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이러한 철학적 의미를 지닌 단어들은 우리에게 사고영역의 확장을 가져다준다. 우리에게 친숙하고 자주 사용되는 말이지만, 막상 이에 관하여 설명하기란 난감함이 앞서게 된다. 그렇다면 ‘삶’이란 무엇이며 ‘죽음’이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정의하면 삶이란 살아 있는 일로 정의 내릴 수 있으며 죽음이란 삶의 종말로 즉, 의학적으로는 뇌의 기능이 정지된 상태로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삶과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나게 되고 이로써 삶을 영위하며 살아가게 된다. 죽음도 삶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자의와는 관계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물론 자의에 의해 죽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경우는 극히 드물기에 무시해도 무방하다 하겠다. 비단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생물들은 누구나 태어남과 동시에 언젠가는 죽게 되며 이를 피할 방도는 현재 존재하지 않고 인류의 미래에도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생전에는 오랫동안 무탈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며,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 혹은 공허함을 가지고 있다. 유독 ‘죽음’에 많은 이들이 감성적이게 되는 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연유일 것이다. 사람은 삶을 부여 받을 때 태어났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유아기를 보내게 되고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죽음의 경우는 개개인이 생활하면서 주변인들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고 결국은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둔 시기까지 항상 죽음을 인지하며 그에 따른 상실감과 고독감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죽음이란 태어남과는 달리 항상 의식함으로써 사람들의 무의식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에 대하여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두려움의 원인은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불확실성에 근거가 있다고 하겠다. 사후세계에 관한 여러 설이 있으나, 사자에게 그 정확한 정보를 물어볼 수는 없으니, 당연 죽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종교인의 경우는 사후세계를 윤회라든지 다른 차원의 세계로의 새로운 삶의 영위라든지 등으로 인식하고 절대적 존재의 믿음을 의심치 않는다. 이러한 믿음으로써 종교인들은 비종교인들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적게 가지는 것이다. 종교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왔다는 설도 존재함으로써 이 사실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죽음은 ‘어둠’이라는 뜻을 내포하며 현실과는 단절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지금 존재하고 있는 자신은 영원히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현세에 대한 많은 미련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사후에 가족에 대한 염려, 사후 자신에 대한 평가 등의 불안감도 가진다. 이런 미련과 불안의 요소가 현세와의 단절을 두려워하는 원인이 된다. 그 외에도 개개인의 차이에 따른 두려움의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복합적 요인으로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의미를 두려워하지만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감으로써 마음속에 ‘죽음’과는 거리가 먼 일상의 생활로 돌아간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함과 동시에 현재의 무탈한 삶이 지속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영웅의 죽음 앞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인다. 최근에 종영된 ‘불멸의 이순신’의 경우,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총에 맞은 이순신이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둘 때의 의연한 모습에 시청자들은 영웅의 죽음에 슬프지만 큰 감동을 받았다. 이순신의 경우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이겨도 선조에게 역도로 몰려 있어 돌아갈 곳이 없는 딜레마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순신은 자의로 죽음이라는 것을 택했을지 모른다는 의견이 많다. 이러한 영웅의 죽음에 열광하는 것은 대리만족의 차원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선인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죽음의 문턱 앞에서는 악인으로 변한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의 죽음을 문제의 해답으로 선택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범인으로는 생각지도 못하는 것이며 설령 생각은 할지라도 이를 실행에 옮기기는 상당히 어렵다. 하지만 영웅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키며 대의를 위해 혹은 선량한 타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리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들은 적지 않게 감동을 받고 그들의 죽음에 열광하는 것이다.
모든 생물의 유한한 생명을 누리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인간 역시 태어나면서 성장한 후 결국 노화하고 죽음과 접하게 된다. 하지만 인류는 이러한 자연의 섭리와는 달리 불로장생 꿈을 가지며 오랜 역사를 가져왔다. 중국의 진시황제는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늙어 병들어 죽음을 걱정해 불로장생의 꿈을 평생 좇으며 살았다. 이러하듯 늙지 않고 영원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방면의 발전과 함께 삶의 윤택함에 기여하였음은 말 할 필요도 없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의학의 발전은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루어 왔다. 과거 전 세계적으로 위협되었던 흑사병 같은 질병도 페니실린의 개발을 통해 해결되는 등의 최근 의학의 발전에 말미암아 인류의 평균 수명은 점차적으로 늘어갔으며 최근에는 노령화문제가 제기되기도 하며 실버산업의 호황도 발생하였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로 생명 연장의 꿈에 한 발 다가가고 있다. 이렇게 생명의 연장과 무한한 삶을 우리들은 왜 바라는 것일까? 더 나은 미래를 경험해보고 싶다든지 해야 할 일이 있다든지 등의 이유는 많겠지만 무엇보다도 죽음이라는 공포에 대한 회피가 강할 것이다. 불확실성과 미련, 불안 등을 수반하게 되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사람들은 이를 피해 지속적인 현실의 삶을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죽음이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불청객이다. 오늘이 될 수도 있으며 혹은 내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죽음이며, 이를 예측하기는 인간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하다. 한 개인의 죽음은 그 구성원들에게는 중대사이지만 전 우주적 관점에서는 매우 사소한 일이며 흐름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죽음이라는 것은 태어남과 동시에 부여받는 대가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죽음이 없다면 우리들은 태어나지도 못했을지 모른다. 하나의 산물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산물이 파괴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러한 자연의 섭리는 거스를 수는 없다. 과학의 기술의 발달을 통해 인류는 과거보다는 전반적으로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으며 수명도 상당히 연장되었지만 무한한 삶을 기약할 수는 없다. 지금뿐만 아니라 먼 훗날에도 무한에 가까운 삶이란 존재치 않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에게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 올 것이다. 그 시기에 우리는 수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후회되는 일도 있을 것이며 자랑스럽게 생각되는 일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부심 있게 생애를 누렸다고 말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이겠지만 항상 두려움을 가지고 생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있고 그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잠시 ‘죽음‘이라는 단어는 멀리 놓아둔 채, 자신이 부여받은 생명에 경외심을 가지고 본연의 생활에 충실하여야 할 것이다.
첫댓글 [4]과제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한것 같습니다. 영웅의 죽음에 대한 열광 부분도 좋구요. 수고많으셨습니다.
[4]본연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씀이 좋네요. 주제 3가지를 적절히 언급해 주셨구요. 잘 읽었습니다.
[4]표현이라든가 전개가 논리적이고 좋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4)전체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고 마무리도 잘 하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4]우주적 질량보존의 법칙은 성립하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