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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짐승은 사자 같고, 둘째 짐승은 송아지 같으며, 셋째 짐승은 사람과 같은 얼굴을 가졌고, 넷째 짐승은 날아다니는 독수리 같더라(계 4:7).
이 네 가지 짐승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제 설명할 것인데 내가 강조하는 것은 이와 같은 짐승들은 하늘나라에 실제 있는 존재들이며 이들에 대한 묘사는 상징이 아닌 실제라는 것이다. 사자는 지상에서 모든 맹수의 대표격인데 물론 이 부분에 대해 이견을 내놓을 수도 있다. 아프리카 사자와 시베리아 호랑이가 1:1로 대결하면 호랑이가 이긴다고 한다. 또 코뿔소는 호랑이와 사자 둘다 이길 수 있는 포악한 맹수이고 그런 식으로 나가면 사자보다 센 포식자가 더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자를 땅에서 제왕인 맹수로 지목하는 이유는 자연, 생태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예언적 의미가 있어서다.
유다는 사자의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네가 먹이를 놓고 올라갔구나. 그는 몸을 구부리고 웅크림이 사자 같고, 늙은 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성나게 하리요?(창 49:9).
왕의 두려움은 사자의 포효와 같으니, 누구라도 그를 노하게 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혼을 거슬러 죄를 짓느니라(잠 20:2).
땅을 통치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 지파의 사자라 불리시는데 구약에 그에 관한 많은 상징과 예표가 등장한다. 주님의 상징에 사자가 매칭된 이유는 그 맹수의 용맹성, 투지와 끈기, 위엄 때문이다.
잘 걷는 것 세 가지가 있고, 정녕, 위풍있게 다니는 네 가지가 있으니, 짐승 중에서 가장 강하여 어떤 것에게서도 물러서지 아니하는 사자와(잠 30:29-30).
사자는 일반적인 고양이과 맹수들 가운데 가장 위엄과 권위가 있는 짐승이요, 그래서 위엄 있는 왕에게는 사자라는 찬사가 붙곤 한다. 이를테면 살라딘과 대적했던 사자왕 리처드 같이 사자라는 상징은 가장 용맹하고 권위 있는 왕에게 붙는 칭호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들이 함께 누울 것이요,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으리라(사 11:7).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요 사자가 송아지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흙이 뱀의 양식이 될 것이라. 그들이 나의 모든 거룩한 산에서 해치지도 손상시키지도 않으리라. 주가 말하노라(사 65:25).
천년왕국이 되어 주님께서 유다 지파의 사자인 왕이 되시어(계 5:5) 다스리시는 때에 지상에는 야생 사자들이 여전히 있을 것인데 그러나 그들은 포식자가 아닌 초식동물인 사자로 바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 이는 너희의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기 때문이니라(벧전 5:8).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기에 여러분이 그 악한 사자와 선한 사자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아야 한다. 네 그룹들 가운데 사자 생김새를 한 그룹은 지상의 육식 동물들을 대표하는 자로서 다시 말해 그들을 책임진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가서 길에 버려진 그 사람의 시체를 보니 나귀와 사자가 그 시체 곁에 서 있는데 사자가 시체를 먹지도 않았고 나귀를 찢지도 아니하였더라(왕상 13:28).
남유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북이스라엘에서 금지된 행동을 했을 때 주께서는 그에게 사자를 보내시어 죽이게 하셨다. 그 사자는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죽은 선지자를 먹지는 않았다. 이 대목에서는 맹수인 사자가 신실한 주님의 사역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데 주님 옆에 지키고 있는 신실한 사자 그룹과 같은 충성이다.
둘째 짐승은 송아지 같으며 왜 다 자란 소가 아닌 송아지가 둘째 그룹의 얼굴일까, 이것은 다섯 번째 그룹이 바로 소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해가 간다. 다섯 번째 그룹은 소의 모양을 했었는데 그가 쫓겨나고 나서 그룹은 넷이 남았다. 그 넷 중 하나의 얼굴은 송아지처럼 생겼다.
소와 송아지 모두 인간들이 전통적으로 우상시했던 짐승이다. 지금도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소를 극히 신성시해서 인간 위에 상전으로 받들어 모시기까지 한다. 힌두교도들은 소에게 코두레를 꿰거나 멍에를 지우는 것을 금기시하며 길거리에 자유로이 풀어놓고 다니게 한다. 때문에 인도의 길거리는 아무데나 싸놓은 쇠똥 때문에 매우 불결하지만 인도인들은 그래도 소님을 신으로 모셔야 한다고 그런 고충을 감수하고 살아간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 하고 나서 제일 처음 벌였던 반역과 배교 행위가 송아지 숭배와 관련되어 있었던 것을 기억하지 않는가? 그들은 이집트에서 섬기던 소의 신 아피스를 추종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가 그들의 손에서 그것들을 받아서 주조한 송아지를 만든 후에 새기는 도구로 모양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기를 “오 이스라엘아, 이것들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온 너의 신들이라.” 하더라(출 32:4).
하고 많은 날짐승, 들짐승, 바다짐승이 있고 그들의 종류에 따라 신들의 수도 많은데 왜 그 이스라엘인들은 그 중에서 송아지를 집어내어서 신성시하려 했을까? 이는 사탄의 본체가 소 모양의 다섯 번째 그룹이었기 때문에 마귀가 가장 선호하는 우상의 형태가 소여서다. 왜 사탄과 그의 수하들이 뿔달린 마귀로 묘사가 되는지 여러분은 궁금하게 생각한 적이 없는가? 왜 사탄에게 뿔이 있는가, 그는 숫소 모양의 그룹이었고 비록 지금은 붉은 용의 형태로 바뀌었지만 과거의 소로서의 얼굴 형태를 그대로 갖고 있다. 그래서 그는 소처럼 굽이 있는 존재, 소꼬리 같은 꼬리가 있고 버팔로 같이 긴 두 뿔이 있다.
이제 그들이 더욱더 죄를 짓고 자기들을 위하여 그들의 은으로 형상들을 부어 만들고 자기들의 고안대로 우상들을 만들었으니, 그 모두가 장인들이 만든 것이라. 그들이 그것들에 대해 말하기를 “희생제를 드리는 자들은 송아지들에게 입맞출지니라.” 하는도다(호 13:2).
이스라엘의 송아지 또는 소 숭배 행태는 바빌론 포로기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송아지들에게 입맞출지니라", 저것은 적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의식의 외양이 그 자의 형상에 키스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디에 입맞출지 생각해 보라. 그 발에 입맞추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에 아직 칠천 명을 남겨 두었나니, 곧 바알에게 꿇지 아니한 모든 무릎과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모든 입이라.” 하시니라(왕상 19:18).
바알을 숭배하는 의식은 먼저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그의 발에 입맞추는 식으로 진행된다. 로마 교황을 접견하는 미신적 카톨릭 교도들이 교황의 보좌 앞에 무릎꿇고 납작 몸을 바닥에 댄 채로 그 발에 입맞추는 것과 비슷하다.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고 하였고, 또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은 합당하니라.”고 하였느니라(딤전 5:18).
소를 사탄에 빗대어 말할 때 부정적인 의미가 부각될지라도 원래 소라는 짐승은 오직 인간에게 모든 혜택을 제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선한 존재다. 인간은 소의 모든 부분을 먹거나 각종 도구로 활용할 수 있으며 거의 버리는 부분이 없을 정도다. 게다가 현대에 와서 트랙터라든가 콤바인이 나와서 농사일에 관해 소의 불가결성이 좀 감소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소는 인간의 충직한 벗이자 하인으로서, 또 식량 제공자로서 존재하고 있다.
이런 소의 충직성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나 기타 사역자들에 대해 소로 비유하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은 하늘에 그 원형이 있는 것들이요, 또 좋은 것을 변질시켜서 우상 숭배에 써먹게 하는 것이 사탄이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고 바산의 힘센 황소들이 나를 둘러쌌나이다(시 22:12).
성경에서 황소(bull)를 이야기할 때는 예언적인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다. 가령 위 구절 같은 경우 바산의 힘센 황소들은 문자적인 황소가 아닌 특정 인간들이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문하고 모독하고 처형했던 그 군인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다. 그들을 황소들로 비유했는데 사탄의 이미지인 황소에 그대로 대입해서 보면 그 자들이 자기 아비를 쏙 빼어닮은 황소 같은 마귀의 자식으로서 그 일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들의 얼굴 모습을 보면, 그들 넷은 오른편에 사람의 얼굴과 사자의 얼굴을 지녔고, 그들 넷은 왼편에 황소의 얼굴을 지녔으며, 그들 넷은 또한 독수리의 얼굴도 지녔더라(겔 1:10).
에스겔서에 묘사된 그룹들은 계시록과 차이가 있는데 우선 그들의 얼굴이 네 면으로 되어 있어서 각 그룹이 네 얼굴을 가졌다. 그들이 가진 공통의 얼굴 가운데 하나가 황소이다. 황소를 제외하면 나머지 세 짐승은 계 4장에 등장하는 그것들과 똑같다. 다만 황소만 새로 등장했는데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보좌가 하늘을 떠나 지상으로 내려올 때 송아지 얼굴의 그룹이 황소 얼굴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송아지는 사라지고 황소가 되었고 네 그룹들은 각기 서로의 얼굴이 반영되어 네 얼굴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룹들이 움직이는 보좌를 둘러싸고 이동할 때는 넷으로 얼굴 형태가 변환된다.
다시 말해 "송아지"(고정시)와 "황소"(이동시)야말로 그룹들이 가진 본체, 본모습이며 그룹들이 독수리, 사람, 사자의 얼굴을 가졌을지라도 그들의 전체적인 신체의 모습은 황소를 빼닮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들은 여자들이 하이힐을 신는 것처럼 다들 발굽을 가지고 있다.
셋째 짐승은 사람과 같은 얼굴을 가졌고 사람과 같은 얼굴을 가졌다 해서 이 셋째 짐승이 사람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지구상의 대다수 생물들은 인간의 얼굴과 구조적으로 닮게 창조되었다. 눈 두개, 코 하나, 입 하나, 대부분 그런 식으로 마스크가 구성된다. 심지어 물고기들 가운데는 "인면어"라는 괴이한 종류가 있는데 옛날 뱃사람과 어부들은 인면어를 인어로 혼동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물론 듀공이나 물범처럼 진짜 더 인어처럼 생긴 생물도 있지만 여러분이 바다생물이든 새든 개나 고양이든 그들의 몸의 형태와 얼굴 생김새를 눈여겨 본다면 알 것이다. 그들은 모두 인간의 마스크와 유사하게 지어졌고 또 인간은 하나님의 얼굴 생김새(주 예수 그리스도)와 유사하게 창조되었다.
그래서, 왜 셋째 짐승이 사람과 같은가,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 이유가 그를 신실한 종으로 임명하여 땅을 다스리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고 그것을 정복하라. 그리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인간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 지어졌으며 셋째 짐승이 자신의 본분과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굳건하게 하나님 보좌의 한켠을 지키고 있듯이 아담도 종이라는 제 위치를 벗어나지 않았더라면 창 1:28의 명령이 어떤 중단됨이 없이 영원히 지속되며 땅과 하늘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사탄이 자기 위치를 저버리고 반역했듯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으며 본분을 버리고 마귀의 자식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위 명령은 천년왕국 이후에나 온전히 수행될 수 있게 유보된 것이다. 물론 지금도 인류는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면서 정복하고는 있다. 그러나 죄성이 그들 안에 있기에 인간 권세의 확장은 생태계 파괴와 전쟁, 오염을 수반하면서 세상을 붕괴시켜 가고 있다. 그런 모순이 없어지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나야 한다.
넷째 짐승은 날아다니는 독수리 같더라 넷째 짐승은 그래서 날짐승의 제왕인 독수리가 등장한다. 사자 같은 경우는 진짜 맹수의 제왕인가 논란도 있지만 독수리는 이론의 여지 없이 공중의 제왕이 맞다. 독수리도 많은 종류가 있지만 그 중 예전부터 귀족 가문이나 제국의 문장으로 잘 쓰이는 독수리는 흰머리 독수리다. 미국의 국가 표식이자 대표 상징으로 쓰이는 흰머리 독수리는 그 위용을 볼때 사자에 결코 뒤지지 않으며 왜 공군 표시로 독수리를 쓰는지 우리가 그 모습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독수리는 가장 민첩하고 가장 무자비하며 또 가장 관찰력이 좋은 포식자 조류이다. 미국은 공군과 해군의 힘으로 전세계를 반세기 넘게 패권 국가로서 재패하고 있다. 그들이 오대양을 지배하는 힘의 원천은 항모 전단에 실린 비행기들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독수리의 나라이고 하늘에 있는 독수리 그룹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힘을 부어 주신 것을 알아야 한다.
어디든지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함께 모이리라(마 24:28).
독수리는 시체를 먹기 때문에 율법에서 부정한 새로 다뤄진다. 시체를 먹는다는 것은 아마겟돈 전쟁 때 독수리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 2억 UN 평화 유지군의 시체 위에 내려와서 시체를 쪼아먹는 사건과 관련된다. 독수리들은 하나님의 예언 성취에 긴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주님께 매우 신실한 짐승들인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유 때문에 독수리 얼굴을 한 그룹을 옆에 두신 것을 알기 바란다.
그때 그 여인이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았는데, 이는 그녀가 광야에 있는 자기 처소로 날아가서 그곳에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부양받으려 함이더라(계 12:14).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대환란 때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를 향해 비행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독수리는 시체를 먹는 날짐승 독수리가 아닌 "공군 표시"의 상징성과 같은 맥락에서 수송기들이다.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가 여객기나 공군 수송기에 태워져서 광야로 이동할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후3년 반의 적그리스도 박해를 견뎌야 한다.
네 짐승들은 각각 자기 주위에 여섯 개의 날개를 가졌고 안쪽에는 눈들로 가득하더라. 또 그들은 밤낮 쉬지 않고 말하기를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여!” 하더라(계 4:8).
이제 그룹들의 전체적 외양을 더 묘사하고 있는데 어쨌건 매우 기이한 존재들임이 분명하다. 천사들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고 인간 남자와 다를 바 없는 외양을 가졌다. 그룹들은 천사들과 달리 여섯 개나 되는 날개가 있고 또 눈들이 가득한 모습이다. 이슬람 창시자 마호메트는 그룹들과 천사들을 분간할 수 없었던 게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브리엘 천사를 만났다고 주장하면서 그 모습을 날개가 육백 개 달린 괴물로 묘사했던 것이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그룹들은 육백 개의 날개 같은 것은 없고 여섯 개만 있으며 스랍들도 여섯 개의 날개를 가졌다(이사야 6장).
또 그 가운데서 네 생물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들의 생김새는 이러하더라. 그들은 사람의 모습을 가졌으며 각기 네 얼굴을 가졌고 각기 네 날개를 가졌더라(겔 1:5).
에스겔서에 등장하는 그룹들과 계시록의 그룹들이 얼굴이 전자는 네 면을 가졌고 후자는 하나라는 면에서 차이가 있고 또 날개의 숫자도 다르다. 에스겔서 그룹들은 여섯 개가 아닌 네 개의 날개를 가졌다고 나온다. 다만 이 날개들은 실제적 비행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고 있어서 날개 갯수의 차이가 비행이라는 목적과는 무관하다고 본다.
에스겔서와 계시록에 나오는 그룹들의 날개 수 차이 때문에 어떤 사람은 계시록의 네 짐승은 그룹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 무엇이라 본다는 것인가? 이사야서 6장의 스랍들은 여섯 개의 날개를 갖고 있다.
웃시야왕이 죽던 해에 내가 또 보았는데, 주께서 높게 들린 보좌에 앉으시고, 그의 옷자락은 성전을 가득 채웠더라. 그 위에는 스랍들이 서 있어 각기 여섯 날개를 가졌는데 그 둘로는 그의 얼굴을 가리고 또 둘로는 발을 가리며 둘로는 날았더라(사 6:1-2).
여기에 스랍(세라핌)이라는 존재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총 몇인지 숫자는 나와 있지 않다. 에스겔서의 그룹들은 비행을 위해 날개를 사용하지 않는데 스랍들은 여섯 개 중 두 개의 날개로 실질적 비행을 한다. 이 점에서 스랍들은 그룹들과 중요한 차이점이 있고 그래서 나는 그룹과 스랍은 구분된 영적 존재로 간주하지 둘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비록 어떤 주석가들과 성경 해석가들이 둘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다 해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내가 해석하는 날개 숫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에스겔이 보았던 그룹들은 날개가 넷이었고 요한이 본 짐승들(그룹들)은 여섯이었다. 뭐가 떠오르지 않는가? 인류 역사 4천년, 또 6천년이 연결되지 않는가 말이다. 이것은 평이하게 추출되는 의미로서 매우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물론 이 추측이 틀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른 가능성이 무엇인가 보자.
그가 그룹을 타고 나셨으니, 바람의 날개 위에서 보이셨도다(삼하 22:11).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동양에서 땅은 네모지고 하늘은 둥글다는 개념이 있다. 이것은 성경에서 기인한 관점인데 땅은 '네 방위'와 관련되어 4라는 숫자가 자주 쓰인다.
하나님께서 그룹을 타고 나실 때, 즉 그룹들을 데리고 흰 말을 타고 예수님이 내려오신다면 그 '바람의 날개'는 땅과 관련된 숫자인 4에 맞춰질 것이다.
이 일들 후에 내가 보니,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사방에서 부는 바람을 붙잡아 그 바람이 땅이나 바다나 어떤 나무에도 불지 못하게 하더라(계 7:1).
땅의 사방에서 부는 바람은 동풍, 서풍, 남풍, 북풍, 그렇게 넷이다. 주님께서 타고 내려오시면 지상에서 그룹들의 '바람의 날개'는 에스겔서처럼 넷이 될 것이다.
계시록의 그룹들이 날개가 여섯인 이유는 그들이 있는 하늘나라가 '입방체'인 점과 상관이 있다. 하늘나라는 평평하지 않은 입체 공간이다. 여러분이 계 21장에 묘사되는 새 예루살렘을 볼 적에 그 도성이 피라미드를 두 개 붙여 놓은 다이아몬드 꼴의 입방체 미니 행성임을 알 것이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동서남북>에 추가해서 <위아래>가 있고 하늘나라에서 그룹들은 여섯 개의 날개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안쪽에는 눈들로 가득하더라 이것은 공포 영화나 이토 준지의 만화에 나오는 눈이 가득한 생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는데 사실은 괴담이 소설들이 성경의 아이디어에 기초해서 그런 이야기를 쓴 것이다. 그룹들이 총 몇 개의 눈을 가졌는지 알 수가 없지만 "가득하더라"는 표현을 볼때 열 개, 스무 개 정도는 절대 아니고 수백 개는 족히 되지 않을까 싶다.
여러분이 상상력을 좀더 키워서 이런 식으로 사고를 전환해 보면 이해가 빠를 듯 하다. 배트맨 영화에 나오듯이 고담 시티 전체를 관찰할 수 있는 모니터링 룸에서 수많은 CCTV를 보는 관찰자 시점 말이다. 하늘나라의 회의실에는 자동으로 지상의 모든 상황을 송출할 수 있는 모니터링 시스템이 제공되고 있는데 네 그룹들이 바로 카메라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도리어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모두 세어 두셨느니라.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 12:7).
지상에서 인간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 생각의 모든 부분이 하늘나라에서 녹화, 녹음되고 있다면 그것들이 기록되어 집성될 책들은 누군가 열심히 받아 적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또 내가 죽은 자들을 보니, 작은 자나 큰 자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으며 또 다른 책도 펴져 있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라. 죽은 자들은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그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더라(계 20:12).
네 짐승은 '동, 서, 남, 북'의 네 방위, 지구상의 전체를 카버하는 일종의 '전시안'을 가지고 모든 인간과 세상사를 실시간 방송, 녹화하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편에서는 위안이 되고 보상의 근거가 되는 것이지만 백보좌 심판석에 서야 할 불신자들의 편에서는 그 자들이 불못에 떨어져야 할 죄목들의 기소 근거가 되는 무시무시한 사실이다.
하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창공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보여 주니(시 19:1-2).
네 생물, 네 그룹이 노래하는 찬송가의 주제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그들은 24시간 쉬지 않고 찬양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하늘나라에서 24시간 항상 BGM으로 깔리는 한 가지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 주제는 "하늘에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재림을 주제로 한 찬송가를 한국의 교단 교회들에서 얼마나 부르고 있는가? 무후천년주의를 신봉하는 목사가 인도하는 교회에서는 소위 절기(사순절, 맥추감사절, 성탄절, 부활절 등)마다 절기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그들은 환란전 휴거, 7년 환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 그런 교리들을 전체적으로 거부하고 불신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에서 네 짐승이 우렁차게 찬송하는 예수님의 재림 노래를 결코 부르지 않고 또 그런 노래를 이단 노래라고 배척하는 것이다.
이들 네 짐승은 솔로로서 테너나 바리톤 같은 가수가 아니다. 이들은 몸에 많은 소리통을 가진 각각의 생체 오케스트라들이다. 한 짐승이 내는 소리가 지구상의 어떤 연합 오케스트라들보다 웅장하고 위대한 음악이다. 런던 심포니, 뉴욕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 그들이 전체 합쳐서 곡을 연주하는 것 같은 장엄한 노래 소리가 이 네 짐승들로부터 스테레오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다섯 번째 그룹이었던 사탄 또한 몸에 온갖 악기를 가진 연주가였다.
네가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 모든 귀한 돌인 홍보석과 황옥과 금강석과 녹보석과 얼룩마노와 벽옥과 사파이어와 에메랄드와 홍옥과 금으로 덮여 있었고 네 북들과 관악기들이 만들어짐이 네가 창조되던 날에 네 안에 예비되었도다(겔 28:13).
사탄은 "덮는 그룹"(겔 28:14)이었고 다시 말해 그는 동서남북을 담당한 네 그룹들보다 월등한 자로서 보좌 위를 자신의 날개들로 덮는 다섯 번째 그룹이었다는 것이다. 사탄 또한 몸에 악기들을 갖고 있었는데 북들과 관악기가 그의 담당 파트였다. 부두교라던지 드루이드교 같은 직접적인 사탄 숭배자들, 토펫에서 갓난아기를 인신제물로 바칠 때 사용된 악기가 북이다. 교회 음악에서 "북 치는" 사람들이 현대 은사주의자들이요, 그들의 영향을 받은 많은 현대 교회들이다. 교회 음악에는 메탈이나 북이 쓰이면 곤란하다. 그것은 육신을 자극하는 혈육에 속한 음악이기 때문에 천상의 곡조인 찬송가에는 쓰일 수 없다.
거룩하시도다가 세 번 반복되는 것은 당연히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공경,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찬양임을 알 수 있다.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여 이것은 계 1:17-18에서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을 소개할 때 사용된 표현과 같다.
전에도(교회시대: 계 2-3장), 지금도(환란시대: 계 4-19장), 앞으로 오실(재림과 천년왕국: 계 19-20장)임을 여기서 알 수 있다. 내가 "전에도"를 A.D.90년대에 적용하지 않고 2천년의 교회사 전체에 맞춘 이유를 알겠는가? 계 1장을 설명하면서 이미 많이 이야기했었다. 사도 요한은 성령의 권능에 의해 미래로 가서 본문의 상황을 겪고 있기 때문에 "전에도"는 A.D. 1세기에 국한되는 게 아닌 2천 년 교회사 전체에 해당된다.
그 짐승들이 보좌에 앉으시어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분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릴 때(계 4:9).
보좌에 앉으신 그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고 "앞으로 오실" 그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물론 성부 하나님께서도 결국 계 21장에 이르러 이 땅으로 오실 것이나 일단 예수님께서 먼저 오셔서 천년왕국을 통치하시기 때문에 8절에서 언급된 재림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9절에서는 왜 보좌에 앉으신 성부께 재림의 찬가를 드리고 있는 것인가? 삼위일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이는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세 분이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요, 이 세 분은 하나이심이라(요일 5:7).
성부 하나님, 말씀 하나님(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께서는 하나이시기 때문에 성부를 높이는 것이 성자를 높이는 것과 같고 그 반대의 경우도 그렇다. 다만 성령께서는 스스로 높이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는 "성령을 높이는 찬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은사주의자들의 경우와 정반대라 할 수 있다. 그들이야말로 성부, 성자 이상으로 성령에 엄청 치성을 바치면서 높이는 자들이니 진리에 역행하는 이단자들이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신 그분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리라. 그분은 자신에 관하여 말씀하지 아니하시며, 무엇이나 들은 것을 말씀하실 것이요, 또 너희에게 다가올 일들을 알려 주시리라(요 16:13).
스물네 장로가 보좌에 앉으신 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분께 경배하며 그들의 면류관을 그 보좌 앞에 던지며 말씀드리기를(계 4:10).
스물네 장로가 취하는 이 행동은 어떤 가식이나 계산된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면 주님께서 그들의 열성과 충성을 알아주실 것이라 기대해서 짐짓 면류관을 던져 보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천년왕국에서 다스릴 통치권을 나눠주신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기뻐하심에 따른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우리는 천년왕국에서 이 땅을 통치할 주의 성도들이 현재까지 인류 역사 동안 땅을 통치해 온 여타 군주들과 현격하게 다르다는 점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불란서의 루이14세는 "왕권신수설"을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웠고 권위를 하나님께 받았다 주장하면서도 자기 백성을 자상하게 돌보지 않고 억압과 전횡을 일삼았다. 실로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왕들과 수상들, 총리들과 대통령들에게 하나님의 통치권을 부분 양도하신 것이 맞지만 루이 14세가 그 직에 신실치 못했듯이 모든 통치자들은 주님의 기준에 놓고 볼때 다 미흡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앞으로 천년 동안 평화의 기간을 주실 때 통치할 사람들은 알렉산더 대왕, 나폴레옹, 루스벨트, 케네디,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오바마 같은 교만하고 건방진 인간들이 아니다. 천년왕국을 통치할 자들은 모두 최고의 겸양을 갖춘 자들이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길 줄 아는 지혜로운 군주들이다.
하나님께서 지상 생애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연단으로 다듬고 환난으로 치시며 징계로 단련하시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들을 속이 꽉 찬 배추처럼 실한 인격체로 다듬어서 천년왕국 통치자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이 땅에서 주님의 연단을 받지 않으려 하는 자들, 소위 육신적 크리스찬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상을 받을 것이 없다. 다시 말해 그들은 천년왕국 통치에 참여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들을 치리자로 세우실 것이기에 육신적 크리스찬들은 조건이 맞지 않아 불합격인 것이다.
한국의 현재 통치자인 문씨는 어떤 사람인가, 그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서 백성을 치리한다는 그리스도인의 기초 상식이 희박한 돌대가리들이다. 그들은 민심, 촛불 같은 말을 매우 사랑하는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다수결'이었음에도 이 허망한 촛불 세력은 민심이 자기들의 권위요 신이다. 또한 문씨와 그 일족은 겸손을 찾아볼 수 없는 교만자들인데 사탄이 교만의 왕인 것처럼 그들도 말로는 백성을 최고로 받들고 섬긴다 하면서 자신들이 가장 각광받는 스폿라이트 터지는 자리에 서서 TV에 연예인처럼 얼굴 항상 들이미는 낯판때기 뻔뻔한 족속들이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집권자를 무고하게 모욕하는 게 아니며 그 문씨라는 자를 실정법적 통치자로 인정 안해서 그런 게 아니다. 느부캇넷살과 산헤립은 과거 합법적인 왕권 계승자였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니 그들은 악의 제국을 세워서 세계를 관할했다. 문씨가 받은 권위도 결국 세상 왕 사탄에게서 받은 것이요, 사탄은 하나님의 허용하심 하에 문씨에게 권력을 내려준 것이다. 나는 그 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의 정부가 사악하다 해도 법을 지키고 세금도 낸다. 다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자신을 낮추는 통치자들은 이 시대에 거의 없고 있어도 불완전한 데 반해 익지 않은 벼처럼 고개 빳빳이 세우고 자기가 가장 잘난 체 하는 위정자들은 우리 앞에 있고 그들 때문에 백성까지 함께 교만하고 부패해져 간다는 것이다.
피조물 자체도 그 썩어짐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라(롬 8:21).
죄 없는 통치자,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본연의 모습, 곧 33살 반의 예수 그리스도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서 다스리기 전까지 세상은 불의하고 교만한 왕들 밑에서 고생할 수 밖에 없다. 여러분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사회주의 포퓰리즘 문씨나 핵무기로 장난치는 북한의 김씨 같은 악하고 독살스러운 군주들 때문에 한국에 살면서 잠시 고통을 받을지라도 잠시 뒤에 주님이 오시면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자격으로 이 땅을 영광스럽게 통치하리라는 점을 잊지 말라. 문씨가 김씨가 받은 권력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며 그들은 사탄의 종들일 뿐이지만 여러분은 그것과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의로운 통치자들이 될 것이다. 다만 주님이 요구하시는 합당한 조건을 여러분이 행위와 간증으로 보여준다면 통치에 참여할 것이다.
“오 주여, 주께서는 영광과 존귀와 권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니, 이는 주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으며, 또 창조되었기 때문이니이다.”라고 하더라(계 4:11).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그리스도와 같은 속성들을 가졌고 그 분과 교제할 수 있다. 우리가 33살 반의 천사의 모양으로 바뀌어 영생을 누릴지라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계속 남아 있다. 어린아이를 이쁘다 이쁘다 하면 상투 잡으려고 한다는 옛말처럼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앞으로 주와 함께 영광 중에 산다고 해서 하나님 머리 꼭대기 위로 올라가도 되는 건 아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우리가 국가의 실정법을 지키고 치리자들을 권위로서 인정하는 것은 그들 위에 계신 하나님의 권위에 순복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권세나 권위는 하나님의 허락하심 하에서 불복종할 수도 있는데 이를테면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 체제 하에서 그가 시키는 일들, 666표를 받는 것이나 짐승의 형상에 경배하는 것을 거부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합법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권세는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롬 13:1).
하나님을 창조주로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은 믿음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이것은 여러분이 창조과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창조의 신비들을 낱낱이 공부한 끝에 이성적으로 하나님은 창조주이심을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IQ 80을 넘는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특별한 배움 없이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창조주임을 시인할 정도의 양심을 갖고 있다. 창조주를 시인하지 않는 사람들 역시 그들의 지식 결핍 때문에 시인을 못 하는 게 아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거부한 데 대해 온갖 이유를 들이대고 그것이 수용된다면 지옥에 간 사람들 중 다수가 "나는 진화론 때문에 지옥에 갔으니 내 탓은 아니다"라고 변명할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이 본질적 문제가 아니라 그들은 자기들의 양심을 버렸기 때문에 진화론이라는 사기를 믿었던 것이다. 진화론, 무신론, 실용주의, 이신론, 몰몬교, 마호멧교, 불교, 카톨릭, 칼빈주의 어떤 사탄의 속임수를 진짜로 착각하고 믿었든 본인이 그것을 믿고 지옥에 가는 것이다.
먼저 알 것은 이것이니 마지막 날들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그들의 정욕대로 행하며, 말하기를 “그가 온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의 시작부터 그대로 있다.” 하리니(벧후 3:3-4).
찰스 다윈이 진화론이라는 유사 과학을 만들어낸 이래 소위 이성과 합리를 맹신하는 현대인들은 성경은 종교요, 진화론은 과학이라는 당치 않은 이분법을 만들어서 적용해 왔다. 이 양극성의 굴레 아래 많은 기독교인들도 세뇌된 채 들어가 있다. 그들은 공립 학교에서 진화론을 사실로 배우면서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는 창조론이 맞다고 수긍한다. 두 가지 상반되는 사실을 수긍하면서도 그들이 모순을 못 느끼는 이유는 "성경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경전이요 진화론은 과학이다"라는 자기 세뇌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저 하늘에는 그 어떤 "유신론적 진화론", "창조적 진화 or 진화적 창조" 같은 것을 믿는 사상가들이 존재할 구석이 없다. 천사들은 모두 창조론자들이며 그룹들도 창조론자들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또한 창조론자이시며 하늘에 있는 모든 성도들도 창조론자들이다. 지상의 모든 육축들과 생물들은 창조론을 몸으로 대변하는 증거들이며 심지어 사탄과 악령들조차 창조를 인정한다. 오직 미혹된 얼간이 철학자, 과학자들, 그들에 세뇌된 군중들만 이 우주 전체에서 진화론을 믿는 자들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진화론자들을 무당이나 점쟁이들보다 더 열등한 무식자들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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