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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2월 공세와 유엔군의 반격
제 1 절 한강 도하와 서울 탈환 작전
1. 개 요
미 제9군단이 아이다호선으로 진출하는 동안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한강 남쪽의 저지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때 미 제1군단의 좌전방 국군 제1사단과 미 제3사단은 매일 500~600톤의 보급물자가 하역되는 인천지역 경계와 한강 남쪽의 진지를 계속 방어하도록 하고, 우전방 미 제25사단(배속:터키여단)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지역에서 도하, 한강 이북으로 진출하여 북한강을 끼고 있는 고지군을 점령하도록하여 미 제9군단의 좌측방을 엄호하면서 서울의 적을 포위할 계획이었다.
2. 작전경과
3월 7일, 동이트기 전에 미 제25사단은 3개 연대 병진으로 도하작전을 개시, 별 저항없이 대안으로 진출하였고 적은 도로에 대인 및 대전차지뢰를 매설하고 그다지 저항하지는 않았다.
공격개시 4일째인 10일, 북한강 서쪽지역까지 올라갔고, 15일에는 제24연대와 제27연대는 서울-춘천 도로까지 진출하였으며, 이때 북한강 동쪽 접경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터키여단은 경춘 국도보다 2마일 더 북상하여 우인접 미 제9군단 미 제24사단이 확보한 진지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미 제1군단은 미 제25사단이 예봉산으로 진출, 서울을 동측방에서 위협하게 되었다.
그런데 미 제9군단이 홍천을 탈환할 무렵 적이 서울을 포기하는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2일, 정찰기가 한강 북쪽의 적진지를 관측결과 적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관찰되었고, 미 제3사단 정찰대가 한강을 도하하여 적진지를 살펴보았으나 적이 없음을 확인하였다. 이어서 서울 남쪽을 방어하고 있던 국군 제1사단의 5개 정찰대가 14일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 강북시내를 정찰하였으나 적과 조우하지 않았다. 이 당시에 1개 정찰대는 중앙청으로 진출하여 청사에 태극기를 내걸었다. 또 미 제3사단의 정찰대도 한강변의 매봉(175m)과 용마봉을 정찰했으나 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1군단장에게 3월 15일 서울 북쪽의 주요 고지군(북한산 지역)을 점령하도록 명령하였다. 8군사령부는 서울 북서쪽 한강변에서 북한산을 경유하여 용마봉을 거쳐 버팔로 선과 연결하는 통제선, "링컨선"을 설정하고 이 선 안은 점령하고 이 선 밖은 정찰대만 보내서 접촉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1군단장은 국군 제1사단이 북한산을, 미 제3사단이 용마산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2월 16일 한강 남쪽으로 진출한 이후 한달여 동안을 서울을 목전에 두고 우전방 제15연대가 한강철교-영등포에 이르는 여의도 치안에, 좌전방 제12연대가 염창-김포일대에 배치되어 잔적을 소탕하고 있었다.
서울 탈환 임무를 부여받은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는 3월 15일 제6중대의 도하를 시작으로, 16일에는 제2대대를 선두로 도하하여 서울 시내를 장악하였다. 이어서 13:00시에는 국방장관 일행이 연대의 한강 도하상황을 시찰하였다. 미 제3사단도 용마봉을 점령하였다.
〔 "중공군 항미원조사에 나와 있는 서울 철수 상황(중권 404p)"
새로 한반도에 들어온 병단(제19병단)의 작전준비시간을 위해~, 축차적으로 적을 저지하여 3월 말이나 4월초에 38선 일선까지 철수하도록 하였다. 38선에서 다음 전역까지는 20~25일의 시간이 있어야 했다.
3월 14일, 북한강 양안을 연해 북진하고 있던 미 제25, 제24사단은 청평천 이남의 구암리를 점령하고 춘천에서 서울에 이르는 도로를 차단하고, 홍천을 향해 전진하던 미 제1기병사단, 해병 제1사단, 영 제27여단은 홍천강을 건너 홍천을 점령하고, 동부전선 인민군 제5, 제2군단과 당면하고 있던 한국군 제3, 제1군단이 하진부리 동-서 일선에 도착하였다.
3월 11일 9시,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계속 적을 피로하게 하고, 아군 방어선을 축소한다. 시간을 획득하기 위해 서울을 포기하고, 운동방어 방식으로 유생역량을 보존하고, 적의 주력을 흡수하여 38선까지 진출하도록 한다." 13일 저녁 지원군과 인민군은 주동적으로 서울을 철수하여 14일 새벽까지 모두 철수하였다, 미 제3사단과 한국군 제1사단이 15일 서울을 점령하였다.〕
리지웨이 제8군사령관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서울을 탈환하고 새로운 지구를 점령했지만 "리퍼작전"의 목적은 수도를 회복하고 새로운 지구를 점령하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주요 목적은 적군의 유생역량을 포로로 하거나 소멸하고, 그 무기 장비를 노획하고 파괴하는데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전은 완전한 성공한 것이 아니였다. 왜냐하면 적군은 신속하게 북쪽을 향해 철수하고, 지연전을 했기 때문이다. 날씨와 지형은 적군의 행동을 어렵게 한 것보다 우리가 훨씬 더 어려웠다.
3. 찬점용사(지역주민)증언, 유해발굴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한강변 매봉, 용마산(아차산, 망우리 공원묘지)의 전투 흔적
매봉은 봄철 한강북로를 달리다 보면 개나리가 만발하여 정말 한강변에 가장 멋진 곳의 하나다. 성동구 응봉동의 응봉과 옥수동의 매봉이 근접해 있다. 강변에서 올려다 보면 대두분 바위로 보이지만 사실 북쪽에서 진입하다 보면 양호하게 도보로 접근이 가능하다.
용마봉(348m)은 광진구 군자동과 면목동, 구리시 아천동의 "3동봉"으로 바로 동쪽의 아차산(287m)보다 높은 고지다. 여기 남북으로 연결된 능선을 타고 오르면 망우공원묘지가 나온다.
"피난민이 옹기종기 모여살아 훼손된 전투 흔적"
먼저 매봉(또는 응봉)지역과 용마봉 지역은 우리가 유해발굴은 못했지만 전투 흔적이 상당한 곳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봉우리가 시민공원처럼 바뀌어, 매봉은 산책로로 용마봉은 지역동네 분들 체력단련장으로 변해버렸다. 지역 탐문과정에 들은 이야기는 전쟁중('51. 3월 이후)에도 피난민들이 학고방같은 것을 집을 다닥다닥 붙여서 짓고 살았는데 원래 엄청난 전투지역이었다고 한다. 폭격으로 민둥산이 되어버렸으니 집이 없는 피난민들이야 어쩌겠는가 그런 곳에 엄청난게 몰려들었다고 한다. 나무는 고사하고 풀뿌리조차 하나 없는 황무지가 되다시피 하는데 그곳에 사람죽어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였다.
60년대 중반에 정화사업으로 한강 중지도를 포함하여 피난민들이 다른 곳에 집성촌을 조성하여 일괄 조정되면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나무없고 흔적은 다 없어진 상태였다.
"운전하던 수환이가 응봉에서 개인호도 수류탄도 보고 전투화도 보고 탄피도 보았다."
이등병부터 전역할 때까지 나를 태우고 다니던 수환이 동네가 응봉근처였다. "곰보다 더 곰같은 우정의 전우"인 수환이가 유해불굴 현장에서 바라보고는 바로 본인의 동네에 응봉에 어릴 적에 놀려가서 흔한 말로 전투유품을 갖고 놀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잘 정돈하여 공원을 조성하여 아예 흔적조차 없다.
옥수동의 매봉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 이곳은 광희문과 가까운 곳인데 광희문이 조선시대 4대문 안에서 죽어가는 시신이 넘나드는 문이고 사실 매봉밑에는 그런 관련 이야기가 많이 있다.
"광희문의 비밀, 조선시대 시신이 나오는 문"
어느날 제보가 왔다. 시신이 50여나 나왔는데 군인들 아니냐는 것이다.
하기야 바로 좌측이 남산이고, 장충단 공원이고, 동국대학교가 있고, 옛 서울 운동장이 있는 곳이 광희문과 연결된다. 동국대후문 쪽이 전쟁 당시에 군부대가 많이 있던 곳이다. 중구 필동 일대다.
그러니 솔깃해서 달려가 제보자를 만났더니 지금 극동아파트인지 재개발이 벌어졌을 때에 시신이 나왔다는 이야기고 지금은 그 처리과정을 모른다고 한다. 이미 재개발 기간이 한참되어 무연고자라 할지라도 모두 화장되어 자연인이 되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 곳에 아주 오래된 절도 있다. 아마도 극락왕생을 빌었던 곳이리라.
경로당에 들러 사연을 들어보려했으나 대부분 조선시대 죽은 시체 모이는 곳이라는 이야기는 다 하는데 전쟁 때 군인이나 경찰 등이 전사한 이야기는 없었다. 물론 매봉 일대가 피난민이 가득했다는 것은 공통된 이야기다.
"망우리 공원묘지를 전수조사하면 많은 전쟁관련 전사자가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아차산일대를 샅샅이 탐사하여 500여 개의 개인호를 찾아내고 발굴 작전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이미 아차산성에 있던 전투흔적은 모두 훼손되어 버렸다.
"아차산성 발굴사업에 참여한 대학생이 발굴병이 되어 왔다" 선발을 위한 면담시에 입대전 관련 학습을 물어보는 과정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문화재청에서 발주하여 고구려성터인 아차산성을 발굴하는 과정에 전투화, 탄피 등 군관련 유품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린 그 결과 발표에 한번도 군관련 유품은 들어본 적이 없다. 고구려 당시 뭐 어쩌고식의 내용만 발표되었다. 하지만 실제 미군 제17연대가 용마봉을 거쳐서 올라간 곳이다. 이런 식으로 괜히 귀찮게 된다는 눈가림으로 전투흔적을 지웠다. 여기만이 아니다. 용인의 할미성도 그렇고 임진강의 초평도 북안에 수내나루 위의 고구려 성터(추정)도 발굴하면서 실제 개인호가 수십개씩 있고 유품도 널려 있는데 우리에게 아무런 것을 통보하지 않고 문화재 발굴이란 미명하에 출입만을 통제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화재가 먼저인지 나라위해 전사한 용사님이 먼저 인지 묻고 싶을 뿐이다."
이런 차원에서 나는 망우리 공원묘지를 3회 탐사했다. 가보면 비석에는 총탄자국이 선명하여 얼마나 많은 전투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실제 우리가 서울을 재 수복한 후에 지금의 국립묘지를 만들기전 망우리가 임시 국군묘지였다. 많은 유해가 그곳에 임시매장 또는 화장되어 있는 상태로 보존되다 현충원에 들어왔다. 이런 와중에 가매장된 유해를 제대로 옮기지 못해 무명으로 남겨져 있다 묘지정리하는 과정에 수 없이 무연고 유해가 되어 헤손되어 버렸다.
"탈북 용사님의 웃기는 묘"
수도사단 출신으로 설악지구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북에서 생활하다 중국을 통해 살아온 탈북용사님이 찾아오셨다. 집에 오니 난리가 났다. 다 죽었다고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묘도 망우리 묘지에 있었다. 가보니 이름이 같았다. 지금까지 그 묘에 집안에서 관리비를 내고 때가 되면 찾아왔다고 한다.
"이 분의 유가족을 찾아 주세요?"
함께 현장에 가서 실태를 확인하고 관리소에 알아보았지만 다른 누가 찾아온 적이 없다고 한다. 망우리 묘지는 벌써 몇번에 걸쳐 무연고 묘를 정리했다고 한다. 참 서글픈 이야기다.
나. 서울 탈환은 3월 15일이 아니라 3월 14일이다?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 소속의 황대형 참전용사님의 증언이다.
"우리는 3월 13일 이미 서울 탈환작전 명령을 받았다. 3월 14일 날이 밝기도 전에 숙영주인 병사들을 깨우라는 소대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분대장으로서 분대원의 실탄과 수류탄 등을 챙기고 확인하는 등 전투준비태세를 완료하고 미군이 지원하는 수륙양용 장갑차에 탑승해 마포방향에 도착하여 진출하였다"
용사님은 여기서 중공군의 박격포탄에 부상을 당해 수원에 있는 야전병원에 갔다, 다시 수혈과 응급조치를 받고 밀양에 있던 제7육군병원에 3개월간 입원을 했다. 그래서 그 당시 상황을 똑바로 기억하고 있다. 그 후에 용사님은 전방에서 전투를 하지않고 후방근무를 했고 월남전에 참여했다.
하지만 전사에는 3월 15일 제15연대 제6중대가 도하를 시작하였고, 16일 서울 전역을 장악했다고 한다(중권 432~435p). 그러나 중공군의 항미원조사 2권 404p에 보면 13일 저녁 지원군과 인민군은 주동적으로 서울을 철수하여 14일 새벽까지 모두 철수하였고, 국군 제1사단과 미군 제3사단이 15일 서울을 점령하였다고 기록한다.
한편 일본인이 쓴 한국전쟁 제8권 83p~86p에도 서울 수복에 대해 상세히 언급되고 있다. 14일이 1차 탈환이고 다시 15~16일 어간에 대부대가 들어가 완전한 탈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적이 이미 철수하여 무주공산인데~
다. 미 제25사단의 양수리 도하작전과 국군 제1사단의 서울 한강북안 침투 양동작전의 중요성?
일본인이 쓴 한국전쟁 제8권의 63p부터 시작되는 미 제25사단의 양수리지역에서의 도하작전의 상공에는 국군제1사단의 양동작전(8권 82p)기록은 아래와 같다
[ 국군 제1사단은 2월 10일경 한강 강안으로 진출, 서울 탈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1개월이 경과하도록 아무 지시가 없었다. 따라서 양동작전에 만족하지않고 광정면에 걸쳐서 활발하게 한강 대안에 대한 정찰로, 때로는 헤엄을 치거나, 민간인의 나룻배나 고무 보우트를 이용하여 정찰대를 계속 한강 건너 서울 서북지역으로 침투시켜 중공군을 자극시켰다. 주력부대는 빈번히 강안의 음폐된 곳에 나타나 틈만 있으면 도하할 태세를 보였다. 중공군 제50군이 양수리방면으로 이동하지 못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럼 항미원조사를 통해 중공군의 시각은 어떠했는지 비교해 보기로 한다.(북한군과, 중공군을 지원군으로 묘사하였다)
지원군은 '51. 2. 16일 지평리 전투에서 철수한 후인 2월 17일, 지원군은 전전선에 운동방어(우리의 기동방어와 비슷)로 전환할 것을 명하였다. 이것은 작전기일이 길어지면서 지원군 6개 군은 연속 4개 전역을 치루고, 병력 손실이 많았던 관계로 부대정비가 필요했다.
한반도에서의 윤번 방침에 따라 제2번 작전부대가 된 제19병단은 2월 16일부터 압록강을 도강하여 3월 중순이 되어야 전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른 제2번 작전부대(포병 등)는 아직 국내서 이동 중에 있어 빨라도 4월초는 되어야 모든 부대가 전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지원군은 총 2개월의 시간을 획득하도록 한강 북안에서 횡성 일선까지 북쪽은 38선 일선 지구까지 3개의 방어 진지를 편성하였다. 이 선마다 축차적으로 저지하는 방식으로 20~30일을 방어 지탱하여 시간을 획득하도록 하였다.
당시에 지원군의 부대 배치를 보면 북한군 제1군단이 한강하구에서 서울 동남 독도 지역까지 정면 32km를, 지원군 제50군은 독도에서 상팔당 지역까지 17km, 지원군 제38군은 상팔당에서 조좌리 지역까지 31km, 지원군 제42군이 조좌리에서 응봉 지역까지 22km, 지원군 제66군이 응봉에서 정금산 지역까지 19km를 담당하고, 북한군 제5군단이 정금산에서 하대곡까지 17km를, 북한군 제3군단이 하대곡에서 방림리 동북쪽 아지동 지역까지 19km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북한군 제2군단은 하진부리 서쪽지역에서 항시 기동하도록 하였다.
이 내용에 유추해 보면 지원군은 미군이 양수리지역에서 도하작전을 개시하려는 것에 제50군을 전용하려는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미 제8군사령부가 설마하는 우려에 너무 민감하여, 혹시라도 중공군이 사전에 정보를 알고 있던지 아니면 도하 장소에 이미 많은 전투력이 배비되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이 지배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일본의 한국전쟁사는 상당히 미 제1군단장 밀번 장군과 국군의 제1사단장 백선엽 장군의 관계와 이들이 하는 작전의 중용성에 무게감을 실어주는 느낌이 나에게는 느껴졌다.
다시 중공군의 항미원조사를 들여다 보자
[서울 수복이전 유엔군의 "킬러작전"이 '51. 2월 21일 시작되는데 지원군이 바라보는 유엔군의 킬러작전의 목적은 지원군과 북한군이 다시 배치하고 공격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고 보고 있다. 그 직접 목표는 서부전선에서 한강 남안 일선을 점령하고, 중부에서는 전선을 지평리-횡성-방림리 일선 이북까지 추진시키고, 동부전선에서는 강릉이북 일선을 점령하고, 원주, 평창, 정선의 "요"자형 전선을 조정하고, 남한강 동조에서 홍안리 일선까지의 지원군 부대를 소멸함으로서 차후 서울을 탈취하고, 38선을 향한 전진을 용이하게 하도록 하는데 있었다.
미 제1군단은 서부전선의 한국군 제1사단, 미 제3사단, 미 제25사단과 터키여단을 지휘하고, 한국군 제1사단은 김포, 영등포의 한강 남안 일선 진지를 확보하고, 미 제3사단과 미 제25사단은 서울 이남과 경안리 이북에서 나란히 전개하여 한강 남안을 향해 공격한다.
미 제9군단은 중부전선의 미 제24사단, 미 제1기병사단, 영 제27여단, 한국군 제6사단, 미 해병 제1사단, 미 제2사단을 지휘하고, 남한강 서쪽 지평리에서 원주 동쪽에 이르는 일선에서 북쪽을 향해 공격하고, 그 중 미 제1기병사단은 지평리-홍천 도로축선, 미 제2해병사단은 원주-횡성-홍천 축선을 연해 주공을 담당한다.
미 제10군단은 동부전선의 미 제7사단, 한국군 제5사단, 한국군 제8사단을 지휘하고, 국군 제3군단은 제7사단, 제9사단, 제11사단을 지휘하고, 한국군 제1군단은 그 수도사단을 지휘하여 총 7개 사단이 평창 동.서, 정선에서 강릉에 이르는 일선에서 북쪽쪽을 향해 공격한다.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계획대로 유엔군은 2월 21일 공격을 개시한다. 리지웨이가 확실히 몰랐던 서부전선의 지원군과 북한군 부대는 18일, 모두 한강 북안으로 철수하였다.
중부전선은 리지웨이의 주공 방향이었다. 미 제1기병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을 주공으로 하고, 미 제24사단, 미 제2사단, 영 제27여단과 한국군 제6사단을 조공으로 하여 지평리 이북과 횡성지구를 향해, 지원군 제42군과 제66군 지역을 맹열하게 공격하였다.
그러나 2월 21일부터 23일 사이에 한반도 역사상 드물게 보는 봄비가 내려 공군 출동에 영향을 주었다. 지면의 도로는 진흙이 되어 지상부대의 행동에 어려움을 더해 주었다.
지원군 제42군과 제66군은 연속 작전으로 인해 피로했다. 식량, 탄약 보급이 매우 어려웠고 부대 감원을 보충하지 못한 상황에서 더 많은 시간을 획득하기 위해 야전 진지에 의탁하여 유엔군의 공격을 끈질기게 지체 시켰다. 유엔군과 주야를 바꿔가며 진지를 고수하고 탄약이 다 떨어지고 겨우 두세 사람이 남았을 때에야 진지를 철수하여 유엔군은 15일간을 연속공격하여 3월 6일에야 목표선을 점령하였다.
서부전선에서는 북한군과 지원군이 유엔군이 공격하기전 이미 한강 북안으로 철수하여 미 제1군단은 전투없이 한강 남안에 도착하였다.
중부전선에서는 양평-횡성-아지동 일선에 지원군 진지를 유엔군이 15일 동안 공격한 후 이 선을 점령하였다. 실제 전투로 점령한 것은 5km를 초과하지 못하였다.
여기서 일본인이 쓴 한국전쟁사의 킬러작전 부분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제8권 48p~)
킬러작전의 목적은 "중공군과 북한군에게 휴식과 재편성의 기회를 주지않기 위해 공세를 재개, 서부전선에서는 남한산 교두보를 돌파하여 한강선을 점령하고, 중부전선에서는 지평리-횡성-방림리 북방선으로 진출하며, 동부전선에서는 강릉 북방선으로 진출하여 불균형한 전선을 수정함과 동시에 본격적인 북진준비를 한다"고 되어 있다.
이를 위해, 미 제9군단은 미 제24사단으로 남한산 교두보를 계속 공격케 하고, 새로 배속된 미 제1기병사단이 지평리에, 미 제1해병사단을 원주 정면에 배치하였다. 이는 장차 북한군과 중공군의 중부전선 거점인 홍천을 협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에 미 제1기병사단은 제5기병연대가 지평리, 제7기병연대가 이천, 제8기병연대가 여주 동측방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으나 모두 지평리로 2월 18일 집결시켰다.
미 제1기병사단의 킬러작전간 임무는 "홍천을 향해 공격하되, 미 해병사단과 협동하여 홍천 남방의 적을 포착 섬멸한다. 그리고 일부로서 군단주력의 좌익을 엄호함과 동시에 가급적 많은 적을 견제한다"
하지만 명령대로 2월 21일 10시에 공격을 개시했지만 중공군 제39군의 강력한 저항, 그리고 무엇보다 비가 억수로 쏟아져 병력과 차량이 모두 홍수에 떠밀려 내려갈 지경이 되었다. 이 비는 40시간이나 계속내려 지금까지 눈에 덮혔던 전장을 일시에 바꾸어 놓았다. 봄을 앞둔 이러한 호우는 드문 일로서 수십년내의 기상이변이었다.
나폴래옹 군대의 모스크바 공략시 동장군의 조기 내습으로 천하무적 나폴래옹 군대가 무너지듯이, 한국전쟁 역시 이변의 연속이었다. 낙동강전선에서는 30년 이래의 혹서에 시달렸고, 인천상륙작전시는 두 차례나 태풍의 내습을 받았다. 전쟁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사태가 따르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동계 건조기에 모래가 많은 강상이 지휘소나 보급소의 위치로 적당했다. 그래서 그 당시에 많은 시설들은 강상에 설치하였는데 야간에 갑자기 하천이 범람하자 이에 당황하여 이동을 개시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유선망은 단절되었고 보급품은 유실되어 사단의 보급로는 차단 되었다.
이 비는 23일 04시경에 겨우 그쳤다. 공격을 재개한 제5기병연대가 2월 24일 최초 목표인 469고지를 탈취하고 다음의 318고지를 공격할 싯점에 공격중지 명령이 하달되었다. 제9군단장 헬기가 한강에 추락한 것이다.
미 제1해병사단장이 군단장 대행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데 "미 제1기병사단사에는, 군단이 공격을 승인했다면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포위는 가능했을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지평리 일대의 전교량, 특히 한강상의 부교가 유실되고 도섭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과연 가능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당시 사단 전장병이 하루에 두끼씩 밖에는 먹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시급한 한강 부교는 공병의 노력으로 2월 25일 04시에 완성되었지만 보급로는 여전히 통행불능 상태로 담당구역의 도로보수에 쫒기는 실정이었다.
미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 전투 이후에 부산 마산 등지에서 재정비를 완료하고 포항, 영덕 일대의 게릴라 토벌에서의 우울함을 씻고 힘차게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곳 원주일대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단의 전투상보에는" 하루 하루가 인간도 장비도 인내력의 시험이었다"라고 기술되어 있으나 2월 24일에는 횡성을 감제하는 모든 고지를 탈취할 수 있었다.
원주 북방에서 중공군의 제1선을 돌파한 해병대는 마치 지옥과 같은 광경을 보고 놀랐다. 제천부근으로부터 북상한 미 제10군단도 역시 그런 처참한 광경을 보았으며 미 공간사의 표현에 의하면 "원주와 제천북방의 모든 고지는 적의 시체로 덮혀 있었다. 황량한 산야에는 얕게 매장된 시체가 더욱 더 많았다. 중공군과 북한군에게는 확실히 예상 이상의 손실이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해병대원은 "인육시장" 또는 인간이 이렇게도 쉽사리 죽을 수 있는 것일까"라고 술회하고 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의 파탄과 킬러작전의 충격효과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가늠하고 하고 있다.
미 제1군단은 한국 제1사단으로 한강 남안의 전선을 확보케 하고, 미 제3사단과 경안리 남방지역으로 진출시킨 미 제25사단을 병진시켜 남한산교두보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때아닌 폭우와 산악지형, 그리고 중공군의 동굴식으로 구축된 호속에 숨어서 주로 반사면을 이용하여 집요하게 저항하는 중공군 제38군에게 저지되어 공격이 용이하게 진전되지 않았다.
하지만 양사단은 끈질긴 공격으로 2월 28일에는 후퇴하는 중공군 제38군을 따라 한강변으로 진출, 도하작전을 준비할 수가 있었다. 이 이후에 중공군 제38군은 다시는 제1선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들은 배수진지 이기에 필사적으로 싸운 것도 있지만 보급두절로 그 대부분은 섬멸된 것 같았다.
미 제25사단은 군단의 우일선으로 경안리 정면을 공격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사단은 제1선 연대의 보급로로서 13km의 도로를 신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도로는 13~35미터의 교량을 12개나 가설해야 했으며 3개의 고개를 폭파하고 새로운 도로를 개통할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공병대대로 하여금 이러한 대공사를 3일간에 완전히 마치게한 사단은 21일 아침부터 계획대로 공격을 개시할 수 있게 되었으나 전술한 바와 같이 호우로 인하여 공격은 중지되고 공격부대는 다시 기동로의 돌을 치우고 모래와 자갈을 깔아 또다시 12개의 교량을 가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배속되었던 한국 노무대대(약 1천명)는 완벽한 지원을 제공했다고 한다.
사단의 전투상보에는 이 공격에 있어서 '특히 두드러졌던 것은 적이 고지 후사면을 이용하여 아군의 포화를 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동시에 총검돌격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 함성을 지르며 고지로 돌격하면 적은 갑자기 사격을 중지하고 기관총과 박격포 1문을 남겨 놓은 채 고지 후사면으로 도주하는데 돌격의 위력에 압도당한 것 같았다.
(2) 적은 기관총으로 맹렬히 사격을 가해 왔다. 중대장은 고지의 적을 향해 총검돌격을 명했다. 우물쭈물하면 전멸당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백병전을 실시하여 곧 고지를 탈취하였다. 고지 전사면에 있던 47구의 적군 중 30구는 총검으로 죽었고, 고지 후사면에 있던 50구는 총검과 사살이 반반 되었다.
(3) 제1소대가 적진의 우측으로 진출하여 함성과 함께 총검돌격을 감행했다. 백병전 끝에 탈취한 고지에 200구의 시체가 유기되어 있었다. 이날 탈취한 3개의 고지에는 모두 500여 구의 시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적은 사격과 돌격을 병행하면 재빨리 도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보고는 좀 과장된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 장기간의 큰 전투에서 대규모의 백병전이 벌어진 예는 극히 적었으며 더우기 수십명을 총검으로 척살하는 예는 극히 드믄 일이었다. 그러나 미군이 총검돌격을 찬양하는 기사를 게재한 것은 전장과 상대의 특성으로 보아 이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때문이었다.
사단은 지금의 남종면 분원리로 진출하여 차기 도하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미 제8군사령부는 2월 말 정해진 목표선으로 진출했다. 한강 남안으로부터 양평-지평리 북방-횡성-방림리-강릉선으로, 부대간의 간격과 극단적인 굴곡진 부분도 없었다.
미 공간사에는 킬러작전의 성공 요인은 "적에게 간단없는 압박을 가하여, 재편성의 시간과 대규모의 반격을 위한 여유를 주지않았다는 점과, 기동성의 기본적인 원칙을 충실히 실행한 결과"라고 기술하고 있다.
중공군이 받은 예상 외의 피해에 관한 실상을 알게 된 제8군 심리전부는 즉시 "부하의 수를 세어 보라'는 간단한 투항권고 전단을 살포했다. 폭격기가 철수중에 있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머리 위에다 수백만부를 살포 했는데, 이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지만 하급 지휘관의 투항이 현저히 증가되었다고 한다.
반격이 제 궤도에 올랐다고 본 제8군은 인천항과 김포비행장의 복구에 착수했다. 그러나 1월에 있었던 철수시에 너무나도 철저히 파괴를 했기 때문에 인천항의 방파재와 기중기, 그리고 조류 조절문 등의 복구는 수주일이 걸렸으며 김포비행장의 복구는 5월에 가서야 완료 되었다.
공병은 자신들이 파괴한 것을 묵묵히 명령에 의하여 위험을 무릅스고 빠른 속도로 복구하지않으면 안되었다. "군대는 그 때와 장소에서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이다.
다음은 "리퍼작전"에 대해 항미원조사는, 그리고 일본인의 한국전쟁사에는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 기록을 보기로 한다. 먼저 중공군의 항미원조사의 내용이다.
[리지웨이의 "리퍼작전"은 "킬러작전"에 기초한 계획이였다. 목표는 서울을 탈취하고 38선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었다. 그는 유엔군 지상부대가 전 전선에서 동시에 공격하는 것은 역량이 부족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특히 서울 탈환을 위해서는 격렬한 전투를 치뤄야 했다. 이에 먼저 미 제9, 제10군단과 동부전선의 한국군이 중부와 동부전선에서 북쪽을 향해 전진하여 지원군과 북한군의 유생역량을 포로로 하거나 소멸하고, 또 지원군과 북한군 주력의 연결을 분리하고, 측익에서 서울을 향해 포위한 후 서울을 탈취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 과연 미군은 어떤 목적으로 리퍼작전을 구상하게 되는지 일본인의 기록을 알아 본다(제8권57~)
킬러작전에 대해 1선 사단이 만족하고 있는 데 반하여 리지웨이 장군은 극히 성과를 불충분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제천 북방에 진출하고 있었던 중공 제66군과 북한군 제5군단도 포착하지 못했고, 원주 북방의 중공 제40군과 지평리 정면의 중공 제39군에 대한 공격도 때아닌 강우로 인해 시기를 놓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 비는 중공군 편이었다. 폭우로 중공군과 북한군은 교묘히 킬러작전에서 벗어나 철수를 완료했다.
[맥아더 원수의 구상]
한국에 있는 중공군을 섬멸시킬 목적을 위한 장기전략계획을 입안시켰다. 물론 이 지역에서의 항구적인 평화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안된 계획의 주안점은 "만주로 연결되어 있는 중공군의 병참선을 공격하여 전선의 중공군 전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한. 만 국경선부근에 해상 및 육상 상륙작전을 시행하여 일거에 중공군을 섬멸시키는 것이었으며 그 기본구상은 다음과 같다.
제1기 작전 : 광정면에 걸쳐 제한된 공격을 가하려 서울을 탈환하고 차후 공세의 발판으로 삼는다. 북한의 북부 전역에 대규모의 공습을 감행하여 적의 후방을 차단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적의 모든 주보급로에 방산을 폐기물을 투하하여 한국과 만주간의 교통을 차단한다
제2기 작전 : 상황이 허용된다면 국부군(대만)도 사용하고 다시 증원을 받을 수 있다면 북한의 동.서해안 북단 가까이에 상륙 및 공수작전(착륙작전?)을 실시하여 적을 거대한 포위망으로 압축 섬멸한다.
[리지웨이 장군의 계획]
리지웨이 장군은 맥아더 원수의 제1기 작전의 완수, 즉 서울을 탈환하고 38선까지 밀어올리는 데 있었다. 하지만 아직 50KM 이상의 산악지대가 가로놓여 있었다. 중공군과 북한군이 방어태세를 갖추기 전에 공세를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리퍼 작전의 목적은 킬러 작전의 목적을 계승한 것으로, 중. 동부전선에서 간단없는 압박을 계속하여 중공군과 북한군의 주력을 격파하고, 그들에게 반격의 야유를 주지 않음으로서 그들이 사수를 기도하고 있을 서울의 포위태세를 조성하는데 있었다.
즉 전전선에서 일제히 공세를 취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하고 서울 탈환은 다시 대격전을 예성케 함으로우선 우익부터 밀어 내는 것은 적의 주력이 이 정면에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기 대문에, 그 공세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며, 또 동부의 북한군과 중부의 중공군과의 연결부분을 돌파하여 이것을 분단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작전명인 리퍼라고하는 것은 종으로 절단하는 톱을 의미하므로 중공군과 북한군을 톱으로 설어서 자른다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서울 동측방으로부터 춘천을 향해 동북진한 다음, 38선 남안에 이르는 요충지를 연결하는 공격축선을 선정하여 이것을 "아이다호선"이라 명명하였다.
미 제1군단은 미 제3사단과 한국 제1사단으로 한강변을 확보하고, 서울 주변의 중궁 제50군과 북한 제1군단을 견제한다. 또한 한국 제1사단은 김포반도를 탈환하여 서울 서측방을 위협한다. 미 제25사단은 한강을 도하, 서울 동북방으로 진출하여 서울을 포위할 준비를 한다.
미 제9군단은 홍천을 협격한 후 춘천부근의 아이다호선으로 진출한다. 미 제10군단, 한국군 제3 및 제1군단은 각각 정면의 적을 격파하면서 순차적으로 통제선을 통과하여 아이다호선을 점령한다.
공격개시는 빠른 편이 좋았으나 도로 보수가 뒤따르지 못햇고, 미 제25사단의 도하준비를 주도면밀히 하기 위해 연기를 거듭한 후 최종적으로 3월 7일로 확정했다.
미 제25사단의 도하
2월 28일, 분원리로 진출한 사단은 6일간에 걸쳐 도하공격준비를 서둘렀다. 사단의 임무는 한강 합류지점에서 도하하여 금곡리로부터 청평에 이르는 경춘선으로 진출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있었으며, 그 주목적은 경춘선의 차단과 서울 동북방으로부터 포위할 태세를 갖추는 데 있었다.
미 제 제25사단은 제24. 27. 35연대를 병행시켜 일제히 도하하여 경춘선(알바니선이라 호칭)으로 진출하고, 배속된 터어키 여단이 청평을 점령하면, 미 제9군단의 좌익인 미 제24사단과 연결시킬 계획이었다.
사단은 신중하고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특히 신중을 기하였다. 기상변화를 고려하고, 중공군과 북한군의 반응을 다각도로 검토하고, 이용가능한 화력은 모두 집결시켜 도하 예행연습을 반복했다. 포병 10개 대대 148문, 전차 100대, 중박격포 48문이 공격준비사격을 20분간 실시했고, 제1제대가 06:15분에 도하를 개시했다.
물론 10여 대의 전투폭격기가 공중대기하면서 근접지원을 하고, 한국 제1사단과 미 제3사단이 양동을 실시하여 중공 제50군의 도하지점으로의 이동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와같이 대규모로 주도 면밀하게 도하지점으로의 적 병력집중을 방해한 것은 도하사단이 경춘선에 접근하면 중공군이 신속하고도 과감하게 반격해 올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리지웨이 장군과 제1군단장 밀번도 현장에 와서 지켜보고 있었으며, 경춘간의 철도와 국도는 중부전선 최대의 요충지인 춘천을 잇는 대동맥으로 이것을 차단당하면 38선 이남에서 중부와 서부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상했던 그대로 치열한 반격이 개시 되었다.
그러나 막강한 화력으로 적을 압도한 미 제25사단은 11일에는 일제히 알바니선(양수리-양덕원리-노천리-태기산-속사리)으로 진출, 서울과 춘천을 잇는 동맥을 차단했다. 도하 당일 밤 중공군의 야습은 일찌기 없었던 격렬한 것이였으나 미 제25사단은 "첫날 적에게 준 피해는 막대하여 살상 5,200명 이상, 포로의 숫자는 최고의 기록"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반격이 당일 밤에 한해 실시 되었고 규모도 크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차후 기도를 시사해 주는 것이었다. 즉 중공군은 결전을 회피하고 다시 물러서서 반격하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한번 중공군의 항미원조사의 내용(2권 403p~)을 보면 이미 중공군은 보급문제와 피로에 지친 병력을 교체할 지원군의 도착이 지연되어 주도면밀하게 대항할 능력이 미흡했다. 따라서 팽덕회가 3월 11일 상부에 보낸 전보에서 "적을 계속 피로하게 하고, 아군의 방어선을 축소한다, 시간을 획득하기 위해 서울을 포기하고, 운동방어 방식으로 유생역량을 보존하고, 적 주력을 흡수하여 38선까지 진출하도록 한다." 13일 저녁 지원군과 북한군은 주동적으로 서울을 철수하여 14일 새벽까지 모두 철수하였다.
실제 도하작전을 실시했던 양수리 일대의 탐사와 탐문결과가 그 실태를 어느정도 보여준다.
경기도 광주 남종면 분원리에서 남한강변을 따라 반월형의 검천리-수청리-운심리, 운심리에서 다시 동북방향으로 강하면 병산리-강상면 세월리까지의 강 이남의 주요격전지는 사실상 찾아보기 힘들었다
.
광주시 경안동 일대를 중앙으로 서측은 남한산성군의 산악지대와 동측은 무갑산-관산-앵자봉-양자산으로 연결되는 횡적인 고지대군이 일선형으로 주 방어지대를 형성한 중공군의 흔적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러나 킬러작전과 리퍼작전을 위한 유엔군의 진출이 한강변에 이르면서 중공군은 강북으로 제1세력들이 철수를 하고 그 일부만 남아 유엔군의 진출을 결사적으로 저지하였다.
도하작전이 진행된 지역은 지금의 하남 검단산과 광주 남종면의 정암산 사이로 경안천과 북한강, 남한강이 합류하는 남양주시 조안면과 양평군 양서면 용담리의 양수리 일대다. 지금의 팔당호내의 소내섬과 족자섬들이 당시의 공격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차안상의 주요고지는 45번국도를 기고 우측에는 조안에서 와부읍의 덕소리 일대의 예봉산-갑산-운길산에서 동북방향으로 수리산-고래산-문안산, 그리고 경춘국도인 46번 도로 윗쪽으로 천마산-송라산-두리봉, 이어서 경기 가평일대로 이어진다.
한편 북한강 우측의 양평 양서면과 서종면의 지면은 용담리의 부용산(366m)이외는 별 고지군이 없다. 그 우측이 바로 용문산군으로 청계산(656m), 옥산(58m), 유명산(862m), 어비산(829m), 용문산(1157m), 중원산(800m), 용두리선이다. 미 제24사단(일시적 국 제19연대 배속)과 국군 제6사단이 진격해 왔다.
따라서 서종면의 300~400고지군이 주고, 바로 그 우측에 북방으로 유명산-중미산(834m)-삼태봉(683m)-통방산(650m)-화야산(754m)/곡달산(630m)/고등산(591m)이 늘어지고, 그 우측이 다음에 있을 중공군의 제5차전역중 사창리에서 승리의 기쁨을 눈물로 되돌려 받는, 가장 큰 피해를 입게되는 용문산 전투의 핵심인 엄소리일대로 장락산맥이 남북으로 길게 달리고 있다.
그러니 사실, 한강도하 작전간 미 제25사단이 결전을 벌인 곳일대는 북한강 우측은 용담리의 터널고지, 북한강 좌측은 예봉산과 수리봉, 문안산 정도다. 그리고 경춘국도를 넘어서는 천마산-수리봉선, 철마산(711m)-축령산(886m)-깃대봉(624m)청우산(619m)-호명산(588m)/불기산(600m)로 가평지구 전역으로 이어진다.
주 전투 현장에서의 유해발굴 결과는 용담리 터널고지 일대에서 3구,조안리 일대 4구, 예봉산 일대 15여 구, 문안산 일대 60여 구, 경춘선 넘어 수동면의 수리봉 일대에서 10여 구이고 북한강 동안은 서종면 푯대봉 일대에서 7구,옥산에서 15여 구, 화야산 일원에서 15여 구를 발굴했다. 물론 이 발굴된 유해에는 중공군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개인호 분포도 살펴보면 북한강을 끼고 좌측 45번 도로와 우측 352 및 391번 도로변에 분포되어 있지만 실제 속사리-횡계리 일대의 갱니호 분포에 비하면 있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렇게 많이 죽었다는 중공군이 다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동네에도 거의 다 찾아들어가 보았지만 명쾌한 답이 없다.
"큰수해와 멧돼지의 침투로 훼손된 유해들!"
분명한 것은 당시는 죽어있는 시신에 대한 판단이 먹고사는 문제에 덮혔고, 사실 통제에의해 시신을 처리하는 인원들이 그리 사명감이이나 인권이 살아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니 물구덩이같은 곳에 집단으로 매장되면서 그 후에 발생하는 수해로인해 모두 훼손되어 버렸다.
하지만 산악지역에 굴토된 개인호나 포탄탄흔 자리에 매장된 인원이 주기적으로 발굴되기도 하고, 멧돼지의 침투로 수난을 격기도하며 죽은자의 존엄은 자연속으로 사라져갔다
판단하건데 중공군이 결사적으로 전투를 실시한 한강선 이남 경안리 남쪽 무갑산-갑산-양자산 일대의 유배 발굴 숫자에 비하면 작는 숫자로서 이미 중공군은 제2제대의 전선 투입을 위한 시간벌기 작전으로 최소한의 인원으로 최대의 저항을 계속하면서 내부 방침대로 38선까지는 축차적 철수를 했다고 보인다.
당시 중공군 부사령관 홍학지의 회고록(234p~)에 보면 "기동방어 기간 동안 중대한 전투는 없었다. 우리는 잠시나마 큰비를 피했다.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병력손실이 잇따르는 상황에서 후속부대가 도착하기만을 학수고대하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유엔군도 병력전개 후 추진력이 모자랐다. 크게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석전술'대로 아군을 따라다니는 꼴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3월 23일, 상대는 고양, 의정부 ,가평, 춘천 선을 점령했으며 미공수 제187연대가 문산에 4천 명의 병력과 탱크, 야포를 투하시켜 북쪽으로 이동하는 인민군 제1군단과 아군 제26군 측면을 위협하려 했다. 그러나 아군 제26군의 저항으로 기도는 실현되지 못했다. 3월말 4월 초에 이르러 아군의 최일선부대는 38선 이북으로 이동해 상대의 진공을 계속해서 막았다. 4월 10일 유엔군은 이른바 캔사스선에 도달했다."
"나무막대기 들고 방황하는 중공군"
우리는 남한산성과 하남시의 검단산일대를 많은 시간을 들여 정밀탐사 및 탐문활동을 했다. 광주시 초월읍과 곤지암읍 일대에서 이곳 남한산성과 검단산 그리고 경안천을 넘어 남종면의 분원리-수청리선에 이르는 모든 산은 다 올라가 보았다.
남한산성 북쪽에 하사창동이 있다. 그런데 사실 남한산성일대는 우리가 생각한 만큼 전투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청나라 군대와 우리군대가 국운을 걸고 싸웠던 곳이고, 6.25전쟁시에는 중공군이 한강 이북으로 철수전에는이곳에 축차방어진지를 구축한 곳이다. 남한산성 둘레를 도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는다. 동측에 가면 청나라 군대가 인조가 머물던 곳을 향해 대포를 쏘았다는 곳이 있다. 이 일대에는 그래도 호가 제법 산재해 있지만 기타지역은 생각보다 분포가 적다.
그 북쪽끝이 하사창동인데 이곳으로 내려서 마을사람을 만나니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막대기로 중공군을 잡았어요"
"아니 아저씨가 군인도 아닌데 어떻게 중공군을 잡아요?"
"그때 정말 내가 잡아서 군인에게 넘겼어요"
"농담하지는거죠, 우리는 중공군을 찾지는 않고 국군이나 경찰, 학도병의 유해를 찾고 미군의 유해도 찾아요"
"아참 이양반이 못믿네, 그때 중공군이 키가 작아요. 내가 12살로 키가 작은데 나보다 더 작아. 그런데 이놈들이 총도 없고, 인솔자도 없어. 그냥 이리저리 몰려 다니는 거야. 오라고 하면 따라와요. 배가 고파서인지 먹을 것을 주면 잘 먹어"
"언제쯤 되어요?"
"그러니까 3월 중순이 넘어서지, 그해에 한강물이 일찍 녹아서 아마도 철수를 못하고 낙오된 모양이에요. 우리는 국군이나 북한군은 못보고 중공군은 많이 보았지. 우리 동네에 그놈들이 함께 있었으니까. 미군도 많이 보았어요. 저기 이성산에서"
"아니 어떻게 미군을 보았어요. 죽은 사람도 보셨습니까?"
"미군 엠브런스에 실고 가는 것 보았지. 우리가 나중에 산에 올라가니 시신이 널려 있는데 온전한 사람은 없고 사람이 박살이 나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요"
"혹시 시간이 되시면 우리 차로 이성산에 함께 가셨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그럽시다. 그렇게 높지도 않고 산성이 있어도 길도 좋아요"
이렇게 해서 아저씨, 아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지금의 춘궁동 이성산에 올랐다. 지금은 활엽수가 일부 울창하지만 탐사에는 지장이 없었다. 언제 쌓여진 성벽인지는 명확하지않아도 꽤나 오래된 성벽인데 대부분 무너져 내렸지만 윤곽은 그대로다. 특히 북쪽 부분에 성벽이 뚜렸했다.
"어르신이 이곳에 언제 올라왔어요?"
"중공군이 들어온 해인데 막 봄이 오는 시기인데 미군이 이 산에 왔어요. 그런데 얼마 있으니까 산위에 난리가 난거야. 포탄이 씽씽 날라가는 소리, 비행기 폭격이 가해지고 그러더니 얼마있으니 미군 엠브런가 달려오더라고. 그래서 어린 나이에 신기해서 쫒아가 보았지. 차에 피가 줄줄 흘리는 군인들이 실려나가는 것 다 보았어요."
"그럼 미군이 미군을 오폭했다는 말씀인 것 같은데~"
"나중에 들으니까 중공군은 그 이전에 한차례 미군의 폭격으로, 뭐 원자탄이라 하던데 불폭탄을 맞고 엄청 죽어버렸고 살아난 놈들은 한강 넘어로 도망쳤고 미군이 들어와 어떤 일인지 오폭을 하게 되었다고 들었어요"
"그럼 미군이 떠나간 뒤에 산에도 올라갔습니까?"
"그럼요, 올라가 보니 사람이 갈기갈기 찢어진 모습으로 여기저기 뒹굴고 있고, 우리가 얼마 동안 이곳에서 전쟁놀이 했는데 그당시에 뼈를 들고 했어요. 그걸 집에 가져갔다가 할아버지께 혼도 났지"
그러나 탐사결과 유해는 찾지못했다. 있다면 중공군일 확률이 높지만 그래도 한구라도 찾고 싶었는데 보이질 않았다
"중공군을 찾으러 간 것이 아니고 전쟁사의 진실을 밟으려했다"
사실 1번국도를 끼고 국군 제1사단이 움직인 곳의 전사는 명확하게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우측의 국군 제6사단의 행적은 이 시기에 관한 것이 별로 없다. 무갑산일대의 혼전도 미 제25사단이 주로 전투를 하였다고 하고, 그 우측에 미 제24사단이 진격하는데 우리 국군 제6사단의 제19연대가 배속되어 움직이는데 어디서 전투를 했는지 전투상보를 뒤져봐도 시원한 답이 없다.
하지만 지역주민의 제보는 "상열미리일대 고지군에서 시신이 노무자들에 의해 실려오고 차량에 실려 나가는데 마치 트럭에 강바닥 모래를 실으면 줄줄 물이 흐르듯 핏물이 쏟아졌다"는 내용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었다. 유해가 300여구나 발굴 되었는데 모두 중공군일수도 없다. 미군에 지원나간 노무자나 카츄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군복을 입고 유해운반 차량에 누워있는 군인중에 국군도 많았고 미군도 많았다는 제보다.
"변화무쌍한 미군의 전투편성의 오해"
1.4후퇴 이 후의 유엔군의 재반격 작전을 대략 개설하면 다음 단계와 같다
1) "울프하운드 작전: 위력수색작전"
미 제8군사령관은 1951년 1월 15일부터 미 제1군단에 오산-수원 간에 집결된 적의 부대규모와 방어력을 확인하도록 한다.
미 제1군단은 미 제25사-27연대에 1개 전차대대를 증원시켜 임무를 부여한다. 이를 부대 명칭을 따서 "울프하운드 작전"이라한다. 미 제25-27연대는 1월 15일 1번도로를 따라 북진 중, 적과 접적이 미약하였으나 도로 및 교량이 파괴되고 적의 도처에 설치된 지뢰 및 장애물로 진출이 지연되어 오산 북쪽에, 서해안 39번도로를 이용한 부대는 발안장에서 진출을 중지한다.
그 우측방을 보호하기 위해 천리로 진출하는 국군 제1-12연대 제2대대는 금량장리 남족 17번도로 상의 천리에 별 접촉없이 진출하지만, 미 제3-15연대 제1대대와 전차 중대는 수원-금량장리 간 20번 도로를 차단하도록 진출 중에 금량장리 북쪽에서 중공군 600~800명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진출이 돈좌 되었다.
1월 16일에 부대들은 철수 명령을 받게 되고, 군단은 적의 진출선과 규모를 확인하게 되었다. 최초의 판단은 중공군 제13병단이 들어와 있으리라 판단했지만 한강이남으로 들어온 부대는 제150사단이었다.
미 제9군단은 미 제1군단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국군 제6사단을 금량장리-백암선에 배치하고 상주에 머물고 있던 군단 예비인 미 제1기병사단의 제70전차대대를 진천으로 전진 배치하여 국군 제6사단을 지원토록한다.
따라서 군단은 금량장리-이천-여주를 연결하는 도로 남쪽지역에 활동하고 있는 적을 포착하기 위해 여주에 미 제24사단 1개 대대를, 중앙의 이천에 전차로 증강된 1개 대대를 배치한다.
그러나 접적이 없자 1월 22일 제8기병연대에 제70전차대대를 편성하는 "잭슨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백암리의 국군 제6사단 전초진지를 초월하여 양지리로 진출시켜, 금량장리-이천 간의 20번 도로 북쪽 고지대를 정찰하도록하였으며, 소규모의 적이 주로 도로변에 배치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2)제2전선부대 차단
서부전선이 안정되어 위력수색을 실시하여 한강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고 있는동안 , 동부전선은 중공군 신정공세(1.4후퇴)와 대를 맞추어 인민군 제2군단 4개 사단이(제2.9.10.31사단) 홍천-횡성-원주 선으로 종심깊이 침투하여 산악지대를 이용하여 제천-영월 남쪽의 단양, 문경, 영주, 안동 일대에 제2전선을 형성하게 된다.
이에 동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과 제1군단은 홍천-주문진의 방어선을 유지못하고 1월 5일 영월-삼척(황우선)으로 철수하였다.
1월 9일 새로 부임한 유재흥 제3군단장(전임은 이형근 장군)은 영월 북쪽의 남한강을 따라 좌전방애 제7사단을 영월 북동쪽 완택산 일대에, 우전방 제9사단을 정선부근에 배치하고, 예비인 제3사단을 춘양에 배치하여 적의 이동을 차단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게 하였다.
인민군 제2군단은 낙동강전투 이후 동부산악지대로 철수하면서 낙오된 패잔벼을 규합하여 화천-김화-양덕에서 재편성하여 유엔군이 평양에서 철수시에 게릴라전을 수행하고 있다 중공군 신성공세가 개시되기 전에 침투를 개시하였다.
인민군 제2군단은 전위에 제10사단, 우전방에 제2사단, 좌전방에 제9사단, 그리고 제31사단을 후속제대로 편성하여 남하 중에 선봉인 제10사단이 원주에서 미 제2사단과 조우하자, 미군과의 접촉을 피하면서 29번도로 동쪽으로 침투하여, 제10사단이 영월로 남하함으로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 사이에 24km의 배치공간이 생겨 생겨서 접적없이 진출할 수 있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10군단의 최대의 위협은 원주로 내려오는 북한군 제5군단이 아니라 이 통로로 침투중인 북한군 제2군단이라 판단하고 미 제10군단에게 지역내 북한군을 격멸하도록 명령했다.
이를 위해 1월 11일 제8군의 예비인 , 상주에 머물고 있던 제187공수연대전투단을 안동으로 이동시켜 제10군단에 배속하고, 안동-영덕 간의 도로 남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함흥에서 철수하여 마산에 대기 중인 미 제1해병사단을 영천-경주-포항 지역으로 이동시켜 후방 경계를 강화하였다.
미 제10군단장은 제천-영월 사이를 방어하기 위하여 문막 동쪽의 국군 제5사단을 이 지역으로 이동시키고, 미 제7사단에게 정찰활동을 강화하도록 했다.
그리고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국군 특별공격대대(대대장 배동걸 소령)는 1월 12일 문경 황장산 하록의 적성리에서 1,000여 명의 북한군 제10사단의 침투부대를 격멸하게 된다.
또한 미 제10군단장은 이미 종심깊이 침투한 적을 찾아내기 위하여 종심깊은 정찰을 확대하기로 하고 여주-원주 선에서 운남리-제천 북쪽으로 방어선을 남하시켜, 미 제2사단이 주방어선을 전담하고, 문막일대의 국군 제5사단을 영춘에, 제8사단을 황강리로 투입하였다.
북한군 제2군단은 이미 안동-의성 지구로 침투한 제10사단과의 연결을 위해 북한군 제2사단이 1월 12일 단양 우측 원만허의 형제봉 일대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의 전투지경선인 남한강변을 따라 침투한 제9, 31사단이 국군 제3군단의 후방지경선인 영주-봉화-춘양을 확보하기 위하여 영월 동남족 옥동리와 남대로로 집결 중에 있었다.
적이 침투한 지역은 속리산-이화령-죽령-소백산-태백산으로 연결되는 소백산맥 지역으로 산악거점을 점령하여 활동이 용이하였다.
이에 미 제10군단장은 미 제7사단을 제천에서 영월 방면으로, 제187공정단은 제천-영주간의 29번도로 주변을, 국군 제2사단의 제17연대가 단양에서 충주에 이르는 도로변을 수색정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국군 제5사단 주력은 영주 북쪽의 군단후방을 정찰토록 하고 국군 제2사단 주력이 문경새제에 집중 배치하여 산속에 고립된 패잔병의 단양진출 차단하도록 한다.
국군 제3군단은 군단 방어선인 두평-후천-정선-송계리 전방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이 없자 예비인 국군 제3사단을 공격에 투입하여 1월 18일 남대리 어래산 선달산일대로 공격을 하고 동북쪽에서 국군 제7사단이 영월쪽에서 미 제7사단 17연대가 영월 포위공격을 실시하여 북한군 제2군단은 1월 22일경, 와해된다.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북한군 제5군단 예하 제27사단을 제천방향으로 투입하여 계속저항은 하였으나 제2군단을 평창부근으로 철수토록 하여 1월 말경 철수를 하게 되고 이미 내륙으로 침투한 북한군 제10사단은 안동으로 진출 도중에 북에는 미 제10군단이 남에는 미 제1해병사단(국군 제1해병연대 배속, 제5대대가 중강됨)에 포위되어 1월 18일부터의 수색작전에 완전히 조직이 와해 되어 버렸다.
당시 미 제8군이 판단한 피해정도는 북한군 4개 사단 16,000명 중 생존자는 8,600명 정도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 하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 어필되는 전투가 문경 적상리와 영월부근 전투인데 과연 우리의 유해발굴을 위한 탐사와 발굴결과와는 어떤 함수관계가 있을까?
가) 문경 적성리의 진실?
먼저 문경지역은 바로 전쟁 이전에도 북한군 유격대가 침투해 들어온 동로지역이다. 지금 경천호 서쪽 강변에 당시의 경찰 충혼비가 서있다.
적성리는 면소재지에 있는 마을로 지금도 그 당시의 학교나 지서(위치 변경) 등이 있다. 북쪽에 1077M의 황장산(월악산 국립공원)이 굽어보고 동북쪽에는 소백산 국립공원이다. 벌재를 넘어서면 충북 단양이다.
나는 2003년 충북 증평의 보병 제67 동원사단 연대장으로 일시적 보직을 받아 근무하게 되면서 자주 이곳에 찾아와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실제 당시의 전투지역이라는 곳을 탐사했다. 하지만 결론은 의문이 남는다.
당시에 소문이 황장산은 영험한 산이라 해서 많은 피난민들이 들어와 있었다고 한다. 배동걸 특수임무부대가 1,000여 명의 북한군 침투부대 또는 패잔병을 섬멸했다고 하는데 정말일까?
이렇게 많은 군인이 죽었다면 어딘가에 그 흔적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소문만 무성하지 그 실체는 없다. 동네분들도 이야기가 엇가린다. 하지만 같은 내용은 그렇게 많이 죽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북한군이 구축했다는 방호선을 따라 열심히 지탐기를 돌리고 일부지역은 시굴을 해 보았다. 하지만 마을 뒤편으로 해서 굴토했다는 일부 교통호의 흔적은 확인했으나 시신과 관련된 정황은 찾지못했다.
나) 영월, 남대리 일대의 진실
김삿갓 묘소가 있는 어래산 지역은 '06년도에 처음 들어가 동네분들이 끌여주는 어죽을 먹으며 탐사가 시작되었다. 워낙 산새가 험하고, 정말 하늘 몇 평만 보이는 지세다.
지역 제보자 한 분을 만나 본인이 직접 산에서 몇구가 함께 죽어있는 개인호를 목격했다는 제보에 따라 산에 올라 이 지역일대 산은 거의 다 찾아가 보았다. 주변의 민가도 그렇게 많이 분포하고 있지않았다.
영월시가 지역도 인근에 천문대가 있는 봉래산이나 태호산 계족산 응봉산 망경대산 등 남한강을 끼고 형성된 고지군과 31번 도로 우측의 예미산이나 중동면 녹전과 외룡리를 탐사 및 탐문하여 때에 따라서는 시굴도 하고 발굴팀을 투입하여 발굴도 해 봤으나 사실 2~3구의 유해만 발굴하였다.
풀리지않는 의문은 북한군은 모든 시신을 전부 가져갔는지, 아니면 우리가 모두 회수하여 화장처리했거나 아니면 일정장소에 매장해 버렸는지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경기 가평의 설악면 선촌리 강변에 떠도는 시신"
동네분들은 대부분 그 당시에 관여한 사람은 안계신다. 소문이나 어려서 목격한 분들인데 몇구는 보았다는 제보는 종종 있다. 영월시가만해도 시내 전체가 시신으로 가득했다고 하는데 그 많은 시신을 전부 동강이나 남한강에 띄워보내 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타문과정에 강물에 띄워 보냈다는 제보는 직접 듣지 못했고 떠나니는 것은 보았다는 곳이 있긴 하다. 바로 경기 가평의 설악면 선촌리의 한강 강변이다. 이곳은 중공군 4월 공세시 밀고 내려와 용문산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이 대승을 거둔 곳인데 이곳에 가면 죽은 시신이 뗏목처럼 강변에 몰려왔다는 제보는 쉽게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영월이나 남대리, 정선일원의 북한군 관련 제보는 별로 없다. 오히려 국군이 들어와 이상한 짓을 하고 북한군에 역습을 당해 여기저기 죽어있었다는 제보는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참 묘한 일이다. 국군이 아니면 북한군이라도 있어야하는데 그 흔적마저 없으니 말이다.
다) 어디에서 북한군의 유해를 찾을까?
유해발굴을 하면서 많은 의문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발굴되는 유해가 국군인지 아니면 북한군이나 중공군은 아닌지 말이다. 하지만 인류학적으로 많은 상식은 없지만 우리는 같다. 그러니 뼈대의 특징으로 구별은 힘들다. 그렇다고 대부분 유품이나 제보 내용으로 판단하게 되는데 이것 또한 미스테리다.
"중공군이나 북한군의 30%이상이 미군 장비를 사용했다"
중공군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미군 장비를 사용하는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를 흡수하였다. 그러니 자연스레 미군 장비를 사용했다고 보며, 실제 지역 제보자들의 이야기는 총은 장총(소련제 모시나칸트 총)을 갖고 있긴 하지만 우리의 칼빈소총과 M1소총을 거의 휴대하고 있었다 한다. 북한군은 아예 미군 무기(전투간 획득한 것)로 전투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란다.
"소총이 필요하면 0사단에 갔다와라"
우스개소리치고는 치욕적인 이야기지만 실제 우리 참전용님들도 "우리 사단이 북한군의 보급대였다"라고 서슴없이 이야기 한다. 도대체 어느정도 군기가 없고 전투력이 없었으면 그랬을까!
하기야 횡성지구에 들어가 탐문과정에 지역주민들 이야기가 이구동성으로 "소총을 수 천 자루 보았으며 북한군이나 중공군도 안가져가더라, 그래서 국군이 다시 수복해 들어왔을 때에 지게에 져서 파출소에 갔다 주곤 했다"는 이야기는 쓴 웃음을 나게 했다. 그러니 유품으로 유해의 국가를 구별한다는 것도 큰 한계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혹시라는 의문에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일단 아군으로 분류한다"는 원칙아닌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
3) 파괴적 위력수색작전 : 썬더볼트 작전
이 계획은 미 제1군단과 제9군다이 전차로 증강된 미군 1개 사단과 군단장의 판단에 따라 국군 1개연대를 추가로 투입하여 1월 25일에 작전을 개시하여 한강까지 수색정찰을 펼치도록 하였으며 서해안-오산-여주를 연하는 공격개시선을 점령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이 처음 재반격작전이 시작되던 '51. 1. 25~31일까지의 한강 진출전 지면편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가) 수원-이천 진출 작전
미 제1군단은 D선으로 철수하여 3주 동안 부대 정비를 마치고 1월 25일 좌전방 39번 도로와 1번 도로 사이에 미 제25사단의 제35연대를, 우전방 55번 도로에는 터키여단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중공군 제50군은 2개 사단을 이곳에 배치하고 있었다.
미 제25사단에 배속된 터키여단이 신갈 남쪽 151고지와 금량장리를 공격하여 474구명의 중공군을 척살하였고 이로인해 '52. 9월에 미 대통령과 이승만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다고 기록되고 있다.
이 전투 이후에 미 제1군단은 터키여단을 서해안으로 이동시키고, 미 제3사단을 수원 동쪽 55번 도로 축선에 투입하고 안성일대에서 경게임무 중인 국군 제1-15연대를 미 제25사단에 배속시켰다.
그리고 사단이 2개의 기갑부대로 경부국도와 안양-소사-인천 도로를 따라 공격하여 한강선에 도착하기 전에 수리산 일대를 점령하도록 하였으나 적의 저항이 완강하여 1월 31일이 지나서 통과하였다.
미 제9군단은 좌측에 미 제1기병사단이 김량장 북방으로, 이천의 미 제24사단이 남한강을 끼고 우측에서 진출하도록 하였다.
1월 26일 제8기병연대가 양지리 부근에서 적의 저항으로 28명이 전사하고 141명이 부상하는 피해를 입어, 제5기병연대를 초월 공격하여 300명을 사살하고 17번 도로를 따라 진출하자, 28일 미 제24사단을 군단의 우익으로 투입하였으나 진출은 31일 이천 북쪽에 제2통제선을 조금 지난 상태였다.
"이 기록에서 혹시나 수리산 전투를 중공군이 아닌 북한군이 주도적으로 하지않았을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1월 29일, 획득한 포로들의 진술을 통하여 접적 중인 정면의 적은, 서해안과 1번 국도 사이에는 북한군 제1군단 예하의 제8사단이 터키 군과 미 제25-35연대의 전방에, 그리고 그 후방엔 북한군 제47사단이 인천에, 제17사단이 영등포 일대에 배치 되었다. 또한 1번 국도와 17번 도로 사이에는 중궁군 제50군 예하의 제148, 제149, 제150사단이 미 제25사단과 미 제3사단 및 미 제1기병사단의 진출을 저지하였다. 그리고 17번 도로에서 동쪽의 남한강까지는 중공군 제38군 에하의 제112, 제113사단이 미 제24사단의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수리산 전투는, 일본 전사나 우리 전사에 미 제25사단 및 터키여단이 중공군과 전투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고 북한군 기록에는 본인들이 영웅적으로 전투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무엇이 맞는건지 알 수 없다. 나는 여기서 10여 구의 유해를 발굴했는데 중공군인지 북한군인지 아니면 아군인지 잘 모르겠다. 유품은 대다수 모시나칸트탄과 탄피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미 제10군단은 한강진출 작전의 우전방을 지원하기 위하여 미 제2사단이 여주 우측에서 지평리로 진출한다.
나) 인천-서울-곡수리 진출
다음은 '51. 1. 31~2. 11일까지, 즉 중공군 2월공세 전에 인천-서울-곡수리 진출전 지면편성은 다음과 같다.
미 제1군단이 서해안지역에 터키여단이 계속하여 김포방향으로 진출하고 미 제25사단(터키여단과 미 제25-35연대가 수리산 공격 탈환)이 안양-관악산 방향으로(국 제1사단 제15연대 배속: 모락산-관악산 탈환, 2월 10일 노량진-영등포선 진출), 미 제3사단이 남한산 교두보 좌측지역 3번국도를 따라 진출(검단산과 청계산 경유 한강선 진출)한다
미 제9군단이 좌측에 미 제1기병사단이 계속하여 남한산 교두보를 향해 진출하고, 남한강 서측변을 끼고 미 제24사단이 국군 제6사단 제19연대를 배속받아 사단의 좌일선에 남한산 교두보를 향해 진출한다. 우일선은 미 제24-21연대가 남한강 동측변을 끼고 진출하며 그 우측에 미 제10군단 미 제2사단이 지평리 일대로 진출한다.
당시에 정보판단은 유엔군과 국군이 그렇게 빨리 반격을 해오리라 조중지원군 사령부는 판단하지 않고 있다, 아군의 반격이 빨리 진행되자 27일경부터 유엔군의 공세에 대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은 유엔군이 2월초에 대규모 반격이 진행될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갑자기 중공군 제13병단 주력들이 한강 북쪽에 집결되어 있었으나 지평리, 가평 북쪽지역으로 이동이 현저히 증가되어 미 제8군은 이를 적이 한강 남쪽에 주저항선을 설정한후 병력을 증원시켜 배수의 진을 치고 완강헤게 저항할 징후라고 판단하였다.
이로인해 미 제8군은 미 제1군단장에게 기갑부대로 서해안 저지대로 진출계획을 수립하고, 미 제5공군은 한강이남에 강력한 항공폭격으로 적을 고립시켜줄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미 제10군단장과 국군 제3군단장에게도 29번 도로 축선으로 집결 주인 북한군 제2, 5군단의 재편성을 저지할 수 있도록 서부전선의 한강 진출전과 같은 작전을 검토하도록 한다.
미 제1군단은 1월 31일, 미 제25-35연대와 터키여단, 그리고 국군 제15연대로 안양 남쪽의 수리산-모락산을 공격하였으나 중공군 제150사단의 저항이 완강하여 수리산 진출이 지연도자 미 제25-27연대를 터키여단쪽으로 투입하여 진지의 일부를 점령한다.
한편 국군 제15연대는 1월 31일 모락산을 미 전차의 지원하에 공격하여 5일만에 백병전으로 진출하였다.
미 제1군단장은 미 제25사단이 안양선으로 진출하자 "알렌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미 제25사단 전방의 적진지를 돌파한 후 한강으로 진출, 인천-영등포에 이르는 도로를 차단하고 김포공항 서쪽을 공격하도록 하고, 우전방 미 제3사단은 검단산과 청계산을 경유하여 한강까지 진출토록 하였다.
이 무렵 안양선으로 후퇴한 적도 관악산에 배치된 북한군 제47사단과 합류하여 방어거점을 강화하고 , 인천에 대기중인 제17사단도 이 지역으로 증원되었다.
미 제8군사령관은 한강선으로의 진출을 재촉하여 2월 9일, 국군 제1-15연대가 관악산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10일 노량진-영등포 선으로 진출하여 적과의 접촉이 가장 경미하여 먼저 한강변으로 진출한 미 제3사단과 연결하였다.
미 제25사단의 기갑부대도 10일 인천으로 진출하였으며, 북한군 제1군단은 한강을 도하 퇴각하였다. 이로써 적의 저항없이 인천-영등포 도로를 점령한 후 계속하여 김포공항과 김포반도로 진출하였다.
이로써 미 제1군단은 인천-영등포-대모산으로 진출, 서울 공격을 목전에 두고 도강준비에 주력하였다.
미 제9군단은 미 제1군단의 우익으로 2월들어 적의 적정이 경미하여 2월 8일까지는 무난히 한강변에 진출할 것으로 판단했으나 남한산과 양자산으로 연결된 산악지대로 접근하면서 도로망의 결핍과 기상악화로 항공지원마저 제한되어 공격이 돈좌 되었다. 남한강을 전투지경선으로 그 우측은 미 제10군단 미 제2사단이 지평리로 진출 중이었다.
미 제9군단 제24사단(국 제6-19연대 배속)이 남한강변 동측을 끼고 남한산 교두보의 우측인 이천-여주선에서 진격을 하여 남한산-양자산을 연하는 적의 교두보를 확보하지 못했다('51. 2. 5~10, 국19연대가 5일배속됨). 미 제1기병사단이 이천-금량장선에서 남한산 교두보의 좌측인 경안리로 진출 중이었다.
이로써 미 제8군사령부의 한강진출작전은 인천-서울-양평 서늘 목표로 하였으나, 남한산-양자산을 연하는 적의 교두보를 남갸 둔채 일단 종료 되었다.
이 무렵 미 제5공군은 진해와 수영 비행장, 그리고 주력은 1.4 후퇴당시 일본에서 이전하여 항속거리와 무장문제가 많았으나 원주, 충주, 안동에 비상활주로를 건설하여 지상작전을 지원하고, 한국전 최초로 1월 23일 한만국경선 부근에서 F-84E 전폭기 33대가 MIG-15 전투기 25대와 공중전을 펼쳐 적기 3대를 격추하였다.
한국 공군 비행단은 대전기지 폐쇄로 제주기지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비행훈련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해군은 유엔군이 재해권을 확보한 가운데 황해도 지역에서 해상으로 탈출하는 많은 피난민을 서해 5도(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를 비롯한 연안도서로 구출하였으며 동해안 38도선에서 영일만까지의 연안에 부설된 기뢰를 소해하였다.
4) 홍천 포위공격("라운드업 작전")
서부전선에서 미 제1, 9군단이 한강 진출작전을 펼치는 동안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은 1월 중순 적 제2전선부대의 침투로 제천-영월 이남지역에 형성된 돌파구내의 인민군을 격파하고 원주-평창 선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때 미 제10군단의 미 제2사단이 한강진출작전의 동측방을 엄호하기 위하여 여주-원주를 연하는 선을 점령하고 일부 부대로 그 좌측의 미 제9군단 예하 미 제24사단과 협조하여 지평리까지 수색정찰을 실시하였다. 이런 과정에 1월 29일 지평리 남동쪽의 쌍터널을 목표로 수색정찰중에 중공군 제42군 예하 제125사단의 역포위에 걸려 2개 연대를 투입하여 결전을 치러야 했다.
1월 말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강력한 적이 24번도로와 29번 도로의 교차점인 홍천부근에 집결하고 있었다. 미 제10군단장은 전략 및 전술적 요충지인 홍천을 신속히 양익 포위하여 적의 증원 거점을 분쇄하고, 동시에 후방 침투에 실패하고 국군 제3군단 정면에서 퇴각중인 인민군 제2군단을 추격 섬멸함은 물론, 아군이 홍천-대관령-강릉 선으로 진출하여 차기 공격에 유리한 발판을 확보할 목적으로 국군 제3군단과 협조된 공격을 계획하여, 이 작전을 "몰이", 즉 포위한다는 의미로 "라운드업 작전"이라 명명하였다.
이를 위한 전투편성은 미 제10군단은 지평리-횡성에 미 제2사단, 횡성 남동쪽 치악산 북쪽에 미 제187공수여단, 평창 남서쪽 주천리 일대에 미 제7사단을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공격제대로 좌전방에 국군 제8사단, 우전방에 국군 제5사단을 투입하여 홍천 포위공격할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미 제2사단은 1개 야포대대(증강), 자동화기 포대, 차량화 보병부대로 편성된 제21지원부대를 편성하여 국군 제8사단을 직접지원하도록 하고, 미 제7사단도 잉런 규모를 편성하여 제7지원대를 국군 제5사단을 지원하며, 추가로 미 제2사단에서 2개 중대 규모의 보전조를 편성하여 국군 제8사단에 배속시켰다.
이때 미 제10군단의 우익인 국군 제3군단은 영월-정선 선에서 북진 중에 2월 5일에 공격개시선인 평창에 도착, 북한군 제2군단을 공격하여 미 제10군단 우익 엄호에 들어갔다.
이 계획에 의거 예하 부대들은 공격대기지점으로 이동을 개시, 좌전방 미 제2사단 제23연대는 지평리를, 중앙의 미 제38연대는 횡성을 점령하였고, 군단 예비인 미 제7사단은 원주 부근으로 진출하기 위해 제천, 영월에서 평창으로 이동 중에 있었다. 이번 작전에 주공인 국군 제8사단과 5사단도 제천, 영주 부근의 후방지역 경계임무를 국군 제2사단에 인계하고 원주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군단의 좌전방 국군 제8사단과 우전방 제5사단은 홍천을 좌우측에서 포위공격하기 위하여 '51. 2월 5일 08:00시에 공격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국군 제8사단은 중공군 제66군 에하의 제198사단과, 국군 제5사단은 북한군 제5군단 에하 제6사단과 접적하게 된다.
하지만 적의 저항이 강력하여 국군 제3군단의 예비인 국군 제3사단이 창리부근에서 이동하여 10일 홍천포위공격의 우전방 제대로 국군 제5사단의 좌전방지역인 횡성-홍천 도로의 우측방을 인수받아 삼매리 지역으로 들어온다
이때 국군 제3군단은 좌전방의 국군 제7사단이 평창 북쪽의 창동으로 진출 중이고, 우전방 제9사단이 정선 부근의 한강 계곡을 통과하여 하진부 남쪽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군 제7사단을 후속하고 있던 미 제7사단 제17연대가 평창 북쪽으로 진출하여 국군 제7사단을 증원할 수 있게 되었다.
가) 대관령 확보
태백산맥 서쪽의 국군 제3군단이 적 제2전선부대 소탕작전을 마치고 홍천포위공격 의 우전방을 엄호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출을 개시하자, 국군 제1군단도 제3군단의 진출을 지원하는 동시에 전선을 연결하기 위하여 경강국도의 요충인 대관령과 강릉을 공격하게 된다.
군단의 정면에는 적 제69여단 및 길원팔 유격부대 약 6,000명이 강릉-구산리 선에서 방어와 유격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에 군단은 강릉과 구산리-대관령을 혹보한 다음 황병산-운계봉 선까지 전진할 계획으로 '51. 2월 3일 송계리-묵호선에서 주공인 제26연대가 강릉을, 조공인 제1기갑연대가 대관령-구산리를 공격하게 된다. 2월 5일 이후에는 에비인 제1연대가 작전지역 중앙에 투입된다.
5) 중공군 2월 공세(횡성의 대재앙)
중공군은 서부전선에서 일부 부대로 유엔군의 전진을 견제하고 일부는 한강 남안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한편, 주력을 동부전선에 집결시켜 유엔군을 종심깊이 유인한 다음 공세로 전환하는 전략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적은 북한군 제1군단과 중공군 제50군은 인천-영등포에, 중공군 제38군은 한강 교두보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유엔군이 중동부전선에서 홍천 포위공뎍을 개시하자 이번 공격의 주공인 제42군을 지평리로, 제39, 제40, 제66군을 양덕원리-홍천 일대로 추진 배치하였다. 그리고 동부전선의 북한군 제2, 3, 5군단도 홍천 동쪽으로 집결하였다.
중공군 제13병단이 주력으로 '51. 2월 11일 20:30을 전후하여 공격이 개시되어 중공군 제42군 주력과 제66군 제198사단이 국군 제8사단을 포위하여 퇴로를 차단하였다.
"당시 사단장 최영희 장군의 회고는 옳은 것인지?"
모든 것을 각설하고 당시 제8사단장이던 최영희 장군은 몇번이고 제8사단이 앞에서 치고 나가는 것이 부담이고 전방에 많은 중공군이 집결하고 있다고 라운드업 작전 당시를 회고하였다.
그러나 불과 2일만에 끝난 횡성의 대재앙(사망하거나 실종된 인원이 장교 323명(여기에는 제10연대장과 전 참모, 제16연대 부연대장, 7명의 대대장, 30명의 중대장이 포함, 그리고 사병 7,142명 이었다)이 발생했다. 장비는 포 14문, 대전차포 5문, 트럭 68대, 무전기 249대, 박격포 87문, 로켓포 137정, 기관총 164정, 자동화기 102정, 카빈소총 2,389정, 소총 4,096정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국군을 지원온 미 제21지원대도 2,000(네덜란드 군 100명 포함)여명이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105밀리 곡사포 6문, 기타 공용화기 277점, 전차 6대, 무전기 195대, 차량 280대였다. 네덜란드 대대 대대장이 계천 남쪽에서 철수하는 부대를 엄호하는 중에 중공군의 침입으로 대대장 오덴 중령이 전사했다.
이에 대하여 당시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의 회고는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고 본다.
"리지웨이의 회고"
중공군의 공격 전면에 있었던 미 제2사단은 처음 용감하게 맞섰으나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우선 대포의 손실이 엄청났다. 이러한 손실은 주로 국군 제8사단이 지나치게 서둘러 철수하는 바람에 생겨났다. 제8사단은 적의 야간공격을 한 차례 받더니만 완전 붕괴돼 미 제2사단의 측면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국군의 엄청난 대패에는 이들이 중공군에 대해 일종의 외경심(북진 작전시 희천과 영변일대에서의 악몽이 재현?)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중공군이 국군진지까지 숨을 죽이고 접근해 돌진하면 대다수 국군들은 겁을 집어먹고 걸음아 날 살려라며 달음박질 칠 것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반면에 중공군의 팽덕회 생각은 이랬다.(홍학지 회고록 224p~)
"지평리와 횡성 두 곳에서 전선이 돌출해 있으므로 우리가 타격을 입히는 데는 절호의 기회다. 그러나 현재의 병력으로는 동시에 두 곳을 공략해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없다. 먼저 한 곳을 치려면 어느 곳이 좋을까. 두 곳 모두 장단점이 있었다.
지평리를 먼저 친다면 서부전선의 상대 주력부대에 큰 충격을 던져주고 우리의 동서 양 전선이 긴밀하게 결합돨 수도 있다. 그러나 지평리에는 상대 병력이 집중되어 있는데다 이미 진지구축 공사를 마친 상태여서 신속하게 공략하기는 어렵다. 1~2일 만에 상대에게 타격을 입히지 못할 경우 이천, 횡성에서 증원군이 몰려들어 도리어 아군이 위태로운 지경에 일게 된다.
반면에 횡성 북쪽을 고려해 본다면 병력은 비록 많으나 국군이 대부분이고 전투력이 취약하다. 게다가 기동 중이라 측면이 그대로 노출 돼 있어우리가 신속하게 포위하는데 유리하다.
따라서 2월 9일, 먼저 횡성을 공격하기도 결정했다. 우선 상대 3개 연대 병력타격을 목표로 하되 제대로 될 경우 다시 상대 2, 3개 연대를 공략해 전세를 안정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이때 중공군이 집결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것 같아 당장 공격하지는 않고 기회를 엿보다 2월 11일 밤에 반격을 개시키로 했다"
가) 평창 부근의 혼전
홍천 우측방 29번도로(홍천-횡성-원주-제천) 동쪽에서 공격 중이던 국군 제3, 5사단도 국군 제3사단을 중공군 제197사단이 공격하였고, 2월 공세의 조공인 북한군 제2군단이 태기산(1,261m)일대에서 국군 제3군단을 고착 견제하는 동안 북한군 제3,5군단으로 국군 제5사단을 공격하였다.
미 제10군단장의 요청으로 국군 제3, 5사단을 통제하기 위해 국군 제1군단사령부가 횡성으로 이동하고, 북한군 제5군단이 계속하여 밀어붙여 결국 제3사단은 원주 남동쪽에, 제5사단은 제천 북쪽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이때 국군 제5사단은 포병부대만 손실이 없고, 공용화기는 절반정도 그리고 병력은 4개 대대 정도만 남았다. 2월 15일 14:00시로 국군 제1군단이 제3, 5사단의 작전통제권을 인수하였고 좌전방 제3사단은 성남리에, 우전방 제5사단은 주천리 부근에, 제8사단은 주포리에 집결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 제5군단(제6,7,12사단)의 계속 공격으로 국군 제5사단의 주천리 일대가 돌파되어 국군 제3군단의 좌전방에 약 30km의 공간이 발생하여, 북한군 제2군단의 쇄도를 우려하여 국군 제3군단은 횡성 동쪽의 창동리 선에 배치된 국군 제7, 9사단을 군단 후방지역에 배치된 미 제7사단의 제31연대가 있는 평창 남쪽의 도돈리와 연결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약 20~25km를 이동시켰다.
이를 물고 따라 들어온 북한군 제9, 27사단이 2월 18일에는 영월 북쪽 13km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이를 간파한 미 제8군사령부는 미 제10군단장에게 국군 제1,3군단간의 공백을 차단하기 위해 미 제7-31연대가 투입되어 영월 돌파를 차단하에 되었다.
나) 지평리 고립 방어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2-23연대 전투단은 한강 진출작전을 진행하면서 좌인접 미 제9군단과 연결을 위해 쌍터널을 정찰한 후 지평리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미 제10군단장은 지평리가 돌출되어 있어 적에게 고립될 위험이 있어 여주로 철수시킬 복안이었지만 제8군사령부는 적이 양평 부근의 한강유역으로 침투, 서쪽 지역의 미군 주력을 포위하고자 함으로 지평리 고수를 요구하였다. 동시에 좌인접 미 제9군단의 국군 제6사단과 영 제27여단을 여주지역으로 이동시켜 제10군단의 통제하에 공간지역을 보강하도록 조치하였다.
미 제23연대전투단(프랑스 대대 배속)은 '51. 2 13일부터 중공군 제39, 제40, 제42군의 총 8개연대의 공격을 고립방어로 버티며, 미 제1기병사단 제5연대가 14일 야간에 곡수리에 도착하여 15일, 전차 23대로 보전조 연결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중공군의 진출을 무력화 시켰다.
중공군의 총 사상자는 4,946명으로 추정되었고, 미군은 전사 52명 부상 259명, 실종 42명이었다.
중공군 부사령관 홍학지의 회고록에도 지평리 돌파는 실패했다고 기록되었다. 그 이유는 제공권이 없어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기록한다
여기서 우리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전투에 투입된 부대들의 당시 상황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말이다. 제8사단, 제5사단, 제3사단의 횡성지역 전투에 참여한 부대들의 특징이 다르다
제8사단 : 북진 작전간 희천과 영변일대에서 중공군에 무력화되면서 중공군에 대한 경외감(리지웨이의 판단?)이 있는 부대로 그로부터 다시 춘천 동북방에서 밀리어 재편성하여 전투에 투입된지 얼마되지않는 부대였다.
따라서 사단장 최영희 장군의 의도와는 다르게 일선 지휘관(제10연대장 고근홍 대령은 희천에서 중공군에 포로되었다가 실종?)들이 전투경험이 부족하여 제대로 전투지휘가 되질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제3사단 : 사단은 북진 작전간 중공군과 전투를 하지않고 북한군과 주로 전투를 실시한 부대로써 동해안을 끼고 길주북방까지 진출하고 해상 철수한 부대로써 홍천북방에 재 투입되었다가 1.4후퇴시 후방지역 경계를 하다 전선에 투입되어 그런대로 전투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제5사단 : 제5사단은 우여곡절이 많은 부대로써 초기전투시 해체 되었다 북진 작전시 재창설되어 춘천-가평지역 경계와 38도선 경계 임무를 제2사단과 수행한 부대로써 사실 정규작전은 없었던 부대로써 횡성 지역전투에서 4개 대대만 남았다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6) 재반격 재개와 서울 탈환작전
가) 제천지역 적 격멸작전(킬러작전)
'51. 1월 25일 재반격작전으로 전환한 국군 과 유엔군은 단계적인 공격작전으로 서부에서는 한강선을 확보하고 중동부에서는 양평-횡성-강릉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한 상황에서 중공군 2월공세로 대돌파를 허용했으나 2월 18일경 양평-원주-제천-영월을 연하는 선에서 적을 저지하였다.
이때 중공군 2월 공세를 지접적으로 받지않은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이 김포반도와 영등포 일대, 미 제3사단이 한강선을 따라 경안리 일대, 미 제25사단은 국군 제1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중공군 교두보 서쪽의 광지원리, 남서쪽의 무갑산 일대를 각각 방어 중이었다.
중부전선 미 제9군단의 미 제24사단이 중공군의 한강교두보 남쪽과 남동쪽을 방어하고, 남한강 동쪽에서는 미 제1기병사단이 하진 일대, 영 제27여단이 주암리, 국군 제6사단이 판대리 부근으로 진출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중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은 미 제2사단이 원주 서쪽 섬강, 제187공수연대(국 8-18연대 배속)는 원주, 국군 제3사단은 성남리, 국군 제5사단이 입석리에 일대에서 차단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동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은 제7사단이 마차리, 제9사단이 정선, 수도사단은 삽당령에서 강릉에 이르는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이 무렵 적의 제1제대는 8개 군을 전개하여 서쪽 한강 하구로부터 양평, 중원산, 횡성, 봉화산, 주봉, 방림리를 거쳐 하진부리에 이르는 제1선을 담당하였다. 북한군 제1군단이 한강하구에서 뚝섬, 중공군 제50군이 뚝섬에서 상팔당, 중공군 제38군이 상팔당에서 조좌리, 중공군 제42군이 조좌리에서 매봉, 제66군이 매봉에서 정금산, 북한군 제5군단이 정금산에서 하대곡, 제3군단이 하대곡에서 아지동, 제2군단은 하진부 서쪽에서 기동방어를 실시하고 있었다.
미 제8군사령부는 공산군의 2월 공세가 불과 몇일 만에 끝나자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적에게 새로운 공격을 준비할 여유를 주지않고, 제천 북쪽에 돌파구를 형성한 적을 포위섬멸하기 위해 격멸작전을 계획하였다. 이번 작전목적이 적 병력 말살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를 "킬러작전"이라 명명하였다.
미 제8군은 남한강 동쪽의 양평-횡성-평창을 연하는 아리조나선 남쪽에서 철수하는 적을 격멸하기 위해 미 제9군단은 원주-횡성-홍천 도로를 다라, 미 제10군단은 제천-영월-평창 도로를 따라 공격하도록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안동지역에서 공비소탕작전을 마친 미 제1해병사단을 미 제9군단에 배속시키고, 미 제187공수연대는 서울 탈환시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공중투하하려는 계획에 따라 대구로 이동하여 공수훈련을 받게 하였다.
1)) 횡성 점령
미 제9군단이 2월 21일 10:00시에 좌전방에 미 제24사단의 엄호하에 제1기병사단(영 제27여단 배속), 국군 제6사단, 그리고 군단의 주공인 제1해병사단으로 4개 사단 병진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기상이변으로, 기온이 10도 이상 올라가고 밤에도 영상의 날씨로 결빙이 녹아내려 노면상태 불량과 하천이 범람하는 등의 문제로 도로와 철도가 두절되는 등의 악순환이 발생하였다.
미 제1기병사단은 24일이 되어서야 양평-홍천 도로 북쪽의 469고지를 점령하였고, 헬기로 전선 시찰중이던 군단장 무어 장군이 탑승한 헬기가 한강탁류에 추락하여 전사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미 제8군은 횡성 저령을 목전에 둔 해병사단을 위해 우측 연대인 제6연대의 작전지역을 미 제10군단에 인계하고 국군 제6사단의 작전지역을 미 제7해병연대가 인수하여 좌전방으로 투입된다. 3월 1일 공격을 재개하여 다소 피해를 입으며 3월 4일 횡성을 점령하였다.
2)) 강림-안흥-봉화산 진출
미 제10군단은 2월 21일 10:00시에 우전방에 미 제7사단이 주공으로 영월-평창 도로를 따라 공격하고, 좌전방에 국군 제3사단이 조공으로, 원주-횡성 축선으로 공격하는 미 제9군단 미 제1해병사단의 우측방을 엄호하면서 원주-방림 도로 북쪽의 강림-안흥--봉화산에 배치된 적을 공격하였다. 사단은 주공군 2월 공세의 피해로 2,000명의 신병이 보충되어 교육훈련이 부족한 전력이었다. 국군 제3사단은 좌전방 제18연대가 26일 음달말에서미 해병과 연결하고, 우전방 제23연대는 안흥지구를 점령하고 군단의 주공인 미 제7사단을 지원하기 위하여 군단의 중앙으로 투입된 미 제2사단과 연결하였다.
2월 28일,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됨에 따라 군단 전투지경선 좌측이 확장되면서 국군 제3사단이 미 제5해병연대의 작전지역을 제23연대가 정암리부근에서 인수받았으며 이때 적은 북한군 제3군단 예하 제6, 12사단의 5,000여 명이었다.
북한군이 479고지-봉화산선에서 강력히 저항하여 진출이 제한을 받다가 적이 3월 5일 진지를 버리고 철수하여 3월 7일 아리조나선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후에 국군 제3사단은 작전지역을 미 제2사단에 인계하고 국군 제3군단으로 복귀하여 마차리-정선 일대로 진출하였다.
3)) 속사리 설한지 작전
국군 제3군단은 태백산맥의 서쪽 산악지대를 공격하게 되는데 오대산을 중심으로 동쪽은 수도사단이, 서쪽은 국군 제7사단이 공격을 하고, 제9사단은 송계리에서 예비로 하였다.
2월 25일 좌인접 미 제10군단의 공격을 엄호하기 위하여 평창-창동리 도로를 따라 국군 제7사단이 공격을 개시하여 순조롭게 진행되자 군단은 미 제7사단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수도사단 1개 연대를 속사리로 투입토록 조치하였다.
이에 사단장은 제26연대가 방어중인 횡계리 부근에 대기 중인 제1기갑연대를 속사리로 진출시켰다. 그러나 폭설로 도로가 두절되고 속사리 후방이 차단되는 상황에서 제26연대가 유천리 일대에서 3월 3일 백병전을 벌이며 차항리로 철수하게 되면서 기갑연대가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 당시에 제7사단은 거문리 일대에서 제5연대가 적과 격전을 치렀다.
이 킬러작전(2.21~3. 6일)으로 아리조나 선으로 진출한 미 제9군단 지역에서만 적은 7,918명이 사살되고 포로 208명이 획득되었다.
나) 중부전선 절단작전(리퍼작전)
국군과 유엔군은 재반격작전으로 전황하여 중공군의 2월 공세를 분쇄하고 킬러작전을 벌여 '51. 3월 초에는 한강남안-횡성-강릉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여 서울 재탈환과 38선 진출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제8군사령부는 현 전선의 중앙에 대 돌파구를 형성, 일단 적의 전선을 양단하여 서부의 중공군과 동부의 북한군으로 분리시킨 다음, 남쪽과 동쪽으로부터 서울을 양익포위한다는 작전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이 작전을 전선 절단과 분리라는 작전 목적을고려하여 "전선 절단작전(리퍼작전)"이라 명명하였다.
이 무렵 중공 지원군사령관은 방어에 유리한 산악과 하천을 이용하여 방어종심을 유지하면서 유엔군의 공격을 저지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유엔군의 우세한 화력과 기동으로 야전축성에 의존한 지연전은 한계에 달해 경미하게 저항하며 철수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고 이때 식량과 탄약 공급마저 제한되어 병사들의 사기도 극히 저하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군 제1군단과 중공 제50군이 서부지역에, 중앙에는 중공 제38, 제42, 제66군이, 동부에는 북한군 제2, 제5군단과 제69여단을 배치하였다.
반면 아군은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 미 제3사단, 미 제25사단(터키여단 배속)이 한강을 따라 강 남쪽의 김포반도, 노량진-잠실-수청리를 점령 중이며, 중부전선 미 제9군단은 국군 제6사단, 미 제24사단, 미 제1기병사단(배속: 영 제27여단), 미 제1해병사단이 양평-용두리-풍수원-횡성 선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5사단, 미 제2사단, 미 제7사단으로 추동리-안흥리-하송빈을 점령하였다. 동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은 국군 제7사단(배속:국군 제1해병연대)이 형제봉-박지산-용산리를 점령하였고, 동부전선의 국군 제1군단이 제9사단, 수도사단으로 간평리-차항리-강릉 선을 점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8군사령부는 이번 리퍼작전에 전 군단이 참여하되 중부의 미 제9군단이 주축을 이루어 서울 동쪽의 덕소-가평-춘천 북방-한계를 연하는 목표선(아이다호선)까지 진출하여 적을 양단함은 물론 적의 병력과 보급물자의 비축 장소로 판돤되는 홍천과 춘천을 점령함으로써 동측에서 수도권에 압력을 가할 계획이었다
이에 제8군사령관은 주로 주공 집단의 통제에 중점을 두고 3개의 통제선(알바니선, 바팔로선, 카이로선)을 선정하였다.
첫 번째 통제선은 알바니선으로 미 제1, 제9, 제10군단 전방의 8~20KM 북쪽의 양수리-양덕원리-노천리-태기산-속사리를 연하는 선으로 제9군단의 전술적 요충지인 홍천을 통제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두 번째 통제선은 버팔로선으로 미금리-진벌리-홍천 북쪽-한계리를 연하는 선으로 이는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에만 설정되었다. 이에 미 제1군단의 미 제25사단이 버팔로선까지 진격하여 서울 장악을 위한 적에 대한 포위망을 확대하는 임무를, 미 제9군단의 주목표는 홍천이었다.
세 번째 통제선은 카이로선으로 미 제9군단 지역에 국한하여 설정하여 가평-춘천 남쪽-한게 북쪽을 점령하면 제9군단은 춘천을 목표로 게속 북진할 계획이었다. 춘천은 차후 공격목표인 "아이다호선"의 최종 목표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미 제9군단은 주공으로 홍천, 춘천을 공격하기 위해 29번도를 따라 진출하고 조공인 제10군단은 풍암리-태기산-운둘ㅇ을 공격하여 주공의 우측방을 엄호하였다. 미 제1군단은 한강선에서 적을 고착견제하고 일부는 예봉산-천마산으로 공격, 주공의 좌측바응ㄹ 엄호하여 서울 포위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한편 미 제10군단의 우인접 국군 제3군단은 산악지역인 운두령-황병산을 공격하고, 이미 주문진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연곡처늘 따라 설정된 최종 목표인 아이다호선으로 진출한 국군 제1군단은 점령중인 방어선을 강화하도록 하였다.
제8군사령관은 이러한 리퍼작전의 성공을 위해 동서해안에 대한 양동작전을 계획하여 미 해군 제95기동함대가 기뢰를 제거하면서 진남포 외곾의 대동강 입구로 진입을 시도하고, 수송선들이 인천에서 출항하여 북쪽으로 항해 중에 되돌아 오곤 했다. 동해안에서는 미 제95기동함대가 2월부터 원산지역에 함포사격을 집중하였고 국군 해병 제41중대는 원산 근해의 도서를 점령하여 긴장을 고조시켰다.
제8군사령관은 '51. 3월 7일을 공격개시일로 결정하고 한국군의 전력 강화를 위해 2월 중순부터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1군단 사령부와 국군 제3사단을 육본 직할로 복귀시켰다.
이에 따라 육군은 국군 제3군단의 우전방 제9사단을 국군 제1군단으로, 국군 제3사단을 제3군단으로, 그리고 홍천 공격에 실패한 후 재편성을 완료한 국군 제5사단을 미 제10군단에 배속전한 시켰다
1)) 홍천-춘천 진격전
리퍼작전의 주 목표는 미 제9군단이 목동리-춘천 북쪽-내평리-한계를 연하는 아이다호선으로 진격하여 홍천과 춘천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51. 3월 7일 공격을 개시한 미 제1해병사단은 오음산 북쪽의 알바니선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여 3월 9일 알바니선을 점령하였으나 우측의 미 제10군단의 미 제2사단과 좌익의 미 제1기병사단의 진출이 지연되어 13일이 되어서야 국군 제6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부대들이 알바니선으로 진출하였다.
국군 제6사단은 제2, 제7연대로 풍수원 남쪽에서 3월 7일 병진 공격하여 11일 풍수원 북쪽 갈기산-성지봉으로 진출 중에 군단의 부대 재배치 계획에 의거 12일 작전지역을 좌인접 영 제27여단과 우인접 미 제7해병연대에 인계하고 제1기병사단의 좌전방 제8기병연대의 장락산-용수리 지역을 인수하였다. 그리고 3월 4일 부터 미 제24사단에 배속되었던 제19연대가 복귀하여 14일부터 3개 연대 병진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8군사령관은 13일 제1통제선인 알바니선 점령이 완료되자 13일 저녁 제2통제선인 버팔로선을 진출을 명령하였다. 15일, 이틀만에 미 제24사단은 청평호에, 국군 제6사단으 홍천강 남쪽 고지군을 점령하고 미 제1기병사단도 홍천강변에 진지를 구축하고 인접 미 제1해병사단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 제9군단장은 16일, 홍천 일대에 중점적으로 배치된 적을 분산시켜 미 제1해병사단의 진출을 지원할 목적으로 홍천강을 연하여 중간 통제선인 "버스터선"을 설정하여 호언 북방의 버팔로선과 연결하고 국군 제6사단, 미 제24, 제1기병사단에 이 선을 점령토록 하였다.
3월 17일, 일제히 4개사단 병진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미 제1기병사단이 적의 저항에 직면도 했지만 19일에는 전 사단이 목표선을 점령하였다.
여기서 국군 제6-2연대가 홍천강 북쪽 구운동에서 중공군 1개 대대를 발견하여 포위공격으로 231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무기를 획득했다.
3월 20일~21일에 중공군이 다급하게 철수하여 21일 미 제1기병사단이 카이로선에 진출하였고, 춘천으로 특수임무부대가 들어갔다. 22일 제7기병연대가 춘천시내로 진입함으로서 리퍼작전의 목표는 달성되었다.
한편 미 제9군단 우전방 인 미 제1해병사단도 18일 동부전선에서 국군 제1해병연대가 배속되어 도착되어 사단의 중앙으로 투입되어 24일 가리산을 점령했다.
지금까지 1.4후퇴이후 재반격작전을 개시하여 서울탈환작전 전 단계의 진출과정 용약을 통해 변화무쌍한 단계별 부대편성의 다양(?)한 모습을 확인해 보았으며 몇가지를 언급하고 동부지역 산악전투로 넘어가려 한다.
첫째 : 적의 전술에 놀라 적이 재편성할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 중공군의 전사기록에 이미 나와 있지만 그들은 전력보강을 위해 최대한 시간을 벌며 유엔군의 저투력 소모를 유도하고 축차적으로 한강이북으로 그리고 다시 38도선 상으로 철수를 하였지만 유엔군이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과대 평가하여 진출속도가 느림으로써 적에서 새로운 부대의 유입과 전투력 복원의 기회를 주었다고 판단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 잦은 전투편성의 변화로 작전부다 부대이동의 작전적 소요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미 제1군단의 선봉인 미 제25사단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 접촉을 유지하면서 밀어붙였다면 훨씬 쉽게 수도 서울을 재탈환하고 중공군이나 북한군의 주력을 무력화 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군우리일대에서 혼난 미제8군사령부는 너무 심사숙고하여 혹시나 중공군의 유인전술에 말려들까봐 기기묘묘한 전술로 수시로 부대교체를 실시하게 되지만, 당시에 중공군이나 북한군은 그 정도가 아니라 그들도 일사천리로 밀고 내려와 혹시나 유엔군의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여 주력을 한수이남으로 내려보내지 않았고 사실 그런 전투력도 없었다, 너무 긴 추격전에서 제대로 보급지원과 병력보충이 없는 가운데 유엔군의 공군과 해군의 무자비한 폭격에 엄청난 피해를 입어 전투력 복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셋째 : 이렇게 잦은 부대편성의 변화는 일사분란한 지휘체계를 가져오지 못했다
"자라보고 놀란가슴 솥뚜겅보고 놀란다"는 비유처럼 장진호와 운산,군우리, 영변에서중공군의 유인전술과 성동격서에 지리멸렬했던 추억이 되살아나 피리소리만 들어도 오금이 저려와 도망친다는 국군과 유엔군의 망령이 작전기간 내내 지배적 요소중의 하나가 되었다.
횡성전투에서 국군 제8사단의 전투양상, 그리고 실제 중공군과 전투를 경험하지 못했던 제3, 제5사단의 무기력한 전투양상은 많은 것을 분석하게 한다.
여기에 도로위주로 화력전투에 의존하는 미군의 전투양상 또한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였다. 여기에 수시로 전투편성이 바뀌어 동서로 오가는 바람에 실제 전투력 발휘는 제한적이었고 오히려 중공군이 상대적으로 유엔군의 역습이 두려워 주전투력을 한강이북에 머물게 함으로서 이런 미군의 노력이 마치 변화무쌍한 전술인것처럼 되었다고 보면 어떨가 한다.
네번째 : 꼭 집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바로 전투피해의 진실성 여부다
아무리 시신수습이 잘 되었다고 치더라도 지난 20여년간 전국을 탐문 탐사한 결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그리 많은 적군을 사살하고, 우리 또한 중공군 전사에 언급된 피해현황이라면 사실 주 전투지역에 남아 있는 유해의 숫자는 대단해야 한다. 하지만 바로 앞의 국군 제6사단의 구운동 전과나 미군의 지평리 전투, 국군 제8, 제5, 제3사단의 횡성지구 전투에서의 인명피해는 너무 현실성이 없거나 과장되었다고 본다.
굳이 전공을 과소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리 많은 인명피해가 났는데 유해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느 기록에도 수습되었다는 사실도 없는데 말이다. 그러니 이런 기록을 가지고 현장에 가서 지역주민의 제보를 받고 참전용사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북한군과 국군의 신분구별이 어렵고 중공군 또한 조선족이 대거 투입되고 무기를 주로 획득한 유엔군의 무기를 사용함으로서 실제구별이 안되었다고 본다.
한가지 예로 다부동전투에서 백선엽 당시 1사단장의 회고에 의하면 하루에 500명씩 신병이 보충되었다고 하는데 다부동애서 1달여 전투기간을 고려하면 1만 5000여 명의 군인이 손실되었다는 것이다. 북진 작전간 운산지구에서 받은 피해 또한 기록도 없다.
따라서 앞에서도 잠시 언급된 내용이지만 현충원에 보관되어 있는 14만여 위패카드의 재분석과 육군본부 부관감실에서 관리하는 전사망카드의 조속한 재점검 작어이 병행되어야 한다.
다섯째 : 전사의 재조명이다
사실 현재 전사는 제1사단과 3사단 그리고 6사단의 전투사실이 주다. 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너무 일방적인 이긴 전투에 대한 기록만이 있다. 제대로된 전사의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어떻게 보면 전사도 실존 인물들의 지휘고하에 따라 그 업적위주의 기록이 많다고 본다. 절대로 누굴 폄하하거나 명예를 훼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전투지역을 탐사하고 수많은 참전용사님과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 것이 영웅담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미 중공군 전사(일부 회고록 포함)나 일본에서 발행된 한국전쟁사등 객관적(꼭 믿는 것은 아니다)인 사실에 맞춰서 정설을 기록해야 하고 미사여구를 넣어 과대포장하면 안된다.
한가지 예로 초기전투에서 한강 철수작전간 국군 제1사단의 지휘부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다부동에서 승리자는 미군인지 국군인지와 '51. 2월의 횡성전투에서 국군부대(제3,5,8사단)들의 엄정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 또한 재진격작전간 광덕산 지역이 제6사단의 4월 전투간 중공군에 무력화 되던 주 전투지역인지 아니면 제2사단의 '51. 5월말에서 6월초 천불산-삼천봉. 735고지로 이어지는 주 전투지역인지 확인되어야 한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전투를 잘한 것으로 평가받는 전사는 전사가 아니라고 본다.
제 2 절 동부지역 산악작전
1. 태기산 전투
가. 개 요
미 제10군단은 전선 절단작전(리퍼작전)의 조공으로 한계-풍암리-태기산-계방산을 연하는 아이다호선을 목표로 공격하게 되었다. 군단장은 좌측지역의 횡성-풍암리간의 소로와 우측의 평창-방림리-속사리 도로를 따라 진격하는데 역점을 두고, 이 도로 축선에 미 제2사단과 미 제7사단을 배치하고 국군 제5사단은 양 도로 사이의 산악지역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나. 양측의 전투 편성
(1) 아군의 전투 편성
미 제10군단은 미 제2사단, 미 제7사단 그리고 국군 제5사단으로, 당시 국군 제5사단은 중공군 2월공세를 받은 후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어 단양-풍기 간의 주보급로를 경계하면서 부대 정비 중, 3월 3일 다시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5일 운교리-안흥리 지역으로 진출하여 좌전방 지구리에 제36연대를, 우전방 월암동에 제35연대를 배치하고 절단 작전을 준비 하였다.
(2) 북한군의 전투 편성
당시의 북한군은 국군 제5사단이 중공군 2월 공세시 횡성 북방에서 일전을 펼친 바 있는 북한군 제6사단이 제12사단의 1개 연대를 증원받아 태기산으로 연결되는 고지군에 지연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다. 작전 경과
미 제10군단은 3월 7일 , 발교산-태기산-속사리를 목표로 좌전방에 미 제2사단, 중앙에 국군 제5사단, 우전방에 미 제7사단을 배치하여 3개 사단 병진 공격을 개시하였다.
국군 제 5사단의 작전지역은 900-1,000m의 대소고지들로 연결된 산악지역으로, 사단은 좌전방 제36연대는 봉복산(1028m)을, 우전방 제35연대는 태기산(1261m)를 목표로 2개 연대 병진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홍천
풍암리 검산리
국27연 국35연
흥정산
발교산 운무산
봉복산
미2사 ‡ 국5사 적 거점 백운동 창동리
태기산
신대리 적 거점
갑산리 국27연 방림리
횡성 자주봉 국35연
▲ 685m(적 거점) 적 거점
포동리 둔방내리 대미산 미7-17연대
적 거점
국36연 국35연
원주 지구리 월암동
안홍리 운교리 말다리
사단은 경미하리라 예상 되었던 지대내의 적의 저항이 강력하여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게속되는 가운데 12일이 되어서야 제36연대는 685고지를 , 제35연대는 자주봉을 점령하였다.
이때 포로들의 진술이 11일부터 시작된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사생결단으로 지연전을 실시하엿고, 적 제5, 2, 3군단 주력은 38선 이북으로 철수하여 새로운 공세를 준비 중이란 진술을 확보하였다.
이에 따라 제5사단장 민기식 준장은 제27연대를 제36연대를 초월하여 계속 적을 추격토록 하고, 사단의 우익에서 창동으로 진출중인 미 제7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미 제7-17연대의 대미산지역을 인수받아 작전지역을 동쪽으로 확장하였다.
추격전을 펼친 사단은 14일 태기산을 점령하고 신대리-백운동 선으로 진출 후 15일에는 운무산(980m)-흥정산(1277)의 아이다호선으로 진출하였다.
국군 제5-27연대 정찰대는 17일, 검산리 부근 고지에서 매복 중에 적 600여 명을 포착하여 425명을 사살하고 57명을 포로로 획득했다. 또한 기관총과 박격포 22문 등 다수의 장비를 노획하였다.
한편 국군 제5사단의 좌측의 미 제2사단과 제7사단은 13일을 전후하여 알바니선으로 진출하고, 17일 최종목표인 아이다호선으로 진출하여 절단작전을 종료하였다
라. 찬점용사(지역주민)증언, 유해발굴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1). 봉복산, 태기산, 자주봉, 주봉, 발교산에는 전투 흔적이 미흡하다(둔방내리 645고지에서 '05년 9구 발굴)
많은 산을 올랐다. 그 덕에 무릎이며 허리가 정상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해도 많이 올랐다. 하지만 내가 오르지않고 누구의 보고나 제보를 분석할 수 있겠는가. 나는 시간만 나면 차량을 운전하는 지원병을 데리고 산을 올라야 했다.
"발교산 수리봉에서의 조난사건?"
어느날 발굴팀 박상병(지금은 서울 경찰)과 청일면 봉명리 절골 입구에서 봉명폭포(하)방향으로 해서 발교산(996m)에 올라서 병무산 방향을 1차 탐사하고 다시 발교산으로 와서 점심을 먹고 북동방향으로 이동하여 수리봉을 거쳐 석재-여무재로 해서 먼드래재로 내려오려 했다.
개인호는 간간히 있지만 집단으로 구축된 곳은 보이지않았다. 그 우측의 봉복산이나 태기산도 사실 전투흔적이 그리많이 남아있지않았다.
"땅벌의 성난 모습"
그런데 계절이 한여름이라 얼마나 땀을 많이 흘렸는지 오후 3시정도 되었는데 머리가 띵하니 어리러워 왔다. 일명 일사병의 징조같았다. 지도에서와는 달리 굴곡이 많아서 쉽지않은 곳이다. 가져온 물은 이미 다 마셔버렸다. 얼마를 가니 922고지 직전방쯤 되는데 땅벌이 떼로 날아다닌다. 아마도 누가 건드린 모양인데 그 피해를 우리가 보고 있다. 산 능선을 피해서 우회하여 진출하는라 도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분명 누군가 아니 동물중에 누군가 그 꿀을 먹으러 건드렸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미 한계점에 다가서는 나는 박상병에게 말도 못하고 마인드콘트롤로 버티고 걷고 있다.
하지만 수리봉에 거의 다 왔는데 더이상 침묵하기가 곤란해서 밑에서 대기중인 진범이에게 구축작전을 알렸다. 물을 들고 봉명폭포(상)쪽으로해서 석재방향으로 들어오라 연락했다. 머리가 너무 띵하여 어지럽다.
결국 진범이가 나타나고 나는 살아서 내려왔는데 절골 입구에 오니 여기에 살고 있는 한분이 어디를 갔다오느냐고 물어서 수리봉에 올랐다 온다고 하니 이곳이 산악조난사고로 희생자가 발생한 곳이라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고 한다.
태기산(1258m), 봉복산(1033m), 운무산(980m), 자주봉(889m), 주봉(827m)은 거의 1,000m에 이르는 산들이다. 주봉만 영동고속도로 밑에 있는 산이고 모두 도로 북쪽에 있는 산들인데 이 엄청난 산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는 산중에 산들이다.
"잔당들이 둔내에서 서석으로 왕래하는 루트"
지역 주민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 지역의 산은 주로 큰전투라기 보다는 북한군 잔당들이 유격전으로 지역주민들을 대동하고 남북으로 연결하는 루트로 사용하고 지역 요소요소에 아지트를 구축하여 아군의 이동상황을 탐지하여 머물고 있는 부대들은 야습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아군도 야간에는 주로 산을 피하여 주둔하게 되었고 자연히 동네에는 잔당들이 집처럼 넘나들며 행세를 하고 웬만한 것들은 죄다 가져다 식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2). 대미산(1232m)의 진실
대미산은 원래 미 제7사단 제17연대의 작전구역이였다. '51. 3월 전투당시에 미 제10군단의 배속된 부대들은 리퍼작전의 조공으로 한계-풍암리-태기산-계방산을 연하는 아이다호선을 목표로 공격하게 되었다. 군단장은 좌측지역의 횡성-풍암리간의 소로와 우측의 평창-방림리-속사리 도로를 따라 진격하는데 이 도로 축선에 우측에 미 제2사단 좌측에 미제7사단을 배치하고 국군 제5사단을 중앙에 배치하여 산악지역을 담당토록 하였다.
주로 1,000m를 오가는 산악전투라 병력통제도 어렵고 적을 추격하는 것이 어려웠다. 적들은 분산과 집중으로 우리를 괴롭히며 북으로 진출하려하고 우리는 이를 차단하여 섬멸하는 작전이 주로 주간에는 국군이 유리하고 야간에는 다시 탈취한 지역을 남겨놓고 적의 야습을 피해야 했다. 그러니 산악지형에 미군이 익술하지 못하다 보니 사단 우측방 대미산지역이 적이 점령하고 있어 진출이 어려웠다.
그렇다고 미군지역은 평탄하냐하면 그러하지도 않다. 동쪽지역이 다 그렇듯이 대부분 1,000m를 상회하는 산들이 즐비하고 그 사이로 소로가 발달하여, 평창강을 사이에 두고 봉평면과 대화면이 갈리는데 그 사이에 424번도로와 31번 도로가 남죽으로 달린다. 따라서 대화쪽은 국군 제3군단 예하의 국군 제7사단이 있어 당시 미군의 전투지역은 정면이 협소하였다.
그런대도 대미산을 탈취하지 못하니 국군 제5사단이 미 제17연대의 대미산을 인수하여 작전지역이 동쪽으로 확장되었다. 이 3월 13일을 기점으로 적이 현저히 약화되어 뒤로 물러나면서 14일 아이다호선으로 진출할 수가 있었다고 기록된다.
우리는 방림 계촌에서 노인회장님을 모시고 간담회를 시작하였다. 의외로 지역참전용님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알고보니 대부분이 처음에 정규군으로 들어가기 보다는 차후에 현지에서 입대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장기수씨(77세, '13) : 16세때에 대미산에 군인을 묻는 작업에 참가했다. 산 저앙일대에 개인호가 수많이 널려있어 시신이 부패하고 있었다. 경찰이 통제하여 몇일간 묻는 작업을 했고 권총이며 총을 주워 반납도 했다. 냄새가 심하여 접근하기도 힘들었다.
솔직히 올라가 보니 전수 부패하여 얼굴도 확인이 어렵고 적군인지 아군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냥 대충 주변의 파헤쳐진 구덩이 같은 곳에 밀어넣고 말았다.
이후에 다른 지역에서 사람들이 올라와 탄피를 캔다며 다시 파헤치고 불이나서 타기도 하고 말이 아니다.
계촌리에 국민학교가 있었는데 선생님 중에 이미 공산군이 쳐내려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분도 있었다. 대부분 피난을 갔는데 선생은 도망가지않고 학생들을 모두 귀가시켜 피난가도록 하고 본인은 숨어서 지냈다. 국군이 밀리어 갔다가 9월인가 다시 올라오는데 태극기를 먼저 교정에 걸다가 동네 프락치들이 도망치며 죽였다. 너무 빨리 태극기를 달았던 것이다.
김용식 참전용사(84세, '13) : 3사단 22연대로 참전했다. 뻔치볼 전방 가칠봉에서 전투했고 아군이 많이 죽었다. 휴전이 임박하여 '53. 6월경에 평화의 댐 전방으로 들엉가 5사단과 교대했는데 북한강가에 차총을 해놓은 상태에서 5사단 병력이 수없이 죽어 있었다. 현재 DMZ안으로 보인다(황병동 일대로 추정됨)
김창근 참전용사(81세, '13) : 해병대 1연대로 참전했다. 현재 을지전망대 부근 924고지에서 치열하게 전투 했다. 야간에 기습을 당해 수없이 아군이 죽었다.
전창식 참전용사(81세, '13) : 9사단 30연대로 한석봉-매봉전투에 참가 했다. 매봉에 2차례 공격시 대부분 다 전사했다. 살아 남으면 용하다고 했다. '51. 5월 공세때에 창촌리에서 중공군에 포로가 되었다가 포로 교환시에 돌아왔다
(3). 조봉(827)-송이봉(896)-청태산(1194)-대미산(1232)-덕수산(1002)-장미산(979)-승두봉(1,013)에 오르다
현대 스키리조트가 있는 지역이다. 조봉에서 송이봉을 거쳐 둔내 자연휴양림이 있는 1061고지를 탐사하는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산 정상까지 거의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대미산 지역은 청태산 자연 휴양림에서 오르기도 하고 계촌 초등학교가 있는 대미동에서 오르기도 했다. 능선에 올라서면 거의 비슷한 능선이 이어지기에 그리 탐사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대미산에서 덕수산을 거쳐 장미산 구간은 오솔길이 사람이 별로 통행을 하지 않아서 진출하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능선상 특히 고자군마다 개인호가 양호하게 굴토되어 있어 흥분을 가라앉히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그러니 자연 무리한 탐사가 되고 힘이 들기도 한다.
장미산 동쪽 게마을로 한번을 내려서서 마을이장을 만나니 속속들이를 알고 있었다. "동네분들이 올라가 시체를 구덩이에 모두 묻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14년부터 이곳 일대에 대한 발굴작전을 개시해 청태산 부근에서 2구('14), 대미산에서 6구, 장미산에서 20구('15)를 발굴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사실 피아식별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곳 일대는 미 제7사단이 주로 전투를 벌인 지역인데 과연 국군이 얼마나 누가 이곳에서 전투를 했는지는 식별하기가 쉽지않다.
(4). 검산리 적군 425명 사살의 진위
이미 적이 3월 15일, 서울 제2차 수복일을 깃점으로 썰물처럼 밀려나 이미 목표선인 아이다호 선을 점령했는데 이 선 전방의 검산리 부근 고지에 '51. 3. 17일에 적들이 은익한 무기와 탄약을 가지려 600여명이 침투했다는 것을 포착하여 국군 제 5사단이 적 425명을 사살하고 57명을 포로로 했다는 기록에 나는 서석면 검산리 샘말의 504-590고지 선을 탐사와 탐문하였다.
샘말 일대의 오래 거주하신 분들을 탐문하여 사실여부를 질문하였으나 명쾌한 답을 듣지 못했고 산에 올라가 격전지 흔적을 찾으려 해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것일까하는 의문에 조금의 답이 되는 증언을 들었다.
익명의 마을 분이 산에 약초를 캐러다니던 중에 우리를 만났고 나의 질문에 말하셨다. "사실 여기서 죽은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 당시에 죽은 사람은 북으로 올라가던 사람(민간인 추정)들이 기습적으로 들이닥친 아군에게 대부분 죽었고 그래서 주변에서 소문을 듣고 나중에 그 유족들이 들어와 시신을 대부분 수습해 갔다"는 것이다.
나는 이 증언에 진실여부는 가질만한 자료가 없다. 다만 마음만 아프고 심증만 깊게 골이 깊었다.
(5). 한국땅에 죽어 있는 북한군 소좌?
대미산의 진실에서 개수리 마을이장의 제보와 발굴 유해가 무려 20여구가 나왔다는 기록을 남겼다. 방림 계촌리에서 서북쪽으로 올라서면 바로 둔방내리다. 물론 이 지역은 국군 제5사단의 전투지역으로 쌍방간에 많은 피해가 있었던 장소이다.
따라서 우리는 '11년도에 둔방내리 마을 회관에서 지역주민 간담회를 하였다. 20여명이 바로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는데 대다수 인원이 처음에는 전쟁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눈떠보니 전쟁이라는 것이였고 마을에 북한군이 진주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에는 여느 지역이나 그렀듯이 별로 나쁜 짓을 안하고 아주 편하게 지냈고 오히려 먹을 것도 주고 선심을 쓰기도 하면서 학교도 문을 열고 별 지장없이 살았다 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 몇집 안되는 산골이라도 흔한 말로 지역 빨갱이가 있어서 집에 경찰이나 군인이 있는 집 가족들은 붙들려가 고초를 당하고 일부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다 보니 이웃간에 서로가 못믿는 풍토가 생겼다고 한다.
김치홍(당시 76세)어르신이 말하기를 본인 집이 두원리인데 마을회관 뒷산 2부 능선에 북한군 소령의 묘가 있다고 한다.
어떻게 기억하시느냐고 물었더니 당시에 별로 나쁜 짓을 안하고 동네사람들을 많이 챙겨주는 편이라 억한 감정이 없었는데 어디서 전투를 했는지 이른 봄날 동네로 와서 죽었다.
그래서 동네분들이 국군이 오기전인데 이른 삽을 들고 나와서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고 떠나는 북한군이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고 갔다는 것이다. 도대체 소설같은 이야기지만 국군이 와서는 크게 문제를 삼지 않아서 그냥 있는데 길에서도 묘가 보인다고 한다. 나는 어른을 모시고 현장에 가 보았다. 바로 길 위에 잡초가 무성하고 관리되지 않은 무덤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북한군이 명확한 경우는 발굴하지 않는다.
2. 하진부리 부근 전투
가. 개 요
전선 절단작전의 조공인 국군 제3군단은 최종 공격 목표인 계방산-황병산을 연하는 아이다호선까지는 16km 남짓 남아 있어 다른 군단에 비해 진격거리는 짧지만 험준한 태백산맥 줄기라 어려움이 많았다.
나. 양측의 전투편성
(1) 국군 제3군단
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작전지역이 협소하여 기동공간이 제한되고, 군단 후방지역에 출몰하는 북한군 패잔병들을 고려하여 국군 제7사단과 배속된 국군 제1해병연대를 공격제대로 투입하고, 미 제10군단에서 복귀한 국군 제3사단을 군단 예비로서, 국군 제1군단으로 배속 전환되는 제9사단의 정선 일대의 진지를 인수토록 하였다.
(2) 북한군 전투 편성
북한군은 제9사단이 백적산을 고수하기 위하여 속사리에서 남하 중이고, 적 제27사단이 형제봉과 박지산으로 남하하여 사단의 우측방 공격을 기도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다. 작전 경과
국군 제3군단은, 속사리-강릉을 연하는 선을 확보하라는 육본의 명에 따라 제7사단은 좌전방에 제3연대를 상대화에서 백적산(1141m)-잠두산(1241m)을 경유 속사리로, 우전방 제5연대를 대기에서 백석산(1364m)-박지산(1391m), 형제봉을 경유 하진부리로 공격하도록 하였다.
'51. 3. 6일, 08:00시에 공격을 개시하였으며, 적 제27사단이 사단의 우측방을 공격할 것으로 판단하여 국군 제1해병연대를 우측 지역으로 투입키로 하였다.
이에 해병연대는 적이 점령이전에 봉산리와 발왕산(1458m)을 점령하기 위해 5일 08:00시에 기동하여 6일 새벽 02:00시에 방왕산과 붕산리로 진출하였다.
'51. 3. 7일 제7사단은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백적산과 백석산 일대에서 진출이 지연되고, 이에 따라 예비인 제8연대를 투입하여 3개 연대 병진으로 공격을 실시하였으며 좌전방 제3연대는 7시간의 혈투로 백적산을 탈취하였으나 적의 야간 역습을 고려 주력은 철수하고 경계부대만 배치하였다.
적은 백적산을 목표로 진출을 기도하고 있었으며, 군단은 예비인 제3사단의 제18연대를 증원하였다. 적은 3월 10일 2개 연대규모로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아군의 보포공군 협동작전으로 적을 백적산-거문리-형제봉선으로 격퇴하였다.
제7사단은 11일, 속사리-하진부리를 잠제할 수 있는 백적산을 확보하고, 12일 최종 목표인 속사리와 하진부리를 점령함으로로서 경강국도를 통제하게 되었다.
오대산 차항리 국군 제1해병
횡계리
투구봉 칼산
월정거리 유천리
속사리
국7-3연 상진부리
진부 병두산
하진부리 국7-5연
이목정리 상월오개리
거문리 형제봉822m 발왕산 1458m 도암호
국3-18연
백적산1142m 신기리 국군 제1해병
국군7-3연
모릿재터널 박지산1391m 봉산리
잠두산1244m
백석산1364m
한편 국군 제1해병연대는 3월 7일, 봉산리를 방어 중인 제3대대가 좌인접 제7사단의 제5연대가 일시 철수함에 따라 적중에 고립되었다. 그러나 9일 제3사단 제18연대가 군단의 우전방으로 투입될때가지 공중보급으로 버티며 적의 공격을 수차례 격퇴하고, 제18연대가 투입되자 적이 후퇴함에 따라 추격하여 13일 09:00시에 최종목표인 외래차지을 점령하고, 다시 차항리로 이동하여 작전지역을 제3사단 제22연대에 인계하였다. 그리고 16일 미 제9군단으로 배속전환되어 홍천으로 이동하였다.
라. 참전용사(지역주민)증언, 유해발굴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1) "고, 일병 권오대 용사님 발굴 비화"
나는 '09년도 유해발굴을 위한 제36사단 대관령 대대 교육을 2월에 지냉하였다. 눈이 내리는 날씨에 겁도 없이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모릿재터널, 백적산 하단부에 있는 곳으로 정찰을 떠났다. 하진부리를 지나 마평리에 들어섰다.
"전쟁당시에 포탄 파편에 다리 부상으로 평생을 고생하는 분을 만났다"
지역제보자 조종선(71세. '09) : 11살의 나이에 미군비행기 폭격에 왼쪽 다리를 다쳤다. 마평리를 지나다 길에 다리를 절룩거리며 걷고 계시는데 웬지 뭔가 알고 있을 것같아서 차를 세웠다.
"아니 눈이 오는데 어디를 가시나요, 눈오면 터널을 못 넘어요?"
"그렇습니까, 저는 육군 유해발굴단 입니다. 전쟁터를 찾아서 지금 대화에 가보려하는데~"
"아니 뭘 거기까지 가요, 저기 터널 위 북쪽으로 가면 호 한개당 한명씩 죽어서 다 묻혀있는데"
"네?, 호 한개당 한명씩이면 얼마나 많이 묻혀 있다는 것인지?"
"내가 그때 비행기 폭격으로 파편을 맞아 왼쪽다리가 못쓰게 되었어요. 보상도 없지 그때는, 군병원에서 치료는 받았어요"
"참 안타깝습니다. 지금같으면 다 보상이 될텐데"
"그러니 세상이 불공평해요. 우리는 정말 그지처럼 살아왔어요"
"그런데 어떻게 저 모릿재에 시신이 많이 있는 것은 알게 되었습니까?"
"배고파서 가끔씩 올라가 탄피를 캐서 엿바꿔 먹으러 올라갔지요"
"언제까지 그렇게 하셨습니까?"
"한 10년되나, 요즘은 숲이 우거져 안들어가는데 가면 있어요"
나는 눈이 오면 모릿재에 가면 안된다하였지만 올라갔다. 걸어서 1시간이 걸렸다. 혼자서 무릎까지 빠지는 모릿재를 올라서 보니 정말 개인호가 많았다.
"눈이 내려도 개인호는 웬만하면 표시가 난다"
이유는 낙엽이 샇여서 썩고있기 때문에 열이 나서 눈이 빨리녹아 오히려 쉽게 호를 찾는 잇점도 있다. 나는 백적산까지는 오르지 못하고 일정구간을 탐사하고 정말 미칠듯이 가슴이 두근거리며 내려왔다.
"사실 나는 그 시절은 귀신들렸다"
미신적인 이야기지만 또 아니디라고 하기에도 좀 설명이 부족한 것이 귀신 이야기다. 미쳐있으면 그런다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적어도 몇번의 체험아닌 체험을 통해서 뭔가 사람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적어도 이곳 모릿재 터널 위를 눈내리는 날 가 보게 된것도 우연이 아니라 갑작스레 나를 그리고 오라는 텔레파시가 있었기 때문에 가보게 되었고, 지역주민도 눈내리는데 길가에서 또 만나게 되는 것도 그 텔레파시와 연관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09년도 2월에 에 유복자이신 외아들이 유전자 검사를 신청해 놓고 있었는데 일치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대, 백적산 일대에서 '08년도에 24구를 시작으로 '09년도에 모릿재 위에서 5구등 50여구를 발굴했다. 그런데 '09년도에 모릿재 터널 위에서 발굴된 유해중 한구가 유가족의 DNA와 일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그 아주머니가 생존하고 있었고 어렵게 살아온 외동 아드님은 스님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2) 지역제보자 조병우(69세. '09) : 나는 직접 마을 어르신들이 국군을 3구 매장하는 것을 목격했다.
"아저씨가 연세가 얼마인데 국군이라고 알고 계셔요?"
"여우들이 물어뜯고 동네 개가 물고 다녔다"
"그때 나이가 8살이요, 그런데 참 이런 이야기 하긴 좀 그런데 당시는 흔히 말하는 빨갱이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못사는 세상이니 누가 이 골짜기에 들어오지도 않고 인민군이 와서 몇달이고 살았어요. 우리집에도 있었으니까. 그러니 친하게 형, 형 하며 나도 살았지. 그런데 어느날 국군이 들어왔다는데 인민군에 아작이 났어요. 인민군이 마을 주위 야산에 숨어있다 처들어와 죽었는데 밭 여기저기 있었지. 그걸 여우들이 물어뜯고 개둘이 물고 다니는데 한겨울인데 봄이 오니 눈이 녹아 다 보이니까 동네 어른들이 괭이로 거둬서 죄더 묻는 것을 다 봤지. 옆에 서서"
"많이 알고 계시겠네요?"
"몇군데 되는데 다 없어지고 한군데가 그대로 있어요."
"혹시 왜 없어졌는지 아시나요?"
"참 그땐 약도 귀할때니 뭐 사람뼈가 어디에 좋다고 소문이 돌아 여기까지 와서 파서 가져가기도 했고 나중에 밭을 넓힌다고 없어지고 뭐 그렇게 되어 지금은 한 곳 밖에는 몰라요"
우린 그곳에 제보자와 함께 가서 밭언저리에 묻었다는 곳을 발굴하여 제보대로 정성스럽게 매장된 3구의 유해와 탄피, 파편, 단추 등 53점의 유품도 발굴했다.
(3) 지역제보자 김복희(72세. '09) : 마을 어른들이 쓰러져 있는 북한군 몇구를 매장했다.
봉평면 무이리라는 곳이 태기산-봉평(창동)선에 위치한다. 창동은 이 지역 전투에 빠지지않는 격전지로 평촌, 창동, 봉평이 사실 한 지명이라고 해도 된다. 이효석의 메밀곷 필무렵의 단편소설이 엮어지는 곳이다. 창동지역은 흥정천이 흐르고 있는 살기좋은 고장인데 이곳이 주요 격전지다. 6번도로가 통과하기도 한다.
"봉복산-태기산"보다 "무이리 안흥동-봉평 창동 685고지에 전투흔적이 많이 있다"
전사에는 국군 제5사단의 "리퍼작전간 주요 격전지며 아이나호선 진출선 부근인데, 사실 탐사결과 봉복산- 태기산 지역은 크게 흔적이 없다. 그러나 상기에 언급한 지역이 전투흔적이 많다. 창동의 685고지에선 '11년도에 26구의 유해가 발굴 되었다.지역주민 제보도 사실과 일치한다.
제보인은 10살이 넘어서 전쟁이 있었고 동네에 죽어서 쓰러져 있는 인민군을 동네 할아버지들이 묻었다고 한다. 사실 이곳은 '51. 3월까지는 북한군이 지배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시키는대로 해야 살아남았다.
우리는 제보지역에서 제보내용과 같은 4구의 북한군 유해를 발굴했다.
(4) 지역제보자 김석만(73세. '09) : 낙오된 국군을 미군이 북한군으로 오인하여 총격을 가해 사살했다.
봉평 지역에 미군이 진출했는지는 전사에 명확하지 않다. 중공군 5월 공세시 운두령에서 미 제3사단이 중공군을 포위격멸하는 내용이 있지만 '51. 3월경에는 없다. 물론 국군 제5사단이 좌측 태기산으로 진출시 미 제7사단이 이곳으로 진격할 수는 있다.
제보자께서 12살이나 되어서 직접 목격한 사실이라니 믿어야 한다. 당시에는 수시로 이곳 창동지역은 국군이 왔다가고 인민군이 왔다가고 봄에는 미군이 수시로 들어왔다 가곤 했다한다.
"복장이 같아서 구별도 어렵다. 미군은 떠나고 할아버지들이 잘 묻어주었다"
복장도 미군은 바로 알지만 국군과 인민군은 같은 복장을 입고 다니는 경우가 많아서 구별도 안되었다 한다. 그런 어느날 국군이 왔다가 인민군에 기습을 당해 흩어지고 몇이 이곳에서 죽었다. 그리고 미군이 들어왔는데 숨어있던 국군이 나오는데 그럴 미군이 사격을 가해 죽여버렸다. 그리고 미군은 그냥 가버렸다.
이 유해를 마을 어른들이 수습하여 잘 매장하였는데 그곳을 알고 있다는 제보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1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3. 인민군 침투부대 섬멸작전
가. 개 요
국군 제1군단은 전선 절단작전(리퍼작전)이 개시 되기 직전에 미 제10군단에서 작전통제가 해제되어 3월 5일 강릉으로 복귀하여 제3군단으로부터 수도사단을 배속전환 받아 대관령-강릉(연곡천)을 방어하게 되었다. 이때 제9사단과 제1, 10경비대대도 군단에 편입되었다.
이 무렵 서부전선에서는 서울을 탈환하고, 중부전선에서도 아군이 38도선으로 접근하였다. 그러나 군단은 황병산-하평동으로 진출하여 이미 절단작전의 최종 목표인 아이디호선으로 진출하였다.
나. 양측의 전투편성
(1) 국군 제1군단 및 제3군단
국군 제1군단은 수도사단으로 하여금 전방방어진지를 강화하면서 좌인접 국군 제3군단의 공격을 지원토록하고, 제9사단은 연대단위로 군단 후방지역으로 북상중인 북한군 패잔병을 소탕하도록 하였다.
국군 제3군단은 우전방 제3사단이 황병산-노인봉-오대산 일대의 주저항선을 방어하고 제7사단 예하 제5연대가 사단에 배속되어 광천리일대에 집결 중에 있었다.
(2) 북한군 전투 편성
이 무렵 북한군 제10사단은 패잔병과 지방 게릴라들을 규합하여 2,000여 명으로 재편서한 후 안동 동북방 일월산으로 북상하엿다. 이 사단은 신정공세 때 제천 남쪽으로 침투하였다가 안동-영덕 선에서 퇴로가 차단되어 미 제1해병사단과 국군 제1해병연대의 공격을 받아 결정적인 피해를 입었고, 국군 제2사단의 소탕작전에 붕괴되었던 부대였다.
다. 작전 경과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수도사단으로 하여금 전방 방어진지를 강화하고, 제9사단이 연대단위로 북상중인 북한군 패잔병을 소탕하도록 하였다.
제9사단장 이성가 준장은 12일 제29, 제30연대로 석이암산-자병산에 차단진지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적은 아군의 기도를 간파하여 주력이 청옥산 부근의 고적대로 이동하고 다시 산계리로 집결하였다. 이에 사단은 예비인 제28연대를 투입하지만 18일 포위망이 돌파되어 북쪽의 목계리로 도주하였다.
적은 계속되는 유엔군의 공중공격과 지상군의 공격에 전력이 약화되어 소규모로 분산되어 산악을 이용하여 탈출을 기도하였다. 국군 제1군단 지역을 탈출한 적이 3월 17일경엔 좌인접 국군 제3군단 지역의 화난봉-석두산 부근으로 이동하여 이때부터 제3군단의 패잔병 소탕작전이 펼쳐졌다.
제3군단은 우전방 제3사단에 황병산-노인봉-오대산 일대에 주저항선을 방어하면서 적 패잔병을 격멸하도록 하였다. 이에 제3사단(최석 준장에서 김종오 준장으로 사단장 교체)은 제18연대는 오대산과 병두산일대, 제23연대가 동대산과 발왕산 일대에, 제23연대는 황병산 남쪽 진지에 배치하고 배속된 제7사단 제5연대를 광천리 일대에 집결시켰다.
북한군 제10사단이 18일 광천리 제5연대 제2대대를 기습한 후에 장군암으로 진출하다 제22연대 제2대대에 격퇴되면서 봉산리-발왕산-용산-백일평-노인봉 축선을 따라 진출하다 제22연대와 제5-1대대에 차단되면서 제23연대가 배치된 차항리-노인봉 축선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여 노인봉 일대에서 항공폭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게된다.
이후에도 적은 계속적인 퇴로를 개척하며 북으로 진출하다 인제지역으로 빠져나가게 되는데 이때의 전력은 1,000여 명에 불과했다.
라. 참전용사(지역주민)증언, 유해발굴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1) 이 시기에 작전에 참여한 참전용사님의 증언이 별로 없다.
지난 20여 년간 증언청취에 '51. 2~3월에 가장 큰 전쟁은 횡성지구전투다. 따라서 이 전투에 대해서는 제8, 3, 5사단의 증언이 제법 많이 있다. 하지만 동부지역 산악지역의 전투에 대해서는 언급하는 용사님을 만나기 어려웠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큰 피해나 전투성과를 얻은 전투가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실 이 시기에 수도사단이나 제9사단, 제3사단, 제7사단의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역주민들의 제보를 들어보면 북한군 패잔병보다 국군이 죽어있었다는 제보내용이 더 많았다.
안타까운 사실은 당시에 산악지역이다 보니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도 않았고 많은 부대들이 집결지 편성을 마을단위 민가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결국 민간인에 대한 피해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가축이나 식량뿐만 아니라 여인들의 피해가 컷으며 그러다 계곡속에 붙들려가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2) 노인봉-소황병산 구간에 항공폭격으로 적이 많이 죽었다는 것은 정설이 아닐 수 있다.
진고개에서 노인봉 오르는 구간은 그리 힘들지 않다. 진고개에서 좌측이 동대산이고 동쪽이 노인봉인데 진고개-동대산-두로봉-신배령 구간은 누가 굴토했던지 개인호 규모가 상당하다. 그러나 진고개-노인봉-소황병산-황병산 / 매봉에 이르는 구간은 그렇게 전투흔적이 많이 남아있지않다.
"노인봉 우측 능선에서 미군오폭으로 우리 전우들이 많이 상했다"
우리가 노인봉에서 소황병산으로 탐사를 진행하는데는 지역 주민의 제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차항리에서 만난 한 지역 어른이 본인이 어려서 탄피주으러 갔다가 아군의 시신을 많이 목격했다는 제보가 있었다.
여기에 신원을 밝히길 꺼려하는 한 참전용사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본인들이 노인봉 우측에서 북한군 패잔병을 추적하다 잠시 쉬고 있는데 미군의 항공폭격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개인호를 구축한 방향이나 형태를 보면 대략 우리가 구축한 것인지, 적군이 굴토한 것인지 분간을 할 수 있다. 미군이 파는 호는 더욱더 숩게 구별된다. 엄청 크게 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역 일대를 탐사하면서 북한군이 구축한 것으로 판단되는 개인호는 식별하지 못했다. 더구나 노인봉에서 소황병산에 이르는 구간은 동해안을 보고 수직으로 형성된 단애가 형성되어 이곳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방어한다는 것은 상식선에서 옳치않다. 조선시대 신립장군이 충주남강변에서 사용했다는 배수진의 전법이 아닌 이상은.
제 3 절 38선 진격작전
1. 서부. 중서부지역 진격작전
가. 개 요
미 제8군사령관은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재탈환하고 춘천을 점령하자, 3월 21일 새로운 작전을 구상하였다. 정찰 결과에 따르면 북한군 제1군단과 중공군 제26군이 의정부를 연하ㅑ는 선과 그 북쪽에 전개해 있음이 확인되었다. 제8군사령관은 임진강을 배수진으로 하고 있는 북한군 제1군단의 3개 사단이 공격하기에 가장 용이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들 북한군은 후퇴할 경우 반드시 임진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임진강의 도하지점만 차단되면 지리멸렬해 질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제8군사령관은 리퍼 작전을 확대하여 제187공정연대전투단을 이들 후방지역에 공중투하 하고, 미 제1군단으로 적을 압박해 격멸한다는 작전계획을 구상하였다. 제8군사령관은 이 작전을 "용기 작전"으로 명명했다.
용기 작전은 2단계로 구상하여, 제1단계는 미 제1군단이 행주-의정부 부근까지 진출하여 공격을 준비하고, 제187공정단이 문산 일대에 공중투하되어 1번 도로를 봉쇄하면 군단이 즉시 공격을 개시하여 24시간 내로 양 부대다 연결한 후 임진강 하구-문산- 북쪽-의정부 북쪽을 연결하는 이스펜선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2단계는 임진강에 연하여 설정된 벤톤선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나. 작전 경과
미 제1군단의 3개 사단은 3월 22일 08시에 10~16km 전방의 카이로선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군단장은 공중투하 부대와의 신속한 연결을 위해 특수임무부대로 미 제9군단으로부터 지원받은 제24사단 제6전차대대를 중심으로미 제3-7연대-2대대, 제58기갑야전포병대대 1개 포대. 제999기갑야전포병대대 1개 대대. 제14전투공병대대A중대를 편성하고, 제6전차대대장 그로우던 중령이 지휘하도록 하였다.
3월 23일 07시에 "토마호크 작전(공수부대 낙하)"를 위해 제187공정단이 대구비행장을 이륙하여 제1대대가 목표지역 상공에서 선두 비행기 엔진고장으로 대구로 복귀하면서 투하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결국 문산 남방 봉서산 일원에 낙하된 부대는 목표를 확보하였지만(84명 부상, 적 136명 사살, 149명 생포) 생포된 포로의 진술에 의하면 북한군은 북한군 제19사단 제36연대로써 300~500명이 이 지역을 방어하였음며 공중투하 전에 제1군단의 잔여 병력은 임진강 이북을 철수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문산지역에 공수작전이 개시되자, 미 제1군단장은 그로우딘 특수임무부대에 23일 오전 카이로선의 국군 제1사단을 초월하여 1번국도를 따라 신속히 진출하여 187공정단과 연결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국구 ㄴ제1사단이 문산을ㄹ, 미 제3사단이 동두천을 , 미 제25사단이 포천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 하였다.
그러나 특수이무부대는 진출간 적이 매설한 지뢰에 의한 피해를 우려하여 지나치게 기동에 신중을 기하는 바람에 23일 18시 30분에 선두가 문산에 도착하여 연결작전의 성과가 크지 못했다.
한편 군단 좌전방 국군 제1사단은 구파발 부근에서 경미한 저항을 받으며 동거리-금촌으로 진출, 접적없이 24일 저녁 무렵 문산-법원리까지 진출하여 제187공정단으로부터 작전지역을 인수하고 차후작전을 준비하였다.
한편 중앙의 미 제3사단은 호킨스특수임무부대(제15연대. 제64전차대대. 제65연대 전차 소대)를 선두로 의정부로 진출하던 중에 24일 중공군 제26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격전을 펼치게 되었다.
이때 중공군은 의정부 북서쪽의 468고지와 북동쪽 천보산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의정부-동두천, 의정부-포천 도로를 따라 진출하는 미 제3사단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결국 24일 공격에 천보산을 점령했으나 468고지는 점령하지 못했다.
이에 군단장은 미 제3사단 정면의 적을 포위 격멸할 목적으로 문산 북방에 집결한 미 제187공정단을 덕정리 북쪽의 228고지를 점령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제187공정단은 기상악화로 기동로가 불량하고, 연료 재보급이 원활하지 못해 문산으로 복귀했다가 25일에 다시 228고지를 공격했으나 적의 강려한 저항으로 목표탈취에 실패한다.
그러나 미 제187공정단이 228고지를 공격하게 되자 미 제3사단 정면의 중공군의 저항이 경미해지면서, 27일 결국 228고지를 점령하여 미 제3사단과 연결되었다.
군단 좌전방 미 제25사단은 좌전방 제24연대가 소리봉-해룡산을, 중앙의 제27연대가 죽엽산-왕방산을, 배속된 터키 여단이 주금산-국사봉을 목표로 경춘국도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소리봉-죽엽산-주금산 일대로 진출하자 1개 연대 규모의 중공군이 방어진지를 구추가고 저항하여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면서 결국 28일 미 제25사단이 포천을 점령한다.
이에 중공군 제26군단은 큰 피해를 입고 포천 북쪽의 종현산 부근으로 철수하고, 일부 낙오병들이 국사봉 소요산 일대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다. 참전용사(지역주민)증언, 유해발굴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1) 공수작전의 허와 실
중공군의 한국 저쟁사 제2권 제4차 전역 제2단계작전 편 기록
404페이지부터 보면 보면 북한군과 중공군 주력은 이미 3월 14일 새벽까지 서울을 철수하였다고 기록한다. 리지웨이의 회고록에 보면 "리퍼작전"의 목적은 수도를 수복하고 새로운 지구를 점령하는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주요 목적은 적군의 유생역량을 포로로 하거나 소멸하고, 그 무기 장비를 노획하고 파괴하는데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리퍼작전은 완전한 성공이 아니였다. 적군이 신속하게 북으로 철수하고 특히 중부지구에서 험난한 지형의 영향으로 기동부대가 신속하게 기동하여 적을 포위하고 돌파하여 점령하는데 어려웠다.
따라서 유엔군이 3월 15일 서울을 점령후 리지웨이는 작전규모를 확대하여 중부전선에서 미 제9군단이 지휘하는 미 기병 제1사단과 해병 1사단으로 홍천-춘천선에서 38선을 향해 공격하였다.
그러나 홍천을 향해 진격하면서 적의 저항이 거세어 리지웨이는 미 공수 제187연대를 3월 22일, 춘천에서 한국전 사상 두번째로 공수하여 춘천의 지원군 부대를 섬멸하여 춘천을 탈환하고자 하였다, 또한 군단이 지휘하는 국군 제6사단과 미 제24사단이 춘천-가평선에서 38선을 향해 전진하였다.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이 임진강을 향해 전진하고, 군단이 지휘하는 국군 제1사단이 성ㄹ-문산도로를 따라 진격하고, 미 제3사단은 서을-의정부 도로를 따라 진격하고, 미 제25사단은 의정부 동북 송우리를 향해 돌진하여 의정부에서 중공군을 격멸하고 미 제3사단이 동두천을 미 제25사단이 포천을 점령하였다.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과 한국군은 현리, 양양 일선을 향해 전진하였다. 그러나 미 제1기병사단이 기 계획한 것보다 빨리 21일 춘천을 점령하면서 공수부대의 투하작전이 취소되고 제187공수연대의 공수낙하 임무는 문산으로 수정하여 국군 제1사단과 배합하여 문산에서 북한군을 섬멸하고자 하였다.
공수작전에 투입된 규모는 먼저 미 제5항공대 B-26 경폭격기 56대가 출격하여 강하장소를 맹타하고, 뒤이어 C-119 72대와 C--46 48대로 총 3,400명의 병력과 지프차. 경전차, 구경 105mm 포 등 각종 장비와 보급품 220톤을 투하하였다.
그런데 이미 인민군 제19사단은 주력이 문산에서 철수하였고 나머지 1개 연대 중 2개 대대는 날이 새기전에 철수하였고 다른 1개 대대만이 남아서 미 제187공수연대와 격전을 벌였다.
(2) 봉서산 일대의 탐사 및 탐문 결과
사실 봉서산은 지금도 미군의 첩보부대 감청반인지 정상부근에 배치되어 있다. 현장은 전후에 건물을 축조하면서 원형이 대부분 파괴되어 남아 있는 흔적은 그리 많이 없었다.
또한 당시에 이 작전을 목격한 지역주민이 사실 없었고(1.4후퇴 당시에 모두 피난) 국군 제1사단 참전용사도 이 작전에 관하여 증언하는 분이 없었다.
다만 문산천을 장애물로 서쪽의 덕은리와 남쪽의 위전리 도내리 일대는 전투흔적이 상당수 남아 있고 유해도 덕운리 지역에서 20여구를 발굴하였다. 그러나 이 발굴유해들은 3월전투가 아닌 중공군 5월 공세이후에 재진격간 전투상황에서 전사한 용사라는 것을 지역 주민증언을 통하여 확인함으로써 3월 전투는 아니였다고 본다.
(3) 양주 은현 228고지의 진실
이 고지는 미군 제187공수연대가 '51. 3. 25일 아침에 문산에서 전환하여 공격을 개시하여 중공군의 저항을 크게 받았다고 기록된다. 그래서 우린 이 고지를 탐사하기로 하고 달려갔다.
"수많은 포로들이 굴속에 들어 있었다"
은현 선암리 하패리 지역에 가서 탐문을 해본 결과 중공군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지역 주민이 그곳에 들어가 먹을 것을 얻어먹고 포로들을 직접 목격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이 228고지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 봉양동의 302고지 칠봉산 해룡산에 이르기까지 본인이 직접 다 다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228고지에 굴 출입구가 한개가 아니라 여러개가 있었는데 지금 모두 폐쇄조치되어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다.
"혹시 포로 분들이 미군인지 국군인지 모르시나요?"
"내가 당시에 11살인데 다 알지. 양키가 어떻고 국군이 어떻고를 다 아는데 중공군 중에 한국인이 많아요. 그래서 심부름도 하고 들어오라 해서 들어가 미뭇가루도 얻어 먹곤 했는데 한 500명도 넘어요. 붙들려온 포로들이. 그래서 보니 주로 미군이 많았고 국군도 있고 민간인같은 사람도 있고 경찰 옷입은 사람도 있고 모두들 묶여서 앉아 있더라고"
"미 공수부대가 화염방사기로 다 태워버렸다"
우리는 안내를 받아 굴의 입구를 3개소 식별하여 정밀탐사를 계획하여 다른 곳의 지역주민도 들어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중요한 제보가 당시에 중공군이 굴 내부에 볏짚으로 벽을 둘러 춥지도 않았고 좋았다는 것과 미군 공수부대가 들어와 화염방사기로 불을 질러 모두 내부가 타버려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그 후에 폭파시켜서 지금 들어가려면 굴삭기를 투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당시에 부상자들이 많았는데 아마도 그분들은 그 속에서 불타 죽었을 거라한다.
그러니 더이상 우리가 조사를 할 엄두가 안나서 주변에 탐문활동을 폭넓게 실시하여 지금의 미군 제2사단 자리 다시말해 소요산 남서부 측면이 엄청난 전투지역이고 전후에 전사자들이 널려 있었으나 부대가 들어서면서 모두 어디로 치워졌는지 다 모른다고 한다.
(4) 소요산-국사봉, 종현산 일대의 전투 흔적과 탐문결과
소요산은 전사와 제보대로 전투흔적이 북쪽 초성리 방향(초기 전투시 아군의 전투지역)이 아니라 공주봉-의상대-소요산에 이르는 횡격실 능선에 주로 호가 남쪽 방향으로 굴토되어 있고(북쪽 방향으로도 일부는 있지만) 형태도 크게 굴토하지 않은 것을 보았을 때 중공군이이나 북한군 아니면 국군이 일시적으로 점령한 흔적이다.
봉암동과 보산동 일대는 1.4후퇴시 국군 제6사단의 병력이 들어와 잠을 눈 내리는 날 자므에 들다 대량 피해를 입어 복숭아밭이 많았는데 꼭 복숭아 떨어진 것처럼수많은 군인이 전사했고 그걸 직접 목격했다는 분들이 다수 생존해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이나 북한군은 그렇게 많이 보질 못했고 미군도 많이 상하지 안했다고들 한다. 소요산이 585고지인데 바로 앞의 종현선은 588고지로 거의 비슷한 높이다. 그런데 이 종현산에는 전투흔적이 쾌나 많았고 추동과 주원리에는 미군이 많이 붙들려와 죽었다는 지역 제보도 많았다. 지금 화력발전소가 있는 추동리, 종현산 동측 아래가 중공군 연대급 지휘소가 있었다고 하며 북쪽 자락의 군자리에 실제 미군이 죽어서 가매장 된 곳을 이 발굴사업이 시작되기전에 미군 발굴단이 들어와 3구인지 발굴도 해갔다고 한다. 여기가 바로 38도선 영평천이 동서로 흐르는데 지역적으로도 북한과 근접한 곳이라 여러 이야기들이 있다.
"엄지손가락을 잘라서 단지에 넣어서 갔고 가다 놓고 후퇴했다"
주원리에서 탐문 도중 가장 끔직한 제보를 들었다. '50.9.28일 서울 수복 후에 유엔군과 국군이 진격하고 다시 중공군이 개입하하면서 '51.1.4후퇴로 내려갔다 '51.3.15일 서울을 재수복 후에 3월 중순이 넘어 봄이 오는데 다시 중공군과 북한군이 38도선으로 밀려가다 '51.4월 말에 공산군이 치고 내려왔고 그 후에 6월이 넘어서 다시 유엔군과 국군이 이곳으로 진격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으로 진격하는 미군을 따라 영평천이 보이는 산자락에 올라갔는데 무슨 단지가 있어 처음에는 뷰비츄랩인줄 알고 미군들이 건드리지 말라했는데 궁금해서 결국 열어보니 엄지손가락이 가득들어있었다 한다.
"미군이 도쟈를 가져와 중공군 시체를 밀어서 강물에 집어 넣었다"
이곳은 연천군 청산면 백의리와, 포천시 창수면 고소성리, 오가리, 주원리 지역으로 동서로 용평천이 38도선이다. 그런데 미군이 '51년도 6월인지 진격간에 지금의 고소성리에서 오가리에 이르는 강변 북쪽에 중공군 시체가 얼마나 많은지 차량이 갈 수도 없었다. 그 썩는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고 있는데 눈뜨고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걸 미군이 도쟈를 가지고 와서 밀어서 모두 강물에 집어넣어 통로를 개척했다는 이야기다. 바로 여기서 87번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보장산(565)-종자산(643)-지장봉(877)-금학산(947)과 고대산(832)에 이르고 철원평야다
2. 중동부지역 진격작전
가. 미 제10군단 지역
1) 개 요
미 제10군단은 리퍼 작전의 조공으로 한계-풍암리-태기산-계방산을 연하는 아이다호선을 목표로 공격하게 되었다. 군단장은 좌측의 횡성-풍암리 간 소로와 우측의 평창-방림리-속사라 도로를 따라 진격하는데 역점을 두고 이 도로 축선에 미 제2사단과 미 제7사단을 배치하고 국군 제5사단을 양 도로 사이의 산악지역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때 국군 제5사단은 중공군 2월 공세 이후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어 단양-풍기 간의 보급로 경계임무를 수행하면서 부대 정비 중, 3월 3일 다시 미제10군단에 배속되어 5일 운교리-안흥리 지역으로 진출해 리퍼작전을 준비하였다.
2) 작전 경과
미 제10군단은 3월 7일 벌교산-태기산-속사리를 목표로 좌전방에 미제2사단을 중앙에 국군 제5사단을 그리고 우전방에 미 제7사단을 배치하여 3개 사단 병진공격을 개시하였다.
국군 제5사단 면의 적은 북한군 제6사단으로 이들은 1개 연대를 증원받아 태기산으로 연결되는 고지군을 점령하고 있었다. 국군 제5사단은 3월 7일 좌전방 제36여대가 봉복산(1028)을, 우전방 제35연대가 태기산(1261)을 목표로 공격하였다. 근접사격과 총검이 난무하는 백병전을 펼치며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ㄹ거쳐 제35연대는 자주봉(889)을, 제36연대는 갑천리 남쪽의 685고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생포된 포로의 진술로 적이 사생결단으로 지연전을 펼친 것은 11일부터 개시된 적 주력 부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한 것임이 밝혀진다. 이 런 시기에 적의 저항이 경미해지는 가운데 사단 동측의 미 제7-17연대의 대미산 지역을 인수하여 작전지역을 동쪽으로 학장하게 되었다.
추격전을 펼친 제5사단은 14일 적의 최후 거점인 태기산을 점령하고, 15일에는 북쪽의 운무산(980)-흥정산(1277)의 아이다호선으로 진출한다. 이때 제27연대 정찰대가 검산리 부근에 매복 중 3월 17일 적이 후퇴하면서 은익한 무기와 탄약을 회수해 가려고 침투한 600여 명의 적을 포착하여 425명을 사살하고 57명을 포로로 하였음며 박격포 22문 등 다수의 장비를 노획하였다.
미 제10군단은 결국 17일 최종 목표선인 아이다호선으로 진출하여 리퍼작전을 종료하게 된다.
나. 국군 제3군단 지역
1) 개 요
한편 리퍼작전의 조공인 국군 제3군단은 최종 공격목표인 계방산-황병산을 연하는 아이다호선까지 약 16KM가 남아 다른 군단에 비해 진격거리가 짧았지만 험준한 태백산맥 줄기를 끼고 있었다.
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작전지역이 기동공간이 협소하고 군단 후방 지역에 북상 중인 북한군 패잔병들의 빈번한 출몰 등을 고려하여, 제7사단과 배속된 국군 해병 1연대를 공격부대로 투입하고, 미 제10군단에서 복귀한 제3사단을 예비로 하여 국군 제1군단으로 배속전환되는 제9사단의 정선 일대를 인수하도록 하였다.
2) 작전 경과
국군 제7사단은 좌전방 제3연대를 상대화에서 백적산(1141)-잠두산(1391)을 경유 속사리로, 우전방 제5연대를 대기에서 백석산(1364)-박지산(1391)-형제봉을 경유하여 하진부리로 3월 6일 08시에 공격하게 하였다.
이 무렵 군단 정보보고에 북한군 제9사단 주력이 백적산을 고수하기 위하여 속사리에서 남하 중이며, 하진부리 부근에서 정비 중이던 북한군 제27사단이 형제봉과 박지산으로 남하하여 국군 제7사단의 우측방을 위협할 것으로 판되었다. 이에 군단은 국군 제1해병연대를 긴급히 이 지역으로 투입하였다. 따라서 해병연대는 봉산리와 발왕산(1458)을 선점하기 위하여 신속히 기동하여 선점하게 된다.
국군 제7사단은 7일 공격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공격이 여의치 않게 되자 사단은 8일 3개 연대 병진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좌전방 제3연대가 7시간의 일진일퇴 공방전으로 백적산을 탈취하게 된다.
북한군은 2개 대대 규모로 야간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사단의 화력으로 크게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그럼에도 하진부리-마평리를 연하는 계곡 통로에 증원 병력을 집중하염서 사단 후방의 백석산을 목표로 진출을 기도하였다.
이에 군단장은 하진부리를 조속히 점령하여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군단 예비인 제3사단 제18연대를 전방에 투입하였다. 북한군은 2개 연대 규모로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사단의 보.포.공 협동작전에 의해 백적산-거문리-형제봉 선으로 격퇴되었다. 사단은 11일 백적산을 확보함으로서 공격개시 1주일 만인 12일에 최종목표인 속사리와 하진부리를 점령하고 경강국도를 통제하게 되었다.
한편 국군 제7사단의 우전방을 방어하던 국군 제1해병연대는 3월 7일 봉산리의 제3대대가 좌인접 제7사단 제5연대의 철수로 인해 적중에 고립되었다. 제3대대는 9일 제18연대가 군단의 우측방으로 투입될 때까지 공중투하 보급을 받아가며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수차례 격퇴하였다.
북한군의 철수가 시작하자 제1해병연대는 13일 09시를 기해 공격으로 전환하여 최종 목표인 외래차지까지 진출하였고, 15일 다시 차항리로 이동하여 작전지역을 제3사단 제22연대에 인계하였다. 그리고 16일에는 미 제9군단의 미 제1해병사단으로 배속이 전환되어 홍천으로 이동하였다.
국군 제3군단은 3월 25일 후방지역의 패잔병 소탕작전을 제7사단에 전담시키고 제3사단으로 하여금 경강국도에서 카이로선인 현리-하서림 도로를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도록 하였다.
제3사단은 제18연대를 주공, 제23연대를 조공, 제22연대를 예비로 하여 26일 08시에 공격을 시작하였다. 제18연대는 오대산에서 설악산으로 연결되는 산악능선을 따라 공격하여 경미하게 저항하는 적을 격퇴하고 27일 카이로선사의 하서림을 확보하였고, 제23연대는 27일 월정동을 경유 30일 조개동으로 진출하였다.
3. 동해안지역 진격작전
가. 개 요
국군 제1군단은 리퍼작전이 개시되기 직전 미 제10군단에서 작전통제가 해제되어 3월 5일 강릉으로 복귀하였다. 이때 제3군단으로부터 작전지역 일부를 인수받고 제9사단과 수도사단을 배속 전환 받았다. 제3군단으로부터 작전지역을 인수할 무렵, 군단은 황병산-하평동으로 진출하여 이미 절단 작전의 최종목표인 아이다호선에 도달하였다.
이 무렵 군단 작전지역내에는 북한군 제10사단이 패잔병과 지방 게릴라들을 규합하여 2,000여 명으로 재편성한 후 북상 중이었다. 이에 제1군단은 제9사단을 투입하여 이들을 소탕하였다. 3월 18일을 전후하여 소탕작전이 소강상태로 저어들자, 육군본부는 군단에 카이로선 이남 지역에 대한 강력한 정찰을 실시하도록 명령하였다.
나. 작전 경과
이에 제1군단장은 양양 공격에 앞서 수도사단으로 하여금 연곡천 북쪽지역에 대한 강력한 수색정찰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때 군단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69여단이 북으로 철수한 제10사단의 일부 병력을 증원받아 하월천리-만월산-명지리 축선에 축차진지를 편성하고 국군의 진격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동해안의 함포사격으로 많은 병력이 손실을 입어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기 때문에 수도사단 제1연대의 진출을 저지하지 못했고, 이에 수도사단은 대관령 너머의 유천리와 차항리 일대의 제26연대를 양양 남쪽의 인구리로, 예비인 기갑연대를 강릉에서 주문진으로 이동시켰다.
육군에서는 3월 25일 08시에 제1군단과 제3군단은 3.25~26일 양일간 공격하여 카이로선을 점령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수도사단은 카이로선의 양양을 점령하기 위해 3월 26일 좌전방에 제1연대, 우전방에 제26연대로 공격을 개시하여 27일 남대천을 도하하여 양양으로 진출, 양양-서림간의 차단진지를 점령하였다.
이 무렵 군단장 김백일 소장이 태백산맥 서쪽에서 작전 중이던 제9사단의 전선을 시찰하고 강릉으로 보귀하던 중 L-5기 추락사고로 전사하게 된다..
양양에서 철수한 북한군은 설악산 입구의 387고지에 강력한 저지진지를 구축하여 3월 29일 제1연대가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음날 포격을로 제압하면서 다시 공격하여 적은 오색리를 경유하여 설악산으로 퇴각하게 된다. 이로써 제1군단은 동해안의 전술적 요충지인 양양을 확보하게 된다.
대청봉
화채봉 송암산
한계령 관모봉 둔전리
오색리 가라피 수상리 양양
필례약수
점봉산
귀둔리 진동리 조침령
서림
구룡령
창촌 오대산군
운두령
다. 참전용사(지역주민)증언, 유해발굴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1) 가라피 387고지의 전투흔적
양양 가라피리에서 오색으로 한계령으로 연결되는 도로 북쪽에 387고지가 있다. 이곳은 설악산의 동남쪽 하단으로 바로 북족에 877고지의 관모봉이 우뚝솟아 있다. 그러나 이 387고지에서 관모봉에 이르는 능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적은 동해안의 함포와 국군의 빠른 진출에 도로변에서 축차적인 지연전을 하며 본대의 설악산 내부로 후퇴하는 시간을 벌기위한 저항을 결사적으로 했다고 보인다.
그러나 막상 이곳 일대의 400고지군을 탐사했을 때는 그렇게 많은 개인호나 전투유품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 골짜기에 불교 박물관이 있어 들어가 사실관계를 확인하여 했으나 여기도 오래사신 주민이 별로여서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는 설악산 대청봉에서 관모봉을 거쳐 강현면 둔전리로, 대청봉에서 화채봉-송암산을 거쳐 둔전리로 이어지는 루트를 모두 탐사했으나 그렇게 큰 전투 흔적은 식별하지 못했는데 전사에는 이곳 387고지 전투가 부각되어 있다.
(2) 오대산군의 전투 진실
전사에는 제3사단과 제9사단이 어떤 상황에서든 오대산지역에서 패잔병 소탕 또는 게릴라 소탕작전을 전개한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실제 오대산 지역에는 그리 많은 전투 흔적을 찾지 못했다.
전투흔적의 대명사 격인 개인호는 두루봉-동대산-진고개 구간에 그런대로 조금 식별되고, 상왕봉-비로봉-호령봉-을수골 1315고지-진부면 탑동리 북쪽 1300고지군까지는 드문드문 있다. 그 서쪽으로 용평면 노동리 계방산에 이르는 구간은 상당히 많은 개인호가 발달하여 차후 중공군 5월공세시 후퇴하면서 굴토된 것인지 아니면 현재 언급되고 있는 양양 진격간 굴토된 것인지 분간이 어렵다.
전사에도 오대산일대에서 정규작전으로 많은 전과나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을 찾기가 쉽지않고, 적 패잔병이나 게릴라 부대를 격멸한 기록이 주인 것을 보면 그 사실관계가 불분명하다.
우리가 오대산 지역에서 발굴한 유해는 주가 속사리에서 횡계리 일대의 평창 전투지역으로 250여구('15까지)이다. 실제 오대산에서 발굴한 유해는 척천리 가매장 지역(1구), 그 북쪽능선에서 몇구를 찾는데 머물러 있다.
(3) 이춘풍 용사님을 기다리는 방아다리골 할머니 비화
할머니 남편의 이름이 고 이춘풍 용사님이다. 수도사단 소속으로 이곳 오대산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할머니는 남편이 군에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는 가운데 시동생들을 길러 장성시키고 남편이 오리라 믿으며 기다리셨다.
그러나 기다려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가운데 세월이 지나 결국 직접 찾아보시겠다고 이곳으로 들어오셨다. 방아다리골에 집을 마련하여 살면서 남편이 살아오길 기다리신 할머니다.
나는 이곳 일대를 탐사 및 탐문 활동을 하다 들리게 되어 일년에 한두번은 이 집에서 잠에 들며 정말 이춘풍 용사님이 나타나길 기원했다.
할머니는 북한군 점령시절에는 집이 원래 서울 강서구로 김포공항 근처였는데 부역으로 참가하여 공항일대에서 시신 처리도 했다. 하지만 그 장소는 제2활주로가 생기면서 모두 흔적조차 없다. 또한 지금 서울 강서구청 바로 앞 무명야산에도 시신처리에 여자의 몸으로 참여하여 여기저기 묻었다고 증언하여 나는 이곳 일대도 탐사를 여러번 했지만 찾지 못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직접 방아다라골 일대의 주민을 대상으로 제보를 받아 알려준 장소에서 유해를 몇 구 발굴하였다. 그런데 진작 남편분인 고 이춘풍 용사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할머니는 기다리다 이제 고인이 되었다.
4. 전투 결과
'50.1월 중순부터 시작된 일련의 위력수색과 반격의 개시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2월 초순까지 국군과 유엔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중공군과 북한군은 유엔군이 위력수색 작전과 소규모의 제한목표 공격을 실시하는 동안에 재편성 및 재보급과정을 통하여 차기 공세를 은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공산군은 서부지역에서 아군과의 접촉을 피하면서 그동안 많은 병력을 중동부 산악지역으로 이동시켰다. 그들은 유엔군 전선의 취약한 중동부전선을 선택하여 돌파를 실시하고 서부전선의 유엔군 주력을 측면 포위하는 게획을 가지고 있었다.
중공군은 2월 9일 횡성을 목표로하는 공격준ㅂ비명령에 따라 신속히 병력을 집결시키고, 2월 11일 17시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당시에 총 13개사단이 사방에서 동시다발로 돌진하는 형태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중과 부족으로 지리 멸렬되어, 2.11~13일 어간에 병력 손실이 약 11,800명에 이르렀다. 국군이 9,800명, 미군이 1,900명, 네덜런드군이 100명이었다. 그밖에 국군 3.5.8사단의 105밀리 야포 14문, 88대의 차량, 미군과 네덜란드군의 105밀리 14문, 155밀리 6문, 280대의 차량을 상실하였다.
횡성전투 결과 중동부 전선에 1월 이후 다시 한 번 대돌파구가 형성될 위기에 미 제23연대전투단이 지평리 방어작전을 성공함에 따라 유엔군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중공군 개입 후에 최초로 유엔군의 전술적 성공 사례였던 지평리전투는 유엔군과 각 부대에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제8군사령관은 보다 더 적극적인 공격작전으로 킬러작전과 리퍼작전을 실행하여, 결국 유엔군과 국군은 킬러작전에 이어 서울 재탈환과 38도선 진출작전을 목표로한 리퍼작전을 3월 말까지 전개하여 문산-동두천-춘천-현리-양양을 잇는 선까지 진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