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해방전선* (외 2편)
한연희 딸기가 점점 썩어버렸다 그런 당연한 일들이 벌어지곤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맨 처음 딸기를 수북하게 담은 날이 떠올랐다 누구의 집이었지 재미없는 삶이었지 아니 달콤한 말이었지 생경한 거실 한복판에서 멍이 든 손목을 내려다봤다 찬장에 이가 나간 그릇이 쌓여갔다 냄비는 손잡이를 잃고 칼은 무뎌졌다 책이 글자를 지우거나 다 타버린 초가 바닥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먼지와 털이 구르는 동안 초침은 타닥타닥 제자리만 걸었다 저기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는 이가 누구인지 잊어버렸다 딸기를 짓이겼다 손가락이 부풀었다 일상은 썩어가는 과정을 반복하는 거구나 당연한 걸 늘 까먹고 말아서 이렇게 쉽게 멍들어버리는 거구나 방문 손잡이가 덜그럭덜그럭 돌아갔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손가락을 데었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 딸기 아래엔 구더기가 있고 구더기 아래엔 이야기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물컹거리며 달콤해지다가 사라질 수도 있다 침묵과 침묵 사이에서 말 못한 사연은 끈적하게 상처에 달라붙었다
너무 가려워 긁고 또 긁었다 이것을 부스럼이라 부를지 부질없음이라 부를지 인간 대신 다른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면 딸기 같은 것도 좋지 않을지 끈질기게 들러붙어 남에게 깨알 같은 흔적을 남길 수 있으니 그러니까 지금 나는 새로운 딸기에 진입한 거구나 새하얗고 여린 열매로서 건넌방에 웅크린 짐승에게 다가갔다 이제야 알겠어 보듬보듬 이마를 매만지면 갓 따온 딸기 향이 죽을 만큼 방안에 채워진다는 것 사랑과 세균이 범벅된 채 몸은 없어지고 만다는 것 그리하여 이번 삶에선 증오를 내버려두기로 했다
*로빈 월 키머러, 『향모를 땋으며』, 노승영 옮김, 에이도스, 2020
비누의 탄생
리지는 실제 인물이다 영화로 만들어진 리지의 이야기는 서글프기만 했다 대신 네모반듯한 비누에게 리지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욕실 안에 놓인 리지는 글리세린과 코코베타인이 주성분이다 특별히 영혼 일 그램을 넣었다 그러자 변화무쌍한 리지가 탄생했다 리지는 브리짓이라는 하녀를 좋아했다 브리짓과 리지는 전혀 다른 영혼이었다 리지는 새어머니를 도끼로 내려쳤다 벌거벗은 채 그랬다 빨간 핏방울이 그녀의 목과 가슴을 적셨을 때 진정 한 인간이 되었다 비누는 리지를 닦는다 피의 이력을 지운다 리지의 성분이 비누를 비누답게 만든다 브리짓은 자신을 더럽힌 주인에게 도끼를 들었다 실패했다 벌거벗은 비누가 대신 죽이자 브리짓은 울기만 했다 리지는 침착하게 현장을 정리했다 도끼를 닦는 비누, 알리바이를 만드는 비누, 죄를 어루만지면 거품을 일으킨다 이것은 죄가 아니다 이것은 죄가 아니다 잿물과 산비둘기의 피로 이루어진 비누가 있다 글리세린과 코코베타인의 가족인 리지가 있다 그녀에게는 죄책감이 일 그램도 없다 비누는 재판에서 깨끗함을 인정받는다 브리짓을 떠난 리지는 홀로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불을 끄면 욕실에서 가끔 피비린내가 난다 리지를 손에 꾸욱 쥔다
씨, 자두, 나무토막 그리고 다시*
잃어버린 연필을 생각한다 뭉개진 자두를 떠올리고 불타오르는 나무토막을 목격한다 언니, 엄마, 이모 그리고 다시 딸을 생각한다 어제는 엄마가 검은 재킷을 입은 자에게서 도망쳤지 내가 사랑한 언니는 곤죽이 된 이후로 사랑을 더는 믿지 않아 이모는 그랬지 밤에 나다니다가는 수풀에서 발견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래 그런데 등을 곧게 세운 딸이 똑바르게 길을 걷기 시작했어 딸이 훌륭한 사람이란 뭐냐고 물어봐 여름에 죄지은 자가 겨울에는 풀려나는 걸 보면서 너무나 쉽게 무죄가 되는 걸 보면서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는데 훌륭씨 착한씨 용감씨 사랑씨 우주최강히어로씨 밭에 그런 씨를 심어두면 될 거래 딸은 이 세계가 어둠 속에 머물지 않을 거래 너무 익어버린 자두를 이모는 밭에 심었지만 씨는 나무로 자라지 못했어 콕콕 박힌 불행의 씨를 삶에서 떼어내느라 흙속에 파묻힌 듯 엄마는 컴컴하게 지내왔어 그래도 어떤 믿음은 훌륭하게 자라나 자두나무로 빛날 거래 죄를 지은 자의 죄를 벌해줄 거래 불타오르는 나무토막을 꽉 안고서 용서를 빌면 그들은 연필이 되고 말 거래 무릎을 꿇고 물음을 묻고 기억해야 합니다 진실을 파헤쳐야 합니다 꾹꾹 적어나갈 수 있는 연필을 언니가 손에 쥔다 엄마가 이름을 쓴다 이모가 일기를 끝마친다 딸이 필통 가득히 연필을 모은다 그렇게 씨가 나무로 나무가 연필로 연필이 진실로 이어지고 이어지는 세계에서는 작고 여린 씨앗이 되는 것이 두렵지 않을 거야 무궁무진한 다음을 기다릴 거야 용서하고 또 할 수 있을 거야 훌륭하구나, 너희들은 정말 구제불능이지만 철수씨 민영씨 요셉씨 우빈씨 동석씨 종환씨 철저히 무언가를 쓰고 되돌아보는 동안 검게 탄 나무토막 앞에서 진실로 울 수만 있다면 그런 자의 모습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어요 자신을 부끄러워할 리가 있겠어요 *보이테흐 마셰크 글, 흐루도시 발로우셰크 그림, 「피노키오, 어쩌면 모두 지어낸 이야기」, 김경옥 옮김, 우리 학교, 2020 —시집 『희귀종눈물귀신버섯』 2023.8 ----------------------- 한연희 / 1979년 경기 광명 출생. 2016년 〈창비〉 신인상 시 당선. 시집 2020 『폭설이었다 그다음은』, 2023 『희귀종눈물귀신버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