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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태욱 교수의 교실 원문보기 글쓴이: 정태욱
<초기 임시정부의 파벌 갈등과 안창호의 노력>
안창호는 평안도의 서북인 그리고 농민 내지 잔반(殘班) 출신이라는 이유로 기호파의 양반 출신 인사들로부터 소외를 당했습니다. 이러한 차별은 한성 임시정부의 각료 구성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각 부가 모두 ‘총장’의 직위로 되어 있는데, 유독 안창호의 노동부만은 ‘총판’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노동에 대한 하시 그리고 안창호에 대한 차별로 이해됩니다. 그리하여 안창호 지지자들은 노동부도 총장의 직위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창호는 ‘한성 정부’를 봉대한다는 정신에 따라야 한다며 총판의 직위를 유지하였습니다.(송하연, 상해 안창호 지지세력의 형성과 분화, 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 25쪽)
또한 사실 초기 상해 임시정부는 기호파 이동녕 내각이었습니다. 이동녕은 임시의정원 의장이 되었고, 아직 상해에 오지 않은 이승만 대신 국무총리 대리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일하게 상해에 와 있었던 또 한 명의 총장인 이시영도 기호파 인사였습니다. 그런데 노령 정부와의 통합이 논의되면서 이동녕은 의정원 의장직을 사퇴하였습니다. 이는 이미 본 바 있습니다.
이동녕과 이동휘는 원래 연해주에서 권업(勸業)회와 광복군 정부 등 함께 활동하였으나, 1917년 러시아에 소비에트 혁명이 발발한 후 갈라서게 됩니다. 이동휘는 레닌 정부와 친하고자 하였고, 1918년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여 레닌의 적군을 도와 러시아 내전에도 참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동녕은 그에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친 러시아적인 대한국민의회가 조직되자, 이동녕은 연해주를 떠나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상해 정부와 노령정부의 통합이 논의되면서 이동녕은 “不能堪代辦之任”, 즉 “직을 감당할 수 없음”을 이유로 사직한 것입니다.
한편 이동녕과 이시영 등 기호파 인사들은 서북파의 안창호를 꺼려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주요한은 상해의 이동녕·이시영·신규식 등 임시정부의 지도부는 안창호가 온다는 소식에 중국 杭州 방면으로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창호가 오면 자기 고집대로만 하자고 할 것이요 잘못하면 또 파벌싸움이니 지방 싸움이니 하는 문제가 날 터이니 우리는 물러간다”며 임시정부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강에 따르면 이시영, 이동녕, 신규식 등의 태도는 “상해에 있던 늙은이들은 다들 달아나”면서 미주에서 건너올 안창호에게 “너 어디 혼자 맡아 해 봐라”식이었다고 합니다.(송하연, 해 안창호 지지세력의 형성과 분화, 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 25-6쪽). 물론 이는 이동녕 이시영 등 기호파의 인식의 단면을 증거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안창호 지지의 서북 인사들의 피해의식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이렇게 안창호는 통합 임시정부를 성사시키는 데에 노령 정부와 상해 정부의 반목 그리고 기호 인사들과 서북 인사들의 갈등이라는 큰 장애물을 안고 시작하게 됩니다.
1919년 5월 말 안창호가 도착하여 통합 임시 정부 설립이 본격화됩니다. 안창호는 상해 교민들에 대한 다섯 차례의 연설을 통하여 대동단결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리고 노령 정부의 원세훈과 협조하여 노령 정부와 상해 정부의 통합에 원칙적 합의를 보았습니다. 이승만의 대통령직도 보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동녕, 이시영을 다시 불러 왔습니다. 안창호가 미주의 대한국인의회로부터 가져온 자금으로 임시정부의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또한 ‘한일관계사’를 작성하기 위한 사료편찬위원회도 구성하였습니다. 파리 강화회의 이후 국제연맹에 제출하기 위한 자료였습니다.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도 발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19년 9월 통합 임시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안창호의 노고는 쉼이 없었습니다. 9월 18일 상해에 도착한 노령 정부 사람들은 통합 임시정부가 상해 임시정부의 연장임을 확인하고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노령 지역 한인들의 대표인 문창범은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노령 국민회의를 부활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동휘는 통합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의 직위는 국무총리였습니다. 이동휘는 친소 사회당을 이끌고 있었고, 소련과의 동맹을 통해 항일해방전쟁을 수행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동휘에게 임시정부는 그러한 항일 무장 투쟁의 민족적 조직이 될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1919년 11월 3일 이동휘가 국무총리, 이시영이 재무총장, 이동녕 내무총장, 신규식 법무총장과 함께 취임함으로써 통합정부가 정식 출범합니다. 안창호는 이동휘의 친소, 무장투쟁, 함경도파 그리고 이승만의 친미, 외교, 기호파를 포괄하여 임시정부를 출범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통합임시정부가 출범한 이후 만주 지역의 무장 항일 단체들도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됩니다. 북간도의 최대 독립운동 단체였던 대한국민회는 1919년 11월 통합정부의 성립을 존중하여 북간도 의원을 선출하여 임시 의정원에 파견하였습니다. 북간도의 ‘군정부’도 12월 임시정부의 요구에 따라 ‘군정서’로 개명하였습니다. 당시 노령에 주둔하고 있는 홍범도 군대도 임정 지지를 표명하였습니다. 서간도의 군정부 역시 ‘군정서’로 개칭하고 임정 산하로 편입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통합 임시정부는 출범 후에도 주요 정파들은 상호 거리와 이견을 좁히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무장투쟁 노선과 외교 노선은 극한 대립을 보였습니다. 이동휘는 국무총리에 취임하기 전부터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비난하였고, 또 취임한 후에는 여운형의 일본 방문을 문제 삼았습니다. 여운형의 일본 방문을 ‘독립론’이 아니라 ‘자치론’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이동휘가 내린 ‘국무원 포고 제1호’는 여운형의 도일(渡日)을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이동휘는 항일 독립 전쟁론에 몰입하였던 것입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여운형의 일본 방문은 독립 운동사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도전이었습니다. 사실 일본이 여운형을 초대한 것은 여운형을 회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점이 이동휘의 우려를 산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운형은 거꾸로 일본의 수도 동경에서 그리고 내외의 주요 언론들 앞에서 대한 독립의 당위성을 웅변하였습니다. 여운형의 연설은 일본 국내에서조차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여운형의 도일은 한민족의 기상을 떨치고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는 개가를 올렸던 것입니다.
안창호는 여운형의 도일에 대하여 “국가를 위하는 순결, 열렬한 충성에 대하여 절대로 신임한다”고 지지를 표명하였고, 이동녕도 이동휘의 국무원 포고는 국무총리 개인의 결정이었을 따름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결국 이동휘는 국무원 포고 제2호에서 ‘여운형은 민족 독립에 위반되는 행동이 없다’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동휘는 러시아 대표 파견에서도 전단(專斷)을 행했습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서구 열강들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한 임시정부는 소련의 레닌 정부에 원조를 타진합니다. 레닌은 소비에트 혁명 이후 모든 식민지 해방을 공표한 바 있습니다. 임시정부는 한형권, 여운형, 안공근 3인의 대표를 선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동휘는 비밀리에 사회당 사람인 한형권만 파견하였던 것입니다.
이동휘는 김립과 함께 1919년 상해로 오면서 상해 고려공산당을 조직하였습니다. 신채호, 선우혁, 김두봉과 같은 임시정부 요원 혹은 독립지사들을 당원으로 확보하였습니다. 이동휘는 국제연맹과 미국에 의존하는 임정의 외교노선을 소련과 코민테른 쪽으로 바꾸려고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이동휘는 친소독립전쟁의 외길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편 이승만은 이승만대로 임시정부을 자기의 조직으로 만들어 나가고자 하였습니다. 이승만은 초기 상해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선임되자 바로 공채발행권을 요구하였습니다. 임시정부 사람들은 미주에서 발행한 공채도 결국은 임시정부에 귀속될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은 한성정부가 수립되었고, 자신이 집정권총재로 선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집정관총재 즉 대통령의 명의로 임시정부 구미위원부를 별도로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미주 지역이 재정을 그 구미위원부를 통해 직접 관할하였습니다. 그동안 임시정부의 주 수입원이었던 미주 대한인국민회의 재정이 이제는 모두 이승만의 ‘구미위원부’로 귀속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임시정부에서 큰 논란을 빚었지만 이시영, 이동녕 등 기호파의 주장에 따라 1920년 3월 공채 발행을 구미위원부에 위탁하는 것이 추인되었습니다.(윤대원, 상해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구, 68쪽).
또한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었지만, 여전히 미국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비록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등 총장들이 이승만 계열이었지만, 실제 임정의 주축이었던 차장 등 소장 층에서는 점점 안창호 및 이동휘 세력이 커졌습니다. 이승만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비선’을 파견하여 상해의 상황을 추적 파악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와이 교포 출신의 목사 안현경을 ‘원동시찰겸 통신원’으로 상해에 파견하였습니다.
“내정을 소상히 탐지하여 누구는 어디 어찌 무엇하며 주의가 어떠한 것과 또 어떻게 마음을 먹는 것을 다집고 한 후에 그 중에 입이 무겁고 통장할 만한 사람이 나오면 붙들고 서로 정을 말하시오”
이후 안현경이 이승만에게 보고한 내용을 옮겨 봅니다.
“현금 상해 형편으로 말하면 삼파가 있는바 이동휘씨는 함경도파요 안창호는 평안도파요 이동녕/이시영씨는 경기도파인데, 이 세파가 서로 주권을 잃지 않으려는 바 근자에는 안씨가 경기파를 좋아하여 합동이 되는 것이 있으니 그 사실은 함경도파가 안씨 평안도를 치고자하는 줄 알으나 시방은 화평적 수단으로 원화롭게 대우하여 협력하나 장차 함경도/평안도 부분에서 합하여 이박사(이승만) 반항할 줄까지 다 알고 있는 중 이동녕/이시영 양씨는 현금 정부의 중권을 잡은 바 혹 마음대로 일을 이리저리 못하는 것은 국무회의 의결이 없이 모든 일을 하지 못하는 고로 실권이 없고...”(윤대원, 상해 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102쪽)
이렇게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의 대립 상황에서도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단결과 지속을 위하여 헌신하였습니다. 통합 상해 임시정부 출범의 산파역을 다하였음은 물론 이후 이동휘 내각이 출범한 후에도 그 노력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임시정부의 물적 기초와 인적 기초에서 안창호의 비중은 절대적이었습니다. 미주 한인사회의 지원금이 이승만의 구미위원부에 귀속되면서 임시정부의 재정적 원천은 국내의 서북지역, 즉 안창호의 조직에 크게 의존하게 됩니다.(윤대원, 69쪽) 또한 이승만에 대한 비선 안현경의 보고에 따르면 “상해 정부의 총장 이하 각원 61인 중 평안도 사람이 48인”일 정도로 안창호의 계열의 비중은 컸습니다. 안창호는 통합 정부에서 노동국 총판에 불과하였지만, 정부의 인사 문제, 외무, 군사, 재무, 내무 등 거의 모든 부서의 일을 각 부차장이나 청년 요원들과 의논 결정하게 됩니다. 또한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에서도 안창호의 영향력은 지대하였습니다. 당시 신문사 사장 이광수가 바로 안창호의 수제자였습니다.(윤대원, 상해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92쪽)
안창호가 가장 절실하게 외쳤던 것은 민족의 실력양성이었습니다. 안창호는 평양의 대성학교 설립부터 청년 교육과 육성에 전력을 기울여왔습니다. 안창호가 국내에서 신민회를 조직할 때 그와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였고,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그 후신으로 ‘흥사단’을 조직하게 됩니다. 안창호는 흥사단 조직을 확대하여 1920년 ‘원동위원부’를 구성합니다. 흥사단은 원래 구한말 개화파 애국지사인 유길준이 결성한 단체인데, 안창호가 그 정신을 계승한 것입니다. 뜻있는 청년들이 안창호 주변으로 모여 들었고, 이들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주요 멤버들이 되고 또 임시정부의 인적 자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창호 지지자들의 지역적 분포는 단연 서북 지역 출신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흥사단은 외부 노출을 걱정하며 비밀조직으로 운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기호파를 중심으로 경계심이 커졌습니다. 안창호가 ‘지방열(地方熱)로 화(化)한 몸’이다, “명예(名譽)와 노(勞)”를 독점한다, “장래 대통령이 되려 한다”는 등의 비방이 잇따랐습니다. 이에 대하여 안창호는 “다 당신네가 당신네 심복으로 악선전한 것이 사실”이라고 응답하기도 하였습니다.(윤대원, 상해 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102쪽)
안창호는 무던 애를 썼지만, 한편으로는 이동휘의 무장투쟁론과 이승만의 외교론 다른 한편으로는 함경도파와 기호파 사이에서 ‘안팎곱사등이’ 신세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 임시정부의 한계이자, 우리 독립운동사의 비극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결국 안창호의 헌신은 도로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이후의 임시정부 진행을 잠깐 먼저 말하자면, 이동휘 파가 먼저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이후 안창호도 임시정부에서 나와 임시정부 개조론을 지지하게 되고, 이는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으로 귀결됩니다.
<참고 문헌>
강덕상, 김광열 역, 여운형과 상해 임시정부, 선인, 2017
윤대원, 상해 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초판 2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한홍구 역,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돌베개, 2015
한시준, 홍진, 탐구당, 2006
조원기, “일제의 만주침략과 간도 참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1집, 2012,
송하연, 상해 안창호 지지세력의 형성과 분화, 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