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도마 신부 전기(四)
『경향잡지』 1949년 7월호 제43권 제7호(201〜501쪽, *쪽번호 인쇄 오류)
(나) 학창에
모방신부의 한국신학생 선택에관한 문헌을 보면(1, 고레 二, 6) 최도마가 신학생으로 제일차 선정되여 一八三六년 二월 六일 불렀고 최방지거는 一八三六년 二월 十四일 선택되었다. 본시 이두학생만 시학생으로 확정하신것이나 제삼차에 김안드레아를 생각하사 동년 七월 十一일후로 신부택에 수용하시고 신중이 고려하신 끝에 이후 혹 기회가 없을까 염려하사 그해 十一월 셋 다 유학시키기로 확정하신것이다.
이상과같이 소년 도마는 신부의 권고에 순응하여 성직을 목적하고 제일차에 신학생으로 간선되었다. 이를 우연한 일로 간과할것이 아닌가 한다. 소년 도마는 여러소년들중에서도 남다른 점이 있어 신부의 일목에 피선된것이나 아닌가 함이다.
최도마 서울로 올라온이래 十개월간이나 「모방」신부님기도하에서 한문과 라딘어공부와 기타의 학엄을 닦었다. 그리고 一八三六년 十二월 二일 모방신부 무릅앞에 꿇어 다른 두 동무와함께 복음성경을 손에 쥐고 장내 만난과 싸우며 주의 사업에 종사할 것을 맹서하였고 (2, 가靑悲十六號9)같은해 十二월 十五일 중국「마까오」를 향하여 한양성을 떠났다. 그날 二十八일 국경선에 이르렀고 익년 六월 七일 목적지에 도착하였다(3, 고레 一, 16, 二, 14)
六개월간의 객고는 잔뼈를 오직이나 아푸게하였으랴! 재학중 주의 성우와 그의 분발심은 그재조에 박차를 가하여 수덕과 학업에 시간을 단축시켰을 것이다.
一八三八년 十一월 二十六일 학창을 습격한 병마는 동학 최방지거를 잃게하였고(4, Annalee 十一, 359-362) 一八三九년은 아편문제로 이러난 마ᄁᆞ오의 폭동이 우리학생들과 그교수들을 괴롭게하여 일시「마닐라」까지 피신하게하였다(5, 고레 一, 16, 17)
아직 요람기에 있던 한국천주교회를 물심양면으로 적극후원한이는 만주교회나 북경, 상해교회보다도 「마까오」천주교회경리부라하여 과언아니다. 당시 마까오교회경리부에계신「레그레좌」신부님은 우리 신학생들을 특대지도하사 그들의 만반편의를 돌보아주셨다. 그신부님의 말씀과같이 당신은 우리신학생들의 교장이오 교수요 지도자였으며 아버지오 의사이였다(6, 고레 二, 15)
「레그레좌」신부님의 애호가 얼마나 어린 그들에게 두터웠는지 그후 그들이 남긴 서간문들이 증명하고도 남는다. 특히 최도마에게 있어 그렇다. 웨냐하면 현재 우리손에 남어있는 그의 서간문은 오직 레그레좌신부께 올린것뿐이라하여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레그레좌신부의 파리로 전근이후 그 후임이신「리봐」신부역시 우리학생들을 특히 애호하셨고 한국에 포교차입국준비중에 계시던 외국인신부들을 우대하며 유숙케하여주섰다. 그중에도「매스뜨르」신부와 「베르뇌」신부님은 장기간 마까오에 머무르시며 우리신학생드을 훈육하섰다. 그리하여 우리학생들은 일반상식에관한 지식은 물론 어히 얻었으며 특히 「베르뇌」신부님의 교수하에서 신학의 예비로 철학전공까지 단기에 성공하였다(7, 고레 二, 18)
학생들의 학업향상은 교수들의 자격과 청신여하에 있는것이다. 우리학생들을 지도하시던 신부님들은 한국천주교회의 기초를 튼튼이 하기위하여 포교제일선에 파견된 인물들이시며 파리외방전교회에서도 선택된 인격자들이시라는것은 쉽게 파악할수있는일이겠지만 그들이 남긴 일생이 더욱 힘있게 그 인격여하를 말하여주는 것이다.
이같은 인물들의 문하에서 자라난 우리신학생들은 자기네 선생드의 멍예를 더럽히지않었다고 말보담 실행으로 증명한다.
이제 우리신학생들의 학업은 제일기가끝났다. 맹장의마하에서 훈련된 용사들과같이, 우물안 개고리로 쇄곡을고집하여 백의동포들의 현세와후세의 행복의길을 더디게하는 조선의 국경을 노리고 떠나려한다.
대세는 국내에서보다 외국에서 더잘 인식하는 것이다. 그들은 해외의 문화를 보았다. 영원대사에대한 진리의빛을 목욕하였다. 이들은 조국애에 불타고 있다. 동족들의 우맹한 처세를 안타까워한다. 동포들의 앞길을 멸망의그늘로 인도하고 있는 마수를 멀리서 바라볼 때 의분으로한껏 흥분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정신과 사랑에무장된 우리학생들앞에는 무서운것이 없다.
환난이냐, 곤궁이냐, 핍박이냐, 주림이냐, 헐벗음이냐, 위험이냐?… 우리는 이모든일에 우리를 사랑하신자를인하여 승리하리라(로마서 八․三五-三七)
그러나 조국은 一八三九년 박해에 이미 입국활약하던 우리학도들을 버히기위하여 예리한 칼날을 준비한후 국경에 비상경계망을 느리고 기다리지않느냐!
2, 귀국도상에
(가)
학업을 마처가는 우리신학생들은 귀국활약을 꿈꾸었으나 앞에 가루놓인 철벽은 하나둘이 아니다.
생각하면 고국은 산해만리에 격하여있다. 국경의 경비는 一八三九년이전과 또다르다. 떠날때는 안내자들이 있었으나 입국의 방도는 각자가 찾어야한다. 그뿐아니라 떠나올때의 일해은 오직 동양인뿐으로 변복만하면 유표한점을 보이지않을수있었으나 이제 입국은 서양인신부와동반할 것이다.
그렇나 만사를 안배하시는 천주의 정하신 기회는 왔다.
一八四二년 아편전쟁이 결과로 영국은 중국의 주요도시 다섯을 얻었다. 이를 본 불란서는 혹 극동방면에 손을 내밀어 어느모에서 이점을 얻을까 생각하고 군함두척을 파견하였으니 이는 곧「에라곤」호와 「파보리트」호이였다. 이군함중 선착으로 「에리곤」호가 일시 마까오에 닷을 던지고 함대장「세실」씨는 마까오교회경리부「리봐」신부를 방문하여 자기들의 사명을 말하는동시에 중국뿐만아니라 일본이나 한국까지도 가서 통상교섭을 하고저하는 의사표시와아울러 통역관의 필요를 말하였다. 리봐신부께서는 즉시 귀국할 한국신학생들이 있음과 한국에 포교할 목적으로 그곳에 체류중에 계신 전교신부들이 계신사정을 말하였다. 장교들의 환영으로 우리신학생들은 일시 통역관을 빙자하고 귀국도상에 오를 기회를 얻었다.(一八四二년 二월 十二일 발신한 리봐신부의 편지에 참고) (1)
세실대장의 통역으로 최도마보다 김안드레아가 결정되었고 매스트르신부도 동행하시게되였다.(2) 그리하여 一八四二년 二월 十五일에 에리곤호는 마까오를 출발하였다. 동창을 먼저 떠나보내고 최도마는 홀로 머물러있게되였다. 一八四二년 四월 二十五일부터 도마는「파리」에계신 레그레좌신부께 글월을 올려 자기 고독함을 호소하였다(3)
「레그레좌 신부께
…내게관한 사정중 다른 것은 말슴드리지않고 오직 내가 타의 유일한 친우 안드레아를먼저보내고 고독히 떠러저있다는것만을 전하여드리나이다. 나는 지금 홀로 남어있어 내방을 지키고있나이다. 그렇나 사실 내가 홀로 남어있으니 만큼 더욱 천주와 접근하고있나이다.
신부님께서 출발하신이후로 우리고향에서 아무소식도 오지 않었고 오직 불란서군함편으로 안드레아가 매스뜨르신부님을 뫼시고 떠났나이다. 그러나 배는 직접 한국에로 가지않고 마닐라로 향하였다 하옵나이다. 나는「파보리트」라는 다른배편으로 「장세니씨」와 함께 한국을 향하게될 예정이옵나이다 우리는 매일 이것을 고대하고 있나이다」
김안드레아 역시 먼저떠나며 홀로 남어있는 동창을 애석히 생각하며 一八四二년 二월 二十八일 마닐라에서 레그레좌신부계 상서할때에
「도마는 지금 혼저 남어있나이다」하는 문구를 기록하엿다(4)
김안드레아는 비록 친우도마를 남겨놓고 홀로먼저 떠났으나 미구에 최도마가 다른배편으로 따러올 것을 알었다.
보내는이나 떠나는이의 심경에는 서루 일치되는 점이 있었던 것이다.
에리곤호군함이 상해부근에 도착하였을때에 세실대장은 뜻을 변하여 더 항해를 계속하지않고 다시 마닐라로 도라갈 것을 언명하매 김안드레아의 입장은 곤란한중 더욱 기다리는 최도마가 보이지않어 자못 마음이 초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