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년~1800년대🌺 |
✿1592년 6월 7일...임진왜란의 전쟁 중 하나인 탄금대 전투가 발발.
임진왜란 당시 충주의 탄금대에서 일어난 전투로 당시 신립이 조선군을 이끌었으나 모두 전멸했다.
1592년 6월 7일(음력 4월 28일)에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일본군과 탄금대(충청북도 충주)에서 싸운 전투. 임진왜란 개전 이후 최초의 대규모 야전이며 이 전투의 패배로 조선 조정은 몽진을 결심했다.
이름은 탄금대 전투지만 실상 전투는 중반까지 충주천 이남 달천 평야에서 벌어졌다. 전투 후반에 신립이 탄금대에서 최후를 맞이했기에 그 임팩트 탓인지 탄금대 전투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탓에 전투가 처음부터 끝까지 탄금대 인근에서만 벌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역사적인 패전이라는 점 외에도 주목받을 이유는 많다. 임진왜란 기간을 통틀어 보기 드물게 조선군이 큰 규모의 병력을 동원한 야전이었던 데다가 일정한 패턴의 공방을 주고 받는 공성전, 수성전과 달리 진법이 승부를 결정지었던 야전으로 한·일 전쟁사에 드문 정규군의 대규모 회전이다.
게다가 당시 조선 최고의 명장이라는 신립과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대결이었으며 기병 vs 보병이라는 양측의 전혀 다른 병종 구성도 묘미다. 주력 무기 또한 활 대 조총으로 서로 달랐다. 여러 모로 전쟁사적 관점에서는 흥미로운 점이 많다. | |
✿1592년(선조 25년) 6월 7일 율포 해전
조선 수군이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율포(밤개) 앞 바다에서 일본군을 무찌른 전투.
당항포해전 이틀 후인 6월 7일. 거제도 영등포에서 약탈을 하고 있는 일본 함대를 발견한 척후선은 신기전을 쏘아 올렸다. 동풍이 심하게 불어와 추격이 힘들었지만, 역풍을 뚫고 일본의 함대를 추격했다. 반면 일본 함대는 조선 함대를 보자마자 가덕도 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급했는지 배 안의 짐짝까지 버려가며 배의 속도를 높이려 했다.
그러나 동풍이 너무 강하자 일본군 함대 7척은 방향을 남쪽으로 꺾어 율포 쪽으로 향했다. 율포에 도착하자 일본군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갔다. 조선 수군은 일본의 전함 7척을 불사 지르고, 적의 수급을 베었다. 상당히 많은 일본군이 조선 수군의 화살에 맞아 쓰러져나갔다. 율포에서의 승리 후 조선 수군이 강하다는 소문이 퍼진 것인지 일본의 전투선은 단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이순신의 승리들은 임진왜란 당시의 분위기를 일시에 바꿔놓은 기적적인 쾌거였다. 해군에서 모두 승리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여기저기 몸을 숨겼던 지방의 수령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군인들도 돌아왔으며, 의병 봉기도 이곳저곳에 일어났다. 두 차례 출정에서의 승리는 막혀 있는 혈관에 피를 통하게 하여 피폐한 조선에 다시금 생기를 불어넣었다.
"당포파왜병장"은 이순신의 애민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내용 또한 많았다. 또한 사상자들의 명단을 기록하였는데, 귀천을 가리지 않고 천민들에게는 입영할 당시 한자로 이름을 지어준 것으로 보인다. 사망자의 장례비와 유족에 대한 위로 또한 베풀게 하였다. 천민 출신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이순신을 보고 있으면 진심으로 애민하는 마음이 느껴지고, 임진왜란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이었는지, 임진왜란의 분위기를 바꿔놓았고,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고맙고 감사한 위인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 |
✿1895년 6월 7일, 마르코니, 무선 전파 라디오 발명
마르코니와 그가 만든 무선전신기.
1895년 6월 7일. 이탈리아 볼로냐 지방의 한 언덕에서 마르코니(Guglielmo Giovanni Maria Marconi, 1874년 4월 25일 ~1937년 7월 20일)라는 젊은 과학자가 금속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 금속판은 유도코일을 통해 공중선과 연결돼 있었다.
맞은편 언덕에서 열심히 검파기를 들여다보고 있던 그의 조수가 순간 벌떡 일어서더니 공중에 총을 쏘았다. 마르코니가 보낸 전파신호가 검파기에 포착됐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시공을 초월해 전파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한 과학자의 집념이 확실히 증명되는 동시에 라디오가 지구상에 태어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 |
🌱1900년대🌱 | |
🌳09년 사립학교 인가수 774개교 🌳09년 13도 창의군 대장 이인영, 황간에서 체포됨 🌳18년 조선식산은행령 공포(10월1일 설립) 🌳20년 대한독립단 부총재 백삼규, 일본군에 피살됨 | |
🌳20년 간도국민회 소속 홍범도 부대, 만주 봉오동에서 일본군 연대병력 격파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
6월 7일 오전 6시쯤, 일본군이 고려령 골짜기에 다다르자 매복 중이던 독립군은 일본군에게 사격을 가하고 뒤로 빠지는 전법을 구사했다. 두 번이나 교전하는 척하면서 봉오동 깊숙한 곳으로 일본군을 유인하는 과정에서도 일본군은 120명이나 사살됐다. 마침내 일본군 주력부대가 포위망 한 가운데로 들어설 즈음 700여명의 독립군 총구가 불을 뿜었다. 3면에서 가해지는 일제사격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일본군은 봉오동에서 2백여 명의 부상자와 함께 157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고 다시 두만강을 건너왔다. 독립군의 피해는 사망 4명에 중상 2명뿐이었다. 하지만 이 전투도 시작일 뿐 4개월 뒤 청산리 대첩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
🌳26년 총독부, 만세 운동을 막기위해 서울에 7000명의 군인 배치. 🌳37년 총독부, 한국 여인들의 금비녀 등 헌납을 강요. 🌳37년 안창호 등 150여명,동우회(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됨 🌳50년 북한, 남북한 총선거 제의 🌳50년 한국군, 유엔군에 편입 | |
🌳54년 세계 최초 컴퓨터 개발자 앨런 튜링 자살
현대 컴퓨터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튜링 머신’을 1937년 세계처음으로 고안한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 (Alan Mathison Turing, 1912년 6월 23일 ~ 1954년 6월 7일) 이 1954년 6월 7일 청산가리가 든 사과를 먹고 자살했다. 동성연애가 알려져 풍기문란죄로 기소된 압박감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최대의 발명품 중 하나는 '컴퓨터의 발명'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계 최초의 컴퓨터는 1946년 2월에 공개된 에니악(ENIAC)으로 알려져 있었다.
1만7천여 개의 진공관을 사용한 30t짜리 괴물인 에니악은 펜실베이니아대학의 모클리(1907-1980)와 에커트(1919-)가 미육군의 포탄과 미사일의 탄도계산을 하기 위해 발명했고, 에니악은 훗날 수소폭탄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 중심의 컴퓨터 역사는 그 동안 일급비밀로 감춰졌던 영국의 콜로서스(Colossus)가 일반에 공개됨에 따라 그보다 먼저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컴퓨터가 1943년 12월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Colossus computer
수학자이자 과학자인 앨런 튜링의 일생에는 그 어떤 과학자보다 많은 이야깃거리들이 숨겨져 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한 전쟁 영웅이었을 뿐만 아니라 컴퓨터의 아버지, 세계 최초의 해커, 인공 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개념을 처음 생각해 낸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모든 업적에도 불구하고, 당시 영국은 그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빼앗아 버렸다.
사후 59년만인 2013년 12월 24일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크리스 그레일링 법무부 장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튜링의 동성애 죄를 사면하였다. 이어서 무죄 판결을 받고 복권되었다. | |
🌳64년 노동신문, 평양 경제 선언을 비판한 프라우다 지 반박. 🌳68년 제1차 한-일 국회의원 간담회 열림 🌳72년 문교부, 교육용 기초한자 1,781자 선정 발표 | |
🌳75년 유제두, WBA 주니어미들급 세계챔피언 획득
| |
🌳76년 제1차 한·미 연합군사훈련(팀스피리트 훈련) 개시
| |
🌳80년 서강대교가 완공되다.
서울시민들의 든든한 발길. 마포구 신정동과 영등포구 여의도동을 이어준다. | |
🌳82년 모부투 자이르 공화국 대통령 방한(9일 공동성명 발표) 🌳82년 비동맹외상회의, 북한의 주한 외국군 철수 및 유엔군사령부 해체 제의 거부 🌳85년 전학련 주최 국민대토론회집회(서울大), 학생등 6000여명 참석 🌳85년 광주사태 전모 발표-국방장관,국회 국방위원회 재확인 🌳85년 尹국방부장관, 국회에서 광주사태 사망자는 당초발표대로 191명임을 재확인 🌳88년 제20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 개막 🌳89년 전두환 전 대통령, 5공청산을 위해 공개증언도 좋다고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에 밝혀 🌳89년 대우조선 폐업, 노조원 파업결정후 발표. 全노조원 사업장 사수 🌳90년 서울시, 호화결혼식 혼주명단 공개. 예식장· 호텔 세무조사키로. 🌳90년 국내건설경기의 호황으로 건축용 철강재 품귀 상태 속에 북한산 철근 수입이 급증 🌳90년 시인 모윤숙 세상 떠남 🌳91년 치안본부, 각종 시위 주도 범국민대책회의와 전대협간부 88명에 대해 일제 검거령 🌳91년 성균관대생 김귀정양의 사체부검이 백병원 에서 실시돼 압박에 의한 질식死로 추정. 🌳91년 제3차 국토개발계획 2차 시안 발표, 송탄 등 신도시 추진 🌳92년 안기부, 독일(구동독) 라이네펠레 건설회사에 파견근무 북한 설계사 金永成씨(58 ) 귀순 🌳93년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환경문제 논의 위한 東亞太환경의원회의 창설. 초대회장 박준병의원. 🌳93년 보사부, 약사관련 규칙개정으로 한˙약사 분쟁 악화. | |
🌳95년 이등휘 대만 총통, 대만 역사상 최초로 미국을 방문
1994년 5월4일 리덩후이(李登輝, Lee Teng-hui, 1923년 1월 15일 ~ ) 대만 총통을 태운 비행기가 코스타리카로 가던 도중 연료를 공급 받기 위해 미국 호놀룰루 공항에 잠시 기착했다. 여정에 지친 이총통은 호놀룰루에서 하룻밤 쉴 것을 미국 정부에 요청했지만, 거절 당했다. 그가 미국 땅에 발을 디딜 경우 중국이 반발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의 5대 교역국이자 ‘전통적 우방’인 대만의 국가 원수는 기내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수모를 겪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상원은 즉시 대만 관리들의 미국 방문을 허용하라는 결의안을 제출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국무부는 대만 정책을 조심스레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1979년 미국이 대만과 단교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94년 9월 미국 정부는 대만과의 통상 관계를 강화하고, 대만의 각료급 관리가 미국을 방문하거나 미국 관리와 만나는 것을 허용했다. 미국의 대만 정책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작은 신호였다. 그러나 그때도 대만 총통의 방미는 허용되지 않았다.
리덩후이 총통이 호놀룰루에서 수모를 겪은 지 1년 뒤인 1995년 5월 초 상원은 97 대 1, 하원은 3백60 대 0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리덩후이 총통의 방미를 허용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5월22일 클린턴 대통령은 그가 개인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리고 그는 6월7일부터 6일 동안 모교인 코넬 대학 졸업식에 참석해 연설했다. | |
🌳96년 통상산업부, 경제협력개발기구의 시범연구 개발 사업인 지적생산시스템 컨소시엄에 참여 | |
🌳96년 음반 사전심의제 폐지
1995년 12월에 개정된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음미법)이 1996년 6월 7일부터 발효되어, 가요음반에 관한 사전심의가 폐지되었다. 그 동안 『창작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 규정』이란 비판이 끊이지 않았던 이 제도의 폐지로 창작자들의 표현영역은 훨씬 넓어졌다. 반면 음반 유통에 대한 칼자루를 휘두르던 공연윤리위원회의 권한은 대폭 축소되게 됐다.
‘키다리 미스터 김’ (이금희, 1966년, 단신인 박정희 대통령의 심기 불편), ‘거짓말이야’ (김추자, 1971년, 불신 조장), ‘물 좀 주소’ (한대수, 1974년, 물고문 연상), ‘한잔의 추억’ (이장희, 1975년, 가사 퇴폐), ‘고독한 디제이’ (이재성, 1986년, 다운타운 DJ 사기 저하), ‘시대유감’ (서태지와 아이들, 1995년, 사회비판적 가사)….
1996년 6월 7일 음반 사전 심의제가 폐지되기 전까지의 금지곡 사유는 어처구니없는 것들이 부지기수다. 특히 박정희 정권 때인 1975년엔 한 해에만 무려 225곡이 무더기로 금지곡 명단에 올랐다. 이유는 대부분 ‘퇴폐’(패배적, 자학적, 퇴폐적 가사)와 ‘불온’(국가안보, 국민총화에 악영향)이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아침이슬’ 같은 국민적 애창곡이 금지곡이 된 이유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당시 두 노래에 붙여졌던 금지 이유는 ‘사유 없음’이었다. | |
🌳97년 제5차 아.태환경개발의원회의, `서울선언문' 채택 | |
🌺2000년대🌺 | |
✿2021년 6월7일.. '한일 월드컵 영웅' 유상철 전 감독, 암 투병 끝에 사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