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코 다 가마
출생-사망 : 1469 ~ 1524
국적 : 포르투갈
활동분야 : 탐험, 항해
주요수상 : 백작의 작위를 받음
주요업적 :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항로 개척
포르투갈의 항해자. 마누엘 1세의 인정을 받아, 70년에 걸친 인도항로 발견 대사업을 성취했다. 이슬람과 힌두 연합함대의 반격을 격파, 코친·카나놀 등에 상관을 설치하여 인도무역 독점의 기초를 다졌다. 국왕의 인도정책 고문이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린 시절에 대하여서는 그의 아버지가 투우사였다는 사실과 에보라에서 수학과 항해술을 배웠다는 것 외에는 분명하지 않다. 마누엘 1세의 인정을 받아, B.디아스의 희망봉(喜望蜂) 발견 후로 숙원이던 인도항로 개척의 원정대장이 되었다. 1497년 7월 8일 4척의 선대(船隊)와 175명의 선원을 인솔하고 리스본 벨렘 항구를 출범하였다. 도중까지 동행한 디아스의 조언대로, 시에라레온 앞바다에서 대서양을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혁명적 항법(航法)을 써서(약 6,400km), 11월 희망봉을 돌아 대륙 동해안을 북상(北上)하여 모잠비크·몸바사를 통과, 1498년 4월 말린디에 도착하였다.
모잠비크에서는 이슬람교도들의 적대적인 공격을 받아 범선 1척을 잃었으나, 우호적인 말린디에서는 이슬람의 수로(水路) 안내인 이븐 마지드의 도움으로 인도양을 횡단하였다. 5월 20일 캘리컷에 도착, 70년에 걸친 인도항로 발견의 대사업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독점무역에 위협을 느낀 이슬람 상인들의 방해와, 무력(武力)에 대한 지방 영주(領主)들의 경계심 때문에 정식 통상교섭은 난항을 거듭, 3개월 만에 겨우 약간의 향료를 입수하였다. 10월 다시 인도양을 횡단하여 올 때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항해하나, 괴혈병(壞血病) ·열병 등으로 선원의 반 이상을 잃었다. 1499년 9월 가까스로 리스본에 귀환하였을 때는 겨우 44명의 선원이 살아 돌아왔다. 바스코 다 가마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귀족이 되어 연금(年金)을 받았다. 그들의 항해는 총 2년이 걸렸고 약 42,000km를 항해했다.i
[바스코 다 가마의 제1회 항해의 항로]
그 뒤로 인도무역은 해마다 확대되었으나 현지인과의 마찰이 점차 격화되어, 1502년 다시 15척의 대함대(大艦隊)를 인솔하고 인도에 건너갔을 때에는 이슬람과 힌두 연합함대의 반격을 받았다. 이를 격파하고 코친 ·카나놀 등 각지에 상관(商館)을 설치, 인도무역 독점의 기초를 다졌다. 그뒤 백작에 봉해지고, 국왕의 인도정책 고문이 되었다. 1524년 54세가 되었을 때 국왕을 대신하여 현지 공관(公館)의 부패숙정을 위해 인도에 갔으며 총 3번에 걸쳐 인도를 갔다. 하지만 이때 과로가 겹쳐 병을 얻고 코친에서 죽었다. 바스코 다 가마는 포르투갈 리스본 남부 벨렘의 제로니모 수도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