본에서는 럭비경기가 유행하고 있었던 실정이었으나 국내에서 일본인이 다니는 관립학교를 제외 하고는 중, 고, 전문학교에 럭비경기가 소개되어 있지 않었았다. 동경 농업대에서 럭비와 검도를 배우다 이듬해 1929년 귀국해 보성전문 (현 고려대) 법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우리민족의 학교로서는 처음으로 보성전문에 럭비팀이 창설되었고 그 후 양정, 배재, 중앙고에 럭비팀이 창설되었다. 중앙은 몇 년 후 해체되었고 양정과 배재는 아직까지 럭비팀을 운영해 오고 있어 우리나라 럭비 저변확대에 이 두 학교가 크게 공헌했다고 볼 수 있다.
학교지원은 럭비볼 2개가 고작
물론 당시 학교의 지원도 넉넉치가 못했다. 럭비볼 2개가 학교지원의 전부였고 합숙비, 유니폼 등은 자체적으로 마련하여 럭비팀을 꾸려나갔다. 당시 럭비팀의 코치를 겸하고 있었던 나는 부족한 예산을 마련하느라 이리저리 허둥댔던 기억이 난다. 훈련을 할 수 있는 연습장도 학교와 떨어져 있어 애를 먹기도 했는데 자주 찾았던 곳으로는 지금의 청와대 자리, 동대문운동장 앞의 메디칼센터 자리, 장충단공원, 휘문고보 운동장 등을 찾아다니며 연습을 하곤했다.
학교 (보성전문) 에는 고작 테니스 코트 하나뿐이었기에 연습장 구하는 일이 힘들었었다. 더구나 서울운동장 같은 곳에 한번 들어가려면 일인당 5전씩을 내어야 했기 때문에 집에서 술을 가져와 문지기에게 주고 그냥 들어갔던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또 잊지 못할 일은 학교에서 연습장까지 이동하는데도 그 비용은 우리팀의 처지에서 볼 때 엄청난 것이어서 이것도 큰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 럭비부원 중에 종로4거리 전차역 매표소 (종각부근)에 근무하는 부원이 있어 매일 전차표를 20-30장씩 얻어와 사용해야만 했다. 그때 학교가 소재한 안국동에서 종로까지 나와 다시 청량리, 용산, 서울운동장쪽으로 가는 전차를 갈아타고 연습장에 다녔었다. 우리 럭비팀은 전문학교에 보성전문 한 팀 그리고 2개의 고등학교팀 등 그 수가 많지 않았지만 일본인들은 실업팀만 보더라도 총독부, 철도국, 경성전기 3팀을 비롯해 전문학교전체(官專, 관전) 그리고 중학교에도 많아 경성사범, 경성중학, 용산중학, 경성상업, 경기도상업 등 대다수 학교에 럭비팀이 있었다. 또 용산역부근 (지금의 용산시장)에 럭비전용구장까지 갖추고 있어 일본인들의 럭비열기는 대단한 편이었다. 그때 열렸던 대회로는 고등전문럭비 선수권대회가 있었는데 만주, 구주, 대만, 후에 (베트남?), 우리나라 등 8개팀이 일본 나고야에 모여 시합을 하는 대회가 가장 권위가 있었다.
일본팀들 보성전문 팀과 대전 회피하기도
처음에는 만주팀과의 지역에서 탈락해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으나 우리나라가 분리되면서 첫 출전한 본선에서 보성전문팀은 일본 명치대(메이지대) 예과팀에 41:0으로 지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이때 럭비에 대해 눈을 떴다고 볼 수 있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럭비에 있어서 신체와 힘에 의존해 럭비경기를 했던 수준이었다. 우리나라 예선전에서 당시 보전 팀은 월등한 신체조건과 힘을 가지고 있어 일본관전 (日本官專)팀들을 무려 113:0, 90:0, 80:0 등으로 눌러 보전 전성시대를 구가했었다. 이때에는 일본관전팀들도 신체가 크고 시합을 하게되면 일방적으로 밀리기 때문에 보전팀을 회피하는 상황이었고 보전팀은 나고야의 본선에 연속 11번이나 출전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본선에 진출해서 한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고 결승전에 두 번 진출해 아깝게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지만 국내대회에서만은 일본인팀의 콧대를 여지없이 꺾어 놓았었다.
이와 같은 보전팀에 제동을 걸기위해 일본인들은 폭력과 경찰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고등전문럭비대회 예선전에서 당시 보전팀과 맞붙은 수원농림팀이 경기가 불리하자 응원단이 칼목검, 몽둥이 등을 운동장에 갖고 들어와 보전응원단 쪽에 난입해 치열한 난투극을 벌이기도 하고 이를 우리쪽으로 전가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당시 홍성화 럭비부장이 나서 그 진상을 폭로해 일본인들의 비열함을 공개한 때도 있었다.
고달프고 열악했던 시절
1920년대 운동선수들은 시합을 하거나 연습을 할시 전신을 내던지다시피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설렁탕이 고작이었으나 이런 혜택도 자주 오는 것이 아니었다. 치열한 신체접촉이 많은 럭비경기인지라 선수들의 부상도 많았고 유니폼 경기 도구도 형편 없었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어도 붕대하나 감고 훈련에 임하거나 신발이 맞지않아 맨발로 경기에 임하는 투혼을 보여 주었었다. 어떤때는 연습을 너무 심하게 해 화장실에서 벨트를 잡고 일어나야 할 정도로 고달픈 시절이었지만 불평 않고 묵묵히 따라준 선수들이 지금 생객해 보면 대견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후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일본이 기울어져감에 따라 우리나라에도 구기금지령이 내려지게 되고 우리나라 스포츠도 그야말로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먹을 것 입을것을 내던지고 럭비와 검도에 매달려 왔지만 갈수록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중학교때부터 시작한 검도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고 해방 후 한때 경기중학 체육교사를 지낸 후 해방 후 럭비협회 재건에 힘써 초대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그후 럭비, 검도, 사격 등 체육행정에 관여해 보기도 했다. 1920, 30년대와 비교해 볼때 지금의 체육현장은 질전, 양적으로 엄청나게 확대되어 있음을 느낀다. 투자에 비례해 성과도 나아지고 있지만 선수들이나 지도자의 자세가 더 진지해 졌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 특히 비가오면 운동장이 진흙탐으로 변해 흙탕문을 마시기 일쑤고 경기 외적인 운동장 청소나 행동에 누구보다 솔선수범하는 태도를 보여준 선수들의 모습이 선하다.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글입니다. 이종구 회장님께서 대한체육회보에 기고하신 글을 복원하여 여러분과 공유합니다. 과거의 역사와 전통이 왜 현재와 미래에 중요한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역사의 준엄한 꾸짖음 앞에 우리가 해야할일에 대해 모두가 고민해보길 원하며 모든 럭비인들과 나누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