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온 혈육이 모여 나의 거창 하다면 거창한 칠순 잔치를 치뤘다.
그 날 얘기 했지만 온 가족이 그렇게 많이 참석한 경우도 없었던 같아
여간 반갑지 않았다.
바꿔 얘기 하자면 별 대수로 생각 하는 인생이 크게 칭찬 받은 거 같아
아닌말로 죽어도 여한이 없게 됐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이 언제나 시골 초가집 시렁을 돌아 다니는 생쥐 같이
평생을 두려워 하고 한탄하고 비관적으로 살아 왔는데. .
남 들이 보면 내가 가진 능력보다 더 할 수 없는 행운에 기대어 평생을 즐기며
살아 왔는 지도 모른다.
내가 중학교 갈 즈음에 병곤 형이 입학고시의 우수한 성적으로 3년 전액 장학금으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됨에. 병곤 형의 주장에 대해 부모님의 결심으로 시골 살림의 어려운 사정임에도
운 좋게 부산으로 갔고 그런 나이기에 같이 어려운 외가에서 공부하면서 나 또한 형의 전철을
밟고싶어 고등 학교도 그렇게 가게 됐는데 결과적으로 내가 형 만한 지혜나 명석함이
따르지 않아 그 겉치레만 하고 말았다.
어런 사실을 사실 얼마전에 알아 다시한번 병곤 형에 대한 고마움을 가지게 됐다.
살아오면서 병곤 형에 대한 나의 아쉬움이 있었는데. .우리 부모님과 모든 형제들이 알게 모르게 병곤 형의 도움을
받으며 젊은 시절을 살아 왔는데 나는 방위 시절에 병곤형이 보내준 5 만원으로 오리엔트 손목 시계
받은게 없다 생각햬 왔는데 내 인생의 반석부터 깔아 주셨다 싶어 다시한번 이럴 때를 빌어
인사드린다.
우리 형제의 돈독한 우의는 남들이 다 부러워 하는데 이는 큰 형님 작은 형님의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과 믿음에 기초하여 동생들의 이견이 없을 만큼 일사불란 했고 병두의 신실함과 향주와 황서방의 적극적이고
다양한 아이디어가 어울러져 이뤄낸 것이라 믿는다.또, 결과적으로 우리 형제의 활동에 윤활 역할을 해 준 형제기금의
작용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그 또한 작은 형의 용의 주도에 의한 장기적인 노력과 지원 덕분이 큰 공헌이라 싶다.
내 칠순 잔치상에 배놓고 감놔야 되는데 뜬금없는 병곤 형에 대한 칭송으로 일관 하는 건..
70 인생을 관통하는. . 어떤 식으로든 내가 알든 모르든 내 인생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분이
특별히 언급하자면 여의도 작은 아버지와 병곤 형이고 이 두분에 대한 언급을 않고는 내 인생을 말할 수 없을 듯 하다.
작은 아버지는 우리 집안의 모든 사상을 내려 주시고 경제적 지원을 아까지 않으셔서 그 깡촌에 살아온 우리에게
남다른 교육의 중요함을 일깨움을 주셨고
또한 우리 형제들의 입신 양명에 첨부터 끝까지 지원과 응원을 아끼지 않으셨고 나는 직접적이라기 보다
나한테까지 그 지원의 여파가, 인식의 흐름이 영향을 미쳐 도회에서 공부하고 터전을 닦아 나가는 초석이 됐다.
작은형은 내 일생의 모든 좌표가 형에 의해서 정해줬거나 의미를 알게 해 줘서 그 길을 따라 가려고
애써 왔다. 허나, 대부분 모짜르트의 천재성을 알아챈 살리에르 처럼 부러워하고 시샘하고 시기 질투하고 포기한 경우가
많았으나 내 일생을 관통해서 형의 지대한 그림자를 부정할 수 없다.
아주 가끔은 나를 칭찬 해 주시는 경우가 있는데 누구에게 자랑 할 수 없지만 어떤 상 보다 자랑 스러웠고
또 그 만큼 형의 지적에 대해 마음의 상처가 커서 며칠이고 앓을 떄도 있었다.
그런게 내 인생의 큰 흐름을 지배하고 나아가서 형의 바램대로 살아가느라 애썼다.
그러니 아무리 애쓰고 용써봐도 도저히 형의 그 교시대로 따라 갈 수 없으니 그게 내 팔자라고 스스로위로하고
그렇게 해서 지금의 내 양상이 만들어 졌다.
그렇기도 했지만 참 희한 하게도 형은 지금 나의 가장 만만한(?) 친구이기도 하다.
어느날에는 내 학원비를 대 주면서 키타를 같이 배우자 했고
지금도 골프 스윙을 지도해 주기도 한다.
그런데.. 더러 가만히 생각 하면 하나님의 섭리 인가 하는 행운이 인생의 여기 저기에
깔려 있어 내 가진 것보다 더 나은 결과물이 된 것도 있는 듯 하다.
이제 내 아내에 대한 생각을 좀 말해야 할 듯 하다.
형 이상의 인생의 동반자이고 내 일거수 일투족을 지며보고 좋은 말을 해 준 아내가 나는 정말
하나님의 선물이다 싶다.
단순히 하나님의 섭리로 얘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여자이고 내가 근접할 수 없는 영역의 순수의
그 자체인 여자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연분이 있어 잘 만났다 하는데. .나는 아내에 비해 너무 방탕하고 무성의 했다.
그렇다고 머리에 광주리 얹어 하는 행상으로 우리집 살림을 돕도록 한 건 아니지만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좋은 처녀가
나하고 40년을 살아왔고 나에게 적당한 모습을 가지도록 물심 양면으로 분에 넘친 헌신을 해 줬다.
우리 둘 사이엔 고맙다 말 안해도 서로 알 정도다. 이 사람을 오래도록 사랑하며 지켜주길 노력하겠다.
또 얘기하는 데.. 좋은 친구와 유익한 사람들을 만나 왔던게 내 인생 여정에 있어 아주 중요한 댓돌이 되기도 했는데
사람 인생은 알 수 없어 작은 인연이 큰 결과를 가져 오기도 하고 뜻하지 않게 큰 행운을 가져 주기도 한다.
내가 지금 이 나이에도 적당한 수입과 오락을 같이 즐기는 것도 그런 행운의 친구가 있어서 이다.
그런데 나는 첨부터 그 친구를 계산해서 만나지 않았고 어떤 기대도 없이 오며가며 안부 물어보던
친구였다.
이제 70 나이면 적당히 인생의 맛을 말할 수 있을 듯 하고 죽고 사는 게
오늘 내일의 일정이 될 만큼 가까워 졌는데 그래서 이제는 아무리 욕심부려 하는 일도
분에 넘치지 않는다 했는데 아직 해보지 않은 건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 거다.
봉사한다는 건..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감사를 느끼고 기쁨을 알 때 하는 거란 말처럼
그런 마음으로 주위에 사회에 봉사하며 여생을 보낼 것을 생각하며
다시한번 나의 형제 자매 됨을 감사드리고 모두의 인생이 아름답게
꾸려지기를 간절히 하나님꼐 빈다.
.
첫댓글 모처럼 긴 얘기 울림이 있네요.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음은 거기에 어울리는 내가 있음이요, 그런 자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을까요....아무튼 ....그렇게 믿습니다. 그냥 이루어지는 일은 없는것 같아요.
옛날 얘기 많이 썼네
고희에 남기는 글이니 남기고싶은 얘기 많이 남기면 좋기는 한데~ 내 관련글은 읽기 숙스럽네
다섯남매가 학창시절을 부모님 덕으로 서울 부산 포항으로 흩어졌다 모였다 하면서 서로 마음으로 큰 의지를 하며 무난하게 보낸것이 지금 생각해도 큰행운이었고 위로였던거 같다
따로 또 함께 걸어온 지난세월이어 너무 고맙다
병무는 특히 어릴적 외갓집에서 4년을 같이 살아서 제일 추억이 많고 고등학교 동문까지 되었으니 남다른 형제이기도 하다
남은 세월도 오래오래 지금처럼 건강하고 서로 의지하며 살면 최고 행복한 가족이 될거라 믿는다. 고희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