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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2 / 편견을 버리고 믿음으로 (요1:43-51)
유행가 중에 ‘만남’이라고,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노래가 있습니다.
누구라도 살아오는 중에 수많은 만남이 있었을 텐데, 돌이켜 보면 그 만남들 중엔 우연이 우연으로 끝난 것도 있지만, 우연이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는 만남도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만남은 시작이 중요한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만남에서 중요한 것은 ‘만남의 유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만남 중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만남이라고 하면 단연코 예수님과의 만남을 첫 번째로 꼽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느냐, 없느냐. 혹은 예수님과의 만남이 유지되고 있느냐, 끊어졌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많은 부분이 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예수님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사람들에 대한 소개가 나오고 있습니다.
먼저 안드레가 예수님을 만났으며, 그가 형제 베드로에게 예수님과의 만남을 주선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떠나시려던 중에 안드레와 베드로의 고향 사람인 빌립을 만나셨고, 빌립이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 친구 나다나엘을 인도하여 예수님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게 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본문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인 걸 알 수 있습니다.
만남이 유지되면서 우연한 만남이 인연으로 이어진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아니지 않느냐?’라고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기존에 바돌로매로 알려진 사람이 바로 나다나엘입니다.
나다나엘은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는 ‘바돌로매’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유는 헬라어로 ‘바’는 ‘누구누구의 아들’이란 뜻이기에 바돌로매라는 이름이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호칭이다 보니 사람들이 그저 편하게 ‘아! 걔? 돌로매의 아들!’ 이렇게 불렀던 겁니다.
정식 이름은 ‘나다나엘’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었지만 사람들이 편하게 돌로매의 아들로 불렀기에 열두 제자의 이름을 기록할 때도 사람들에게 더 알려진 ‘바돌로매’로 명명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과 만난 사람들이 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유지됐느냐 하면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했다가 돈이 많아 근심하며 떠났던 부자 청년도 있었고, 특히 당대의 기득권자들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유지하는 대신 이런저런 이유로 예수님을 손절해 버린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의 만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놓고 있는데,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전하였을 때 사람들 중에 한 분류는 조롱하였다고 했고, 또 한 부류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으며, 다른 한 부류는 믿음으로 결국 이방 교회들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에 대한 사람들의 ‘거절, 유보, 유지.’했던 반응,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과의 만남에 있어 과연 우리가 거절이나 유보나 유지를 결정할 권한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선택할 기회’가 있는 것이지, ‘결정할 권한’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선택할 기회’라는 건 뭘까요?
그게 성경이 말하는 ‘자유 의지’입니다.
이때도 자유 의지가 어째서 선택할 기회라는 것이냐를 묻는다면 선택지를 주신 분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예로 보면,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 놓고 하나님은 사람에게는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 의지라는 게 이런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생각엔 너희가 에덴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런데 너희 생각이 내 생각과 다를 수도 있으니 너희가 직접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고 하신 겁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시면서 ‘너희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안 먹으면 당연히 하나님의 축복 안에서 사는 거지요.
이처럼 사람은 스스로가 결정할 권한이 아니라, 주어진 선택지 앞에서 자신이 선택할 기회만이 있는 겁니다.
이런 사실은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좀 더 명확해집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들도록 자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에겐 이미 하나님이 주신 ‘내가 네 후손으로 번성케 하리라’고 약속하신 선택지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겐 하나님이 자식을 주시기까지 기다리느냐 마느냐에 대해 선택할 기회만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땠습니까?
스스로 하갈이라는 선택지를 만들어 놓고, 자신이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겠다고 결정할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그 결과가 이스마엘입니다. 그 후손이 오늘날 중동의 아랍 민족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스스로 결정할 권한을 행사한 결과 아시다시피 당대엔 가정불화와 가족 간 마찰이 있었고, 오늘날엔 끊임없이 발발하는 중동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보며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진대 항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언제든 인간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강제로 복 받기를 강요하진 않으십니다. 대신 묻고 계십니다. ‘너는 내가 주는 복을 받겠느냐?’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복 받기를 원하면 ‘복을 선택할 기회’를 놓치지 마라!
그런데 ‘복을 선택할 기회를 잡으라.’는 말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돼라.’
예수님을 믿을지 말지에 대해 결정할 권한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이미 복은 주셨으니 우리에겐 받을지 말지에 대한 선택의 기회만이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나다나엘의 경우가 그런 겁니다.
본문 45절을 보게 되면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말하기를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하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이때 ‘선한 것’이라 함은 당대에 유대인들이 학수고대하던 ‘메시아’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메시아라는 분이 하필이면 나사렛 출신이란 것에서 나다나엘이 의구심을 갖게 된 겁니다.
여기서 우린 선택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한 첫 번째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즉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는 우리 생각 속에 있는 ‘편견’이라는 겁니다.
지난 시간까지도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생각이 믿음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 중에서도 믿음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생각이 바로 편견입니다.
‘아닐 거야’라는 편견, ‘안 될 거야’라는 편견이 우리 생각 속에 ‘안 된다는 믿음’과 ‘못 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나다나엘은 어떤 이유로 나사렛 출신 예수는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편견을 가졌던 걸까요?
당시 나사렛은 지방색에 대한 편견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유대 지역 사람들. 특히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리 지역 사람들은 교육도 받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고 교양도 없는 촌놈들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그들을 천시했습니다. 게다가 그런 갈릴리 지역 중에서도 더 변두리에 있었던 나사렛은 전반적으로는 빈민 지역이었고 마을 규모도 작은 데다가 로마 군대까지 주둔하고 있다 보니 거의 이방 땅과 같이 취급되며 멸시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그런 촌구석에서 메시아가 나올 리 없다는 게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은 나사렛 출신입니다.
이게 사실이고 진실입니다.
‘내 생각과 사실’. ‘내 편견과 진실’.
이것들이 선택할 기회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빌립의 권면 앞에서 나사렛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힌 나다나엘은 자신이 선택할 기회를 놓칠 순간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자 빌립이 말합니다. ‘와서 보라’고.
이 대목에서 대개는 빌립이 전도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 전도를 강조하며, ‘와서 보라’를 전도 방식의 하나로 가르치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전도는 매우 귀중한 사역이자 책임이지만 본문에서 빌립이 말한 ‘와서 보라’는 말은 전도 이전에 빌립 자신의 신앙고백이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집니다.
간혹 교회에서 전도단을 파송하려다 보면 개중엔 ‘안 믿는 사람 만나면 뭐라고 해요?’라던가, ‘사람들이 이것저것 따지고 물어보면 뭐라 답해요?’라며 전도에 대한 걱정 내지는 두려움을 가지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인지 교회는 나름의 이런저런 전도 훈련이나 전도 특공대다 뭐다 해서 전도에 대한 교육 및 전도 방법을 가르치는 데 열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린 이걸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말로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 말이 많아질수록 예수님은 적어진다는 것을.
이런 의미에서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전도한 것만이 아닙니다. 당시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자기의 신앙고백’을 소개했던 겁니다.
예전에 모 광고 문구 중에 ‘진짜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라는 게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의 편견 앞에서 빌립의 심정이 그랬던 겁니다. 즉 ‘나사렛 예수가 진짜 메시아가 맞는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였던 겁니다.
앞서 전도에 임할 때 ‘안 믿는 사람 만나면 뭐라고 해요.’라던가 ‘이것저것 따지고 물어보면 뭐라 답해요.’라고 했던 사람들이 가졌던 현실적 고민이 빌립에게 닥친 겁니다.
그러나 내가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해서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닌 건 아닙니다. 그래서 빌립은 말한 겁니다. ‘와서 보라’고.
기억하세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하는 겁니다.
하얀 게 소금인지 설탕인지를 모른다면 먹어 보면 알듯이 믿음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빌립이 했던 ‘와서 보라’는 말은 ‘직접 겪어보라.’ 또는 ‘직접 경험해 보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나다나엘이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했던 말은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입니다. 그때 빌립이 이렇게 말한 겁니다. ‘그건 네 생각이지.’ ‘직접 겪어봐.’라고.
당시 빌립은 전도라는 행위 이전에 예수님에 대해 ‘체험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편견에 막힌 나다나엘에게 설명하는 대신 본인이 했던 ‘체험하는 믿음’을 권유했던 겁니다.
오늘날에도 복음과 관련한 진실 앞에서 사람들의 질문은 동일합니다. ‘그럴 리가 있나?’ 내지는 ‘그럴 수가 있나?’라고 합니다.
다들 예수님에 대해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전제로 접근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본문에서도 보면 빌립이 체험한 확신을 보며 나다나엘이 예수님께로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직접 예수와 맞부딪혀 보자.’ ‘예수를 직접 맞대면해 보자.’
이게 나다나엘의 당시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대면하기도 전에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하시더니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라는 나다나엘의 질문에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부터 보고 있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향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그 순간 나다나엘도 기존의 편견 대신 예수님에 대한 체험적인 믿음을 가지게 된 겁니다. 본인이 예수님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나다나엘의 생각 속엔 편견이 깨지고 믿음이 들어간 겁니다.
이 과정이 중요합니다. 빌립이 그랬고, 나다나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한 ‘직접 체험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이제부터 우린 우리가 어찌해야 우리도 체험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 방법을 알려면 본문에서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했던 말의 의미를 확장해서 살펴봐야 하는데, 우선은 ‘와서 보라’입니다.
마태복음 11:28절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며 내가 하는 일들이나 하려는 일들이 안 될 것 같거나 가망이 없을 것 같거든 일단은 예수님부터 찾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게는 예수님이 계시지!’라는 생각이 ‘와서 보라’의 시작입니다.
믿으세요. 예수님은 내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계십니다.
51절에서 말하기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창세기 28:12절에서 막막한 광야에서 밤을 지새야 했던 야곱이 꿈에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했다고 한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두 말씀에서 공통인 건 ‘내가 어디 있든 하나님이, 혹은 예수님이 거기 계신다.’입니다.
그래서 우린 확신해도 됩니다. ‘내게는 예수님이 계시지!’라고.
두 번째로는 ‘불러보라’ 입니다.
열왕기하 2:14절에는 엘리야의 승천을 목격한 엘리사가 돌아오는 길에 요단강 앞에 이르러 하나님을 찾으며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나이까?”라고 부르자 앞서 엘리야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엘리사 앞에서도 요단강이 갈라졌다고 했습니다.
‘불러보라!’ 이게 ‘체험하는 믿음’을 위한 두 번째 단계입니다.
행여라도 와서 보라 했다고 어디 가서 예수님을 만나 나로 고민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우리가 가서 만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부르면 와서 만나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우리에게 체험하는 믿음이 있으려면 우린 언제든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조용한 곳으로 나아가서, 아니면 심중 깊은 곳에서부터 ‘주님 어디 계십니까?’를 외쳐 불러보세요.
‘능력의 주님은 어디 계시나이까?’라고 부르세요. 그리고 이 문장에서 ‘능력’이라는 말 대신에 ‘응답, 치유, 도우심.’처럼 지금 나에게 필요한 예수님을 부르면 내게도 예수님의 응답과 역사가 나타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체험하는 믿음’을 위한 마지막 단계는 ‘해 보라’입니다.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을 불렀으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권고하시는 ‘해 보라’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믿어 보라. 그러면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축복을 얻습니다.
기도해 보라. 그러면 믿고 기도한 것은 응답을 받습니다.
감사해 보라. 그러면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불러옵니다.
이렇게 우리가 ‘와서 보라-불러보라-해 보라’의 단계를 거치며 체험하는 믿음을 키워나가다 보면 본문 50절에 약속된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는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게 되는 겁니다.
각자의 삶을 돌아보세요. 현 상황에서 크든 작든 인생에 큰일이 났습니까? 혹은 해결 못 할 큰일이 있습니까?
그렇더라도 예수님이 그것들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이후론 나를 위한 예수님의 더 큰 능력, 더 큰 역사가 있을 것을 믿어서,
안 되고 못 한다는 편견을 버리고 대신 내 생각 속에 예수님이 계시게 하고, 내 믿음과 내 기도에 예수님이 계시게 해서,
언제 어디서든 큰 일을 성취해 주심으로써 우리로 더 큰 일을 보게 해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부단하게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기도하며, 예수님 말씀대로 해 보기를 힘써 해냄으로써, 해봤더니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주인공으로 인생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