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ycott당한 Boycott 씨]
19세기 후반의 아일랜드 농업 구조는 극단적으로 불균형했다.
토지의 대다수는 영국에 거주하는 대지주, 이른바 ‘부재지주(absentee landlord)’의 소유였고, 실제 토지를 경작하는 아일랜드 농민들은 소작인 신분으로 살아갔다.
소작인들은 법적 소유권 없이 매년 임대료를 납부해야 했고, 흉작이나 경기 침체가 닥쳐도 보호 장치는 거의 없었다.
임대료를 제때 내지 못하면 즉각 퇴거당했고, 그 순간 생계는 무너졌다.
이 구조적 취약성은 1840년대 대기근 이후에도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감자 역병으로 수백만 명이 굶주리거나 이주한 뒤에도, 토지 소유 구조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농민들의 삶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메이요 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 지역은 토질이 좋지 않고 기후도 험해, 흉작이 반복되던 곳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계 전직 군인이었던 찰스 커닝엄 보이콧 대위는 한 지주의 토지를 관리하는 대리인으로 메이요에 파견된다.
그의 역할은 임대료를 징수하고 계약을 집행하며, 필요하다면 소작인을 내쫓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가 이를 융통성 없이 실행했다는 점이었다.
흉작으로 농민들이 임대료 인하를 요구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고, 연체를 이유로 실제 퇴거 조치를 단행했다.
당시 아일랜드 농촌에는 이미 조직적 저항의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1879년 결성된 아일랜드 토지연맹은 ‘공정한 임대료, 안정적인 거주권, 자유로운 토지 이전’이라는 이른바 ‘3대 요구(Three Fs)’를 내걸고 전국적인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토지연맹은 무장 투쟁보다는 사회적 압박과 연대를 중시했고, 폭력을 피하면서도 실질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메이요의 농민들과 주민들은 이 전략을 보이콧 대위에게 적용하기로 한다.
누구도 그의 밭에서 일하지 않고, 누구도 그의 집에 물건을 팔지 않으며, 누구도 그와 말을 섞지 않는 방식이었다.
이 결정은 자연발생적 분노라기보다는, 당시 농촌 공동체가 공유하던 윤리와 토지연맹의 조직력이 결합된 결과였다.
결과는 극적이었다. 수확철이 되어도 그의 농장은 손대는 사람이 없었고, 외부에서 일꾼을 데려오려 하자 이를 보호하기 위한 군경과 비용이 필요했다. 수확물보다 더 많은 돈이 들었다.
고립은 완벽했고, 폭력은 없었다. 결국 보이콧 대위와 그의 가족은 메이요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이 사건은 영국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다.
이 방법은 당시 농민들이 가진 유일하면서도 효과적인 저항 수단이었다.
‘보이콧’이라는 말은 그렇게, 한 시대의 불균형한 권력 구조 속에서 태어났다.-펌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