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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59
10월25일 [연중 제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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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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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3L7KXBlVa2E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58610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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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힘겨운 날>
오늘 오후 한 아이를 "큰집"에서 데려오는 차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오랜만에 쐬는 바깥공기에 기분이 좋아진 아이는 "마치도 길고도 깜깜한 터널을 막 빠져 나온 느낌이다"고 말했습니다.
그간 아이의 고생이 손에 잡힐 듯 했습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홀로 이곳 저곳을 전전해서 그런지 아이는 자기표현이 뚜렷했습니다.
제가 "적군"이 아님을 확인한 아이는 자신의 지난 스토리를 스스럼없이 아주 소상하게 들려주었는데... 참으로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아이의 기막힌 사연을 들으면서 진흙탕에 빠진 사람에게는 그를 건져줄 다른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아이 홀로 헤쳐나가기 어려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혼자 발버둥쳐도 진흙탕에 빠진 사람은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들기 마련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이 있더라구요. 알아서 뭍으로 올라오겠지 생각하고 방치해두면, 더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어 결국은 헤어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하루였습니다.
힘겨운 날 어깨를 기댈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다는 것처럼 슬픈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그런데 때로 이 세상 어딜 가도 의지가지 하나 없이 홀로 비틀비틀 걸어가는 아이들을 만납니다. 너무도 가엾어서 할 말을 잃고 맙니다.
결코 길지 않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힘겨운 날, 이 세상에 그나마 당신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계셔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사랑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힘겨운 순간 함께 같이 길을 동행해주는 일, 깊은 좌절로 인해 일어설 힘조차 없을 때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는 일,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고통이 눈물 되어 흘러내릴 때 조용히 어깨를 감싸 안아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일,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돈보스코 성인의 교육학 안에 참으로 중요하며 효과적인 도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친절한 사랑입니다. 돈보스코 성인에게 있어서 친절한 사랑이란 아이들의 영혼을 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전략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친절한 사랑은 살레시오 정신 안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입니다.
친절한 사랑이란 잘 대해준다든지 공감해준다든지 상냥하게 대하는 그 이상의 태도입니다. 친절한 사랑이란 상대방의 무례함이나 부족함을 끊임없이 인내하는 덕 중의 덕입니다.
친절한 사랑은 상대방의 성장을 위해 기꺼이 한 알 썩는 밀알이 되고자 하는 바램의 외적 표현입니다. 친절한 사랑은 인격 전체의 투신을 요구하는 영웅적인 행위입니다.
친절한 사랑은 이웃에게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개방하고 이웃을 진정한 형제로 받아들이는 복음적 삶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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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는 끊임없이 해고한다>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0xCw6gHSa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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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모든 율법의 목적지입니다. 사랑하면 그러니 모든 율법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했어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양한 지식이 결국은 자신을 속이게 될 것입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속는다는 말이 딱 맞습니다. 지식의 목적은 행복이고 영원한 삶인데, 사랑을 위한 지식이 아닌 것들은 시간과 에너지만 낭비하게 만들어 지식의 허세라는 수렁에 빠지게 만듭니다. 겸손과 사랑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배워서는 안 됩니다. 교만만 키우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교육이 마치 히틀러와 같은 괴물을 만들어내는 것에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이 경쟁하여 남을 이기는 목적이 된다면 그렇게 많이 배운 사람은 그 배운 것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가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사랑은 분명 경쟁이 아니라 공생입니다. 나를 죽게 하여 타인을 살리는 삶입니다. 이 방향이 틀어지면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됩니다. 우리는 관계의 중요성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참 많은 시간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영화 ‘인 디 에어’(up in the air/ 2009)는 해고 대행 회사의 베테랑 직원인 ‘라이언 빙햄’의 이야기입니다. 라이언은 전국의 사람들을 만나 회사 대신 해고통보를 해주는 일을 하며 1년 365일 중 322일을 비행기에 오릅니다. 그런 그가 원하는 유일한 것은 아메리칸 에어라인(AA)에서 천만 마일리지를 모아 7번째이자 최연소로 플래티넘 카드를 발급받고 기장에게 인사받는 것입니다.
그는 해고통보를 하는 일과 별개로 강의도 하는데, 그의 강의 주제는 ‘당신의 배낭에는 무엇이 있습니까?’입니다. 배낭에 넣는 물건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부담을 지지 않고 사는 것의 장점을 피력합니다. 라이언은 결혼도 안 하며 어떠한 관계에도 얽매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출장을 가서 바에 들른 어느 날, 자신처럼 출장을 다니는 아름다운 여인 ‘알렉스’를 만나게 됩니다. 서로의 출장 일정을 맞춰보고 일치할 때마다 만납니다. 그러나 그냥 가벼운 관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라이언의 회사에 ‘나탈리’라는 신입사원이 들어왔는데, 패기 넘치는 신입인 그녀는 회사에 출장비용을 감축시키기 위해 비디오 회의를 건의합니다. 그렇지만 라이언은 멀쩡히 다니던 직원을 해고하는 일은 직접 출장을 가서 면대면으로 전달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화면으로 해고를 한다는 것은 무리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 한편에는 마일리지를 거의 다 모아가는데 플래티넘 카드를 못 받을까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라이언에게 그럼 나탈리를 데리고 출장을 가서, 직접 만나서 해고하는 일의 장점을 보여주라고 합니다. 라이언은 혹이 달리는 게 너무 귀찮지만 어쩔 수 없이 함께 떠납니다. 나탈리는 선배인 라이언이 하는 걸 지켜보기도 하고 직접 해 보기도 하지만, 자신의 말을 듣고 낙담하고 좌절하고 화를 내고 자살을 하겠다는 등의 다양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 일이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탈리는 감성적이고 어쩌면 사랑이 풍부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나탈리는 자살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 여자를 건성으로 만나며 결혼은 꿈도 꾸지 않는 해고의 달인인 선배 라이언에게 자기만 아는 아이 같다고 한바탕 퍼붓습니다. 라이언은 나탈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는 가끔 만나던 알렉스의 집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녀는 가정이 있는 여자였습니다. 자기가 해고하기 직전의 마음으로 만났듯, 그녀도 라이언을 그렇게 만났던 것입니다. 라이언은 관계의 짐을 지려고 하다 알렉스에게 차이는 마음의 아픔을 겪습니다.
그때 천만 마일리지에 도달해 기장으로부터 플래티넘 카드를 받습니다. 그리고 기쁘지 않으냐고, 집이 어디냐고 묻는 기장의 말에 라이언은 “여기입니다!”(up to the air)라고 말합니다. 평생 자신이 쫓았던 목적을 달성했어도 한 명에게 마음을 주었다가 당한 아픔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공중누각을 지으며 살아왔음을 알게 됩니다.
별거 아니었던 한 사람과의 헤어짐이 자신의 감정에 이렇게 큰 울림을 준다면, 가족과 같은 사람들과의 관계는 얼마나 큰 행복을 줄까? 그는 마음을 바꾸어 그동안 해왔던 짐을 내려놓으라는 강의를 때려치웁니다. 그리고 해고 통지 때문에 자살까지 하는 그런 회사를 떠나버린 나탈리를 위해 좋은 회사에 입사할 수 있도록 정성껏 추천서를 써줍니다. 또 돈이 없어서 신혼여행의 꿈은 꿀 수도 없는 자신의 매형이 될 사람과 누이를 위해서도 발 벗고 나섭니다. 해고 통지를 하던 삶에서 고용하는 삶으로의 전환. 이제 라이언은 무언가를 알아가는 느낌입니다. 땅으로 조금씩 내려오는 느낌입니다.
사람은 관계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실제로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가족을 제외하고는 5년 이상 친분을 유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목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일까요? 어쩌면 끊임없이 사람을 해고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요?
관계가 전부입니다. 늦더라도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 진리를 모르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지식을 머리에 넣습니다. 그것은 공중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삶입니다. 왠지 공허하고 하늘에 붕 떠 있어 정착하지 못하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히 남는 것이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관계입니다. 관계를 유지하려면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은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빈손으로 주님께 가지 맙시다. 주님은 플래티넘 카드를 들고 왔다고 칭찬해주지 않으십니다. 내가 만들고 간 관계를 칭찬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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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전례는 모든 인간의 삶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마태 22,37) 사랑해야 하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찬양하고 있다. 여기서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시이며 증거이기 때문에, 하느님과 인간은 떼어놓을 수 없는 두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
복음: 마태 22,34-40: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예수께서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 당신 계시의 새로운 면과 독창적인 면을 종합해주고 계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께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악의를 위장하기 위해 사랑에 대한 논쟁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들이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36절) 라고 예수님을 떠보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제시하면서,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써 첫째 계명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있는 것으로 품었던 의심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의심과는 관계없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중요성을 신명기 표현을 들어 확언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7절). 그리고는 봉인을 하듯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38절) 하셨다.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거부하거나 바꾸지 않으시고 오히려 강조하고 활력을 불어넣으신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특히 예수님 자신의 생활, 특히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순명’(필립 2,8 참조)으로 받아들이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증거된다. 예수님의 대답의 의도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우선성에 대한 재확인보다도 그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묶어놓으려는 데 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39절) 예수께서는 레위 19,18을 상기시키며 이는 이스라엘 사람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확대 적용하신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체계를 확인하면서도 이 두 계명을 하나로 묶으려 하신다. 두 계명 간의 보충적인 것에 대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창세 1,26) 창조되었으며, 인간 창조가 가장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창세 1,31) 둘째로, 강생의 신비 이후 하느님의 ‘모상’이 더 깊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은 이제 신화(神化: Deificatio)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는 ‘보이는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 하느님께 드리는 그 사랑과 ‘닮은’ 사랑으로 인간을 사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느님을 향한 여정은 바로 형제들과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도 요한은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21)라고 역설하고 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40절)는 말씀은 두 계명의 일치성과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뿐 아니라, 이 두 계명으로 모든 계시가 ‘종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종합의 의무는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몫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그 ‘종합’을 생기 있고 활력 있게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
구약에서는 이미 이웃에 대한 사랑, 특히 더욱더 도움이 필요한 사람, 즉 외국인, 고아, 과부 등에 대한 사랑이 강력하게 요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웃 사랑’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해주신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을 드러내는 표현방법이었다. 1독서에 나오는 규정들은 ‘박애주의적’ 정신만이 아니라, 신앙의 내용이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려움에 부닥쳐있는 자기 형제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들의 호소를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비하시기”(탈출 22,26) 때문이다. 형제들을 어떻게 대하든 간에 그것은 하느님을 그렇게 대하는 것과 같다.(마태 25장 참조) 하느님은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엄하게 다루실 것이다. 이것이 복음과 만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하느님 중심주의적’인 ‘박애주의’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인간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더 이웃 형제들에게 베풀 수 있는 봉사도 더 잘 이루어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그분께 ‘첫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신을 소외시킬 수 있으며,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노예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셨듯이 이 두 계명의 종합을 이루어가야 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37.39절)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가치관을 확실히 가져야 한다. 하느님이 우리 삶의 첫 자리에 계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 하느님 자리에 다른 것이 있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그 때문에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물이나, 다른 것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치관이 올바로 정립될 때에 우리는 진정 이 두 계명을 ‘종합’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는 조금씩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러한 삶으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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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어느 신부님의 강론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죽음을 맞이한 할머니 이야기가 뉴스로 나왔습니다. 이 할머니는 날마다 지하철역에서 구걸하며 연명하였는데, 그 겨울 추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장례를 치른 뒤, 시청 직원들이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침대 밑에서 150만 달러나 되는 큰돈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많은 돈을 두고도 할머니는 먹지도 못하고 기름도 아끼다가 배고픔과 추위로 숨을 거둔 것입니다.
처음에 저는 할머니의 삶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 같았으면 적당히 맛있는 것도 먹고, 잠도 따뜻하게 잤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처럼 구걸을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할머니와 제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신문 기사가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신부가 죽었다. 그런데 그 신부의 침대 밑에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5,000개나 남아 있었다.”, “신부가 죽었다. 그런데 그 신부의 침대 밑에서 한 일 없이 버린 시간이 20년이나 남아 있었다.”, “신부가 죽었다. 그런데 그 신부의 침대 밑에서 아껴 둔 웃음이 만 리터나 남아 있었다.”
어쩌면 평소에 감사함을 표현하지도 않고, 누군가를 위하여 시간을 내어 주지도 않고, 괜히 사람들 앞에서 얼굴만 찌푸리며 사랑할 기회들을 놓치고 살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그 할머니는 아직 돈을 쓰기에는 멀었다고 생각하며 아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사랑하기를 자꾸 미루며 오늘 하루를 허비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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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장 큰 계명>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하느님과 나’ 사이의 사랑이 곧 신앙이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활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절대자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 또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 그리고 그것을 믿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면서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입니다.) ‘가장 큰 계명’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계명의 근본정신’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라는 말씀은, 단순히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첫 번째, 두 번째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두 사랑이 모든 계명들과 율법들의 근본정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계명’은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계명의 근본정신’은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이기도 합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즉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인데,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주시면서 너희를 사랑하시니 너희도 그렇게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10) 아버지와 아드님은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완전히 하나로 일치되어 계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일은, 당신 자신을(당신의 모든 것을) 내주신 일과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라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기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 라는 뜻입니다.)
1) “나는 지금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마음이 자꾸 다른 곳을 향하거나, 쓸데없는 것들이 마음속에 너무 많이 들어와 있거나, 두 마음을 품거나, 마음이 불순한 것들로 오염되어 있지는 않은가? 마음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의 예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가시덤불’입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 13,22) 여기서 말씀의 숨을 막아버린다는 말을,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심각하게 방해한다는 것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걱정거리들 쪽으로 쏠려 있거나 유혹들 때문에 흐려져 있으면, 여러 갈래로 마음이 흐트러지게 되고, 그래서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15.19.21-24)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데도, 머리로는(생각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데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자꾸만 다른 쪽으로 가는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내 의지대로 통제가 안 되고, 이성과 마음이 충돌하고......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비참한 심정이 될 때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해법으로 ‘믿음과 기도’를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5) 이 말에는, 굳은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느님(예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성과 마음이 갈라져 있는 상태를, 또는 걱정들과 유혹들을 믿음과 기도로 극복할 수 있고, 그러면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흐트러져 있어서 기도를 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기도를 하란 말인가?”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기도가 안 된다면, 그럴수록 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마귀가 끈질기게 방해하겠지만, 그 방해를 이기려면, 또 그 마귀를 물리치려면 우리 쪽에서도 더욱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마르 9,29).> <살다보면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을 만날 때가 있고, 그런 일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때가 기도할 때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니, 하느님의 힘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을 보았다면, “믿음이 부족하니까 걱정한다.” 같은 무정한 말만 하지 말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2) “나는 지금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목숨을 다한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모두 쏟아 붓는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죽을 것처럼 힘든 사람은 “힘들어 죽겠다.” 라는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그런 말을 할 힘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 덜 힘들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체력이 약한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으려는 의지가 없는 것은 사랑이 부족한 것이고, 사랑이 부족한 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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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애잔한 음색의 가수 심수봉이 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에 대통령의 만찬에 함께 했었습니다. 어느덧 41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당시에 장충동에서 석간이었던 동아일보를 배달하고 있었습니다. 신문은 호외를 발행했습니다.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경제성장과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했던 대통령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긴급조치와 중앙정보부를 통해서 무고한 사람을 가두고 간첩으로 조작하면서 장기집권을 하였던 대통령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게도 10월 26일은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가수 심수봉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을 겁니다. 시련과 아픔이 있었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서 새롭게 가정을 이루고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만든 노래가 ‘사랑밖에 난 몰라’입니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때문에 내일은 행복할 거야. 얼굴도 아니 멋도 아니 아니 부드러운 사랑만이 필요했어요. 지나간 세월모두 잊어버리게 당신 없이 아무것도 이제 할 수 없어 사랑밖에 난 몰라.’
시간을 되돌려 2000년 전 갈릴래아를 생각합니다.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 예수님을 만나서 삶이 변화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망과 고통의 삶이었지만 감사와 기쁨의 삶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어부들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눈이 멀었던 소경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소경은 예수님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운명에 처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운명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저 여인에게 먼저 돌을 던지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여인의 죄를 묻지 않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어 드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사랑밖에 모르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둘째도 이와 같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루가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강도를 당해서 쓰러진 사람이 있었는데 사제와 레위인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업고 여관으로 데려갔습니다.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치료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까?” 율법학자는 대답하였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하십시오.”
오늘 탈출기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가난한 사람, 고아나 과부를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받을 것이 있어도 무리해서 그들의 처지가 너무 힘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과부나 고아를 돌보아 주는 것은 우리가 선행을 베푸는 것이고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나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가난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분들의 불편을 함께 고민하고, 나눈다면 그곳에서부터 하느님나라는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난과 질병, 굶주림과 헐벗음이 있는 것은 재물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의료의 수준이 낮아서도 압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입을 것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소유하려고 하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눈다면, 우리가 서로의 접근을 쉽게 받아들인다면,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공감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넉넉하게 채우고도 많은 것들이 남을 것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예수님 시대에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한다면 오억 명을 먹이고도 넘치도록 남을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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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
마태오 22,34-40 (가장 큰 계명)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사랑>
그대 있기에
있는 그대가
있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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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배광하 치리아코 신부님]
하느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작은 얼굴에 구멍 일곱 개를 뚫어 놓으셨습니다. 눈구멍 둘, 콧구멍 둘, 귓구멍 둘, 그리고 입구멍 하나입니다. 그 작은 얼굴에 기껏 구멍이 일곱 개뿐인데 지구상 수십억 인구 중 단 한 사람도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쌍둥이까지도 다릅니다.
그런데 손가락의 지문을 보면 더욱 놀랍습니다. 손가락의 그 작은 지문이 각 사람에게 어떤 문양으로 새겨졌기에 창세 이래 아담과 하와로부터 세상 끝나는 날까지 그 어느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 없을까요.
결국, 나란 존재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가장 귀한 보물이라는 것입니다. 남들 또한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듯 속삭인 것입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나의 눈에 값지고 소중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이사야 예언서 43장 1절, 4절)
이 말씀을 우리네 가락으로 신명 나게 풀이하면, “어화! 내 사랑아!” 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을 이토록 사랑하신 지극한 사랑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진실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도 분명 같은 가르침으로 이해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이타적’ 인 사랑으로 배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나 자신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가장 귀한 존재로 만드셨으니,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오 복음 22장 39절)는 말씀은 나 자신을 먼저 소중히 사랑해야 남도 그렇듯 사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 자신을 비관하여 스스로 학대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 결코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나란 존재에 대한 경이로운 감사와 자랑스러운 사랑이 일상의 삶에서 먼저 존재해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넘치는 감탄에서 나오는 환호성, “어화! 내 사랑아!”의 흥이 사랑이라는 계명의 완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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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오요안 세례자 요한 신부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
<나를 사랑하는 방법> <혼자서도 별인 너에게>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서점에 가면 많이 보이는 책 이름입니다. 이러한 책 이름들이 말해주듯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하십니다.
한 젊은이의 핸드폰 메인 화면에 ‘남을 위해 사는 착한 사람 말고, 나를 위해 사는 좋은 사람 되기를’이라는 문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렇듯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공허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면 자신이 행복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것, 자신이 부족한 것을 바라보기보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과 채워주신 것에 감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부족하고 못난 사람으로 여기는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절절히 깨달을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자신을 잘 바라볼 줄 아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이웃이 자신의 부족함을 참아 주고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이웃을 불편하게만 여기던 시선에서 벗어나, 그 이웃이야말로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지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자기 자신이 사랑스럽다고 느껴지지 않을 때, 한없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 하느님께 무엇을 받고 살아왔는지, 하느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오셨는지 돌아보고, 그것에 대해 하느님께 더욱 많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더 많은 것을 베풀어주시고 더 좋은 길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느낄 때 이웃을 더 많이 돌보고, 더 자주 안부를 묻고, 따뜻한 말을 더 건네고 특히 친절을 다하십시오.
친절은 나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자기를 사랑하는 행복한 멋진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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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윤행도 가롤로 신부님]
<사랑은 아무나 하나>
제가 하대동본당 보좌 신부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진주지역 교정사목이 하대동본당에 맡겨진 관계로 한 달에 한 번 진주교도소에 미사를 봉헌하러 갔었고 그곳에서 조폭 행동대장 출신의 에드몬드라는 젊은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면담 끝에 제게 편지를 해도 되겠느냐고 묻기에 그렇게 하라고 했고 그렇게 그와의 펜팔(?)은 시작되었습니다.
그곳에 계시는 분들에게 가장 많은 것이 시간이다 보니 그 친구는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보냈고 저는 답장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솔직히 짜증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신부님은 말씀하실 때마다(입만 열면) 사랑, 사랑 하시는데 정작 실천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라며 돌직구를 날렸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교회 목사님은 틈틈이 재소자들에게 양말이며 내의며 간식거리들을 사다 주시는데 신부님은 해준 게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불에 덴 것같이 얼굴이 화끈거리더군요.
그 이후로 종종 양말, 속옷, 간식거리 등등 그 친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보내주었고 그 친구가 춘천교도소에 이감을 간 후에도 긴히 의논할 일이 있다며 면회를 와달라는 부탁에 단 10분간의 면회를 위해 왕복 10시간을 달려간 적도 있었습니다. 출소 후에도 한참 동안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몇 해 전부터 연락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라고들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제 사제 서품 모토이고 그 친구의 지적처럼 입만 열면 여전히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제 입에서 나온 말만큼, 아니 1/100, 1/1000만큼이라도 실천했더라면 벌써 제 머리 뒤에는 동그란 테가 걸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제가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그 말의 홍수에 갇혀 제대로 된 실천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이면서 사제인 저는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을까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하시니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고 있는 사랑의 크기를 보면 알 수 있겠지요.
올해 초부터 시작되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진행 중인 코로나19 사태, 역대 최장, 최악이라는 장마와 태풍과 같은 재해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숨과 정신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만이라도 다하여 주위를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행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저의 주님이라 고백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죽은 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자들의 하느님이시고, 입에만 달린 사랑,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랑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기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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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증권회사 분석가를 포함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간혹 자신의 전망이 완전히 빗나가는 상황이 오곤 합니다. 이때 이들의 반응에 따라 일류, 이류, 삼류로 나누어진다고 합니다.
일류는 ‘예측이 맞느냐, 맞지 않느냐?’보다 예측이 빗나갔다고 판명되었을 경우, 재빨리 그 상황을 보고하면서 신뢰를 회복하는 사람입니다. 이류는 서툰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입니다. 자기 때문이 아니라는 이유만을 늘어놓습니다. 신뢰하기 힘들어집니다.
삼류는 틀린 자기 의견을 계속해서 고집하면서, 결과적으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실패했을 때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면 신뢰만큼은 잃지 않게 됩니다.
이 신뢰로 최고의 것을 얻을 수 있음에도, 순간의 위기만 모면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이류, 삼류의 삶을 삽니다. 자신의 실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일류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왜 주님께서 계속해서 겸손하라고 하셨는지를 다시금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바리사이들 중 율법 교사 한 명이 예수님께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스승님이라고 부르니까 특별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 같지만, 사실 바리사이들은 무리의 힘으로 그분을 이기려고 한데 모인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합리적인 논증으로는 그분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난해한 질문을 하나 들고 나타납니다. 즉,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율법의 세부 조항 613개 모두가 빠지지 않고 다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사랑’을 이야기하십니다.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사랑에 달려 있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율법을 단지 예수님을 이기려는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율법이 이기고 지는 수단이 아닌, 사랑 그 자체를 봐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그들의 숨은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신의 틀렸음을 인정하고서 회개의 모습을 보였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일류가 아닌, 이류, 삼류의 모습을 보입니다. 서툰 변명을 늘어놓으면 자신들은 맞고 예수님은 틀렸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겸손의 삶을 우리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가득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 뜻에 맞게 사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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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위대함>
갑곶성지의 ‘천국의 문’ 봉안당을 운영하면서, 안치 예식을 제가 직접 진행합니다. 그런데 예식을 진행하기에 앞서 유가족들을 만나서 고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 저희 봉안당으로 20년 전 주님 곁으로 가신 남편을 모시기 위해 오신 어느 자매님과 인상 깊은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20년 전 병으로 먼저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남편만 바라보면서 살았었기에 당시에 너무 큰 충격이었고, 마치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커다란 대못이 박힌 것만 같았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20년 동안 정말로 힘들었겠어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 아픔이 오히려 저를 지금까지 살아오게 한 힘이었습니다.”
너무나 사랑했기에 죽음이 큰 상처로 다가왔지만, 살아가면서 사랑했던 기억들을 통해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통해 사랑의 위대함을 더욱더 분명하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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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평생 사랑 공부>
-1.하느님 사랑, 2.나 사랑, 3.이웃 사랑, 4.자연 사랑-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시편18,2)
서울주보를 보는 순간 한눈에 들어온 오늘 시편 화답송입니다. 이 시편구절은 성녀 소화 데레사의 임종어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고백성사시 보속으로 자주 써드리는 시편 구절도 생각납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 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
어제도 상담고백성사후 세 차례 형제들과 ‘십자가의 예수님’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습니다. 함께 십자성호를 긋고 기념 사진을 찍으니 밝고 환한 모습이 그대로 성화聖畫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이 또한 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사랑하고 싶어 하고 사랑 받고 싶어하는 것은 생래적 본능입니다. 하느님의 모상 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복된 운명입니다. 사랑하라 지음 받은 인간입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야 비로소 사람이니, 사랑-삶-사람은 같은 어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듯 생각됩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은 ‘사랑의 학교’이자 ‘사랑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평생 졸업이 없는 사랑의 학교에서 평생 공부가 사랑 공부입니다. 사랑공부에는 끝이 없고 우리는 사랑공부에는 영원히 초보자일 수뿐이 없습니다. 이런 자각에서 비로서 겸손의 덕입니다. 또 사랑의 여정 중에 날로 성장, 성숙되어가야 하는 사랑입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육신은 노쇠해가도 성장, 성숙해 가는 사랑과 더불어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사랑밖에 답이, 길이 없습니다. 사랑 결핍이 만병의 근원이요 사랑만이 만병통치약입니다. 인간 영혼의 고질적 질병인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러니 사랑을 공부해야 합니다.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입니다. 참 사람이 되는 길도 사랑뿐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 역시 예수님은 사랑이 우리의 모두임을 확인해 주십니다. 율법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율법 교사의 물음에 주님은 거침없이 대답하십니다. 바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다.”
우선적인 만고불변의 진리가 이런 갈림없는 한결같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이야 말로, 우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수행들 이런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온마음, 온정신, 온힘을 다해 매일, 평생, 끊임없이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의 표현인 수행이 참으로 우리를 순수하고 자비롭게, 겸손하고 지혜롭게, 자유롭고 행복하게 합니다. 이어 예수님은 이웃 사랑을 명하십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참으로 분리할 수 없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은 이웃 사랑을 통해 입증됩니다. 이런 사랑은 그대로 아가페 순수한 사랑입니다. 생명을 주는 사랑, 집착이 없는 자유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오늘 탈출기의 약자보호법에서 이웃 사랑이 구체적으로 열거되고 있습니다. 추상적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곤궁중에 있는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곤궁중에 있는 이들을 누구보다 사랑하신 하느님이요,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이들을 사랑할 수뿐이 없습니다.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된다.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된다. 너희가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그에게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되고, 이자를 물려서도 안된다. 너희가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 주어야 한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구체적입니다. 하느님은 친히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보호자 배경이 되어 주십니다. 이들이 부르짖으면 하느님도 그 부르짖음을 들어 주신다 합니다. 오늘 탈출기이 마지막 결론 말씀이 깊은 여운으로 남습니다.
“나는 자비하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랑으로 특히 가난하고 약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하셨고 몸소 그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완전히 예수님 안에서 하나로 융합되고 있음을 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앞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이 표현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우리의 평생 사랑 공부의 롤모델이 예수님이십니다. 평생 하느님을 사랑하셨고 이웃을 사랑하셨던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참 모범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주님 사랑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체험해야 사랑도 할 수 있습니다. 마음만 열면 언제 어디서나 와닿는 하느님 사랑의 체험입니다. 지금 이렇게 살아 있음이 바로 사랑 받고 있음의 체험입니다. 새삼 행복뿐 아니라 감사도 사랑도 발견임을 깨닫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바로 제2독서의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 환란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대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을 깨달을 때 저절로 회개입니다. 하느님이,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달을 때 비로소 하느님을, 나를,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내가, 이웃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지 깨달아 더욱 하느님을 예수님을 나를 이웃을 사랑합니다. 하여 하느님은, 예수님은 물론, 자기도 남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소중히 아끼고 사랑합니다.
회개의 모범이 역시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입니다. 이들은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사랑의 회복이 중요합니다. 회개의 여정과 함께 가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참으로 다시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입니다. 평생 사랑의 학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삶의 의미이자 성소입니다.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학교에 재학중인 늘 사랑에는 초보자이자 평생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이웃이란 개념을 확장해야 할 시대입니다, 사람만 이웃이 아니라 공동의 집인 지구안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 피조물이 이웃 형제들이라는 자각입니다. 기후 위기로 인해 모두가 공멸할 위기에 처해 있는 작금의 시대입니다. 인간의 무분별한 착취와 소비, 횡포와 탐욕으로 날로 황폐화 되어가는 하느님 사랑으로 창조된 이웃 자연환경들이요 멸종되어 가는 무수한 피조물 이웃들입니다. 사람 이웃뿐 아니라 자연 피조물 이웃도 아끼고 사랑하는 공존공생의 지혜와 사랑이 참으로 절박한 때입니다. 하여 생태적 회개가 절실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의 넘치는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충만케 하시어, 온 마음, 온정신, 온힘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나와 이웃 사람 형제들뿐 아니라 피조물 자연 형제들도 아끼고 사랑하게 하십니다. 끝으로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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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은 사랑할 때>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뵙고자 한다면 사랑해야 합니다. 이 시간 사랑함으로써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얻기를 기도드립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참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사랑 하면, 상처를 입고 자기를 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마더 데레사)
다시 말하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행위가 이웃사랑을 통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십시오. 어렵고 힘들지만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사랑하십시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더 얻게 됩니다. 내 방식의 사랑을 고집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인간으로 오셨듯이 우리도 눈높이 사랑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노래 한 곡 불러드리겠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온유하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의 말씀을 노래했습니다.
자! 그러면 고린도 전서 13장의 말씀에 견주어서 우리 사랑의 정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오래 참습니다. 나는 친절합니다. 나는 시기하지 않습니다.나는 자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교만하지 않습니다.나는 무례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나는 성을 내지 않습니다. 나는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나는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나는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어떻습니까? 부족함을 알았으면 채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22,34-40)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22,39)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일상생활 안에서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어른이든 어린이든 약한 사람이건 힘이 센 사람이건 할 것 없이 누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알아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주님,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던 주님을 만나야 비로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4,7-8)
그러므로 하느님과의 친교가 깊으면 깊을수록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크고 거창하게 사랑하려 하지 말고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일상 안에서 사랑할 소재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때로는 친절로, 때로는 온유로, 밝은 미소로,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으로, 청소를 하는 것으로, 설거지를 도와주고, 환자를 방문해 주고…… 어떤 의견에 공감해 주는 것으로…. 상대를 인정해 주고, 칭찬의 말 한 마디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할 기회는 너무도 많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많이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제대로 만나고 그 만남의 기쁨도 이웃에게 전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도하지 않고서는 항구하게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기도 하십시오.
“그분의 뜻을 알아듣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의 뜻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마더 데레사)
먼저 기도 하십시오. 그리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우리 인생의 참된 가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무엇을 이루는 게 아니라 사랑은 그 사랑을 지켜낼 때 가치가 있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새로워지길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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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모든 존재의 본질인 사랑 이야기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율법 학자에게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함'은 그분 피조물이며 자녀인 모든 이의 첫째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신 하느님을 고백하는 이로서 이를 부정할 사람은 없지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율법 학자는 가장 큰 계명 하나만 물었는데 예수님은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까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각각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그 자체를 증명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웃 사랑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두 사랑을 하나로 엮어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이웃 사랑이야말로 하느님 사랑의 눈에 보이는 증거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을 연민하고 존중하는 이, 이웃에게 헌신하고 자비를 베푸는 이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기는 참 어렵습니다. 또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이가 타인을 억압하거나 착취하고 무관심하거나 증오하기는 어렵습니다. 굳이 그리스도교 교리나 신학을 몰라도 절대자를 경외하는 마음에서 그렇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주님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를 억눌러서도 안 된다."(탈출 22,20-21)
이방인, 고아, 과부는 하느님밖에 기댈 존재가 없는 가난한 이들입니다. 부족 중심 사회에서 그들을 보호해 줄 울타리나 뒷받침이 되어 줄 언덕이 없는, 참으로 가련한 처지로 떨어진 이들이지요.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당부하십니다. 이집트 노예살이라는 이스라엘의 과거를 상기시키시며 그들이 이 규정을 마음에 새기길 바라십니다.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탈출 22,26)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분 계명을 준수하면 참 좋겠지만, 주님은 그러지 않을 상황까지 미리 염두에 두십니다. 그래서 '너희가 나를 어기고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면 당신이 가만히 계시지 않겠다.'고 단호히 덧붙이시지요. 힘 없는 그들 대신 내가 나서겠다는 이 말씀은 자비이신 그분의 존재적 속성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가만히 있지 않겠다.'라는 엄포라기보다,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당위적 표현으로 들립니다. 그분은 가련한 이의 부르짖음을 존재적으로 간과하실 수 없는 자비와 사랑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신앙이 어떻게 전승되는지 보여 줍니다.
"여러분은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의 모든 신자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1테살 1,7)
사도들과 제자들은 주님의 인격과 가르침을 직접, 또는 계시로 접한 사람들입니다. 테살로니카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는 사도들을 주님의 대리자로 여기고 그들을 "본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배운 바를 충실히 지켜 그들 자신이 다른 신생 교회 공동체의 "본보기"가 되지요.
이 신앙의 연쇄적 흐름을 관상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는 그리 특출할 것 없는 이들을 통해 이웃에게 건네지고, 이를 전하는 이들의 인격과 가르침에 실려 전염됩니다. 사랑은, 자비는 바로 이렇게 전달되고 또 전달되면서, 거쳐간 이들을 또 다른 그리스도로 변모시키는 신비입니다.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이 계명에로 초대된 우리는 책임과 권리를 동시에 지닙니다. 주님 향한 우리의 뜨겁고 열렬한 사랑은 먼저 주님 곁에 머무르는 기도를 통해, 그리고 우리에게 보내 주신 이웃들에게 내미는 사랑의 손길을 통해 표현되지요.
그리고 비록 숨은 선행이라도 이를 감지하는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그들이 "본받는 사람"이 됨으로써 이 사랑의 릴레이는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그들 또한 다른 이의 본보기가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표현되는 신앙과 희망이 역사를 이어 아직까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는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굳이 드러나게 본보기가 되려 하지 않아도 이 계명이 우리를 점점 더 주님을 닮아가게 만듭니다. 부족한 선행이나마 우리의 뒷자락을 보고 누군가에게 '본받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면, 언젠가 그 역시 또다른 "본보기"가 될 것이니 이 또한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겠지요.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고 이웃을 겸손히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함께 사랑이 되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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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가을이 익어가는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우리 삶을 익어가게 하는 ‘사랑' 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보다, 우리 인간을 익어가게 하고 변화되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약한 자에 대한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지만, 특히 이방인, 과부, 고아, 그리고 병든 자, 헐벗은 자 등이 하느님 사랑의 초점이 됩니다. 그것은 마치, 가정에서 건강하고 튼튼한 자녀보다 병들거나 불구된 자녀에게 부모의 관심이 더 먼저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혹 누가 불구된 자녀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면, 부모의 가슴이 더 아프고 더 쓰릴 것입니다.
사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타난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의 뜻에는 울부짖는 백성의 소리를 들어주시는 분, 곧 울부짖는 백성들과 꼭 함께 하시는 분이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자유와 해방」(1986)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과 사랑”을 신학의 기본입장과 기본정신으로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밀접하게 연결시키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들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아들딸들을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제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으로 보지도 못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20)
그렇습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과 타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진정 자신과 형제를 사랑한다면, 자신과 형제를 주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하나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자기 사랑은 자신에 대한 존귀함에서 오며, 자신에 대한 존귀함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사실, 이러한 ‘참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는 문헌 <새 천년기>에서, 친교의 영성에 대해서 다루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친교의 영성을 삼위일체의 심오한 신비체 안에서, 타인을 “나의 일부인 사람들”로 생각하고 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을 “나를 위한 선물”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한 생명’이 되고, 한 아버지 안에 한 형제자매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제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형제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지니게 되고, 형제의 바람과 요구를 깊이 공유하며 깊고 참된 우정을 지니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비로소 이웃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이 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사랑이 됩니다. 형제 사랑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이 되고, 하느님 사랑이 진정한 자기 사랑이 됩니다. 사랑은 서로 한 생명이 되고, 하느님은 사랑이 됩니다. 이웃이 곧 하느님이 되고 아내에게는 남편이, 남편에게는 아내가 곧 하느님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사고와 인식의 틀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남’을 사랑하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이요,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의 혁명을 요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곧 사랑의 혁명서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한 강론(2014,11,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어진 사랑의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혁명은 변화와 실천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 집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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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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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내가 사랑하는 하느님은 어디에 계실까?>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어떤 율법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향해 있습니다. 그 사랑이 크면 나의 전부가 너에게 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려면, 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내 마음이 향해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하느님은 어디에 계실까?'
아름답게 잘 지어진 큰 성당일까? 성당 제단에 마련되어 있는 화려한 감실 안에 계실까?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곳이 없지만, 하느님의 마음이 향해 있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성과 인성을 두루 갖추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의 마음이 향해 있는 곳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낮은 곳'에 계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사랑의 물은 늘 낮은 곳으로 흘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누추한 곳'에 계십니다. 하느님은 '사회적 약자들' 안에, 곧 '가난한 이웃들과 고통 받는 이들과 이방인들'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나의 마음도 하느님이 계신 그곳에 가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하느님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높고 화려한 곳에서만 찾지 말고, 낮은 곳에서 찾고, 낮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을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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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terve3_CQw&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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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 37)
단풍은 산불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붙잡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우리의
순간들입니다.
무엇과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입니다.
모든 사랑 위에
하느님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살게 하시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안에
이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가장 먼저도
하느님 사랑이고
가장 나중도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우리는 사랑을
갈망하며 사랑의 길을
떠나고 있습니다.
허약한 우리를
끝까지 살아내게 하는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길은
우리 또한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다시 우리를
일으켜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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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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