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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사] 3. (쉬어가기) 기자조선은 정말로 존재했을까?
[고조선사] 4. 패기가 넘치던 왕국(王國), 고조선(기원전 4세기)
[고조선사] 5. 우리 역사 최초의 전쟁 -고조선의 대몰락- (기원전 3세기 초반)'
[고조선사] 6. 고조선 부활하다(기원전 3세기 후반)
[고조선사] 8. 고조선, 전성기를 펼치다(기원전 2세기 초중반)
[고조선사] 9. 멸망 전쟁의 서막(기원전 2세기 후반)
1. 들어가며..
한 무제의 공격으로 인한
고조선의 멸망 과정은 <사기>에 자세히 나와있으므로,
이하에서는 <사기>를 바탕으로 서술합니다.
다만 이하의 내용은
적국의 붓으로 작성된 것을 기초로 하였기에
중국 위주로 내용이 전개되고
다소간의 왜곡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므로
각자 감안하고 바라보기 바랍니다.
2. 한의 정복군 출정
한무제는 기원전 109년 가을
좌장군 순체에게 5만명 육군으로 요동에서부터 출격하게 하였고,
누선장군 양복에게 7천명 수군으로 산둥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왕검성(평양)을 직접 공격하도록 명합니다.
한나라 군사의 총합은 무려 5만 7천명!
이 군사를 막느냐에 못마느냐에 따라
고조선의 운명이 달려있습니다.
(마지막 전쟁, 이제는 부여가 있을 때가 맞아요)
3. 전장 초기 고조선의 우세
우거왕은 순체의 육군 5만을 막기 위해
국경인 패수(압록강)를 전장으로 삼았습니다.
순체의 졸정 '다'라는 사람은
요동의 군사로 고조선 군을 공격하였으나
고조선군은 이를 격파하고
한의 본진으로 복귀한 '다'는
군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형당했습니다.
이후 순체의 육군 5만은
패수(압록강)를 지키는 고조선의 서쪽군을
본격적으로 공격하였으나
역시 고조선 군의 승리로 끝나고
한나라 군대는 패수를 넘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 수군 7천명을 이끄는 양복은
바다를 건너 왕검성(평양)에 이르렀는데
우거왕은 양복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성에서 나와 양복을 공격하여 격파하였습니다.
양복은 군사를 잃고 10여일간
길을 잃고 헤매다 흩어진
병사를 겨우 모아 진열을 가다듬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양복의 수군 7천명을 보고
'군사의 수가 적다'고 판단한 우거왕을 보며
왕검성(평양)에 있던 고조선군의 숫자가
최소 1만을 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고,
고조선이 우리의 생각보다 국가의 체제가 잡혀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사견).
4. 한의 교섭 진행
한의 육군은 패수를 건너지 못하고,
수군은 왕검성(평양)에서 대패를 하자
한 무제는 전황이 불리하다 판단하고
위산에게 명하여 우거왕에게 항복을 설득하라고 명합니다.
이때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사기>에 따르면 우거왕은 항복을 하겠다는 의사를 보이며,
“항복하기를 원했으나 두 장군이 속여 죽이려고 할 것이 두려웠소.
이제 진짜 부절(符節)을 보았으니 항복하기를 청하오.”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우거왕은 태자를 한무제에게 보내 사과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고 합니다.
고조선의 태자는 무기를 지닌 만여명을 이끌고 패수(압록강)로 나아갔습니다.
이 순간 순체와 위산은 태자에게 항복했으니 무장을 해제하고
패수(압록강)를 건너오라고 지시하나 태자는 혹시나 순체와 위산이
자신을 죽일까 겁나 무장을 풀지 않고 왕검성(평양)으로 돌아갔습니다.
한무제는 이 사실을 보고받자 위산을 처형합니다.
5. 고조선의 패수 전선 붕괴
아직까지는 고조선이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패수(압록강)에서 양군은 대치를 하였고
전선이 고착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순간 순체의 육군은 패수의 고조선 군을 격파하고
거침없이 진격하여 왕검성의 서북쪽을 포위합니다.
패수 전선이 뚫리고 순체가 곧장 왕검성으로 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고조선의 힘이 2차 방어선을 만들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사견).
양복도 흩어진 수군을 모아 왕검성의 남쪽에 주둔하였는데
고조선의 왕검성은 몇달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전쟁의 승패는 왕검성의 수성 여부에 정해졌습니다.
이 성을 지키면 고조선이 이기는 것이요,
못지키면 나라가 멸망하는 것입니다.
6. 한나라 군의 분열 조짐
육군을 이끄는 순체는 패수에서의 승리에 도취되어
화평보다는 싸움을 원했고,
수군을 이끄는 양복은 계속된 패배에 위축되어
싸움보다는 화평을 원했습니다.
순체는 왕검성을 맹렬히 공격하니
마침 고조선의 대신들 중에서도
항복을 원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이들은 순체보다는 화평을 원한 양복에게 사람를 보내
항복의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순체는 힘껏 싸워 빨리 성을 함락시켜
공을 독차지하고 싶었고,
반대로 양복은 싸우지 않고
성안의 대신들의 항복을 빨리 받아 공을 독차지하고 싶었습니다.
순체가 양복에게 어서 공격하자고 독촉하여도
양복은 항복을 받기 위해 싸움에 나가지 않을 뿐이었습니다.
싸움이 제대로 되지 않아 답답한 순체는
자신도 고조선 대신들에게 항복을 권유해보나
이미 고조선 대신들은 양복에게 항복할 생각을 가지고 있어
순체에게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쯤되니 순체는 양복이 고조선과 내통하여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한나라 군이 분열될 조짐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때 고조선이 분열을 이용했으면 좋으련만
이미 고조선은 대신조차도 항복을 생각할 정도로 여력이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7. 한나라 군의 통합
한 무제는 두 장군이 반목한 것을 알고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내
일을 적절히 처리하도록 명합니다.
순체는 공손수에게 평소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말들..
즉, 양복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은밀히 하였고,
공손수는 순체의 말이 맞다고 판단하여
양복을 순체의 진영으로 불러내어
체포하고 두 진영의 군사를 합쳤습니다.
일을 적절히 처리했다고 생각한
공손수는 한무제에게 보고했더니
한무제는 공손수를 죽입니다.
사서상 정확한 이유는 나와있지 않지만
무언가 한무제의 역린을 건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황제가 임명한 장군을 체포한 게
황제의 역린을 건든 게 아닌가 싶지만(사견)
정확한 이유는 사서에 안나왔습니다.
하지만 공손수로 인하여 한나라 군대는
지휘권이 '순체' 한사람에게 통합이 되었기에
고조선에게는 상황이 더욱 악화가 되었습니다.
8. 무너지는 고조선
순체는 양군을 합하여 맹렬히 왕검성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때 왕검성 내부에서 우거왕 몰래 항복을 논했던
조선상 노인, 니계상 참, 장군 왕겹, 상 한음이 모의하길..
“처음 양복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양복은 지금 잡혀 있고
순체는 단독으로 장졸(將卒)을 합하여 전투가 더욱 맹렬하여
맞아서 싸우기 두려운데도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는다.”
이에 한음, 왕겹, 노인은 왕검성을 몰래 나와 투항했는데
이중 노인은 도중에 죽었습니다.
이 사건은 고조선 내부의 대신까지 사기가 떨어져 있음을 반증합니다.
그럼에도 우거왕이 끝까지 항전을 하니 대신들이 항복을 한 것입니다.
주요 인물마저 항복을 할 정도로
고조선은 점점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9. 고조선의 멸망
기원전 108년 여름.
전쟁이 시작된지 1년이 되어갑니다.
그런데 이 때 왕검성 안에 남아있던
니계상 참은 우거왕을 살해하고
한나라에 투항합니다.
하지만 우거왕의 신하 성기가
왕검성을 끝까지 지켜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기는 한나라 군대를 공격합니다.
순체는 죽은 노인의 아들 최와
우거왕의 아들 장항으로 하여금
백성들을 잘 달래고 성기를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결국 성기가 이들에게 사살당함으로써 왕검성은 함락됩니다.
이로써 고조선의 역사가 종료되었습니다.
10. 그후..
한무제는 왕검성을 함락한 순체가
공을 다투고 시기하여
계획을 어긋나게 하였다는 이유로
공개처형하였습니다.
또한 체포당한 양복에 대해서는
왕검성에서 순체를 기다리지 않고
제멋대로 공격했다가 군사를 잃었다는 이유로
주살을 하려다가 서민으로 강등시켰습니다.
반면 고조선으로부터 항복한
니계상 참은 홰청후로,
상 한음은 추저후로,
장군 왕겹은 평주후로,
노인의 아들 최는 온양후로,
우거왕 아들 장항은 기후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한무제는 고조선의 영역을 나누어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을 설치하여
'직접 지배'를 시작합니다.
역사는 이를 한사군이라 부릅니다.
고조선의 영역이 중국땅이 된 것입니다.
11. 나오며..
필자는 고조선이 계속 존속하였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종종하곤 합니다.
고조선은 왕검성만 최소 1만의 군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왕검성에 있던 태자가 1만명을 이끌고 패수로 향한 것을 생각해십시오.
왕검성에는 최소 1만의 군사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외에도 패수의 고조선군은 정확한 숫자를 알 수는 없지만
순체의 5만군과 대치할 정도의 군세였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고조선의 병력 규모가 아무리 못해도 2~3만이라고 생각합니다(사견).
고구려가 서기 3세기 중반 동천왕 시절에 2만 정도를 보유한 것을 생각하면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이정도 군사력을 보유한 고조선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만약 고조선이 멸망하지 않고 계속 성장하였다면
한반도는 통일된 고대국가가 보다 일찍 등장하였을 것입니다.
학계에서는 고조선이 초기 형태의 '부체제'를 가진 국가로서
고대국가의 첫걸음을 걷는 단계로 바라봅니다(노태돈).
이런 고조선이 한반도 북부를 거의 장악하고 있었으니
만일 계속 존속하였더라면 훨씬 더 큰 세력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고조선은 4개로 찢어지고 중국 영토가 되었습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한사군 중에서 낙랑군은 약 400년간 존속하며
한반도 남부에서 거대 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철저히 방해했습니다.
우리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실제로 낙랑군의 영향으로 한반도 남부에서
제대로 된 거대 세력이 등장하는 것은 3세게 중후반 백제가 성장하면서 입니다.
그래서 필자가 늘 아쉬워 하는 것입니다.
한반도 북부의 통일된 세력이었던 고조선이
초기 형태의 부체제를 가지고 고대 국가의 첫걸음을 걷고 있었는데
이 고조선이 사라져 버리고,
심지어 고조선 영토를 차지한 중국인들이
한반도 남부에까지 통일된 세력의 등장을 수백년간 막았다는 것이
필자로서는 너무나 아쉽습니다.
한울리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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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사기> 조선열전을 수록합니다(출처 네이버 사기).
양이 방대하여 본문에 녹이지 못함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해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파견해
제나라 땅을 출발해 발해(渤海)를 건너니 군사가 5만여 명이었는데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로 하여금 요동을 나와 우거를 치게 했다.
우거가 군사를 일으켜 험난한 것을 의지해 대항했다.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는 요동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적군을 공격했으나 패해 흩어지고, 다는 돌아왔으나 군법을 어겨 참형되었다.
누선장군은 제나라의 군사 7천여 명을 이끌고 먼저 왕검에 도착했다.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다가 누선의 군사가 적음을 염탐해 알아내고
즉시 성을 나와 누선을 공격하니 누선의 군사들이 패해 흩어져 달아났다.
장군 양복은 자신의 무리를 잃고 산중에 도망해 10여 일 숨어 있다가
점차 흩어진 군사들을 찾아 거두어 다시 모았다.
좌장군이 조선의 패수 서쪽의 군사를 공격했으나, 이를 깨뜨리고 전진할 수 없었다.
황제가 두 장군만으로는 불리하다고 여기고,
이에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세로써 우거를 타이르게 했다.
우거가 사자를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기를
“항복하기를 원했으나 두 장군이 속여 죽이려고 할 것이 두려웠소.
이제 진짜 부절(符節)을 보았으니 항복하기를 청하오.”라 했다.
이에 태자를 파견해 한나라에 들어가 사죄하게 하고
말 5천필을 헌납하고 군량을 보내기로 했다.
만여 명의 사람들이 무기를 가지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니
사자 및 좌장군은 그들이 변란을 일으킬까 의심해,
태자가 이미 항복했으니 마땅히 사람들에게 무기를 지니지 않도록 명하라고 말했다.
태자 역시 사자와 좌장군이 속여 자신을 죽일까 의심해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무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위산이 돌아가 황제에게 보고하니 황제가 위산을 죽였다.
좌장군이 패수 언덕 위의 군사들을 물리치고 바로 앞으로 나아가
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포위했다. 누선 역시 가서 군사를 모아, 성의 남쪽에 머물렀다.
우거가 드디어 성을 굳게 지키니 몇 달이 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좌장군은 평소 황궁에서 황제를 받들어 모셔 총애를 받았는데,
그가 이끈 연나라와 대(代)나라의 군졸들은 사나우며
또 이전의 승리를 믿고 대부분의 군사들이 교만해 있었다.
누선장군은 제나라 군사들을 이끌고 바다에 들어가 이미 여러 차례 패해 도망한 적이 있었다.
이전에 우거와 싸웠으나 곤욕을 당해서 군사를 잃었고,
또 군사들이 다 두려워하고 장군도 마음으로 부끄러워했다.
때문에 뒤에 우거를 포위할 때 늘 조화와 절제에 힘썼다.
그런데 좌장군이 급히 왕검성을 치려고 하자 조선의 대신들이
이에 암암리에 사람을 시켜 사사로이 누선에게 항복을 약속하는 말을 전하려고 했으나 아직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좌장군은 여러 차례 누선과 더불어 싸울 것을 기약했으나
누선은 급히 그 약속을 성취하려고 그를 만나지 않았다.
좌장군 역시 사람을 시켜 조선을 항복시킬 기회를 찾았고,
조선도 속으로는 누선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두 장군이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좌장군은 마음속으로 누선이 전에 군사를 잃은 죄가 있고,
지금은 조선과 더불어 사사로이 친하며, 조선도 또 항복하지 않으니
그가 반란을 일으킬 계획이 있는가 하고 의심했지만 감히 발설하지는 않았다.
황제는 “장수가 앞으로 진격하지 못하기에 위산을 시켜 우거에게 항복하라고 타일렀다.
이때 우거가 태자를 파견했는데 위산이 사자로서 전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좌장군과 더불어 잘못을 저질러 마침내 약속을 저버리고 말았다.
이제 두 장군이 성을 포위했지만 또 의견이 맞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오래도록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제남(濟南) 태수 공손수(公孫遂)를 시켜 가서 그 일을 바로 처리하게 하고,
편의에 따라 임의로 일을 처리하게 했다.
공손수가 도착하자 좌장군은 “조선은 벌써 공격해 함락시켰어야 하지만,
아직 공격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계속해서 그는 누선장군이 여러 차례 싸움을 기약했지만 모이지 않은 것을 말하고,
평소 의심해온 일들을 전부 공손수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이제 이와 같은 자를 잡지 않는다면 아마도 큰 해가 될 것이며,
누선장군 혼자뿐만 아니라 또 그는 점차 조선과 함께 우리 군대를 무찌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공손수 역시 그렇다고 여기고, 부절을 사용해 누선장군을 불러 좌장군의 병영에 들어와서 일을 의논하게 했고,
거기에서 즉시 좌장군의 부하에게 명령해 누선장군을 사로잡게 하고, 그의 군대를 병합해버렸다.
이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하니 황제는 공손수를 죽였다.
좌장군은 이미 두 군대를 병합해 즉시 급히 조선을 공격했다.
조선의 재상 노인(路人)과 재상 한음(韓陰), 이계(尼谿)의 재상 삼(參)과 장군 왕협(王唊)이
서로 모의하기를 “처음에 누선에게 항복하려고 했으나 누선은 지금 붙잡혀 있고,
홀로 좌장군이 두 군대를 병합해 거느리고 있어 전세가 더욱 급하게 되었다.
아마 그와 더불어 싸울 수는 없을 것이나, 우리의 왕도 또한 항복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 했다.
한음, 왕협, 노인은 다 도망해 한나라에 항복했다. 노인은 도망하는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 여름에, 니계의 재상 삼이 사람을 시켜 조선 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했다.
그러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옛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 반란을 일으켜 다시 관리들을 공격했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항(長降)과 재상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 백성들을 타일러 성사를 죽이게 했다.
그런 까닭에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했다.
삼을 획청후(澅淸侯)에 봉했고, 한음을 적저후(狄苴侯)에 봉했고,
왕협을 평주후(平州侯)에 봉했으며, 장항을 기후(幾侯)에 봉했다.
최는 아비가 (항복하려고 오는 도중에) 죽은 공으로 인해서 온양후(溫陽侯)에 봉해졌다.
좌장군은 불려 와서 공을 다투어 서로 질투하고
계책을 어긋나게 했다는 죄를 받아 기시(棄市)의 형벌을 받았다.
누선장군 역시 군사가 열구(洌口)에 이르렀을 때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했으나
자신이 멋대로 먼저 공격하다가 군사를 많이 잃어 죽어야 마땅했지만,
돈으로 죄를 용서받고 대신 평민이 되었다.
태사공은 말한다.
“우거(右渠)는 성의 견고하고 험난한 것만 믿다가 나라의 제사를 끊기게 했다.
섭하(涉何)는 공로를 속여 병사를 일으켜 조선(朝鮮)을 공격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누선장군(樓船將軍)도 마음이 좁아 위험과 재난을 만나 죄를 얻게 되었다.
반우(番禺)에서의 실패를 후회하다가 오히려 의심을 받았다.
순체(荀彘)는 공을 다투다가 공손수(公孫遂)와 더불어 다 함께 죽임을 당했다.
두 장군의 군대는 다 곤욕을 당했으며, 장수 가운데 후(侯)에 봉해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댓펌
환빠스러움에 빠져있는 역사학자들 중에는 고조선을 공격한 한나라 장수 중 상을 받은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근거로 한나라의 고조선 공격은 실패했고 그로써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분도 많더군요. 근데 개인적으로도 참 수수께끼이긴 합니다. 양복은 그렇다치더라도 순체나 공손수는 충분히 상을 받을만 했을텐데 말이지요
공손수는 누선장군을 잡아버린 게
황제의 뜻에 어긋나 처벌을 받은 게 아닌가 합니다.
일을 해결하랬더니 황제가 임명한 장군을
임의로 체포한 게 선을 넘었다고 본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진실은 황제가 알겠지만요.
사실 대부분의 환이론에서도 이 시기에 고조선이 멸망한 것을 인정하기는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망을 부인하는 환이론 내에서의 극소수분들이 계시긴 한데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제는 자기 첩의 오빠인 이광리가 패전한거 눈 감아주려고, 이릉을 궐석으로 사형주고 사마천 거세한 인간임. 그냥 순체의 행동이 무제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거 같음
유물은 발견되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론 위만조선의 역사서가 발견이 안 되어 아쉽습니다.
준왕 시절만 해도 중국계 유이민이 꽤 들어왔고 위만조선만 해도 중국계 세력이 주도해 세운 걸 보면 이런 중국계 세력이라도 활용해서 사서를 편찬하는 게 가능할 법 한데 말이죠.
고구려나 백제는 그들이 기록한 역사가
신라에 흘러와서 삼국사기에 반영되었는데요
(그래서 고구려인, 백제인만 알 수 있는
고구려, 백제의 '내부' 상황에 대한 기록도 남았죠).
그런데 고조선은 스스로 기록을 남겼더라도
이걸 낙랑군이 잘 보존할리 만무하고..
그렇다고 인근 세력들은 아직 자신들의 역사도
문자로 남기질 않던 시절이었는데 고조선 역사를 보존할리 만무하고..
이러나 저러나 아쉽습니다.
만약 고조선 이후 한사군이 없었으면 삼국통일이 좀 더 빨리 됬을까?
고조선이 쭉 이어졌음 삼국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ㄷㄷ 물론 상상의 영역이긴 하지만요.
혹시 기회가 된다면 고구려가 고조선에 대한 계승 의식의 존재 여부나 부여, 고구려, 고조선간의 관계를 연재해주시면 안될까요? 개인적으로 궁금해하는 부분인데 능력 미달로 알아가기가 어려워서요.
개요는 아래와 같습니다.
0 고조선-부여
별 관련이 없습니다ㅜ
0 고조선-고구려
별 관련이 없습니다ㅜ 계승관계도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0 부여-고구려
고구려는 자신들이 하늘의 자손이라 여겼기 때문에 부여를 계승했다 여기지 않았습니다. 서로 물질문화도 다릅니다. 하늘의 자손이 부여 따위를 계승했다고 여길 수가 없지요.
0 부여-백제
백제왕실은 자신들이 부여왕실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합니다. 부여의 정통성을 그대로 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댓글을 읽고 의문점이 생겨 질문을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고조선을 뺀다면 한국사 주요 국가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부여와 고구려, 신라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부여와 고구려가 고조선과 별 관련이 없다면 고조선을 한국사에 어떻게 넣을 수 있을까요? 이 점이 궁금합니다. 그냥 현대 한국인의 조상 중 하나가 되는 예맥계 국가라서 그런 것일까요???? 아님 고조선의 유민이 사로국을 세워 신라로 이어졌기 때문일까요????
역사의 범주를 설정하는 이론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속인주의 : 우리 조상이 세운 나라는 다 우리 역사다.
2) 속지주의 : 현재 우리땅에 있었던 과거의 모든 국가는 모두 우리 역사다.
한국과 일본은 속인주의를 택하고 있고 중국은 속지주의를 택하고 있는데요.
우리는 속인주의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조상이 세운 고조선사를 당연히 우리의 역사로 바라봅니다.
말씀하셨듯이 신라도 고조선의 유민이 세웠고,
고조선의 유민은 낙랑군을 거쳐 고구려의 백성이 되었기도 하기에
속인주의에선 당연히 고조선사가 우리의 역사가 됩니다.
무엇보다 고려 말기부터 고조선을 우리의 시조로 보는 인식이 천년 이상 이어졌기도 하구요.
선생님께선 사료 행간에 숨어있는 요소를 어떻게 역사적 상상력으로 발전시키시는지요?
저는 상상을 하기보다는 '추론'을 합니다.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면 '흔적'이 남습니다.
사료든, 고고학 자료든 흔적이 남는데요.
후세인들은 이 흔적을 통해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복원합니다.
그리고 복원된 사실과 실제 있었던 사건이 최대한 같기를 바랍니다.
이게 역사학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사료나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어떤 일이 있었을지 '추론'할 뿐이지 상상을 하진 않습니다.
여기서의 '사실관계 추론'은 제가 배운 여러가지 기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비전공자이다보니 일종의 상상력이라 생각했는데, 여러 기법을 통한 추론이었군요! 혹시 이러한 추론 기법은 어느 문헌을 참고하면 좋을까요?
음...... 기법이 정리된 책이 있는 게 아니라
교수님들이 쓴 연구서와 논문을 보면,
그분들이 어떻게 사고를 했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후학인 저로서는 그분들의 추론법을 따라해보는 것이지요.
또 이와 별개로 법률가들이 쓰는 사실인정 기법이란 게 있는데
이것도 별도로 책으로 있는 게 아니라
판결문들을 보고 습득한 것인지라 특별히 책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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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조선이 좀 더 이어졌으면 정말 어땠을까 진짜 흥미돋는다 여샤 잘봤어 고마워~
넘 재밌다 근데 진짜 한무제는 공을 세운 장수들을 다 처벌했네;; 군인이 인기를 얻은걸 경계하고 시샘했나? 고조선 기록들이 있으면 좋을텐데 아쉽다 북한지역 발굴하면 뭐라도 나올거같은데 쩝 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중국이 간도 쪽 땅 먹은 이후로 고조선 관련 자료들 발견되면 암암리에 없애거나 아님 지네껄로 하거나.... 완전 이런 식이어서.... 에효..... 고조선이 한무제의 저런 어이없는 공격으로 무너지기에는 너무 크고 체계가 있는 국가였어서 납득 안 가고, 전부 한무제 입장에서 써진 거라는 의견이 많은 거 같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