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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내월에서는 재덕의 작은 외숙모 유순이 일곱 살의 재덕이 놀러오면.
“재덕아 외숙모 허리 좀 밟아줄래.”
“네 아주머니.”
재덕이 허리를 밟아주면.
“아이고 시원해라 아 구구구 시원해라. 거기 그래 거기 좀 꼭꼭 밟아라. 아이고, 착하기도 하지 우리 재덕이 설 때 맛있는 콩엿 제일 많이 주어야지. 아이고, 시원하다.”
하면서 허리를 밟게 했는데 유순의 나이 겨우 쉰 넷인데 일을 많이 해서 그런지 재덕이 오면 허리를 밟아달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광국의 큰아들 재명이가 스물넷이나 되어서 큰집 형님 하묵의 주선으로 영린의 친구 박계멱 진사의 열여섯 살 된 손녀딸 윤희와 혼담이 오가고 거리가 먼 관계로 단월서 혼례를 올리고 윤희는 집을 떠나 가마를 타고 간내월을 향하여 떠났다.
쇠쟁이를 지나서 개울을 끼고 돌 때에는 눈물이 쏟아서 나왔다.
그리고 개울을 끼고 비슬을 지날 때에는 윤희는 가마멀미가 나서 죽을 맛이었다.
가마 안에 놓여있는 놋요강에 토하기 시작하는데 오장육부가 다 올라오는 것 같았다.
윤희의 그런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마는 방촌을 지나 봉미산으로 접어들 때에는 집 생각이고 뭐고 걸어서 가는 게 났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이를 악물고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산을 넘어 길곡에서 점심들을 먹는데 윤희는 물 한 방울도 넘길 수 없었다.
먹으면 뭐하나 그냥 다 올라오는 걸 열여섯이 되도록 집에서 오리 밖을 나가본 적이 없는 윤희는 이 길을 다시는 못 올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가마는 그런 것도 아랑곳없이 동막을 지나 장락산을 넘어서 복고개를 넘어 삼막골을 지날 때에는 해가 기울고 있었고 우리골을 지날 때에는 해가 넘어가 땅거미가 질 무렵 떼네에 도착해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시집인 간내월에 도착했다.
그렇게 건들면 쓰러질 것 같이 파김치가 된 몸으로 같이 온 두 몸종의 부축을 받으며 폐백을 드려야 했다.
그리고 잠깐 눈을 붙였는가 싶었는데 새벽같이 일어나야 했다.
시아버지 광국이 안방 아랫목에 시 할아버지 시할머니의 지방을 써서 붙이고 사당제를 올리는 것으로 혼례의 모든 절차가 끝났다.
그러나 윤희 친정에서는 정문 댁 작은집 에 큰 손주 며느리로 손녀딸을 보내면서 살림살이가 곤궁한 줄은 꿈에도 모르고 몸종을 둘씩이나 딸려서 보낸 것 이었다.
아니 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을 시집보내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가 보지도 않고 시집을 보낸 친정 부모님 아니 할아버지의 처사가 원망스럽기도 했으나 어린 윤희는 그저 그렇게 살아가야 하나 보다 하고 있었다.
난감한 것은 광국 부부도 마찬 가지로 모든 뒤처리는 남순의 몫이 되었다.
점심은 생각도 못하고 아침저녁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식구가 다섯인 형편에 어른이 셋이나 더 해지면 여덟이나 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남순은 안 되겠다 싶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가 나 좀 보자.”
“예 어머니.”
“너도 보다시피 우리 집 형편이 생쥐 볼가심할 정도니 너를 볼 낫이 없구나, 그래서 말인데 네 몸종을 돌려보냈으면 한다.”
“네.”
그렇게 몸종을 돌려보내야만 했다.
몸종을 두고서 금이야 옥이야 자란 윤희의 시집살이가 시작 되었다.
몸종이 알아서 해주던 때하고는 달리 모든 것이 두렵기만 했다.
그래도 몸종이 떠나기 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었지만, 윤희 혼자 감당해 나가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점심때가 되어 되어서 남순에게 여쭈어 보게 되면서 부터가 시집살이의 시작이었다.
“어머니 점심은 어떻게 해야죠.”
“찬 밥 남은 것 있지?”
“예 어머님.”
“그걸 물을 넣고 끓여라.”
“예”
하고 부엌에 들어가 마른 검불에다 화로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불을 부젓가락으로 집어내어 올려놓고 후 후 불어서 불을 붙이는 데 연기가 나고도 한참을 불어야 불이 붙었다.
그렇게 작은 체구에 한참을 불고 나니 머리가 팽 돌면서 어지러웠다.
밥솥을 가셔내고 물을 부면서도 두려웠다
물의 양을 알 수가 없으니 밥을 지을 때에는 손을 넣어보아 손가락 두 마디가 잠길락 말락 하게 물을 부으면 된다고 했는데 밥을 끓이라니 감이 잡히지 않아서 물을 부어놓고 망설이고 있는데 남순이 들어와 솥뚜껑을 열어 보더니 누룽지와 찬밥 덩이를 넣고 물을 조금 더 넣고 솥뚜껑을 닫고 나갔다.
윤희는 물을 얼마나 부었나를 보기위해 솥뚜껑을 얼어보고 도로 닫고 불을 때면서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밥그릇과 수저는 눈여겨 봐둔 게 있어서 잘 찾아서 놓고 김치를 썰어 탕기에 담고 간장을 담은 종지에는 깨보숭이를 조금 넣고 또 다른 탕기에 동치미를 썰어서 넣고 국물을 채우고 그렇게 상 두개를 보고 있는 사이에 솥에서는 밥이 끓고 있었다.
얼른 화로에 재를 일부만 남기고 뒷간에 버리고 나서 가지고 들어와 부삽을 대고 고무래로 불을 꺼내어 화로에 담았다.
냉과리가 있는지 연기가 나서 부적가락으로 골라내고 화로를 안방 화로방석에 놓고 부엌으로 와서 국자를 꺼내어 먼저 두 사발을 떠서 상을 들고 조심조심 들고 안방으로 향하는데 조금 무직 했다.
다시 돌아와 그릇 그릇 채우고 나니 한 국자 정도가 남았다.
그걸 사발에 담아 가지고 다른 식구들이 미안해 할까봐 물을 조금 채워가지고 안방에 들어가 문채에 앉아서 점심을 먹는데 눈치가 빠른 남순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아가 난 양이 많구나, 너 더 받으렴.”
하면서 크게 한 숟가락 덜어주면서
“한 숟가락은 정이 없단다.”
하면서 다시 작게 한 숟가락을 더 덜어 주었다.
윤희로서는 그저 황망 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여섯 식구가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재덕이 들어 왔다.
“도련님, 여기 우물이 어디에 있어요.”
“제가 길어 올까요.”
“아니에요 가르쳐만 주세요.”
“따라 오세요.”
윤희가 똬리를 머리에 얹고 동이에 바가지를 넣어서 이고 따라 나섰다.
앞에서 재덕이 쫄랑쫄랑 걸어가면서 몇 번을 뒤돌아보며 논배미 위에 자리한 작은 옹달샘으로 가서
“여기에요.”
윤희가 물을 동이에 반이 조금 넘게 담고 바가지를 엎어 놓았다.
그래야 물이 덜 출렁여서 물을 엎지르지 않는다.
똬리 끈을 입에 물고 똬리를 머리에 얹고 동이의 족자리를 잡고 들어 올려서 머리에 얹으려고 하는데 그만 똬리가 떨어져 대롱대롱 매달렸다.
다시 동이를 내려놓고 똬리를 얹고 다시 동이의 족자리를 잡고 머리에 이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똬리가 떨어지기 직전에 동이가 얹어서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삐딱하게 자리를 잡았는데 그걸 본 재덕이 다가와
“제가 해 드릴 깨요.”
하고 동이를 조금 들자 제자리에다 똬리를 얹어 주었다.
그리고 걸어서 오는데 돌부리라도 걸릴까 봐 눈을 아래로 뜨고 조심조심 걸어서 오는데 물이 출렁여서 고개를 힘들게 했다.
그렇게 열 번 가까이 물을 여 날라야 했다.
그리고 해가 서산에 기울어 반쪽이 남았을 때 안방에서 화로를 들어다 부엌 한 귀퉁이에 놓고 부적가락으로 불씨를 꺼내어 입으로 불어서 불을 붙여서 나무를 끌어다 꺾어 넣으며 불을 때고 있으면서도 안방에 기척을 살폈다.
시어머니 남순이 기척이 들리고, 바가지를 가지고 가니 남순이 뒤주에서 쪽박으로 쌀을 퍼서 바가지에 부어 주면 가지고 부엌에 가지고 와서 이남박에 넣고 물을 붓고 한 번 저어서 뜨물을 동이에 붓고 이번에는 박박 문질러 씻어서 물을 붓고 저어서 노구솥에 두 번을 붓고 물을 부어서 조리로 일어서 밥솥에 앉히고 바닥에 조금 남았을 때 바가지 두개를 가지고 일어서 돌을 골라내는데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다시 한 번 일어서 돌이 없으면 그만인데 돌이 보이면 다시 일어서 앉히고 물을 부면서 손가락 두 마디가 잠길락, 말락 하게 물을 부어서 맞추고 마침 시래기를 삶아서 자배기에 담가놓은 것이 있어서 건저서 두 주먹을 짜서 도마에 올려놓고 썰고 장독대에서 된장을 크게 두 숟가락을 푸고 막장을 한 숟가락 퍼가지고 와서 조리에 담아서 노구솥 뚜껑을 열고 숟가락으로 저어서 풀고 있는데 남순이 들어왔다.
“어머니 국은 이정도 앉히면 될까요.”
“오냐 된 것 같구나.”
“난 시집살이를 별로 하지 않아서 너도 알겠지만 단월서 큰어머니 와 사촌동서 하고 살림나기 전에 조금밖에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 노구솥은 네 시할머니가 시집올 때 해가지고 온 건데 지난 을축년 대홍수 때에도 네 시아버지가 저것부터 꺼내 가지고 나올 정도로 애지중지 하는 물건이다.”
윤희가 부엌에 들어와서 보니 그래도 살림살이 중 괜찮아 보이던 것이 노구솥 이었는데 그런 사연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럭저럭 저녁을 마치고 나서 자리끼를 떠가지고 안방에 들어가 광국 부부에게 인사를 올리고 건넌방으로 와서야 하루 일과가 끝나고 재명 부부가 마주 할 수가 있었다.
시아버지 보다 신장이 훨씬 큰 게 아마 외탁을 했나 보다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윤희는 일찍 깨어나 화로를 들고 부엌으로 가서 불을 붙이고 불을 때서 물을 덥히면서 안방에 기색을 살피고 있으려니 시어머니가 기침을 했는지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리고 뒤주를 여닫는 소리가 이어저서 나무를 아궁이에 밀어 넣고 이남박을 가지고 갔더니, 오늘은 쌀만 주시는 게 아니라 노란 좁쌀을 따로 주면서 이건 따로 씻어서 잘 일어서 먼저 앉히고 쌀을 나중에 위에 안쳐서 네 시아버지는 따로 떠 드려라.
“예 어머니.”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좁쌀부터 씻어서 바가지로 세 번을 일어서 앉히고 다시 이남박에 쌀을 씻어서 뜨물을 받아서 노구솥에 두 번을 붓고 조리로 일어서 앉히고 다시 남은 것은 바가지로 세 번을 일어서 돌을 골라내고 앉히고 물을 맞추고 아궁이에 나무를 더 끌어넣고, 이번에는 간장을 부어서 간을 맞추고 무를 나박하게 썰어서 무국을 끓여서 상을 보아서 안방에 들이고 윤희도 안방에 앉아서 좁쌀이 반 이상 섞인 조밥을 먹기 시작 했는데 시아버지가 우지직 하면서 돌을 씹고 말았다.
윤희가 황망하여 몸 둘 바를 몰라 하는데 이번에는 재운이 또 우지직 하면서 돌을 씹었다.
시어머니 남순이
“모두 국에 말아서 먹어야 하겠다.”
그렇게 난감해 하면서 아침을 마치고 재명과 재운은 나무를 하러 가고 남순이 윤희를 불러서
“아가야.”
“예 어머니.”
“내가 아침에 잘 일러줄 걸, 좁쌀을 이를 때에는 더운물로 일어야 하는 거란다. 찬물에 이르면 아무리 잘 일어도 돌이 들어간단다.”
그랬다 아침에 씻을 때에는 더운물로 씻었는데 일을 때에는 더운물이 아까워서 찬물을 부어서 좁쌀을 일었는데 그게 원인 이었다.
그리고 그날도 점심을 아침에 해 놓은 조밥을 끓여서 내놓았는데 재명이가 상을 차리는 도중에 없어졌다.
점심이 끝나고 이제나 저제나 오려는가 하고 기다렸는데, 해가 노루꼬리 만큼 남았을 때 나뭇짐을 지고 들어왔다.
저런 점심을 안 먹은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재명이 윤희에게 내가 안 먹은 거 부인이 먹었으면 했다고 했을 때 고마운 마음에 몸 둘 바를 모르게 했다.
그리고 입 하나라도 줄여야 갰다며 광국은 산판일을 떠났고, 1월8일에는 이봉창의사가 도쿄에서 천황을 폭살시키려다 실패한 사쿠라다몬의거가 일어났다.
그런가 하면 재명만 그런 게 아니고 재운도 점심을 차리는 도중에 슬며시 사라졌다.
모두가 윤희가 더 먹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그걸 맘 편히 먹을 수는 없었다.
그런가 하면 하루돌이로 죽을 쑤어 먹는데 하루는 콩탕 하루는 팥죽 하루는 시래기죽을 쑤는데 사흘돌이로 콩을 담가서 맷돌에 갈아야 했는데, 처음에는 어처구니가 빠지기도 하니 남순이 같이 어처구니를 잡고 돌리는데 남순은 몸에 익어서 그런지 불은 콩을 국자로 잘 떠 넣으며 가는데 그걸 배우려고 시어머니가 없을 때 갈면서 떠 넣는 것을 한참을 시도한 끝에 혼자서 떠 넣으며 맷돌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둘이서 맞잡고 하는 맷돌질은 남순이 떠 넣는데 아무래도 배워야 할 것 같은데 만만한 막내 시동생 재덕이 괜찮아 보여서 남순이 잠깐 친정에 마을을 간 틈을 이용해
“도련님 이것 좀 같이 돌려주실래요.”
했더니 얼른 좋아 해서 둘이 어처구니를 잡고 돌리면서 한참을 시도 한 끝에 배울 수 있었는데, 고맙게도 맷돌을 함지박에 앉히면 그때마다 도와주려고 했는데, 윤희는 그때 마다 시어머니 눈치가 보여서
“작은 도련님 어머니 보시면 제가 ...”
했더니 다음에는 남순이 어디를 가면 도와주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막내 시동생 재덕은 몸에 배어서 그런지 잘 먹었는데 특히나 팥죽이나 콩죽을 쑬 때에는 솥 밑에 눌어붙은 누룽지를 긁어주면 좋아했다.
그러던 것이 팥죽은 손이 많이 가서 한번 쑤면 이틀 사흘 두고 먹는 데 죽을 덥히는 기색이 보이면 달려와 팥죽 더껑이를 건져서 달래서 떡처럼 먹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자 광국이 광목 한통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지난 초겨울에 입고나간 바지는 새털바지가 되어서 거지 중에 상거지가 되어서 돌아왔다.
광목은 콩짚을 땐 재에 물을 부어 잿물을 내려서 가마솥에 삶아서 표백을 해서 재운이 자배기를 지개에 얹어서 강가에 저다 주어서 윤희가 빨아서 강가 자갈밭에 널어서 말려서 들여다 풀을 먹이고 잘 당기고 개어서 다듬잇돌에 얹어 놓고 고부가 앉아서 다듬이 방망이로 박자를 맞춰가며 방망이질을 하는데 처음에는 박자가 안 맞아서 엉키기도 했지만 몇 번 만에 박자를 잘 맞추어 방망이질을 마지막 단계에 홍두깨에 말면서 재덕을 불렀다.
그리고 홍두깨에 감긴 광목을 방망이질을 하는 동안에 골고루 때리라고 홍두깨를 돌리는 일을 시키는데 한쪽은 돌리는 쪽으로 굴러가지 않게 남순이 발을 뻗어 발등으로 버티고 재덕은 돌리면서 고부가 방망이질을 한참 해서 다시 말려서 남순이 마름질을 하고 윤희가 바느질을 해서 옷을 지었다.
일제는 만주사변은 마무리 단계로 3월1일, 만주족의 후예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국가원수(집정, 후에 황제)로 하는,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조선인, 일본인의 오족협화로 이루어진 “만주인”에 의한 민족자결의 원칙에 기초에 둔 국민국가를 표방하는 만주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실제 통치는 1931년의 만주사변에 의해서 이 지역을 점령한 일본제국 육군의 주력부대 중 하나였던 관동군이 행함으로써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였다.
이어서 국제 연맹의 리튼 조사단은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정권이며, 만주 지역은 중화민국의 주권 아래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중화민국의 입장을 지지해 일본정부를 비난했다.
그것도 잠깐 온 누리에 봄기운이 돋고 새싹이 돋기 시작하자 남순이 산과 들을 다니며 나물을 캐 오거나 뜯어다가 삶아서 물에 우려내고 짜서 나물죽을 쑤어 먹으며 보릿고개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아버지, 남편. 열여섯 먹은 시동생 재운이 까지 일을 나가면 입을 덜어서 조금 나았다.
그리고 시어머니도 일을 핑계로 친정으로의 출타가 많았는데, 점심때가 되면 재덕이 밥을 한 덩이씩 가지고 돌아와서 내 놓으며
“아주머니 이거 잡수세요.”
“도련님은 요.”
“저는 형님 일하는 데서 먹었어요.”
그러나 윤희는 그걸 덥석 덥석 받아먹기가 죄스러웠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조금만 요기를 하고 방구리에 모아서 살강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비가 와서 일을 나가지 않는 날 점심으로 끓여서 내놓으려고 쏟았는데 이런 아래에 있던 밥이 삭아있었다.
삭은 밥은 따로 골라내고, 나머지 밥을 끓여서 내놓았는데 너무나 죄스럽고 밥을 버리는 것이 아깝고 벌 받을 것 같았다.
그래서 삭은 밥을 물에 헹궈서 다시 끓여서 먹으려고 냄새를 맡아보니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서, 호미를 들고 울타리 밑을 파고 묻었는데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는 게 커다란 죄를 지은 것 같았다.
그리고 윤희는 임신을 했고 입덧이 시작되어 엄청 고생을 했다.
4월29일에는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거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져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 등을 죽이고,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은 실명되었고,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은 다리 절단 중상을 당했으며,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절름발이가 되었다.
5월 15일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 도야마 미쓰루(頭山満), 타치바나 카지야, 미카미 다카시(三上卓) 등 11명이 극단적 우익단체인 혈맹단을 창단해 정당, 재벌 타도를 목표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해군 청년 장교 10명과 육군 사관후보생 11명, 그리고 민간 농본주의자 일파로 구성된 쿠데타군은 정우회 본부, 경시청, 일본은행 등을 습격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후 5시 반에 해군 중위 미카미 다쿠가 이끄는 해군사관 4명과 육군 사관생도 5명이 총리 관저를 침입했다.
이에 내각총리대신 이누카이 쓰요시 는 도망치라는 측근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쿠데타군과 대화를 시도하다가 뒤늦게 관저에 들어온 해군 소위 구로이와 이사무의 총에 맞아 암살되었다.
일본의 정당 정치는 군사 쿠데타인 5·15 사건으로 인해 사실상 끝을 맞이했다. 이후에 군부의 정계 진출이 이루어지면서, 재벌들은 군부를 지원하기 시작하였으며, 군국주의 사상의 강화로 인해 독일과 같은 국가사회주의 운동의 막이 올랐다.
1920년대까지 일본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사회주의 운동과 민주화 운동은 치안유지법을 제정하면서 모습을 감췄고, 상징적인 의미로만 존재했던 일본 천황을 절대 권력의 중심에 두면서 군부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나갔다.
이와 같은 군부의 영향력 확대는 1936년에 일어난 2·26 사건을 통해 입증되었다.
그런가 하면 7월 31일에는 독일에 나치가 총선거에서 제 1당이 되었다.
올 겨울도 어김없이 광국은 산판일을 나섰다.
그리고 그해 겨울 윤희는 딸을 옥인을 낳았다.
그런데 광국은 여느 해와 달리 좀 늦게 집에 도착했다.
연유를 물으니 사촌동생 형묵이 사는 물골안에 다녀왔다고 했는데 댓새를 묵어서 오면서 거지꼴을 해가지고 들어 왔는데 가만히 입이나 닫고 있었으면 괜찮았을 것을 물골안 형묵이가 부자고 산에 잣나무를 심느냐고 몇 칠 묵어서 왔다고 했다.
“그래 뭘 줬어요.”
“받긴 뭘 받아와.”
남순은 화가 났다.
나가서 하는 짓이라고는 잘사는 동생 내 가서 일만 해주고 왔는데 하다못해 옷이라도 깨끗이 해 입혀 보내던지 아니면 살림이 곤궁한걸 알면 노잣돈이라도 쥐어 보내지 않고 끓는 속을 삭였다.
1933년1월30일에는 히틀러가 독일 수상으로 취임을 했다.
지난 가을 부터 가물더니 봄내 가물어서 농사를 짓는데 애를 먹이더니 드디어 비가 오기 시작했는데 굉장히 많은 양의 비가 왔다.
광국은 재운을 불러서 은상이내 가서 밧줄 하나를 빌려오게 하였다.
그리고 집에 있는 바를 하나 준비해 강가에 버드나무에 끝을 묶었고, 은상이내서 빌려온 바도 딴 나무에 끝을 묶었다.
그리고 재운의 허리에 하나를 묶고 묶지 않은 하나를 어께에 걸고 흙탕물 소용돌이치는 강물 속으로 헤엄을 쳐 들어가 떠내려 오는 재목에 어께에 걸고 들어간 밧줄을 묶었다
강가에서 광국과 재명이 밧줄을 당겨서 재목들을 건져 올렸다.
재운은 어려서 부터 헤엄을 잘 쳤다.
밧줄을 당기는 일을 옆에서 돕던 재덕이 물가로 밀려오던 재목을 건지려고 들어가다가
광국으로 부터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그만큼 위험한 일인데 삼부자 아니 사 부자가 건져 올린 재목이 꽤 되어서 그해 가을 사랑채를 짓는데 쓰려고, 여름에 시간이 날 적마다 손질을 했다.
윤희가 집안일을 할 때에는 재덕이 옥인을 업어 줬다.
그러던 무더위가 한참인 여름날 재덕은 옥인을 업고 빨래 자배기를 인 윤희를 따라 강가로 따라 나섰다.
윤희가 한참을 빨래를 하고 있는데 동내에서 나온 아이들이 강가로 나와 멱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윤희가 재덕을 힐긋 보니 입이 튀어 나오고 화가나 있는 게 역역 했다.
더운데 멱도 못 감고 아이를 보는 게 싫어서 화가 나 있는 줄 알고,
“도련님, 더우실 텐데 옥인이 내가 업고 빨래 할 테니 가서 멱 감으실래요”
“안예요, 아주머니 저는 하나도 안 더워요.”
하며 손사래를 치며 물러나며 옥인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래서 부지런히 빨래를 하고 옥인을 받아 업고,
“도련님 이제 다 됐으니 멱 감으러 가세요.”
하고 빨래 자배기를 머리에 이고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재덕은 식 식 거리며 애들이 멱 감는 쪽으로 가서 애들이 벗어 놓은 옷들을 죄다 강물에 던져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애들이 깜짝 놀라 옷을 급히 들어가 건저 가지고 나오며 도망치는 재덕을 향해.
“야 너 거기 안서 잡히기만 해.”
“야 이놈들아 누가 남의 형수 앞에서 빨개 벗고 멱 감으래 네 놈들은 혼나야 해.”
하긴 젖은 옷은 입기도 불편 하거니와 빨개 벗고 동내로 들어 올 수도 없으니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쉽게 쫒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남순에게 서 꾸지람을 들었다.
그리고 가을걷이가 끝나고 사랑채를 세워놓고 나머지는 세 형제가 마무리를 하라고 하고 광국은 힘에 부치지만 산판일을 나갔고 남은 형제들은 사랑채를 짓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간내월에도 노다지 바람이 불어서 사금을 사 모으는 사람이 들어왔다.
농한기에 들어선 남자들이 강가에서 모래를 파서 작은 함지에 넣고 일어서 사금을 채취하는 일에 매달렸다.
재명이도 재운이도 모래를 일어서 두세 푼 많을 때에는 다섯 푼까지 금을 채취해 가지고 가면 저울에 달아서 좁쌀로 바꾸어 왔다.
느루 먹기는 좁쌀만 한 것이 없어서 매번 좁쌀로 바꾸어다 끼니를 해결하여 그해 겨울은 굶지 않고 보낼 수 있었다.
광국이 올해도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물골안에서 나무를 심느냐고 열흘을 넘게 있다가 왔다고 했다.
남순을 화가 났다
어린 것들이 살아 보겠다고 겨우내 손이 얼어 터져가며 모래를 뒤지고 언 강을 깨고 모래를 일어서 금을 채취해 먹고 살려고 고생을 한 것을 생각하면 화가 났다.
“그래 배부르고 등 따시니 좋습디까?”
“그게 뭔 소리여.”
“아니 열흘을 넘게 일을 해주고 왔으면 의관이라고 챙겨 보내지 바지는 새털바지 그대로, 거지꼴로 보내요. 그래 올해는 노잣돈이나 얻어 오셨소.”
“노잣돈은 뭐.”
하긴 줘도 덥석 못 받아올 위인이 광국이다.
그저 일가붙이라면 입에 있던 거라도 빼줄 위인이라는 것을 남순은 잘 알고 있었다
남순에게서 바가지를 긁히다 더 앉아 있어봐야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을 한 광국은 담뱃대에 담배를 꾸겨 넣고 부싯돌로 불을 붙여서 물고 마을을 갔다.
남순은 그게 다 땅 팔아서 시아버지 의병 할 때 주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니 화가 더욱 더 치밀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줬다는 그 뭔가 헝겊대기는 애지중지 하면서 하는 짓하고는 울화통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반다지 서랍에서, 흰 비단에 붉고 금빛 나는 진명주사로 쓴 고종황제의 임명장을 가지고 나와서 윤희가 저녁을 짓는 아궁이에 던져 버렸다.
고종황제의 임명장은 아궁이 속에서 꿈틀거리고 오그라들면서 타들어 갔고, 이내 머리카락 타는 냄새를 남기고 아주 작은 숯덩이가 빨갛게 마지막 불꽃을 피우는가 싶더니 이내 하얀 재가 되어 방고래 속으로 날아들어 갔다.
후련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겁이 났는데, 뒤돌아 부엌을 나오는데 재덕이 옥인을 업고보고 있었다.
“너 아버지한테 엄마가 아궁이에 넣었다고 하지 말라.”
“네 어머니.”
재명이 결혼시키기 전에 삼형제를 앉혀놓고 이게 고종황제가 할아버지께 내린 임명장이라며 보여주던 것이 생각이 났다.
한편으로 겁이 나고 후회도 됐지만, 그까짓 헝겊대기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제는 왜놈 세상이고 만약에 그걸 왜놈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애들한테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을 하니 잘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찌 되었거나 그해 봄 농번기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품팔이 하는 일꾼 품삯이 조금 올랐다.
하루 쌀 세 되씩 주고 사람을 하루 종일 일을 시킬 수 있었으나 그걸 받느니 강에서 모래를 일어서 금을 채취하는 게 났다는 사람이 생기자 닷 되로 올랐다.
가을걷이가 끝나갈 무렵에 올해도 광국은 산판일을 가기 전 아버지 유품을 한번 보려고 반닫이 안 서랍을 열고 아버지 유품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에 두었나 하고 다른 서랍을 열어보고 급기야 옷을 꺼내 흔들어 가며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자
“재덕아, 재운아, 제명아.”
하고 소리를 질러서 온 식구들이 모였다.
“너희들 할아버지 유품 못 봤냐?”
지난 봄 남순이 투덜대며 아궁이에 집어넣는 것을 본 윤희도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니 누가 아버지 유품을. 그게 어떤 건데 아이고, 아이고.”
광국은 체면이고 뭐고 없이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았다.
14년 전이나 20년 전 딸이 죽었을 때에도 그저 담담 하게 받아들이던 광국이 이번에는 그렇게 낙담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집안에 사람이 몇인데 돈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귀신이 곡하겠네. 왜들 대답들이 없어.”
하면서 서있는 식구들을 하나씩 훑어보는데 막내인 재덕에게 눈길이 멈추는 순간
“그거 어머니가 아궁이에...”
그 말이 체 끝나기도 전에 광국이
“이놈의 여편네가.”
하면서 벌떡 일어나 덤벼들었고 재명과 재운이 말리고 남순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에 얼른 친정 조카내로 내뺏고, 광국은 식식 거리다 제풀에 주저앉았으나 길게 한숨을 내쉬고 애꿎은 담배만 담뱃대에 꾸겨 넣고 부싯돌로 붙여서 뻑뻑 빨아 댔다.
그렇게 두 번을 피고 나니 화가 조금 가라 않는 듯 했다.
“아버님 저녁 차려 왔어요.”
하면서 슬금슬금 눈치를 봐가며 윤희가 밥상을 들여왔으나 도저히 밥을 먹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앞에서 저녁을 먹는 식구들도 고개를 숙인 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저녁을 마치고 재운이와 재덕이 연창이내로 남순을 찾으러 갔다.
“아버지 저녁 드시디.”
“아뇨.”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나 여기서 자고 갈 테니 그리 아라.”
“네.”
하기야 비가 그쳤다고 바로 나갈 수는 없고 완전히 갠 다음에 가야 나을 게 아니냐.
다음날 점심때가 지나서 남순이 돌아 왔으나 광국은 말 한마디 없었고, 남순 역시 말 한마디 붙이지 못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나는 동안에도 말을 않고 지내더니,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광국이
“어멈아 내일 산판일이나 떠나야 갰으니 그리 알아라.”
“예 아버님.”
다음날 광국은 아침을 일찍 먹고 윤희가 싸준 주먹밥을 들고 인제로 떠났다.
그리고 삼형제는 강가에서 함지를 가지고 가서 사금을 채취하는 일에 매달리던 섣달 몸씨 추운 날 그날도 재운은 모래를 함지박에 일고 재명이 밭이 포락이 된 곳이 땅이 조금 덜 얼어서 파기가 좋아서 땅을 파서 어렝이에 담아주면 재덕이 날라다 주면 재운에게 갖다 주었다.
재운은 열심히 일어서 마지막 얼마 남지 않은 모래 속을 살펴보았다.
반짝이는 게 유난히 많았다. 얼추 보아도 두 푼이 넘어 보였다.
재덕이 세 어렝이를 갖다 주었는데 두 푼이 넘게 나오다니 가슴이 뛰었다.
여느 때는 열 어렝이 좀 일어야 나올 수 있는 양인데 힐긋 땅을 파고 있는 형님 재명을 보니 분명 밭 아래 사태밥이 이었다.
그러는 사이 재덕이 가지고 흙이 다시 함지박에 부어졌다.
재운은 다시 일면서 생각해 봤다. 이게 바로 노다지라는 거구나 그렇다 소문이 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저 밭 전체를 사자 그리고 금을 캐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재덕이 또 한 어렝이를 가지고 왔다.
순간 재운은 다 일어가던 흙을 강물에 휙 던져 버리며.
“추운데 괜히 고생만 했다.”
하면서 일어나면서.
“형님 오늘은 추운데 그만 하고 갑시다.”
하면서 함지를 씻어서 들고 집으로 가기를 재촉했다.
집으로 들어온 삼형제는 언 손을 아랫목 이불속에 넣고 녹이면서 재운이 입을 열었다.
“형님 노다지요 노다지,”
“그래?”
“노다지가 분명해요. 그래서 말씀인데 우리 그 땅을 삽시다.”
“어떻게?”
“우리 저녁 먹고 금방이 끝난 시간 쯤 되서 가서 돈을 비려달라고 하고 돈을 빌려서 작은 외삼촌에게 사달라고 하면 어때요.”
“그래 그게 좋겠다.”
그러고 보면 이재에는 재운이가 재명이보다 나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남순에게 재운이
“어머니 이일을 아무 에게도 발설 하면 안 돼요.”
재운이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다.
“재덕이 너 이말 어디 에서도 한마디라도 하지 마라라.”
“네.”
저녁을 먹고 재명과 재운이 금방에 간 사이 남순은 재덕에게 다시 한 번 다짐을 놓았다.
“아까 형 말 명심해야 한다, 알았어?”
“예.”
하긴 지난번 임명장 소각할 때도 입을 다물고 있다가 광국이 채근을 하니 마지못해 입을 열지 않았던가.
한편 금방에 도착한 재명과 재운은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남폿불이 환하게 켜진 점방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래 오늘은 얼마나 가지고 오셨나.”
두 형제가 머뭇머뭇 하며 말을 꺼내지 못하자
“그럼 오늘은 선불로 좁쌀 한포 드릴까, 두 포를 드릴까.”
하면서 두 형제의 눈치를 살폈다.
아마 금 채취를 못해서 좁쌀을 미리 선불로 좀 줄 수 없느냐는 부탁을 하러 온 것으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재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염 사장님, 다름이 아니고 돈 좀 빌렸으면 해서요.”
“얼마나?”
“한 칠십 원 정도....”
아니 일이 원도 아니고 쌀 일곱 가마 값이나 빌려 달라는 것은?
“아니 노다지?”
형제는 고개를 끄떡였다.
염 사장은 장사꾼이라 그런지 눈치가 빨랐다.
“그럼 내가 우선 십 원을 빌려 줄 테니 계약을 하고 이삼일 내에 나머지를 해 줄 테니 그 때 까지 비밀로 하세.”
그리고 염 사장을 제 빠르게 계산부터 했다 내가 직접 해봐야 그렇겠고 나야 금 장사만 잘 하면 한 몫 단단히 볼 텐데.
그렇게 십 원을 빌려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다음날 조반을 마치기가 무섭게 형제는 남순과 함께 제동의 집으로 찾아가 재명이가 들어가고 그 다음 재운이 들어가고 남순이 따라 들어갔다.
아무리 친정이라도 아침부터 아낙이 대문에 먼저 들어가는 것을 삼가던 시절이었다.
막내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자라서 제동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오라버니 개용개 아래 강가에 있는 은상이네 밭을 우리가 샀으면 하는 데 오라버니가 산다고 하시고 팔 의향이 있나 알아보고 사주 세요.”
“돈은 있는 게냐?”
“그건 걱정 마시고 알아만 봐 주세요. 꼭 사야 되요.”
“알았다, 괜히 가오리흥정이나 되지 않을 런지 모르겠다만 서도.”
“없는 우리가 산다면 그럴 수 있지만 그래도 오라버니가 산다고 하면 의심하지 않을 거 아니에요.”
“알았다. 뭐 봐 둔거라도 있나 매부도 없는데 땅을 산다고 하니..”
“옥인 아범이 노다지를 보았데요. 그러니 오라버니만 아시고 사주 세요.”
“알았다, 알았어.”
“그럼 오라버니만 믿고 갈게요.”
그날 제동은 먼 촌 동생 벌 되는 제중이를 찾아가 밭을 사겠다고 하자.
“글쎄요.”
하면서 머리를 극적이며 쉽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재동이의 집에서 가까이 있는 것이라면 모르겠는데 줌 떨어진 곳이고 곡식을 심어먹기 좋은 곳이라면 모를까 개피나 수수 기장이나 심어 먹는 밭을 사자고 하니 이건 좋아해야 할지 싫다고 해야지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잘 생각해 보게나.”
“알았어요, 형님.”
제동이 돌아간 후 제중은 생각을 해 봤다.
그렇지 않아도 쉬 골에서 개용개 밭까지는 좀 멀어서 힘이 들어서 어디 대토라도 있으면 개비를 했으면 했는데 재동이 형이 그 밭을 왜 사려고 할까?
우리 집에서나 재동 형 집에서 나 거리가 비슷한데 혹 재명이네라면 모를까?
재명이내 사주려고 그러나 재명이내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는데.
그날은 그렇게 운을 떼 놓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 다시 재명이 제동의 집을 찾았다.
“은상이내 밭 어떻게 됐어요.”
“내가 운은 떼 놓긴 했는데 그 사람도 생각을 해보겠다고 했는데, 아마 대토가 생기기 전에는 힘들 것 같은데, 누가 쉬골에 내놓은 전답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작은 외숙이 가지고 있는 논 한 배미를 놓으라고 하면 안 될까요. 달랑 한 배미만 있어서 불편해서 판다고 하면 어떻게 안 될는지?”
“그럼 작은 삼촌에게 부탁을 해보려무나.”
그길로 재명이 작은 외숙에게 찾아가 부탁을 하자, 제남은
“그러지 말고 너의 논하고 맛 바꾸자고 하는 게 어떻겠니? 식구도 늘고 해서 아무래도 쌀 보다 수수 기장을 심어서 소출이 많이 나는 밭이 필요할 것 같아서 산다고 해라 무리를 해서라고 평수가 많은 것을 산다고 하면 수긍이 갈 것 아니냐.”
“그게 나을는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하는 게 나을게다. 은상이내야 그 밭 말고도 좋은 밭이 많으니 웬만하면 잘 될 거다.”
다음날 다시 제동이 제중이를 찾아서 이야기를 했다.
“기실은 내가 사려는 게 아니고 재명이내 사주려고 하는데 식구도 늘어나고 해서 밭농사라도 늘였으며 해서 무리를 해서라도 사고 싶다고 해서 내가 돈을 꿔 주더라도 사주고 싶어서 그러네.”
“그럼 그렇지 형님이 그 밭이 필요하리라고는 생각 들지 않아서 의야 했었어요.”
“정이 팔기 싫다 면이야 할 수 없지만 재명이네 샘물 구덩이 앞에 논을 바꾸고 웃전을 더 주면 안 될까?”
“그럼 얼마나 처 주실 런지?”
“아 논 값이야 시세가 나와 있는 게 아닌 가 한 평에 한말 을 잡아서 삼 백 평이니까
66원 이면 되고 자내 밭을 얼마나 받을지가 관건이 아닌가?”
“우리 밭은 아무래도 평당 닷 되는 쳐 주시면 안 될까요?”
“에이 이 사람아 간내월에 상 전 이라고 치는 밭이라야 평당 닷 되 치는데 누가 자내 밭을 닷 되 씩이나 주고 사나?”
“재명이내 논도 상답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 그 논이야 샘 물 구덩이 바로 앞에 있어서 웬만하면 물 걱정 안하고 그 밑에 논은 고래실논인데 그게 상답이 아니면 그만한 상답을 어디에 찾나?”
“그럼 우리 밭을 90원 치고 재명이내 논은 60원 치면 안 될 까요?”
“그러지 말고 자내 밭을 70원 치고 재명이네 논을 55원 처서 계약을 하세.”
“서로 깍지 말고 웃돈으로 25원만 더 주세요.”
“그럼 이렇게 하세 아까 웃돈은 15원 아닌 가 딱 중간인 20원 어떤가, 논도 자내 집에서 가깝고, 자네가 훨씬 이득 아닌가?”
“그래도 좀.”
“아 자내야 괜찮은 그 묵밭은 임자 나왔을 때 파는 게 상책이네.”
하긴 그랬다 어떻게 된 밭이 질어서 보리가 패서 여물 무렵에 비라고 한축 오면 골보리가 되어서 씨앗 건지기도 힘들어 봄에 강피나 갈던지 철놓치면 기장이나 붙이려고 했는데 잘된 일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죠.”
그렇게 해서 재명이를 불러서 그 자리에서 교환계약을 쓰고 웃돈도 먼저 10원을 주고 나머지 10원은 보름 후에 주기로 하고 계약을 끝냈다.
다음 날부터 삼형제는 사금 채취하는 일에 매달렸다.
매일 사금을 한 돈 이상 씩 채취를 해서 미리 빌린 돈을 10원을 다 갚았다.
그리고 10원을 다시 빌려서 잔금을 치루고 나서 노다지를 발견했다는 소문을 냈다.
그리고 염사장이 불러온 사람, 인근에서 소문을 듣고 온 사람 해서 오십 명이 넘게 간내월에 모여 들었고, 영린의 제사를 지내러 온 광국도 그동안의 사연을 듣고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런 복을 주셨구나 하고 기뻐하였고 산판일에 다시 나설 이유가 없어져서 집에 눌러 앉았다.
그리고 채굴권을 파는데 줄을 가지고 재서 평당 한 가마에서 세 가마 값을 받고 팔고 재운은 덕대가 되어서 모두가 김 덕대 김 덕대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재덕은 작은 덕대 작은 덕대 그렇게 불렸는데 그게 무슨 벼슬인양 좋아 했다.
그렇게 새해가 시작되고 외지에서 노다지의 꿈을 찾아 들락 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품삯도 많이 올라서 하루 한 말은 주어야 사람을 살 수 있었다.
그해 여름 올망졸망한 열두서너 살짜리 애들이 강가에서 멱 감고 놀다가 한 녀석이 제안을 했다
“오늘 밤에 참외 서리 하자.”
“누구 네 연진내?
“그래.”
“연진이 한 테는 비밀이다.”
“그럼 이따가 저녁 먹고 멱 감으러 나와서 만나자.”
그날 저녁을 먹은 아이들이 대여섯 명 모였다.
거기에는 연진이도 있었다.
“연진아 너는 옷 지키고 있어 우리가 강 건너가서 참외 서리 해올 깨.”
“아냐 나도 갈래.”
했지만 여럿이 옷을 지키라는 여론에 밀려서 연진을 옷을 지키게 되었고, 재덕이가
“연학이 하고 나하고 둘이 가서 사다리 묶은 칡을 두 칸을 칼로 그어 놓을 테니 그 때 부터 참외를 따오는 거다.”
그리고 연학이와 재덕이는 원두막으로 가서 키 높이에 있는 사다리를 묶은 칡, 두 칸을 칼로 그었다.
그 당시에는 못도 귀했지만 못을 원두막을 지을 때 못을 박으면 참외나 수박이 썩는다는 속설이 있어서 칡을 끊어다 묶어서 원두막을 지었다.
이윽고 대 여섯 놈이 참외를 따는데,
“누구냐?”
하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조금 후 아이쿠 쿵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고, 아이고 허리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킥 킥 거리며 참외를 서너 개씩 따가지고 강가에 모여 앉아서 먹었다.
내용을 모르는 연진이는 같이 맛있게 참외를 먹었다.
내 것도 훔쳐 먹는 게 제일 맛있는 모양이었다.
다음날 연진이가 “울 할아버지 허리 다처서 큰일 났어.”
누군가
“큰일 나면 떡 해 먹지.” 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참외 넝쿨을 걷는 날, 그날은 동내아이들을 모아놓고 밭에서 딴 참외를 싫건 먹게 하는 풍속이 있다
연진 할아버지는 애들을 보고 물어 본다 누가 우리 밭에 와서 참외서리 해갔니 물으셨다.
“강 건너 애들이 했겠죠.”
“아이고 내가 허리를 다쳐서 한 달을 넘게 고생을 했는데 어떤 녀석들이 했는지?”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나와서 웃었지만 어린 철부지들의 서리라는 놀이가 사람을 다치게 했어도 그냥 그렇게 넘어가는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광국은 금전판을 벌린 덕에 그해 가을 나오는 전답을 사들여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을 만큼 터수가 되었고, 염사장도 한 몫 단단히 챙겼다.
그리고 윤희의 할아버지 계멱이 돌아가서 광국과 재명이 다녀왔다.
윤희는 도저히 갈 엄두를 못 내고 집에 있어야만 했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화재거리는 서울에서 활동사진 춘향전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젠 변사가 이야기를 하는 게 하니라 활동사진이 말을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가 바뀌어 1936년 2월 26일 새벽 구 일본군의 보수적 파벌중 하나인 황도파의 영향을 받은 일부 청년 장교들(20대의 대위부터 소위가 중심)은 일본 천황의 친정(쇼와유신) 등을 명분으로, 원로중신들을 죽이고 천황친정이 실현되면 정·재계의 부정부패나 농촌의 곤궁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근위 보병 제 3연대, 보병 제 1연대, 보병 제 3연대, 야전 중포병 제 7연대 등의 부대를 이끌고 2월 26일 새벽에 궐기하였으나, 이들의 군사반란은 오래 가지 못했다.
2월 27일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28일에는 일본 천황에 의한 원대복귀 명령이 내려졌다.
반란군은 천황 친정을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고 있었는데, 천황이 복귀 명령을 내리자 반란의 근거를 잃은 이들은 부사관과 병들을 원대 복귀시키고 일부는 자결하고 일부는 투항하여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3월 7일에는 나치 독일이 로카르노 조약파기하고, 라인란트 진주했다.
이로서 나치 독일은 안전핀을 뽑고 서서히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간내월에서는 윤희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용동이라고 지었다
광국 부부는 기뻐서 연인 입이 귀에 걸렸고 금전판도 잘 돌아갔다.
7월17일에는 2차 대전의 전초전인 에스파니아 내전이 시작 되었다.
그리고 석 달 뒤 10월 나치독일과 이탈리아가 조약을 체결 하고 11월 2일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가 베르린 로마 주축을 선언했다.
이어서 25일에는 나치독일과 일제가 반공 협정을 체결했다.
본격적인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근거지를 잃은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의탁하였고, 장제스는 장쉐량을 중국 중부지방에서 동북군(만주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홍군과의 국공내전의 부사령관으로 삼았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장정으로 옌안을 수도로 하여 동북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장쉐량 휘하의 동북군은 고향인 만주를 일본에 빼앗긴 상태여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많았고 홍군과의 의미 없는 소모전에 지쳐있었다.
특히 홍군은 동북군 포로들에게 '진짜 적은 같은 중국인인 홍군이 아니라 만주를 침탈한 일본군이라'는 지속적인 "항일선전"을 폈고 이들을 석방시켜 다시 동북군으로 돌아오자 동북군 사이에는 항일에 대한 요구가 점점 커지게 되었다.
장쉐량 자신도 홍군과의 접촉을 통해 좌익의 영향을 받았고 대 일본 전쟁에 소극적인 장제스의 난징정부의 "선 통일, 후 저항" 정책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1936년 초 장쉐량의 동북군은 홍군과 비밀리에 접촉을 갖고 서로 적대적인 행위를 중지하고 일본과 항쟁하는 통일전선을 구축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장쉐량은 만주시절부터 내려오던 동북군 장교단을 젊고 진보적인 좌파로 채우고 공산군과의 접촉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접촉은 장제스의 난징정부에는 철저한 비밀리에 이루어진 것이다.
장제스는 중국군 총사령관 및 행정직 주석직도 겸하고 있었고, 장쉐량은 동북군의 원수로 점차 두 사람사이의 긴장은 커지고 있었다.
반일감정이 고조된 서북지역의 민심을 뒤로 한 채 장제스는 공산군 토벌에만 몰두하였고 이에 소극적인 동북군을 점차 신뢰하지 않고 직접 난징의 군대를 동원하여 대규모 홍군토벌을 준비하였다.
10월 장제스는 직접 시안을 방문하여 동북군의 공산군 토벌을 독려하였으나 동북군의 젊은 장교들은 대 일본 통일전선 수립 및 소련과의 동맹 및 내전 종식을 요구하였다.
장쉐량도 장제스에게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과의 항전을 거듭 촉구했으나 총통은 듣지 않았다.
11월 21일 동북군을 대체하여 공산군 토벌에 나선 난징 국민당군제1군이 홍군에게 참패를 당하자 장제스는 직접 시안으로 날아가 반드시 홍군을 분쇄하고자 하는 결의를 다졌다.
12월 7일 장제스는 공산군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전용기편으로 직접 시안에 도착하였다. 동북군 지휘관들은 다시 한 번 장총통에게 항일전을 촉구하였으나 거절당했고 양호성(楊虎城) 장군 휘하의 4만 명의 서북군도 더 이상 홍군과의 소모전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동북군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12월 9일에는 수천 명의 학생들이 반일시위를 벌였는데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장제스의 헌병대가 발포, 두 명의 동북군 지휘관의 자식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장쉐량이 중간에서 성난 학생군중을 무마하여 더 이상 큰 사건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장제스는 제6차 홍군토벌전 계획을 발표하고 총동원령이 임박하였음을 알렸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경질하고 토벌군사령관을 교체할 계획을 세웠고 장제스의 친위병력인 남의사(藍衣社)는 항일을 주장하는 동북군 장교에 대한 블랙리스트까지 작성 동북군의 핵심세력을 제거하고 공산군 토벌에 찬성하는 장군들로 대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2월11일 밤 10시 장쉐량은 동북군, 서북군의 합동사단장회의를 소집하고 본격적인 반란에 돌입하였다. 동북군 1개사단과 서북군 1개연대를 시안 외곽을 이동하라는 비밀명령이 떨어지고 총통과 그 참모진을 '체포'하기로 결정되었다.
12월12일 동북군과 서북군의 반란군은 오전 6시까지 시안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고 국민당군 참모부와 남의사 요원들은 구금상태로 들어갔다.
장제스 총통은 시안에서 16km정도 떨어진 온천휴양지 임동(臨潼)에 머물고 있었는데 새벽 3시 장쉐량의 부하들이 장제스의 호텔을 급습하여 약간의 유혈사태를 치른 후에 잠옷 바람에 맨발로 도망친 총통을 야산에서 발견 체포하였다.
반란에 성공한 직후 동북군과 서북군은 다음과 같은 8개의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1. 난징정부를 개편하고 모든 정파를 참여시켜서 구국의 공동책임은 분담케 할 것.
1. 내전을 전면적으로 즉각 중지하고 "무력항일 정책"을 채택할 것.
1. 상하이의 애국운동 지도자들을 석방할 것.
1. 모든 정치범을 사면할 것.
1. 인민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1. 애국적 단체를 조직할 인민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것.
1. 쑨원 박사의 유지(遺志)를 이행할 것.
1. 전국구국회의를 즉각 소집할 것.
이 요구 조건에 대하여 중국 공산당과 중화소비에트 정부, 홍군은 즉각 찬성을 표시하고 공산당 대표들이 시안으로 날아왔고 공동항일투쟁 의사를 발표하였다.
12월 14일에는 동북군 약 13만 명, 서북군 4만 명, 홍군 9만 명으로 구성된 "항일연합군"이 구성되고 장쉐량이 연합군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홍군과의 전투명령은 즉각 중지되었고 항일연합군은 새로운 전열을 가다듬고 일본과 전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는 국민당의 사전검열로 서북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일체 보도되지 않았고 장쉐량은 그저 반란군으로 묘사될 뿐이었다.
난징의 국민당 정부는 총통의 체포와 구금사실을 철저하게 숨기고 서북지역의 반란군을 응징할 준비를 하였고 이는 난징정부의 내부권력 투쟁양상으로 번지게 되었다.
구금되어 있는 동안 장제스는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와 면담을 가졌고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링을 비롯한 난징정부의 대표단이 시안으로 날아와 막후협상을 벌였다.
대다수 동북군 장교들은 장제스를 '인민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산당 및 다른 온건파들은 장제스가 그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어야만 10년간의 국공내전이 종식되고 위신이 깎이지 않은 채 난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제스의 실각이나 죽음은 또 다른 내전의 빌미가 되고 결국 일본만 이득을 본다는 것이다.
동북군의 젊은 청년장교단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 8개 요구 항에 대한 문서 서명 확인 없이 12월 25일 석방되었다.
반란군, 공산당과 난징 정부 대표들 사이에 정확하게 어떠한 합의가 도출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장제스는 더 이상 내전이 없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보장했고 장쉐량이 제공한 비행기 편으로 난징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이때 장제스의 체면은 손상하지 않기 위해 장쉐량 자신도 함께 난징으로 가서 스스로 반란에 대한 처벌을 기다렸다.
시안 사건 발생이후 3개월간 중국내 정세는 180도 선회하게 되었다.
장쉐량은 난징에서 총통에게 스스로 처벌을 요청하였고 12월 31일 군사법정에서 10년 금고형과 5년간의 공민권 박탈을 선고 받았으나 다음날로 장제스의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 다시는 동북군이나 어떠한 군사권도 갖지 못했고 사실상 장제스의 포로로 1950년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도주할 때도 데려갔으며 타이완에서도 오랫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있었으며 시안 사건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장제스는 반란을 막지 못한 무능을 탓하며 사의를 표명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는 사실상 정치적 연극에 불과했다.) 이후 국민당 정권내 대대적인 '친일파관료들의 숙청이 이루어졌고 그 자리는 '구미파(歐美派)'로 채워졌다.
이어 열린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형식적으로 반란군의 8개항을 거부했으나 국가의 당면한 최대의 문제는 "공산당 축출과 통일"이 아니라 "실지회복"임을 결의했다.
또한 장제스가 오랫동안 연기해온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것을 결의하고 조속히 민주제도를 도입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정치적 발언과 언론의 자유를 선포하고 정치범을 석방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공산당에는 4개항의 화평조건을 제시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홍군을 해체하고 국가의 단일 군사력(국민당군) 아래 편입할 것.
1. '소비에트 공화국'을 해체할 것.
1. 쑨원 박사의 "삼민주의"와 배치되는 공산주의 선전활동을 중지할 것.
1. 계급투쟁을 포기할 것.
이러한 요구조건을 제시하면서 난징정부는 반란군의 요구사항과 공산당의 '협력'제안을 거부하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교묘하게 반란군의 8대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는 책략을 썼다.
이러한 정책은 난징정부 내에서도 강경파의 반발이 있었지만 장제스는 유화정책 강행하였고 2월에는 교묘하게 동북군을 이동시키고 서북군을 국민당군으로 편입시키고 3월에는 서북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으며 이후 서북지역을 장악한 상태에서 공산당과 협상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용동이의 첫돌 잔치가 있었다.
광국은 돼지를 한 마리 잡고 술도 빚고 떡을 하고 해서 금전판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불렀다.
색동옷에 복건을 쓴 용동이의 목에는 실타래와 복주머니가 걸렸다.
돌잔치가 끝나고 남순이 복주머니를 열어보니 20원이 넘는 돈이 들어 있었다.
그렇게 광국의 터수는 나아지고 있었다.
광국은 모은 돈으로 상답을 사들여서 이제는 부자소리를 들을 만큼 되었다.
시안 사건이후 조용하던 중국에서는 칠칠사변(루거우차오 시벤)이 일어났다.
루거우차오는The Marco Polo Bridge Incident(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 또는Battle of Lugou Bridge(루거우 다리 전투) 일본 명칭은 노구교사건, 라고도 부르는데 이 다리는 전략적으로 베이징과 연결되는 중요한 거점으로 사건발발 당시 일본군은 서쪽을, 국민당군은 동쪽을 관할하고 있었다.
당시 이 부근에 주둔한 군대는 국민혁명군 쑹저위안의 29군이었고 일본군은 카니치로 타시로가 지휘하는 중국주둔군이었다. 양 군은 서로 다리를 놓고 대치하고 있었다.
7월 7일 야간 훈련 중이던 일본군 중대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일본군 병사 1명이 행방불명이 되는 일이 발생했다.
행방불명되었던 일본군병사는 20분 뒤에 부대로 복귀했으나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중국 주둔지역으로 일본군을 보내 수색하겠다고 요청하였고 중국군은 거절하였다.
일본군은 곧 전투태세에 들어가 다음날인 8일 새벽 중국군 진지에 포격을 시작하고 공격하여 루거우차오를 점령했다.
양측이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11일 새벽 일단 현지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일본군은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 국민당은 베이징 내의 모든 반일단체를 일소하고 반일활동을 중지할 것.
* 국민당은 7월 7일 사건의 모든 책임을 질 것.
* 쑹저위안 등 29군의 고위 장교들은 반드시 사과할 것.
이 같은 조건을 내걸고 현지에서 협상이 벌어지는 동안 일본 본국의 제1차 고노에 내각은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침략을 가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이 ‘중국 측의 계획적인 무력 사용’이라고 단정하고 중국에 전면적인 파병을 발표했다.
일본군과 협상은 결렬되고 곧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여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다급해진 중국정부도 8월21일에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였고, 일제는 준비된 각본대로 22일에는 경성에서 등화관제 훈련을 실시하였다.
중국군은 기계화 병력인 일본군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베이징은 8월 29일에, 다음날은 톈진이 함락되었다.
이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화민국과 일본의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 되었고 중국내 반일감정은 더욱 거세졌다.
국민당은 공산군과의 내전을 종식하고 함께 대(對)일본 항전에 들어갔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20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윤덕영의 부인 김복수가 회장이 되어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를 결성했다.
이 단체에는 조선귀족인 민병석, 이윤용 등 친일 세력의 부인들과 김활란, 고황경, 송금선, 유각경 등 신교육을 받은 여성계 인사들이 참가했다.
이날 열린 결성식에서 금비녀를 비롯한 장신구와 현금을 즉석에서 모아 국방헌금으로 헌납하였고, 이 광경은 동양화가 김은호가 〈금차봉납도〉라는 그림으로 묘사했다.
설립 목적은 일본군의 중일전쟁 수행을 지원하기 위한 국방헌금의 조달과 원호 그리고, 출정하는 일본군을 위한 환송연을 열고 참전한 병사의 가정을 위문하거나 조문하는 기능도 있었다.
전쟁초기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 수뇌부들은 '2~3개월 정도면 중국대륙 전역을 점령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8월에 상하이에 상륙해 공략을 시작했는데, 상하이에서의 중국군의 저항은 매우 격렬했다.
그러나 연일 승전했다는 보도가 계속 되었다.
특히 '오송 상륙 전투'에서 일본군은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1930년대 초 중국내 독일 군사고문으로 파견된 팔켄하우젠 장군과 젝트 장군이 강력한 벙커밭을 조성하였고, 장제스의 직속군대 역시 독일식 장비를 갖추고 독일 군사고문의 조언대로 훈련 받으면서 육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이러한 벙커밭을 뚫기 위해 돌진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또한 독일식으로 훈련받은 장제스의 직속군대의 정예 제88사단은 일본군의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일본군 상륙부대를 상하이에 묶어 놓고, 매우 격렬하게 저항했다.
일본군은 3개월 동안의 전투 끝에 지원부대가 증강되면서 11월 5일에 이르러 겨우 상하이를 점령하였다.
상하이 전투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고 전쟁이 장기화 되어가자, 일본군은 적개심에 불타 무고한 양민들을 잔인하게 죽이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일본군은 가는 곳마다 태우고, 빼앗고, 죽이는 이른바 '삼광작전'을 개시하면서 살육전이 일반화 되어 갔다.
1937년12월, 상하이 교두보를 벗어난 일본군은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으로 향했다.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격할 즈음, 중국 국민당은 수도 난징을 포기하고 충칭으로 임시 천도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 측 사령관 탕셩즈(唐生智) 장군은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도를 지키겠다.' 고 선언한다.
그러나 난징을 삼면에서 좁혀 들어오는 일본군의 포위 속에 국민당 주요관리와 부유층들은 재빨리 손을 써서 도시를 빠져나갔고, 중일전쟁 발발 이전에 약 110만 명 육박했던 난징은 도시를 빠져 나가려는 시민들과 일본군을 피해 난징으로 들어오는 피난민 등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었다.
난징성을 포위한 일본군은 탕셩즈에게 투항을 권고하였으나, 난징성을 지키고 있던 탕셩즈 휘하의 중화민국 군인들은 투항을 거부했다.
난징에 남아 수성하고 있던 탕셩즈의 군대들은 도시 밖 요충지를 포기하고 난징성 안에 머무르며 고립된 채 방어하겠다는 전략을 택했다.
12월13일, 일본군은 난징성을 점령하고 성 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난징성을 방어하고 있던 탕셩즈 휘하의 군대는 약 15만명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무너졌다.
이는 중국군의 흐트러진 군기와 지휘관들의 부재 및 무능함에서 비롯되었다.
중국군은 제대로 전투도 못해 본 채 혼란 속에서 성을 빠져나가기에 급급했다.
난징성이 함락되기 전날,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자신의 휘하 부대와 난징 성에 고립된 민간인들을 뒤로 한 채, 양쯔 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망쳤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피난을 떠나지 못한 채 남아있던 약 60만명의 난징 시민들과 군인들은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1937년 12월 13일부터 약 6주 동안 일본군은 중국 민간인들과 군인들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살육, 방화, 강간 등을 자행했다.
매체에서는 승전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그해에는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일본의 국력이 강해지자 일본인과 비슷해 보이는 황인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일본의 도움으로 만주국이 독립하자 본래 만주민족의 땅인 연해주에 대한 영토반환 분쟁을 대비해 1937년부터 시베리아, 연해주 등에 살고 있던 모든 황인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수많은 동양인들 희생되었다.
특히 일제를 피해 시베리아와 연해주에 망명한 한인들 또한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이는 스탈린이 시베리아와 연해주, 사할린 섬 등에 대한 영유권을 공고히 하여 만주국과 일본, 중국과 의 영토분쟁을 피하려는 속셈이 숨어있었다.
첫댓글 노다지 노터치에서 왔다는 말이 맞는지 모르지만 노래 까지 있는걸 보면 아마 금본위 아니 금은 로망이었는데 아 금을 채취해 연명을 한 시절도 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