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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 묵시록의 말씀 7,2-4.9-14>
나 요한은
2 다른 한 천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땅과 바다를 해칠 권한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3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
4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9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0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
11 그러자 모든 천사가 어좌와 원로들과 네 생물 둘레에 서 있다가, 어좌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느님께 경배하며
12 말하였습니다.
“아멘.
우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영예와 권능과 힘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13 그때에 원로 가운데 하나가,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원로님, 원로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 제2독서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요한 1서의 말씀 3,1-3>
사랑하는 여러분,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 복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기도의 지향에 따라 성인도 되고 악마도 된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특별히 일 년 동안 지켜주시고 기도해주신 저희 자신들의 주보 성인께 감사드립시다.
오늘 복음은 진복팔단입니다.
성인은 행복하신 분들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행복하려면 마음이 가난해야 하고, 슬퍼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며, 의로움에 주려야 하고, 자비로워야 하며, 마음이 깨끗해야 하고, 평화를 이루고, 박해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의 단어로 통합하자면 ‘어린이’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마태 18,4)
영성이란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일을 말합니다.
주님께 더욱 나아갈수록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기도’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기도가 그 사람을 더 큰 어른으로, 더 하느님과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한 번은 본당에 있을 때 사목회 위원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물론 누구인지 알게 하지 않기 위해 구체적인 인적사항은 바꾸었습니다.)
약속도 하지 않고 와서는 신부님을 꼭 만나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전화를 받고 어쩔 수 없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상담을 위해 내려갔습니다.
그 형제의 얼굴은 화가 잔뜩 나 있는 듯했습니다.
아들에게 화가 나 있었습니다.
사실 모든 것에 화가 나 있는 듯도 했습니다.
저를 찾아온 이유는 나중에 아들과 면담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재수생인데 그 착했던 아들이 어느 날부터 반항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봐도 말도 안 하고 문을 걸어 잠그기도 합니다.
언제부턴가 학원도 빠지고 방에서 게임만 합니다.
게임 하느라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문을 꽝 닫아버리길래 키보드를 부신 적도 있습니다.
심지어 그날은 잔소리 좀 했더니 아버지 앞에서 거울을 주먹으로 쳐서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손에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성당에서 복사도 하고 착실했던 아이가 그렇게 되어서 신부님이 말씀하시면 들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십계명에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이 있으니 말입니다.
아버지는 본당에서 열심한 신자입니다.
성경도 1년에 1번 이상은 통독하는 분이고 묵주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세상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수억의 연봉을 받는 사람이었고 엘리트 코스만 밟아온 사람입니다.
그 아이의 형은 그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형도 전교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일류대 의대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이 문제입니다.
그분은 기도하는 중에 환시와 같은 것을 본다고 했습니다.
성당에 앉아있으면 예수님께서 나타나 위로도 해 주시고 미래의 이런저런 일을 알려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하면 하는 일도 잘 풀리는 기적을 많이 겪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성공한 것은 순전히 기도 덕분인데 둘째 아들을 위한 기도만은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부터 이분의 영성이 의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형제는 자신의 세속적인 것들을 기도로 채우고 심지어 기도로 자신도 커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기도를 잘해서 가정이 이만큼이나 사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현재 상황이 안 좋아진 것도 자신이 그런 환시를 따르지 않은 벌이라고 여겼습니다.
일단 저는 아들에게 무슨 잘못한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마 비싼 고시원에 넣어달라고 했는데 형 등록금 때문에 안 된다고 한 것에 화가 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지금 아파트를 더 큰 곳으로 옮기고 사업을 확장하느라 빚까지 져서 조금 돈이 달리는 때인데, 공부도 못하는 아들이 너무 비싼 고시원을 원하기에 안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아들이 아버지와 말을 안 하는 이유가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가난해서 라면만 먹은 적도 있고 맨밥만 먹은 적도 있으며 어머니 잠바를 입고 학교 다니고 돈이 없어서 공책도 사지 못한 경우도 많았지만,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형제님은 약간 당황한 듯 보였습니다.
물질적으로 자녀에게 충분히 못 해 준 것 때문에 자신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없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아들을 위해 하느님께 이렇게나 기도를 열심히 하고 물질적으로도 사실 남들보다 잘해준다고 생각하는데 아들이 그러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으니 알아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우선 위원장님께서 하시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내 의견을 주님께 관철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뜻이, 그것이 비록 내 뜻과 맞지 않는다고 해도 다 받아들일 힘을 키우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님은 기도를 통해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거나 집값이 오르기를 바라셨습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의 자유뿐만 아니라 아들의 자유까지 인정해주지 않고 많은 것을 강요하셨습니다.
아들이 이미 성인이 되었는데도 아들의 인생에 간섭하고 계십니다.
아들이 말을 안 하겠다면 이젠 성인이 된 아들의 결정을 인정해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나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고 싶은 근본적인 이유는 형제님께 열등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열등감을 기도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도 형제님에게 이용당하는 소와 같이 됩니다.
여물 줄 테니 밭 갈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 하느님도 자유를 빼앗기십니다.
이것을 우상숭배라 합니다.
형제님이 이렇게 된 데에는 어렸을 때 어떤 상처를 받았거나, 혹은 부모님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해 자존감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돈과 명예로 나의 부족한 자존감을 극복하려 합니다.
아마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으려 했지만 인정해주지 않으신 상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과 가족들을 이용해 낮은 나의 자존심을 세우려 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그러지 않습니다.
부모님으로 충분합니다.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이 어른입니다.
어른은 하느님 앞에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게 해 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가족들의 자유도 빼앗습니다.
자녀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아버지의 뜻이 강하기에 아마 자녀들의 많은 것을 간섭하실 것입니다.
가장 큰 도둑질이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빼앗길 때 물건처럼 됩니다.
아드님은 이것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인정해주십시오.
둘째는 형처럼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입니다.
기도하실 때 어린이처럼 되려고 하셔야지, 계속 하느님 앞에서 어른이어서는 안 됩니다.
당분간 나의 뜻을 하느님께 주장하기보다는 주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청하시고, 아드님에게도 생각할 수 있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찾아갈 자유를 주시는 것은 어떠신가요?”
이렇게 말씀드리니 얼굴이 좀 더 일그러지셨습니다.
“네, 다 제 탓이죠.
저는 아들이 제 말을 좀 잘 듣고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설득해 달라고 신부님을 찾아온 것인데.
일단 알겠습니다. 제가 더 기도해야겠네요.”
저는 마음속으로 이 형제가 기도의 지향을 바꾸기를 기도했습니다.
기도로 자신이 더 큰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모르며 기도하면 기도가 그 사람을 더 악하게 만듭니다.
세속-육신-마귀는 사춘기 때부터 급격히 증가합니다.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것들을 청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기도를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것들에서 벗어나 더 어려지기 위해 바치는 것입니다.
어려질수록 하늘 나라에서는 더 큰 성인입니다.
어려질수록 하느님께서 아버지시기에 내게 없던 자존감이 넘쳐납니다.
그리고 그 자존감의 수준이 곧 나의 행복의 수준이 됩니다.
이와 상반되는 사례가 있습니다.
독일 루르 한인성당의 고정아 막달레나 자매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글의 내용입니다.
그 자매는 간호사로 독일에 와서 정착한 분입니다.
하지만 남편의 뇌세포 소멸로 인한 장애증세가 나타나면서 그 자매의 삶은 더 힘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성당도 열심히 다니고 간호사로서 돈을 벌며 남편도 잘 간호하였습니다.
이때 자식 없이 사는 옆집 할머니로부터 희망의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자신이 자립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때 자신을 도와주면 남은 재산을 다 주겠다는 유언장을 변호사 앞에서 쓴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뒤 바로 풍을 맞아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은 그 자매가 일하며 남편과 옆집 할머니까지 간호하는 게 불가능하니 요양병원에 입원을 시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자매는 약속이 더 중요하다고 하며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의 서류를 정리하던 그녀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사실 쓰러지기 전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조카에게 넘긴 상태였습니다.
지금 사는 집도 조카 명의로 되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가진 돈도 없이 이 자매를 속인 것입니다.
자매는 돈 때문이 아닌 무엇보다도 할머니에게 배신당한 것이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조카들은 할머니에게 사실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매는 며칠 동안 처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이 자신 안에서 이뤄지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할머니가 불쌍하게 보였고 이젠 아무 대가 없이 더 극진히 간호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 자매는 바보 소리를 들어가면서 끝까지 할머니를 돌보았습니다.
몇 년이 지나 장례를 치룬 이후에도 무덤 관리까지 자매가 다 했습니다.
자매는 때가 되면 무덤에 가서 꽃을 꽂아줍니다.
이 자매의 기도는 분명 위 형제의 기도와 달랐습니다.
한 형제는 자신이 커지기 위해 기도했고, 한 자매는 어린이처럼 작아지기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면 자매처럼 조금 슬프지만 그래도 가난하고 작아지고 순결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끔 ‘성인’(聖人)이란 말도 합니다.
이것이 선교의 방법입니다.
성인들은 기도로 자신들을 어린이처럼 만든 분들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모습이 자신을 통해 드러나게 하신 분들입니다.
우리는 위 두 예 중 어떤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기도하면 성인이 됩니다.
그렇지만 기도한다고 다 성인이 되지는 않습니다.
더 어려지려고 기도해야 성인이 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행복하십시오!>
교회가 어떤 사람을 ‘성인’으로 선포하는 것은 ‘성인들의 생애에서 드러나는 은총의 위대한 업적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하느님을 흠숭하고, 성인들의 거룩한 생애나 업적을 일부라도 본을 받도록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미 하느님과 일치하여 영생에 참여하고 있는 성인들이 아직 현세에서 구원의 길을 순례하는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전구하여 주기를 청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세를 사는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인들의 모범을 우리가 살아감으로써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인을 올바로 공경한다는 것은 외적 행사의 복잡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사랑의 깊이에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쉬지 않고 조금씩 주님께로 발길을 옮기는 것, 이것이 성인이 되는 비결입니다.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지 않는 한 결코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
(가경자 알베리오네)
“예수 그리스도님에 대한 앎이 모든 것의 열쇠입니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님을 아는 것, 바로 그것만이 성인의 길을 걷는 신앙인의 목표요, 지름길입니다.”
(복자 앙투안 슈브리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인은 “어쩌면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이 세상에서 사신 분들입니다.”(함께야).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 험난한 고난의 길,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순명과 사랑의 길을 묵묵히 걸으신 분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1요한 1,12-13)이기에 성인입니다.
“행복합니다.
당신께서 뽑아 가까이 오도록 하신 이!
그는 당신의 뜰 안에 머물리이다.
저희도 당신 집의 좋은 것을, 거룩한 당신 궁전의 좋은 것을 누리리이다.”
(시편 65,4)
그러나 그 성인의 거룩함을 잃어가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거룩함을 잘 간수하여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은 8가지 행복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행복의 근원을 미래에서 찾아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약속된 미래가 있기에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가난해서가 아니라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에 행복합니다.
슬퍼함이 행복이 아니라 위로를 받음이 행복입니다.
땅을 차지할 것이기에 행복하고. 만족할 것을 기대하니 행복하고. 자비를 입게 되고 하느님을 뵙게 되니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되고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행복하고.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으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그 큰 행복을 차지할 기회를 잃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행복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행복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너희는 행복하다.”
1.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마음의 가난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그에게 온전히 의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것이기에 행복합니다.
2.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고 자기의 죄에 애통해 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행복합니다.
3.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온유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황, 처지, 여건에 흔들림 없이 평상심을 유지할 줄 아는 사람, 자제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4.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진선미를 갈망하며 천상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5. “행복하여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자비는 사랑입니다.
애간장을 녹이는 안타까움을 간직하며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 이웃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사람입니다.
6.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주님은 ‘내가 완전한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함을 지닌 사람, 죄에 물들지 않은 맑은 영혼을 지닌 사람은 행복합니다.
7.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외형적인 평온에 앞서 내 마음 속에 있는 욕심과 무질서, 불의와 미움을 거두고 화해를 전해주며 갈라진 사람을 맺어주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8.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선한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시기와 질투, 모욕과 중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도들은 주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였습니다(사도 5,41).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성인이 됩시다” -궁극의 희망이자 목표>
오늘은 11월 위령성월의 첫날이자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천상에 있는 또 지상에 있는 ‘이미 그리고 아직은 아니지만(already and not-yet)’ 하느님의 승리를 드러냈던 드러내고 있는, 드러낼 천상에 또 지상에 있는 모든 성인성녀들을 기념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을 지극히 사랑하며 성인이 되고자 분투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대축일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나라는, 성인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궁극의 희망이자 꿈이요 목표입니다.
그리하여 하늘 향해 ‘희망의 문’을 활짝 열어 준, ‘희망의 빛’이 쏟아지는 11월 첫날, 모든 성인의 날을 기점으로 하여 저는 감히 11월을 ‘희망성월’이자 ‘성인성월’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희망과 기쁨이 샘솟는 모든 성인의 대축일입니다.
우리 모두 이제 지상에서 성인이 되어 천상의 기쁨을 앞당겨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11월 위령성월을 희망성월이자 성인성월로 삼아 참으로 한달 깨어 알뜰하고 보람있게,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바야흐로 성인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품위있게 사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과제로 주어졌습니다.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제2독서에서 요한 사도가 우리를 격려하며 고무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날로 주님을 닮아 순결해 가는 성인의 여정, 희망의 여정에 오른 우리의 복된 발걸음입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 묵시록의 하느님 어좌 주변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모든 성인들과 모든 천사들과 원로들은 바로 우리 궁극의 미래를, 희망을 보여줍니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
“아멘.
우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영예와 권능과 힘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이미 지상에서 이런 천상 성인들의 하느님 찬미를 앞당겨 사는 우리들입니다.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야자나무 가지를 든,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성인들은 바로 우리의 미래상이기도 합니다.
이들에 대한 원로의 해명이 은혜롭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바로 분투의 노력을 다해 순교적 삶을 사는 우리 모두를 상징합니다.
크고 작은 고통과 시련, 환난 중에 정화와 성화의 여정을 통과해 언젠가 성인들이 되어 그분 곁에 있게 될 우리들의 영예스런 미래상입니다.
바로 이런 궁극의 희망이 우리를 용기백배, 백절불굴, 날마다 새롭게 영적 승리의 파스카 삶을, 성인다운 삶을,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영혼들은 성인이 되고 싶은 궁극의 희망을 선택하여 한결같이 정진하는 이들입니다.
오늘 입당송도 어제 저녁성무일도시 신명나게 불렀던 마리아의 노래 후렴도, 또 오늘 감사송도 우리의 희망의 기쁨을 배가하며 우리 모두 성인답게 살도록 용기를 북돋웁니다.
“주님 안에서 다 함께 기뻐하세.
모든 성인을 공경하며 축제를 지내세.
천사들도 이 큰 축제를 기뻐하며, 하느님의 아드님을 찬양하네.”
- 입당송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 마리아의 노래 후렴
“오늘 아버지께서 저희 어머니인 천상 도읍 예루살렘을 보여 주시니, 거기서 저희 형제들은 이미 승리의 월계관을 받아 쓰고, 아버지를 영원히 기리고 있나이다.
나약한 저희도 성인들의 뒤를 따라 영광을 기뻐하며, 그들의 도움과 모범으로 힘을 얻어, 활기찬 믿음으로 영원한 고향을 향하여, 나그넷길을 서두르고 있나이다.
그들의 모범은 나약한 저희에게 힘이 되나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 궁극의 희망이자 꿈이요 비전인지요!
신임 서울 대교장이 된 정순택 대주교의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문장 말마디, “하느님 아버지(Deus Pater), 어머니 교회(Mater Ecclesia)”도 우리의 궁극의 배경이자 희망을 상기시켜 줍니다.
어떻게 지상에서 성인다운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바로 그 지름길을 오늘 복음의 주님 행복선언이 보여줍니다.
우리에 앞선 모든 성인들이 참행복을 좌우명 삼아 살아 마침내 하느님 나라에 갔습니다.
십계명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구무진한 깊이의 참행복 대헌장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매일 분투의 노력을 다해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참행복 선언의 수행입니다.
1. 행복하여라, 마음의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2.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3.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을 땅을 차지할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할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6.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을 하느님을 볼 것이다.
7.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8.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우리 내면의 모습을 환히 비춰주는 거울같은 말씀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영성대가들이 극찬하고 격찬했던 말씀입니다.
한번 자신의 성덕(聖德) 점수를 100점 만점에 20점은 기본점수, 각항목당 10점 만점으로하여 계산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 불림받고 있습니다.
성인이 되는 것은 바로 우리 궁극의 목표이자 희망이요 보람이자 행복이요,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요 책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참행복의 성인이 되어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시며 격려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마태 5,12ㄴ)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참된 행복>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성성’에로 나아가라는 강력한 호소를 듣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성성’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제1독서인 <요한묵시록>에서는 말합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란을 겪어낸 사람들이다.
어린 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묵시 7,14)
구원에 이르는 길은 쉽지만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부딪혀야 하는 수많은 시련들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성성’은 언제나 순교의 형태를 띠기 마련입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의 손에 들려있는 ‘야자나무’는 바로 이 시련에 대한 승리를 상징한다 할 수 있습니다.
제2독서인 <요한의 첫 번째 편지>에서는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 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요한 3,2)
여기서, ‘성성’은 ‘신적 자녀 관계’로 드러납니다.
곧 ‘성성’은 우리의 생명 안에, 신적 현존이 더더욱 명백히 드러나도록 하기 위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 ‘추구행위’의 결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삶의 어떤 한 순간의 영웅적 행동에 의해 우연히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항상 계속되어지는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참된 행복”을 통해 ‘성성’이란,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나약성’과 ‘그분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함’ 외에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는 곳에서 실현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가난을 사는 일’입니다.
이미 그분을 차지한 까닭입니다.
그러면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할 것입니다.
또 ‘슬퍼할 줄을 아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과 세상의 죄를 슬퍼하되, 자비 안에서 위로를 받고 기쁠 것입니다.
이미 깨어, 임을 바라보며 기도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 ‘온유해지는 일’입니다.
그것은 진정, 있어야 할 하느님 품에 이미 안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감미로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 외에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결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이미 주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입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영에 끌려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고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정,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이토록 우리는 복된 삶에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의 성구를 새겨봅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성인으로 불리기를 바라지 말고, 참으로 성인으로 불리어지도록 먼저 성인이 되십시오.”
(수도규칙 4,62)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주님!
제가 가난을 살게 하소서.
비록 ‘쓸모없는 종’이지만, 당신 앞에서는 부유하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이 제 가슴에 부어지게 하소서.
온유하게 하소서.
겸손하고 양순하신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게 하소서.
당신 외에는 결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게 하소서.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게 하소서.
아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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