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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다해 연중 10주간 수요일
<뿌린 대로 거두는 게 당연하다>
복음: 마태오 5,17-19
한 요양원에 65세가 넘는 노인들이 입주해 있었습니다. 노인들이 어느 날 술렁대기 시작했습니다. 원장이 노인들에게 새로운 생활지침을 차별을 두어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1층 거주자들에게는 “오늘부터 여러분들은 모든 걸 스스로 하셔야합니다. 먼저 일주일에 한 번씩 보여드리는 영화관람 시간을 스스로 결정하셔야 합니다. 또 정원의 식물을 돌보는 일과 물을 주고 풀을 뽑고 가지를 쳐 주는 일도 여러분이 알아서 해 주셔야 합니다. 저희는 이 일에 대해서는 손을 떼겠습니다.”
2층에 사는 노인들에게는 이와 상반되는 생활수칙을 주었습니다.
“여러분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말씀해주십시오. 저희가 다 해드리겠습니다. 영화 관람도 가장 편안한 시간으로 저희가 정해드리겠습니다. 정원 관리도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저 각자의 건강만 잘 챙기시면 됩니다.”
그로부터 18개월 후 노인들의 건강상태를 검사해보니 1층 노인들의 93%가 건강이 좋아진 반면 2층 노인들은 71%가 건강이 악화된 것으로 나왔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2층 노인들의 사망률이 1층 노인들의 두 배나 됐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일대학의 로딘(Judith Rodin)교수에 의해 주도된 실험입니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더 일을 많이 한 이들이 더 건강해지고 오래 삽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일하면서 스스로 자신은 세상에서 꼭 필요한 존재라고 믿게 되어 그 믿음에 맞추어 육체는 물론 정신적 건강도 함께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강의를 하다보면 당연히 받아들일 것 같은 사실까지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그 중 하나가 하늘나라에서는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늘나라 가면 똑같이 행복할 것이라 믿습니다. 물론 자신이 느끼는 행복은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각자에게 자신의 그릇 크기만큼 행복이 채워질 것입니다. 다만 그 그릇크기가 다를 뿐인 것입니다. 그 그릇 크기는 이 세상에서 정해집니다. 이 세상에서 한 것대로 보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과 같은 대접을 받기를 원하면 그것이 정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 당연하고 한 대로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서는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을 것이라며 그것이 어떻게 정해지는 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모든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 하나로 요약됩니다. 즉, 이 세상에서 한 사랑의 크기만큼 저승에서도 그 보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사랑하면 좋은 사람입니다. 나쁜 사람은 나뿐인 사람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합니다. 반면 사랑이 적은 사람은 나만 먼저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은 사랑이 적을 가능성이 매우 많습니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말에 ‘나’라는 단어를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셔비츠(Larry Scherwitz) 교수는 600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대화를 녹음하여 어떤 사람들이 “나”, “나의”, “나를”, “내 것” 등의 말을 자주 하는지를 세어보았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나’에 관한 말수와 심장병 위험성이 정확하게 일치하네!”
“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이웃에 대한 배려도 적고 그래서 건강도 좋지 못한 것입니다.
이 예들은 ‘왓칭’이란 책에 소개된 사례들입니다. 저자가 평행이론 등을 믿고 있어서 뉴에이지적 성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내용 자체보다는 소개된 사례들이 좋아서 인용하는 것뿐이니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쨌건 이 예들은 정확히 나에 대한 집착이 강하면 타인에 대한 사랑이 적어지고 그러면 건강도 그만큼 안 좋아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이 세상에서 이렇게 영향을 준다면 그 사랑으로 심판 받는 하늘나라에서도 영향을 미칠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서 아주 작은 사랑의 계명이라도 어기거나 어기도록 가르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초등학교 때 사칙연산을 배웠습니다.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입니다. 제 기억에 나누기가 어려웠습니다. 나누기보다는 받는 것이 익숙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칙연산은 다른 모든 수학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이 되었습니다. 사칙연산을 하지 못하면 다른 수학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사칙연산은 수학이라는 집으로 들어가는 열쇠와 같습니다.
운전하기 위해서는 교통신호와 표지판을 알아야 합니다.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교통신호를 어기고, 표지판의 내용을 무시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5분 먼저 가려다가 50년 먼저 갈 수도 있습니다. 음주운전은 본인은 물론 타인의 생명에도 큰 피해를 주기 때문에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교통신호와 표지판은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원하는 목적지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약속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인생에서 길을 찾는 사칙연산과 같습니다. 계명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교통신호와 표지판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율법과 계명을 어겨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고,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듯이, 율법과 계명은 사람을 구속하고 억압하지 않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율법과 계명은 우리가 함께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입니다. 사람을 하느님께로,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는 도구입니다. 그러기에 율법과 계명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율법과 계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겸손의 3단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겸손의 첫 번째 단계는 십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불쌍한 이를 도와주고,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겸손의 두 번째 단계는 십계명은 물론 작은 규율까지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 미사 참례는 물론 평일 미사까지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는 것입니다. 본당의 피정, 교육에 기꺼이 참여하고, 단체 활동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겸손의 세 번째 단계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함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은 것을 택할 수도 있는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성인, 성녀들이 걸어갔던 겸손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과 꿈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비를 베풀고,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성, 죄인, 병자,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모든 장벽을 허물고 싶어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모든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율법과 계명은 울리는 징과 같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율법과 계명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