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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태욱 교수의 교실 원문보기 글쓴이: 정태욱
<임시정부의 탄생>
임시정부로서 가장 먼저 수립된 것은 ‘노령 정부’입니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 조직인 ‘전로한족중앙총회’는 ‘대한국민의회’로 조직을 개편하고 3.1 만세 운동에 호응하여 3월 17일 군중집회를 열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정부 구성을 선언하였습니다. 대한국민의회의 지도자는 최재형, 문창범, 이동휘 등이었지만, 임시정부는 명망있는 민족지사를 중심으로 구성하였습니다. 대통령은 손병희, 부통령은 박영효, 국무총리는 이승만, 군무총장은 이동휘, 내무총장은 안창호였습니다. 그러나 노령정부는 어떤 헌법적 규정은 두고 있지 않았습니다(김병기, 대한민국임시정부사, 69쪽).
당시 연해주에는 러시아 귀화인을 포함하여 많게는 20만명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실상 러시아(소련) 정부의 정책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러시아는 격변기에 있었습니다.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 제정이 타파되고 자유주의적인 임시정부가 구성되었지만, 임시정부 케렌스키 정부는 상황을 통제할 수 없었고, 이어서 10월 소비에트 공산 혁명이 성공합니다. 그러나 초기에 반혁명 세력이 광범위한 전선을 구축하였고, 일본 및 서방 국가들은 각기 수만명의 군대를 파병하여 반혁명 ‘백군’ 세력을 지원하였습니다. 이후 1920년까지 러시아는 내전의 혼돈 상황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러시아의 한인들은 어떤 통일된 진로를 정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것이 노령 정부에 어떤 헌법적 구상이 결여된 원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만, 임시정부 명단은 대한국민의회 차원이 아니라 국내외의 여망과 제안에 호응하는 차원에서 명망가들을 망라하여 발표하였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반병률, 대한국민의회의 성립과 조직, 123-167쪽 참조).
이어서 성립한 것은 ‘상해 임시정부’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상해 신한청년당 중심의 독립 운동 노력은 각지로 퍼져나가 상해에 이미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리하여 국내외의 독립지사들이 속속 상해로 집결하였습니다. 상해는 당시 아시아와 세계의 문물 교류의 중심지이면서, 중국 영토이지만 외국의 조차지이기도 하여 일본의 방해나 특정국의 지배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노령 연해주에서도 이동녕, 조완구 등 소위 ‘기호파 인사들’이 상해로 왔습니다. 이들은 대한국민의회와 아무런 상의 없이 그로부터 ‘이탈’한 것입니다. 이동녕은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의정원장이 됩니다. 최재형, 문창범 등 대한국민의회 간부들은 회의를 소집해 이동녕, 조완구를 제명처분합니다(반병률, 대한국민의히의 성립과 조직, 157쪽). 향후 통합 임시정부의 험난한 미래에 대한 하나의 전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3.1 운동에 즈음하여 여운형, 선우혁, 이광수는 독립임시사무소를 두고, 국내에서 온 현순 목사가 간사 일을 보았습니다. 신한청년당의 리더였던 여운형은 처음에는 임시정부가 아니라 하나의 정당 조직을 생각하였습니다. 임시정부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각지에서 찾아 온 여러 민족지사들의 의견은 달랐습니다. 이미 노령정부도 구성되었고, 또 국내에서 곧 ‘한성정부’가 선포될 것이라는 소식도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파리 강화회담에 파견된 대표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도 정부의 형식을 갖추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드디어 상해 임시정부가 구성되었습니다. 4월 10일 임시의정원이 구성되고, 4월 11일 임시헌장과 함께 임시정부가 선포되었습니다. 여기서 선포된 임시헌장은 오늘날 우리 민주공화제의 원형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 기초위원은 조소앙, 신익희, 이광수였지만 실제 기초자는 조소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전문을 알아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大韓民國臨時憲章宣布文
神人一致로 中外協應하야 漢城에 起義한지 三十有日에 平和的 獨立을 三百餘州에 光復하고 國民의 信任으로 完全히 다시 組織한 臨時政府는 恒久完全한 自主獨立의 福利에 我 子孫黎民에 世傳키 爲하야 臨時議政院의 決議로 臨時憲章을 宣布하노라
第1條 大韓民國은 民主共和制로 함
第2條 大韓民國은 臨時政府가 臨時議定院의 決議에 依하야 此를 統治함
第3條 大韓民國의 人民은 男女貴賤及 貧富의 階級이 無하고 一切 平等임
第4條 大韓民國의 人民은 信敎⋅言論⋅著作⋅出版⋅結社⋅集會⋅信書⋅住所⋅移轉⋅身體及 所有의 自由를 享有함
第5條 大韓民國의 人民으로 公民資格이 有한 者는 選擧權及 被選擧權이 有함
第6條 大韓民國의 人民은 敎育 納稅及 兵役의 義務가 有함
第7條 大韓民國은 神의 意思에 依하야 建國한 精神을 世界에 發揮하며 進하야 人類의 文化及 平和에 貢獻하기 爲하야 國際聯盟에 加入함
第8條 大韓民國의 舊皇室을 優待함
第9條 生命刑 身體刑及 公娼制를 全廢함
第10條 臨時政府난 國土恢復後 滿 一個年內에 國會를 召集함
大韓民國 元年 四月 日
臨時議政院議長 李東寧
臨時政府國務總理 李承晩
內務總長 安昌浩
外務總長 金奎植
法務總長 李始榮
財務總長 崔在亨
軍務總長 李東輝
交通總長 文昌範
宣 誓 文
尊敬하고 熱愛하난 我 二千萬 同胞國民이어
民國 元年 三月 一日 我 大韓民族이 獨立을 宣言함으로브터 男과 女와 老와 少와 모든 階級과 모든 宗派를 勿論하고 一致코 團結하야 東洋의 獨逸인 日本의 非人道的 暴行下에 極히 公明하게 極히 忍辱하게 我 民族의 獨立과 自由를 渴望하난 實思와 正義와 人道를 愛好하난 國民性을 表現한지라 今에 世界의 同情이 翕然히 我 國民에 集中하엿도다. 此 時를 當하야 本政府가 全國民의 委任을 受하야 組織되엿나니 本政府가 全國民으로 더부러 專心코 戮力하야 臨時憲法과 國際道德의 命하난 바를 遵守하야 國土光復과 邦基確國의 大使命을 果하기를 玆에 宣誓하노라
同胞國民이어 奮起할지여다. 우리의 流하난 一滴의 血이 子孫萬代의 自由와 福榮의 價이요 神의 國의 建設의 貴한 基礎이니라. 우리의 人道가 마참내 日本의 野蠻을 敎化할지오 우리의 正義가 마참내 日本의 暴力을 勝할지니 同胞여 起하야 最後의 一人지 鬪할지어다
政 綱
一. 民族平等⋅國家平等及 人類平等의 大義를 宣傳함
二. 外國人의 生命財産을 保護함
三. 一切 政治犯人을 特赦함
四. 外國에 對한 權利 義務난 民國政府와 締結하난 條約에 一依함
五. 絶對獨立을 誓圖함
六. 臨時政府의 法令을 違越하난 者난 敵으로 認함
大韓民國 元年 四月 日
大韓民國臨時政府
(이상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국사편찬위원회, 2005), 「大韓民國臨時憲章宣布文」)
보시다시피 이 임시헌장은 정말 놀라운 문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민주공화제라는 한 단어로 국가형태의 요체를 완전하면서도 간명하게 정리하였습니다. 또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대 헌정의 핵심 그리고 국제적 평화의 원리까지 온전히 담고 있는 훌륭한 헌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후 지금까지도 우리 대한민국의 헌법은 여기서 천명된 기본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즉 우리 민족의 새로운 백년 아니 어쩌면 수백년의 비전을 담아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임시헌장 제1조의 민주공화제, 즉 민주공화국의 규정은 현재 우리 헌법 제1조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민주공화국이 평범하고 너무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지만 당시로서는 민주공화국이라는 작명은 참으로 선진적인 통찰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신우철 교수에 따르면 당시 세계적으로 민주공화국이라는 국가형태를 헌법에서 명시한 나라는 없었다고 합니다. 미국, 프랑스, 독일 모두 공화국이라고 하였을 뿐 민주공화국이라는 명칭을 쓰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소비에트 혁명 이후 러시아의 1918년의 헌법도 ‘노동자, 농민, 군인들의 공화국’이라고 하였을 뿐입니다. 사실 미국이나 프랑스 모두 당시까지 흑백차별, 제한선거 등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중국의 경우 초기 민국 시절의 여러 헌법에서 “중화민국은 민주국”이라는 규정은 있지만, 민주공화국이라는 명칭은 1925년에서나 보인다고 합니다(신우철, 19쪽).
참고로 여기서 제4조 끝에 “소유의 자유”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습니다. 저명한 역사학자 조동걸 교수는 이를 오늘날의 의미인 ‘소유권의 자유’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마 일반적인 인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착오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는 재산소유권에 대한 규정이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선 그 조문이 일반적 ‘자유권’에 대한 부분이고, 또 소유(所有)라는 한자어는 ‘모든’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즉 “종교, 언론, 출판, 거주, 이전, 신체 등의 모든 자유”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습니다. 만약에 오늘날의 소유권의 자유를 규정하려고 하였다면, 그것은 아마 별도의 조문으로 규정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문구도 ‘소유의 자유’가 아니라 ‘소유권’ 혹은 ‘소유재산권’ 혹은 ‘소유권의 자유’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아울러 당시 우리 임시 헌장에 대한 중국 측의 번역도 “신체의 자유 등 일체의 자유”라고 되어 있음도 참고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대하여는 신우철 교수의 훌륭한 설명이 있습니다(신우철, 중국의 제헌운동이 상해 임시정부 헌법 제정에 미친 영향, 23쪽).
또 하나의 임시정부로 ‘한성정부’가 있었습니다. 이는 국내에서 성립된 임시정부였습니다. 역시 3.1운동의 과정에서 4월에 조직되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는 여러 갈래로 임시정부가 추진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움직임은 ‘한성 정부’였습니다. 이는 홍면희(홍진)가 주도하여 추진되었으며,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13도 대표자회의를 열어 구성되는 정부라서 대표성에서 더욱 비중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홍면희는 구한말 법관양성소에서 교육받고, 법관임용시험에 합격하여 검사직을 역임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검사직을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나선 법률가이자 민족지사였습니다.
홍면희의 민족적 열정과 법률가로서의 지성은 3.1운동의 체계화와 조직화로 모아졌습니다. 그는 각계각층에 연락하고 뜻을 모아 ‘한성정부’의 조직안을 구성하였습니다. 3월 17일 서울의 한성오(당시 현직 검사로서 홍면희와 친분이 있었다고 함)의 집에서 열렸습니다. 이후 4월 2일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인천 만국 공원에서 13도 대표자대회를 열었습니다. 애석하게도 13도 대표자들이 다 모이지는 못하였고, 대개는 서울 경기 인근의 대표자들 그리고 기독교, 천도교 등 종교계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하여튼 이 대표자회의에서 위의 한성정부 구성과 약법을 승인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이후 국민대회를 열어 임시정부 성립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고자 하였습니다(한시준, 홍진, 54쪽).
홍면희는 국민대회를 보지 못하고 상해로 출발합니다. 당시 상해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국내 임시정부와 서로 호응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시일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홍면희는 임시정부의 원본을 품에 넣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교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통나무 배로 건넜습니다. 그렇게 안동(지금의 단동)에 도착한 후 다시 중국 사람인양 변장을 하고 상해로 갔습니다. 홍면희는 압록강을 건너면서 이름을 바꿉니다. 이제 홍진이 되었습니다. 국내에서는 4월 23일 13도 대표자와 학생들 중심으로 국민대회를 추진하였습니다. 종로에서 시위가 계획되었습니다. 불행히도 13도 대표자들은 모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학생들은 용감하게 외쳤습니다. ‘공화만세’, ‘국민대회’의 깃발을 들고 시위를 감행하였습니다. 임시정부선포문과 국민대회 취지서를 뿌렸습니다....(한시준, 홍진, 65-7쪽)
홍면희가 구성한 한성정부의 조직과 약헌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임시정부 선포문
“……아민족은 세계만방에 대하여 조선의 독립이오 조선민족의 자유민임을 선언하고 아울러 전민족의사에 기하여 임시정부의 성립되었음을 자에 포고하노라…….”
국민대회 취지서
“3·1독립선언의 권위를 존중하고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여 인간필연의 요구에 보답하게 하기 위해 이에 민족일치의 동작으로써 대소의 단결과 각 지방대표자들로서 분회를 조직해 이를 세계에 선포한다.”
결의사항
① 임시정부 조직, ② 일본의 조선통치권 철거와 군대의 철퇴 요구, ③ 파리강화회의 대표 선정, ④ 일본관청의 관공리 퇴직, ⑤ 납세 거절, ⑥ 일본관청에 청원 급(及) 소송 금지
임시정부 각원(閣員)
집정관총재 이승만(李承晩),
국무총리총재 이동휘(李東輝),
외무부총장 박용만(朴容萬),
내무부총장 이동녕(李東寧),
군무부총장 노백린(盧伯麟),
재무부총장 이시영(李始榮), 재무부차장 한남수(韓南洙),
법무부총장 신규식(申圭植),
학무부총장 김규식(金奎植),
교통부총장 문창범(文昌範),
노동국총판 안창호(安昌浩),
참모부총장 유동열(柳東說), 참모부차장 이세영(李世永),
파리강화회의 출석위원
이승만·민찬호(閔瓚鎬)·안창호·박용만·이동휘·김규식·노백린
약법(約法)
제1조 국체(國體)는 민주제를 채용함,
제2조 정체(政體)는 대의제(代議制)를 채용함,
제3조 국시(國是)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고 세계평화의 행운을 증진케 함,
제4조 임시정부는 하(下)의 권한이 유함
- 일체 내정
- 일체 외교
제5조 조선국민은 하(下)의 의무가 유함
- 납세
- 병역
제6조 본 약법은 정식국회를 소집하야 헌법을 발표할 때까지 차(此)를 적용함
(이상 인터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1754; 한시준, 홍진, 51쪽)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헌장보다는 간략하지만, 역시 민주제와 대의제 그리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 그리고 세계 평화의 원리 등 기본 원리와 구조에서 상해 임시정부의 그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3.1 운동의 민족적 시대정신은 이렇게 신묘하게 서로 통하였던 것입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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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외, 안창호 평전, 개정 3판, 청포도, 2007
박찬승, 한국독립운동사, 역사비평사, 초판 4쇄, 2018
김기승, 조소앙이 꿈꾼 세계, 지영사, 2003
윤대원, 상해 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초판 2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한홍구 역,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돌베개, 2015
이정식,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대 출판부, 2008
박영석, 일제하 독립운동사연구, 중판, 일조각, 1997
김소진, 한국 독립선언서연구, 국학자료원, 1999
김병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사, 이학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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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철, “중국의 제헌운동이 상해 임시정부 헌법제정에 미친 영향”, 법사학연구 제29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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