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로마서(7장~9장) 묵상
※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롬7장)
종교개혁가 루터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기 전에 수도원에서 생활했다.
루터는 정말 최선을 다해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기 원했다.
악한 생각이 들 때마다 신부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했고
용서를 받고 돌아온 후에도 또 다른 악한 생각이 들면
그럴 때마다 다시 신부에게 가서 죄를 고백했다.
어떤 경우는 하루에 여섯 시간동안 고해성사를 했다고 한다.
세상과 격리된 수도원에서 열심히 경건을 추구했던 사람이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을까?
그만큼 루터는 죄에 민감했다.
마음의 작은 죄도 그에게는 크고 무거운 짐이 되었다.
루터가 그런 면에서 도전이 되었다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도
죄에 대해서 우리에게 도전과 교훈을 준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을 어떻게 봐야하는지,
율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 것이다.
하지만 율법은 한계가 있다.
율법은 거룩함과 의로움과 선함을 줄 수는 없다.
그리고 이제 바울의 관심은 조금 더 ‘나’에게로 모아진다.
왜냐하면 결국, 율법과 죄의 관계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단락은 로마서 전체에서 가장 많은 논쟁이 되는 부분이다.
바울이 말하는 ‘나’를 어느 시점으로 봐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다.
두 가지 견해로 정리할 수 있는데 하나는 바울이 말하는
‘나’를 구원받기 전, 불신자로 보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바울이 말하는 ‘나’를 구원받은 후,
믿는 자로 보는 견해이다.
어떤 견해를 가지든지
본문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논쟁이 되는 것이고
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불신자로 볼 때
불신자가 간절하게 선을 행하기 원하는 것이나,
믿는 자로 볼 때 믿는 자가
무력하게 선을 행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나
두 견해 모두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다.
어떻게 죄로부터 해방된 믿는 자가
여전히 자신에 대해서 죄의 종으로 말하고
그 안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는지,
또한 그 반대로 율법에 원수가 되는 불신자가
어떻게 율법을 즐거워하며 율법을 원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견해를 취해야 한다면
로마서 7장의 나는 구원 받은 신자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계속되는 투쟁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내 속에서 계속되는 선과 악의 싸움이다.
바울은 자신을 ‘육신에 속한 자’로 표현한다.
만약 불신자라고 한다면 자신에 대해서 이런 평가를 하기 어렵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의를 드러내며 자신만만한 것이 불신자의 자기 평가이다.
반대로 믿는 자의 자기 평가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바로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타락한 본성과 싸우며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약속된 완전하고 최종적인 구원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서
본문의 ‘나’를 믿는 자이며 성화의 과정 중에 있다고 볼 수 있다.
1. 아노니
로마서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바울이 “아노니” 라고 고백하는 것,
바울은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율법과 대조되는 육신은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법은 지극히 선하지만 육신은 지극히 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여기 말씀하는 육신은 단순히 육체, 몸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악하다고 말하는 육신은 죄의 성품, 타락한 본성을 말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모든 사람은 이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모든 사람이 멸망당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내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고백하게 된다.
2. 알지 못하노니
로마서 7: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로마서 7: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로마서 7: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을 한다.
나는 선을 행하기 원한다.
하지만 실제 나의 모습은 어떤가?
내가 원하는 것과는 다르게 내가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다.
열심히 말씀보고 기도해야지 하는데, 그렇게 잘 안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남편을 긍휼히 여겨야지 하는데,
막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보면 화를 내며 쏘아붙이고 만다.
자녀를 사랑으로 대하고 품어줘야지 다짐을 하는데,
그런 결심은 하루도 못가고 철저히 무너진다.
자녀에게 소리 지르고 있는 나를 본다.
나를 계속 힘들게 하는 사람,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워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정말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가 바울의 고백을 공감하며 똑같은 고백을 할 수 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바울의 이 고백은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모른다는 말,
내가 하는 일이 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말입니다.
‘아! 진짜, 내가 왜 이러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우리에게는 선한 마음을 선한 행동으로 바꾸어 놓을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이러한 능력의 부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알고 사랑하고 선택하고 간절히 원한지만
그것을 행할 힘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나의 연약함을 보게 됩니다.
계속되는 투쟁과 갈등 속에서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행하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 말은 이런 뜻은 아니다.
‘그 일은 내 잘못 아니야!
그 일을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야!’
이 말은 잘못의 책임을 전가하고 자기변명을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선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그 원인이 죄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악한 본성이 이 일을 한 것이고 책임은 나에게 있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것이 진짜 ‘나’인가?
선을 원하는 내가 진짜 ‘나’인가?
아니면 악을 행하는 내가 진짜 ‘나’인가?
우리는 이중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
정체를 숨기고 있다가 죄의 본성이 드러나면 헐크로 변하는 사람인가?
지금 모습과 헐크로 변한 모습, 무엇이 진짜 나인가?
여기에서 깨달음이 나온다.
3. 깨달았노니
로마서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바울이 한 법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말하는 법은 율법이라기보다
하나의 원리, 법칙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무엇을 깨닫게 되었는가?
선을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
선과 악의 원리를 깨달았다.
구원받은 우리는 선을 원하지만 그
런 우리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을 원하는 것도 ‘나’이고,
악을 행하는 것도 ‘나’이다. 둘 모두, 진짜 ‘나’인 것이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의 이중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구원받은 죄인이기에
이러한 두 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개의 자아는 두 개의 법을 따르게 된다.
로마서 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로마서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우리에게 두 개의 법이 있다.
내 속 사람, 구원 받은 자로서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따른다.
하지만 내 안에는 그 반대편에 있는 다른 법, 죄의 법이 존재한다.
그래서 죄의 법은 하나님의 법에 대적하고 나를 사로잡는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내 속에 벌어지는 싸움이다. 그
리고 내 존재의 연약함은 깊은 탄식으로 이어진다.
로마서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한다.
사망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약함의 핵심은 이 사망의 몸이다.
우리가 사망의 몸,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곤고하다는 말은 비참하다는 말이다.
우리 존재의 연약함은 그 연약함을 넘어서 비참함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비참함으로 인한 탄식은
우리에게 놀라운 위로로 연결된다.
로마서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비참함 가운데 탄식하는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의 참 능력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의 연약함으로 오는 탄식에서 눈을 돌려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신 일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곤고한 사람이다.
비참한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가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며
기쁨으로 섬길 수 있도록 하셨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다.
그리고 ‘아직’ 구원의 완전함은 누리지 못하지만
그래서 연약함에 넘어지고 실패하지만,
그래서 비참함에 탄식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만 그날에 우리는 이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
완전한 구원을 맛볼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 꿀송이 보약 큐티, 365일 성경 통독
남아공 노록수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