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14)/정진석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맞이하여 여러분과 온 세상에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성탄이 희망과 위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성탄을 맞이했습니다. 하느님은 외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무한하신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성탄 시기는 과거 이천 년 전에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오셨음을 기념하는 때입니다. 또한 현재 우리 가운데 오심을 기억하는 동시에, 미래에 이 세상을 완성하러 오시기를 기다리는 때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아주 보잘것없는 말구유에서 가장 여리고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성탄은 우리 인간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여리고 약한 모습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고 삶의 의미와 우주의 신비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며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바로 ‘인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아닌,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러 오신 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차별이 없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성탄의 기본 정신은 바로 ‘차별이 없는 세상’을 지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차별이 없어진다면 우리의 세상은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란 그 옛날 이사야 예언자가 맹수와 약한 동물들이 어울려 노는 세상으로 표현했던, 바로 모든 이가 함께 공존하는 평화입니다(이사 11,6-8 참조). 이런 평화와 행복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입니다.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소외와 차별 속에서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누리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공동체 의식보다는 개인의 이기심, 집단적 이익추구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성탄을 맞이해서 모든 어려움들을 안고, 세상의 빛이 되어 오신 주님을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두움 속을 헤매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빛이 되시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요한 1,4 참조). 따라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이 세상의 어두움을 밝게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들의 희망과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신앙인들은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또한 교회는 끊임없는 회개와 쇄신을 통해 우리 사회를 개인의 울타리를 넘어서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지도자들은 하느님께로부터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야 할 소명을 받았습니다. 지도자들이 우리 사회가 평화와 자유를 한껏 누리는 차별 없는 세상이 되도록 노력해주시기를 당부합니다. 지도자들이 억울하고 차별을 받는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한 사람의 눈물이라도 더 닦아주려고 노력한다면 그만큼 우리 사회는 더욱 희망차고 행복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성탄을 맞이하여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거듭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고 사랑하며, 섬기고 용서하는 삶을 살 때 바로 그곳에 구세주께서 오시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하느님의 끝없는 사랑과 축복이 이 시대 모든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에게 충만하게 내리기를 다시 한 번 기원합니다. 2010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대구] 사랑과 나눔이 있는 곳에 평화가 있습니다/조환길 대주교
메리 크리스마스!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교구 100주년을 앞두고 주님 은총의 해를 준비하는 우리 마음에, 그 옛날 목동들이 처음 들었던 천사들의 합창이 새롭게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예수님께서는 죄에 물들어 평화를 잃어버린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구세주 탄생의 복된 소식을 알리러 나타난 천사는 목동들에게 이렇게 전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2,10-12)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께서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하늘의 군대를 거느리고 찬란한 영광에 싸여 나타날 수도 있으셨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마구간에서 비천하게 태어나셨습니다. 주님을 알아보는 표징이 바로 가난하게 되신 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시자마자 당신을 죽이려 드는 악인들 때문에 외국으로 피하셔야 했지만,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당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용서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그저 싸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것, 우리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못하실 일이 없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기심과 폭력으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불안한 이 시대에 참된 평화가 너무나 간절합니다. 하지만 자기 안에 평화를 간직하지 못한 채 남과 평화롭게 지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모시지 않으면 돈이 아무리 많고 군대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진정한 평화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모시고 살며 그분을 본받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려고 가난하게 되신 주님처럼, 우리도 주님께서 주신 선물들을 이웃과 나눕시다. 우리의 부족함과 죄 많음을 멸시하지 않으시는 주님처럼, 우리도 서로 참아주고 받아들입시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기 예수님을 우리 가정에, 우리나라에, 이 세상에 참으로 영접하게 됩니다.“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2010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천주교 대구대교구 교구장 조환길 타대오 대주교
[부산] 하늘에서 온 평화/황철수 주교
성탄 밤 복음말씀의 마지막 단어가 '평화'였습니다. 모든 교우님들께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그 평화를 기원합니다.올해는 분단의 시대를 살아가며 ‘뜻밖의 포성’을 듣고 긴장한 우리에게 ‘평화’라는 말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 연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소망하는 평화는 대단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아침에 일어나 매일 반복되는 출근길이 오늘도 계속되는 그런 평화입니다. 저녁이면 집에 돌아와 불을 켜고 고단한 하루를 마감하는 그런 평범한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일상의 평화도 포성 한 번으로 깨질 수 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세상이 말하고 보장하는 평화에 대해서 의심의 눈길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조금이라도 ‘세상을 아는 사람’은 세상이 말하는 평화의 한계를 감지합니다. 그런 연유로 인간은 항상 ‘세상이 주는 반쪽자리 평화가 아닌 하늘이 주는 온전한 평화’를 갈구하는 종교적 존재로 살아왔습니다. 성탄축일의 메시지는 인류가 소망하던 하늘의 그 온전한 평화가 오늘 우리의 시간 속으로,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 하늘의 평화 앞에서 우리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진정한 희망이 있음을 고백하고 갈라지고 상처받은 마음의 치유와 위로를 청합니다. 구유조배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성탄복음에는 하늘에서 온 온전한 평화가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계시는 예수님이라는 신앙 공동체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결국 성탄 이야기는 단순한 탄생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이야기 형식'으로 말해지는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라는 측면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그 고백의 내용은 진정한 구세주는 단순한 정치, 군사적 메시아가 아니라 그 차원을 넘어서는 ‘인간의 마음과 혼을 온전히 치유하는 구세주’여야 함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구세주는 인간의 메시아 시스템 속에서는 주어질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인간의 메시아 시스템은 엘리트 가문이나 권력의 최고 정점을 모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탁월한 가문과 권력을 모태로 하더라도 여기서 나온 메시아는 궁극적으로 원죄적 세상의 악순환 구조를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만들어낸 모든 메시아는 '불완전한 평화 밖에는' 줄 수 없습니다. 참으로 인류가 오랜 세월을 통해 염원한 메시아는 인간역사의 수평적 산물이 아니라 역사마저도 구원할 수직적 선물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인류의 염원에 하느님께서 답하신 선물이 예수님입니다.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어떤 인간도 생각지 못한 곳에서의 출발은 이미 인간이 기획한 메시아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구원의 시스템이 시작됨을 말하고 있습니다.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새로운 사랑과 평화의 길을 통해 한 해의 여정 속에 쌓여진 모든 아픔과 상흔들이 치유되고 정화되기를 기원합니다.
[의정부] 정의가, 큰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 72,7)/이기헌 주교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예수 성탄의 기쁨이 온 세상에 가득하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누도록 합시다.대림절을 지내며 성탄을 준비하며 기다리던 우리는 그 옛날 메시아를 고대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랜 기간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그분이 오시면 어두움과 불의가 가시고, 빛과 즐거움이 넘치고 정의와 평화가 가득찬 세상이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의가, 큰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 72,7) 라고탄원하였으며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본다”(이사 9,1)는 예언자의 말을 믿었습니다.금년도 성탄절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 또한 그들과 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정의와 평화가 요청되는 시기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사람은 모두가 그 품위 때문에 존중받고,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합니다. 권력과 재물, 학벌과 사회적 지위로 평가하고 또 차별하는 세상에는 하느님의 정의가 자리할 수 없습니다.지난 11월 23일 북한은 우리 서해 연평도를 향해 포탄을 퍼부었습니다. 우리 군도 이에 대응해 포탄을 북한의 해안포 진지를 향해 쏘았습니다. 가히 전쟁이라 할 수 있는, 결단코 일어나서는 안 될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남북간에 전면전이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한반도를 휘감고 있습니다.백주에 버젓이 포탄을 퍼부어 인명을 살상하고 전쟁의 위협을 가한 북한 정권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우리 민족의 미래에 암운을 드리운 파렴치한 행위이고, 그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 될 수 없는 범죄행위이기 때문입니다.아울러 사태가 이렇게 된 데는 현 정부의 대북정책도 탓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화를 지향하는 대북정책이 실행되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세계의 이목이 한반도로 향하고 있는 이 시기에 우리는 평화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나라를 맡기며 그분의 뜻이 한반도 안에서 펼쳐질 수 있도록 기도드려야 하겠습니다.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던 시기에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목동들에게 하신 말씀은 ‘러시아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평화를 위해 바치는 기도입니다. 북한의 회개와 우리 모두의 회개를 위해 기도드리는 일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우면서도 소중한 일입니다.파티마에서 성모님의 발현을 본 사람도, 성탄 밤에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처음 접한 사람도 모두 양을 치는 목동들이었습니다. 목동들이 하늘로부터 들은 것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라는 말씀이었습니다.목동들은 자신이 맡은 일을 묵묵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었으며,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불안이 사라지도록 참 평화를 구하면서, 목동들의 묵묵하고 성실한 삶을 묵상하면서, 과연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반성해야 하겠습니다.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먼저 정의를 실현하는 일입니다. 정의의 실현은 무엇보다 생명과 사랑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사회에 넘쳐흐르는 반생명적인 문화인 죽음의 문화를 퇴치하고 생명의 문화를 건설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정의의 실현일 것입니다.생명의 문화를 건설하는 데는 진보와 보수의 구별이 없고, 여야의 구별이 없으며, 기득권을 위한 싸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정부의 모든 정책이 생명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도록 우리 모두 애를 써야 할 것 입니다.북한과 인접하고 있는 우리 의정부 교구의 지리적 특성상, 평화에 대한 갈망이 더욱 큽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사람이 사람을 해쳐야 생존하는 인간성 상실의 극한인 전쟁을 결단코 반대하고, 평화를 선택해야합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며,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는”(이사 11,6) 그런 세상을 소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우리 의정부 교구는 타 교구에 비해 우리나라의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해야 할 의무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더욱 열심히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는 일이야 말로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는 시작이며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아울러 주님 성탄의 기쁨을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를 청합니다. 가난한 사람, 외국인 노동자, 독거노인, 소년소녀 가장과 요양원이나 여러 시설에서 외롭게 지내는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성탄의 기쁨을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로 이 땅이 채워질 때 하느님의 평화 또한 온 세상에 넘쳐흐르게 될 것입니다. 성탄의 거룩함과 기쁨이 형제 자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고 한반도 곳곳에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안동] “생명의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권혁주 주교
모든 생명체는 빛을 향하고 있습니다. 빛이 없으면 생명은 성장을 멈추고 죽습니다. 성경 말씀은 모든 ‘생명의 원천’(시편 42,3)이신 하느님을 빛이라고 했으며(1요한 1,5) 이 세상을 어둠에서 해방시키러 오신 예수님을 “생명의 빛”(요한 1,4)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비추어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어느 한 순간도 우리의 생명을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함께 살 때만 우리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세상의 빛’이 되어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밝게 비출 수 있게 될 것입니다.(요한 12,46)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이러한 빛의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특히 빛은 거짓과 무지의 어둠과는 반대로 특히 진리와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빛은 이렇게 우리를 살게 하고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합니다. 그리고 또 빛은 따뜻한 열을 전해주기 때문에 사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랑이 있는 그곳에는 빛이 세상에 드러나고, 미움이 있는 그곳에는 세상이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들레헴의 외양간에 세상이 기다리던 큰 빛이 나타났습니다.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영광은 당신 스스로 자신을 선물로 내어놓으시고 우리를 사랑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당신의 모든 권세와 위엄을 스스로 포기하신 그런 사랑의 영광입니다. 베들레헴의 빛은 한 번도 그 빛을 잃은 적이 없습니다. 모든 세기를 걸쳐 그 빛은 남녀 모든 사람을 비추었습니다. ‘그들의 둘레를 비추었습니다.’(루카 2,9) 이 아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솟구쳤던 그곳에 또한 사랑이 샘솟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 연약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관심, 용서의 베풂 등이 그러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베들레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빛과 사랑과 진리가 세상을 휩쓸었습니다. 바오로와 아우구스티노에서 켈커타의 마더 테레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성인들을 보면, 우리는 베들레헴의 신비 곧 아기 예수님으로 오신 이 하느님을 향해 항상 새롭게 타오르는 사랑과 빛의 이러한 흐름과 여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아기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사랑으로 이 세상의 폭력에 맞서시며 우리가 아기 예수님을 따르도록 부르십니다.” (2005년 12월 24일 성탄 밤 미사 강론 중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오셨습니다.(요한 1,14)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고자 ‘누더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루카 2,6.12참조)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크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스스로 가장 작은 분이 되셨고, 모든 것을 맘대로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스스로 자신조차 방어할 수 없는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이렇게 가난하고 작고 약하고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이유는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이고, 우리가 가난하고 작고 약하고 힘없는 아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당신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이렇게 사람이 되시어 우리들 중 한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에 오신 것은 사랑 이외의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는 말씀의 뜻이 바로 그러한 뜻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돈과 힘의 논리로 모든 가치 기준을 설정하려는 경향에 물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도덕적인 가치보다는 경제적인 효율성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며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의 생명을 함부로 침해하며 파괴하기까지 합니다. 특히 약한 생명을 함부로 침해하고 빼앗는 행위의 뿌리에는 ‘힘의 논리’와 ‘왜곡된 자유’가 있습니다.(생명의 복음 19) 그런데 이렇게 생명을 함부로 침해하며 파괴하는 생명경시풍조를 조장하는 더욱 근원적인 이유는 ‘생명이신 하느님’을 거부하고 ‘물질’(맘몬)을 선택하려는 현대인들의 혼돈된 의식 때문입니다.(마태 6,24참조) 우리가 이러한 세상의 어둠에서 해방되고 구원되는 길은 오로지 “생명이신 하느님”을 섬기며 “생명의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며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 구세주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시고 “생명의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 드리며 그분을 우리 가운데 모시도록 합시다.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채웁시다. 그리고 세상에 나아가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됩시다. 약한 생명을 일으키고 살리는 따뜻한 빛이 됩시다. 우리 인간이 생명이신 그분 안에 머물며 그분의 빛으로 살 때 우리는 참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4-5) 2010년 12월 25일 예수성탄대축일
[군종] 2010년 성탄메시지/ 유수일 주교
친애하는 교구 신자, 군종 사제 그리고 군종 교구를 위해 봉사하시는 남녀수도자 여러분,북한에 의한 천안함 및 연평도 공격 등 국민 모두가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을 겪은 가운데 금년 한 해가 저물고 있고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어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이 세상에 보내주신(요한 3,16 참조) 하느님께 마음을 다해 감사드리고, 이 감사의 정신 안에서 현재의 고통마저 끌어안도록 합시다.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며 우리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이 말하고 있듯이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치하 때 속령이던 팔레스티나의 베들레헴이라는 고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처녀 마리아를 택하시어 성령의 권능으로 당신 외아드님 우리 구세주를 동정으로 잉태하여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묵상할 때 몇 가지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2위의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인간의 몸을 통하여, 곧 한 여인의 몸을 빌려 오셨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발현하신다던가 웅장한 소리와 번쩍이는 빛 속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하느님의 권능에 어울리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마리아라는 한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시기로 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매우 좋아하는 기도문 중에 성 암브로시오가 쓴 “사은 찬미가”(떼데움)가 있습니다. 이 찬미가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영광의 임금이신 그리스도여, 당신은 아버지의 영원하신 아드님, 인간을 구하시려 몸소 인간이 되시고자 동정녀의 품 안을 꺼리지 않으셨나이다.”이렇게 볼 때,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심에 있어 사람들을 통하여 또 인간의 길을 통하여 역사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보인다 해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당신의 구원 역사에 있어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고, 사람을 출신이나 외모나 재능을 갖고만 평가하지 말아야 하는 그런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예수님 자신이 당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신 예수님 자신의 겸손만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구세주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그 방법을 보면서, 내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데에서 얼마나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다음으로, 하느님께서 아드님 예수를 탄생하게 하시는 장소로 왕궁이나 부유한 저택이 아닌 상상도 못할 장소, 가축들이 잠자고 여물을 먹는 구유를 택하셨다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장소, 외롭고 춥고 짐승의 똥냄새 나는 장소, 그러나 순수한 장소인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기대 밖의 장소에서 아드님이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구유는 우리가 전혀 예상 못한 탄생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뜻을 늘 찾아야 합니다.셋째로, 우리는 구세주 예수님께서 지극히 가난하게 탄생하신 것을 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또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느님께서 왕궁은 고사하고 여관방 하나 얻지 못하시고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그 가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었다.”(2코린 8,9)고 말합니다.가난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 세계 도처에 너무도 많은 현실에서 가난만을 예찬할 수는 없습니다. 굶주리는 이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야 합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그런 극단적 가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성직자와 수도자로부터 시작하여 좀 더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살고 탐욕을 버리며 못 가진 이들과 나누는 청빈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경제사정과 관련없이 언제나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지나친 편리성, 지나친 효율성, 지나친 안정성, 그리고 지나친 고급성을 피해야 합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의 공통된 욕구일 것 같습니다. 청빈의 정신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이 욕구들을 조절하거나 억제하는 일입니다. 우리 주님의 가난한 탄생이 우리의 지나친 욕구를 조절하고 억제하는 은혜의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우리는 어려운 이들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하는데, 여분의 것만이 아니고 내게 꼭 필요한 것들도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청빈의 덕을 성실히 추구한다면 우리 사회의 악은 상당히 줄어들 것입니다.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많이 소유하고 있는 부유층으로부터 이 덕을 실천해주었으면 합니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루카 2,7)라는 복음서의 기록을 묵상하도록 합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보게 됩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최고의 기쁜 소식이 외로운 사람들인 목자들에게 맨 먼저 전해졌고 또 목자들이 탄생하신 아기 예수를 맨 처음 경배하는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이가 이 기쁜 소식을 들어야 하겠지만 외로운 이들이 이 기쁜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외로움”은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심리상태입니다. 이 세상에는 일시적이든 장기간이든 외로움을 겪는 이들이 많습니다. 외로움의 다른 이름이 “고독”인데, 저는 외로움 혹은 고독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인 고독과 하느님을 찾는 고독입니다. 옛날 수도자들이 고독을 예찬하는 글들이 있습니다. “오오, 은혜로운 독거여! 오오, 고독의 축복이여! 오오, 행복한 고독이여! 오오, 유일한 행복이여!” 이 예찬은 온갖 것을 다 잊어버리고 온갖 피조물에서 떠나 영혼 깊숙이 숨어 계신 하느님을 찾는 이들의 축복된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병이 되는 고독도 있습니다. 인정 못 받고 사랑 못 받고 소외된 이들이 겪는 고독입니다. 어떤 상황의 인간적 고독이든 이 고독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성탄을 맞으면서 외로움, 고독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예수님 탄생이 진정한 기쁨과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탄생의 기쁜 소식이 외로운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전달되었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외로운 이들에게 이 기쁜 소식이 가장 먼저 전달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교구의 신자, 사제, 수도자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쁨과 감격으로 경축하고 하느님께서 아드님의 탄생을 통하여 보여주신 놀라운 일들을 관상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기쁨에 찬 이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슬픔에 젖은 이들에게 위로의 말과 기도를 선물로 보내면서 형제애 넘치는 성탄절을 보내도록 합시다.
[춘천] “하느님께 영광! 사람들에게 평화!”/김운회 주교
사랑으로 하나 되는 춘천교구 공동체의 하느님 백성 여러분.세상의 평화를 위해 성탄을 함께 기뻐하고 계신 이웃의 형제자매 여러분“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신”(요한 1,14) 오늘, 저는 대림시기 동안 사랑과 희생으로 주님의 강생을 기다려 온 여러분 모두에게 온 마음을 다해 감사와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성탄은 사랑과 나눔의 신비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죄의 사슬에 묶여 어둠 속을 헤매던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가장 보잘 것 없고 낮은 모습으로 인간이 되신 주님의 크신 사랑을, 우리는 오늘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한편 그 사랑은 예수님의 일생을 통해 실천되었고,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영광을 경축하는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랑을 전해야 하는 신앙의 부르심을 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강생을 기뻐하고 축하하면서도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주님의 강생은 여전히 추운 벌판에서 아무도 모르게 벌어지는 초라한 사건으로 끝나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이 성탄절이 사랑과 나눔의 실천을 통해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눈물과 고통이 그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기회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특히 졸지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연평도 주민들을 위해 기도해 주실 것을 청합니다.또한 성탄절은 모든 이에게 평화의 축제입니다. 개인으로부터 우리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온 세상이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주님께 도우심을 청하도록 합시다. 평화를 거스르고 해치는 모든 것들을 물리치고, 화해와 용서를 통해 진정으로 하나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먼저 소금과 누룩이 되어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것이 오늘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임마누엘,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며 그분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일 것입니다.지난 일 년 동안 최선을 다해 살아오신 사랑하는 교형자매들, 그리고 선의의 이웃들 모두에게 다시 한 번 온 마음으로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아기 예수님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첫댓글 수고해주신 덕분에 한자리에서 복음을 모두 볼수가 있어 감사드립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로 이 땅이 채워질 때 하느님의 평화 또한 온 세상에 넘쳐흐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첫댓글 수고해주신 덕분에 한자리에서 복음을 모두 볼수가 있어 감사드립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로 이 땅이 채워질 때 하느님의 평화 또한 온 세상에 넘쳐흐르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